기계신과 함께 020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내의 눈이 나를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이 자리에는 나와 이 녀석 둘밖에 없었다.
창고가 꽤 넓었기 때문에 생존자들은 여기저기 조금씩 흩어져 있었다.
그나마 사내를 지켜보고 있던 흰머리 중년인은 소변을 보러 갔고.
내가 다가가자 강간마 사내가 살짝 음험하는 것이 보였다.
"뭐, 뭐야? 이제 와서 죽이려는 거야?"
'이봐, 친구.
"
"왜? 뭐?"
"너 정말 여자들 안 죽였어?"
이쩌면 사람들이 사라신 게 바더와 관련이 있는 것인지도 몰랐나.
"아, 진짜 돌아가면서 사람 짜증 나게 하네. 내가 안 죽였다고!"
"그래? 흠…… 그럼 여자들이 사라진 상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 빈 말해봐."
"내가 X발 왜?"
이 상황에서 이런 배짱이라니. 머리가 없는 건가?
"너 사람 발가락이 몇 개야?"
"뭐? 누굴 바보로 보나? 10개다, 븅시나."
"9개가 됐을 때도 똑같은 말을 지껄일까 궁금하군. 어디 깡 한번 볼까?"
나는 품에서 건블래이드를 꺼내 널브러져 있던 놈의 오른발을 잡아챘다.
놈이 몸부림쳤지만 내 힘이 압도적으로 강했기 때문에 놈의 발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가만있어. 잘못하다간 뭉텅이로 잘리니까."
그러면서 초진동을 일으켜 슬슬 신발 외곽에서부터 새끼발가락 쪽으로 살살 접근시켜 갔다.
신발이 마치 두부 잘리듯 칼에 잘리는 걸 본 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자, 잠깐! 잠깐! 말할게! 말한다고!!"
놈이 온몸을 뒤틀며 필사적으로 외쳐 댔다.
"아쉽네. 좀비만 썰고 다녔더니 꽤 식상하던 차였는데."
역시 괜한 말다툼 하느니 이쪽이 가장 빠르고 편했다.
이렇게 말 잘 듣는 순한 양이 되지 않는가?
"그, 그게 일단 내가 데리고 가서 한 번 하고 나면 이년들은 다들 혼자 있고 싶어 하더라고. 특히 울고 불고 한 년들일수록 심했지. 그래서 보통은 알아서 오게 버려두고 돌아 왔단 말이지."
어휴, 쓰레기 자식 맞다, 이놈은.
성질 같아선 확 죽여 버리고 싶었다.
[마스터, 던전 끝나기 전에 생식기 라도 떼버리죠.]
트리슈라가 차분한 어조로 살벌한 소리를 해댔는데, 의외로 괜찮은 방법인 것 같다.
'생각해 보니 죽이지만 않으면 되잖아?'
던전이 요구한 것은 24시간이 지날 때까지의 생존자들의 생존.
한 마디로 상태가 어떻든 별 상관은 없다는 뜻이었다.
"일행에게 돌아오는 길이 어려웠나?"
"아니, 그렇지는 않았어. 보통 건물 화장실 같은데서 했으니 길치가 아니면 다들 제대로 찾아왔을걸."
"근데 여자들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그래, 아예 감쪽같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심지어 비명 소리조차 없이."
흠, 확실히 뭔가 좀 이상하긴 하다.
이놈 말이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좀비를 만나면 소리라도 질렀을 텐데.
그렇다고 여자 좋아하는 이놈이 제 스스로 여자들을 죽여 없앴을 것 같진 않고.
"그러고 보니 남자들도 사라졌다며?"
내가 듣기로는 원래 12명이었던 일행 중 여자 3명, 남자 2명이 사라졌다고 한다.
문제는 그게 전부 이 사내와 단둘이 있을 때 사라진 것이고.
"아 x 발, 그게 이상한 게, 나랑 같이 경계 서거나 사냥하러 갔던 새끼들이 모두 잠깐 어디 간다고 했다가 사라지더라고."
"역시 비명도 없이?"
"그래."
이쯤 되면 추측을 해볼 수 있었다.
첫째, 일행 중에 마더가 있다.
둘째, 그 마더가 사람들을 해친 듯 하다. 아마 잡아먹지 않았을까.
셋째, 교묘하게도 그 누명을 모두 강간마 녀석에게 뒤집어씌운 것 같다.
'아무래도 이 녀석은 아닌 것 같긴 한데.'
이 녀석이 마더였다면 사람들이 지금까지 살아 있었을까 싶다.
이놈이 변태 새끼긴 해도 좀비들에게서 사람들을 지켰다는 사실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는데, 과연 이 녀석이 마더라면 그랬을까?
[하나씩 혼자 먹으려고 그런 것 아닐까요?]
'음, 신선한 인간을 좋아한다는 거냐?'
[네, 이렇게 데리고 다니다가 먹고 싶어지면 데려가서 먹는 거지요.]
과연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일단 확인해 보자.'
[뭘요?]
'이놈이 마더인지 아닌지.'
이럴 때 마더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아주 확실한 방법은 아니었지만 신뢰도가 꽤 높은 방법이었다.
나는 놈의 구속을 풀어줬다.
그리고 말했다.
"자, 옷 벗어."
"뭐?"
"팬티까지 싹 다 벗어."
"뭐?? 왜?"
"찾아볼 게 있어서 그래."
"너, 설마……."
놈이 미심쩍고 두렵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설마 뭐?"
"나, 남자 좋아하는 거 아니지?"
"아니야, 이 자식아, 벗어!!"
놈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하나둘 옷 꺼풀을 벗어 내렸다.
왠지 내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지만, 나는 꾹 참고 놈의 온몸을 샅샅이 살펴봤다.
"역시 없군."
"뭐가?"
"있어, 문신 같은 거."
"아, 내가 이 바닥에서 특이하게 문신 안 하긴 했지."
뭔 바닥에 있었는지 알 만하다.
"근데 무슨 문신?"
"있어, S자처럼 생긴 거."
"뭐? 에스 자?"
"에스 자. 이렇게 생긴 거."
바닥에 대충 s자를 그려 보였다.
"어? 나 이렇게 생긴 문신 본 적 있어."
강간마 녀석이 중얼리듯 말했다.
"뭐?"
나는 의외의 말에 깜짝 놀랐다.
"어디서 봤어?"
놈의 어깨를 붙잡고 다급하게 물었다.
"이거……."
여기까지 말한 놈은 그러나.
털썩.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
뭐지?
가만히 놈의 목에 손을 대보니 정신을 잃은 것뿐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마더의 소행인 것 같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타이밍 이네요.]
그렇게 트리슈라와 이야기하는데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저…… 자꾸 말소리가 들려서……."
목소리의 주인공은 서은이의 엄마였다.
서은이의 손을 잡고 나타난 그녀는 알몸으로 쓰러져 있는 강간마 사내를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놈과 나를 번갈아보며 바라보는데, 왠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런 거 아닙니다."
"……."
"아니라고요."
서은이 엄마가 살며시 서은이를 자기 쪽으로 돌려세우며 당기는 것이 보인다.
젠장, 이놈은 옷이라도 좀 입고 쓰러질 것이지.
나는 놈의 목에 살며시 얹어놓았던 손을 멋쩍게 떼었다.
대충 옷가지로 놈의 몸을 덮어둔 나는 서은이 엄마에게 물었다.
"저기, 어머님."
"……네."
"몇 가지만 좀 여쭤볼 텐데 협조해 주시겠습니까?"
"……알겠어요."
"서은아, 미안한데 잠깐 저쪽으로 가서 기다려 줄래?"
나는 서은이를 멀리 보내놓고 서은이 어머님과 창고의 상자 위에 걸터 앉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사람들 중에 어쩌면 마더가 있는 것 같아요."
"예?"
서은이 엄마가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마더라는 게…… 좀비를 나타내는 단어 아니던가요?"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사람인 척하는 좀비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정황이 발견됐거든요."
"아……."
아직 믿기지 않는 눈치였지만 그녀의 눈이 불안으로 떨리는 것이 보였다.
"솔직히 어머님이 믿으시든 말든 상관없습니다. 다만 마더가 있다는 가정하에 생각해 주시죠. 일행 중에 누가 마더일 것 같습니까?"
내 말에 조금 당황하는 것 같던 서은이 엄마는 이내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제 생각에는……."
이윽고 그녀가 입을 떼었다.
"잘 모르겠네요. 다들 너무 인간 같아서……
"음,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럼 제 생각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경청할게요."
"제 생각에는, 여기 사람들 중에 가장 사람들의 믿음을 받고 있고, 또 자리를 자주 비우는 사람일 거라 생각합니다. 이번 마더는 사람들을 다루는데 능숙하지만 단독행동을 하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혹시 생각 나는 사람이 있으세요?"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서은이 엄마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그…… 사람들이 가장 믿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자주 자리를 비우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하던 그녀가 갑자기 어느 한쪽을 바라보며 화들짝 놀랐다. 저벅저벅.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요실금 때문에 화장실이 이젠 제 집처럼 느껴지는군요. 근데……."
발소리의 주인이 우리를 보며 똑바로 걸어오고 있었다.
"무슨 얘기하고 있으세요?"
서은이 엄마가 우리를 향해 씨익 웃는 그를 향해 떨리는 손을 들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