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고 천산으로(3) >
항복 문서(을 가장한 사과문)를 전해준 대가는 적지 않았다.
“폐하께서 내리는 보상입니다.”
갈첸 창군의 친우라 자신을 소개했던 대장군은 그렇게 말하며 하나의 커다란 상자를 내게 내밀었다.
거의 내 몸만 한 크기의 상자 안에는 각종 보석과 금. 그리고 황제가 몸에 둘렀던 것과 비슷한 가치의 장신구가 그득했다.
“편지 한 장 보내준 것 치고는 과할 정도의 보상이군요.”
“그 종이에 적힌 내용이 내용이니 말입니다. 한 글자, 한 글자에 백 근의 금이라 해도 아깝지 않을 만한 내용이니까요.”
“하긴.”
피식, 그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나도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수도 내 거주민 전원의 목숨을 살려준 값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과한 것 같지도 않구려.”
“허허허, 그렇지요.”
내 농담 섞인 대답에 토번의 대장군이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진지한 얼굴로 표정을 바꾼 그가 앉은 그대로 고개를 깊이 숙이며 대답했다.
“···다시 한번 이 나라를, 그리고 제 친우를 구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그저 우연히 일어난 일에 불과합니다. 대장군께서 그리 고개를 숙일만한 일은 아닙니다.”
“아뇨, 설사 우연에 우연이 거듭된 일이라도, 그로 인해 구함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만으로 존경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대인께선 감히 셀 엄두도 내기 힘든 수의 사람을 구하셨으니 이만한 대가도 모자라지 않겠습니까.”
“설사 그 사람이 황제를 모욕한 자라 해도 말입니까?”
“황제가 아니라 신을 모욕했더라도 제 대답은 똑같습니다.”
까딱 잘못하면 반란을 넘어 신성모독까지 될지도 모르는 말까지 서슴없이 내뱉는 대장군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완전 현실주의자이시구만.
제국에서도 세 손가락 내에 들만한 권력자의 입에서 나온 발언이라곤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애초부터 나와의 거래를 위해 황제가 무시당하는 것까지 감수했던 걸 생각하면, 원래부터 황권이던, 신권이던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뭐, 어찌 됐든, 주는 걸 거절하는 성격은 아니다.
더군다나 이렇게 큰돈이라면 더더욱 말이지.
짤그랑.
열린 상자에서 한 주먹의 장신구만 꺼낸 뒤, 재물이 가득한 상자의 아가리를 닫았다.
“이건 임지로 보내주십시오.”
“네? 임지로 말입니까?”
“네. 아직 여기서 할 일이 다 끝나지 않아 이걸 들고 움직이기가 쉽지 않아서 말입니다. 어차피 중원으로 돌아갈 땐 그곳에 들려야 할 터이니, 그때 다시 챙겨 가려 합니다.”
“아···예.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군요.”
“서찰 두 장을 동봉할 테니, 그것도 함께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믿을 만한 사람을 시켜 안전히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음 같아선 가장 믿음직하고, 친구로 만나보라 할 겸 토번의 대장군에게 직접 부탁하고 싶었지만, 지금 제국 수도의 상황은 혼란 그 자체.
백성들의 인망도 높고, 병사들 사이에서 인기도 좋은 그가 수도를 떠났다간 수도 내에 무슨 위험한 사태가 일어났을 때 막을 만한 사람이 없다.
내 마음 편해지자고 그를 보낼 수도 없었고, 설사 내가 부탁해도 그가 먼저 거절하리라.
“그럼 서찰은 적어서 함께 두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곧 사람을 보낼 테니, 그에게 모두 전해주시면 됩니다.”
그 말과 함께 다시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하고선 자리를 뜨는 대장군. 그가 방에서 나가는 걸 확인한 후, 붓대를 들어 서찰을 작성했다.
하나는 지금 임지를 관리하고 있을 갈첸 성주 대리에게, 남은 하나는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곡산에게.
두 서찰의 내용은 한어와 토번어로 작성되었다는 점만 제외하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악마의 침공이 끝났으며, 한 달 내로 임지로 돌아갈 것. 그리고 상자 내 자금은 너무 많은 양만 아니라면 갈첸은 도시를 안정화하는데, 곡산은 여행을 떠날 자금으로 써도 된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두 통의 서찰을 작성한 후 그걸 상자 위에 가지런히 올려뒀다.
대장군이 빠르게 사람을 보내준다 했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이유도, 시간도 없었다.
어차피 일을 다 끝내면 임지로 꼭 들리게 되어 있거니와, 만약 내가 적어놨던 대로 전해지지 않았다면, 그때 다시 돌아와서 뒤집어엎어도 상관없으니까.
주머니에 한 움큼 챙긴 장신구도 나를 위한 건 아니었다.
이 정도면 내가 일을 마무리할 때까지 그 인간들이 먹고살기 충분하겠지?
[이곳에서 장신구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진 모르지만, 그 정도면 되지 않겠냐? 그리 길게 걸릴 일도 아니니까.]
화순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미리 준비해놨던 주머니에 장신구를 모조리 쓸어 넣었다.
어차피 천산에 가는 길은 이미 알고 있고, 거기까지 가는 데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 이건 일 가주와 옛 어머니의 부하였던 사내에게 건네주고 떠날 생각이었다.
이런 말을 하게 될지는 몰랐지만···어쩌면, 다시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가능한 빈손으로, 조용히 떠날 생각이었다.
[다 끝났냐?]
···그래.
화순의 질문에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날려 창문으로 빠져나가 성의 최상층으로 올라갔다.
주변 어디와도 비할 데 없이 높은 성벽의 위에 올라선 덕분일까.
우리가 가야 할 그곳, 천산의 전역이 똑똑히 보였다.
[엄청나게 잘 보이네.]
그러게 말이야.
일 가주는 특수한 진법을 통해 외부에서 보이지 않도록 조치를 해놨다 했지만, 화경의 경지를 넘어선 내게 그런 진법은 눈흐리기조차 되지 못했다.
물론 화순 또한 내가 보는 시야를 통해 그곳의 전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이름 그대로 높게 솟아오른 천 개의 산.
하나하나가 중원의 오대명산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마음 편히 그 광경을 구경만 하고 있을 순 없었다.
느껴진다. 저 넓은 천산 전체를 아우르는 무시무시한 그 기운이, 감히 색을 말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정도로 어둡고 음습한 기운이.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그 기운이.
[저기에 그 인간이 있겠지?]
그렇겠지. 최소한 거짓말은 하는 것처럼 들리진 않았으니까.
서로의 시선은 천산에 고정한 채 대화를 나누던 우리 두 사람은 곧 몸을 날려 하늘로 날아올랐다.
목적지는 천산.
모든 것이 시작되고, 모든 것이 끝나게 될 바로 그곳이었다.
*****
[이거, 진짜 모르고 왔다면 그냥 지나쳤겠는데?]
화순의 말대로, 천산의 입구는 아까 성의 최상층에서 보고 느꼈던 기운은 온데간데없이 평범한 숲으로만 보였다.
여기까지 오는데 당연히 길다운 길은 바랄 수도 없었다. 짐승조차 드물 정도로 울창한 숲길에 사람의 흔적 따위, 눈 씻고 찾아봐도 있을 리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모두 속임수.
스윽.
보이지 않는 얇은 천을 지나가자, 거기에 나타난 건 어디의 대도시에도 뒤지지 않는 고층의 건물과 말 여섯 마리가 한 번에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길고 넓은 대로가 끝없이 이어진 발달한 땅이었으니.
인간의 손길을 왈가왈부하는 게 우스울 정도로 완벽한 도시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다만 문제라면.
[···엄청나게 을씨년스럽군.]
보기엔 수만 명의 사람도 거뜬히 살아갈 만한 도시에는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다는 정도일까.
[천산에선 한낱 어린아이조차 일류 고수다···라는 건 알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싹 데리고 가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어쩔 수 없지. 그놈이 단 하나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다 데리고 가라고 했으니까.
이번 전쟁은 천산의 얼마 되지 않는 인적 자원을 모조리 끌어모아 벌인 전쟁이었다.
전쟁이 좀 더 심화하기 전에 내가 일 가주와 만나고, 일 가주가 놈의 신앙을 버린 덕에 아이들까지 나서진 않았지만, 전쟁이 조금이라도 길게 이어져서 천산 쪽에서도 사람이 모자라게 되었다면···.
···으음. 별로 상상하고 싶은 일은 아니다.
[지금껏 마교에서도 어린아이를 전장에 보냈던 적은 없는데···그 작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인 걸까?]
글쎄다. 괴물의 마음을 우리 같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여기서 말하는 우리도 일반적인 상식에선 한참 벗어나 있는 인간들이었지만, 그의 생각은 도저히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의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 없는 텅 빈 대로를, 목을 높이 들어야 겨우 꼭대기를 볼 수 있을 만한 건물들 사이를 걷는 건 그간 온갖 특이한 경험은 황제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해봤다 자부한 나도 생전 처음 해본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런 특이한 경험은 정점은.
[···저건 또 뭐야.]
내가 걷던 길 한복판에 서 있는 괴기한 무언가를 마주하며 정점을 이루었다.
전신이 강철로 이루어진 인간 모양의 인형.
내가 소림에서 봤던 동인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어디까지나 수련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만큼, 그 재료의 가치에 비해 단순한 형태를 띠고 있던 소림의 동인과 달리, 눈앞에 나타난 강철의 인형은 그런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현실적인 인체 비례부터 잘 단련한 무인의 그것과도 같은 근육. 그리고 미남이라 칭해도 부족할 부분 없는 외모와 한 올, 한 올 바람이 불면 부드럽게 움직일 듯한 머리카락까지.
색깔만 살구색으로 칠해졌다면, 거기에 사람이 서 있다고 해도 믿을 만한 정밀함이었다.
“···누군진 몰라도 취미가 좋진 않군.”
물론 그걸 진짜로 사람이라 믿을 사람은 여기에 아무도(우리 두 사람뿐이긴 하지만) 없었다.
길가에 누가 세워둔 것처럼 보이는 강철의 인형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가까이서 봐도 흠잡을 때 없이 훌륭한 강철의 조각상.
만약 이런 시간, 이런 장소만 아니었다면 조금은 감상하고 싶을 정도였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누가 여기다 가져다 둔 걸까?”
[일 가주에게 이런 게 있다는 말은 못 들었어?]
“아니, 놈이 있을 만한 장소와 천산의 지리는 알아냈지만, 길 한 가운데에 조각상이 있을 거라는 말은 못 들었는데.”
물론 그와 한가롭게 수다를 떨 만큼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눈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런 특이한 부분이라면 설명을 했을 텐데, 이런 말 한마디도 안 하고 있었다니.
···아니, 어쩌면 천산에선 이런 게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하도 외부와 긴 시간 떨어져 있던 곳이니, 그들만의 특이한 문화가 있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게 다 해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권능의 주인이시여.”
“···이런 미친.”
지레짐작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것도 잠시 그 강철의 조각상이 입을 연 순간 나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놀라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주인의 명령에 따라 두 분을 모시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인의 명령?”
“네, 그렇습니다.”
“그, 주인이라는 놈이, 혹시···내가 아는 그놈이냐?”
“그렇습니다. 저의 육신을 빗고, 혼을 불어넣어 주신 바로 그분. 위대한 신이었지만, 이제는 결국 잊히고, 버림받은 그것의 아들이자, 본신의 능력으로도 신과 같은 경지에 오른 그분.”
싱긋.
그것의 입가가 뒤틀어지며 미소를 짓는 건, 정말 기분 나쁠 만큼 자연스러웠다.
“그분이 바로 저의 주인이십니다.”
“···그렇구만. 자기가 초대했다고 시종까지 하나 딸려 보내준 거냐?”
“정확히는 초대장에 불과하지만, 만약 안내를 바라신다면 어려울 건 없습니다.”
“그래?”
지도가 있긴 하다만, 직접 안내해주면 나야 좋다.
물론 그놈이 함정을 파놓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지만, 본인이 직접 나오는 게 아니라 그냥 평범한 함정이라면야, 별로 위협이 될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건, 놈도 잘 알고 있을 테고.
하지만 궁금한 점은 아직 남아있었다.
“넌 대체 언제 만들어진 거냐? 수십 년 전? 수백 년 전?”
“만들어진 시간···이라고 하신다면 육신이 만들어진 건 수만 년 전의 일이고, 거기에 혼을 불어넣은 건 달포 전의 일입니다.”
“달포 전?”
이 미친놈.
“···천산의 무인들을 모두 밖으로 몰아내자마자 널 만들었다, 이 말이냐?”
“그런 말이죠.”
···아이까지 내보냈을 때, 나는 그놈이 어린아이들까지 병사로 사용하려는 정신 나간 놈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내 생각은 틀렸다.
그놈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훨씬 더 미친놈이었다.
“더 쓸모가 없어서, 다 버리려고 했던 거냐?”
“주인의 뜻을 저따위가 어찌 알겠느냐마는···.”
그 기분나쁜 미소가 다시 입가에 그려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아까가 부자연스러움에 의한 혐오였다면, 지금은 그저 존재 자체의 혐오.
“아마, 그러실 생각이었겠죠?”
챙!
놈의 말에 등에 메고 있던 두 자루의 창을 슬며시 내려, 양손에 꽉 쥐었다.
“아니, 역시 안내는 필요 없어.”
“네? 어째서요?”
“어차피 넌, 여기서 부서질 운명이니까.”
“그렇습니까? 아쉽군요.”
끼긱.
끼긱, 끼긱.
끼긱, 끼긱, 끼긱.
‘그것’이 입을 열고 말을 한 그 순간,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던 건물에서 ‘그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 자릿수가 곧 두 자릿수가 되고, 두 자릿수는 곧 네 자릿수가 된다.
다섯 자릿수가 넘어간 그 순간부턴, 그 개수를 감히 세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럼 안내는 제 다른 형제들에게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괜찮겠죠?”
< 그리고 천산으로(3) > 끝
ⓒ (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