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고 천산으로(2) >
“네···당신은 대체 무얼 원하는 겁···니까?”
한 마디를 꺼내는 와중에도 하대해야 할지, 존대해야 할지 헷갈리며 말을 마구 바꾸는 사내.
이들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옷차림새라 찍었는데, 아무래도 이 인간이 대가리가 맞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대가리를 맞춘 건 좋은데···가까이 와보니 이거 심상치가 않다.
마치 평생 가난하다 그저께나 돼서야 돈 좀 만져 본 졸부처럼 입고 있던지라, 어디 철없는 고위 귀족네 아들놈이 정신 못 차리고 전쟁터 마실이나 나왔나···싶었는데.
“아니, 뭐.”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의 말을 흘려 넘기며, 주변의 인물들을 다시 한번 살폈다.
주변 시종들의 옷차림도 그냥 시종이라 하기엔 너무 고급스럽고, 시녀들도 평범한 귀족 가문 내 시녀라 하기엔 평범한 교육을 받은 기색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윽.
조용히 검병에 손을 올리고 있는 주변의 병사들.
절대 평범한 병사들의 몸놀림은 아니거니와, 설사 웬만한 수준의 무인들이라고 해도 말조차 못 꺼내 볼 실력이다.
“싸움이 끝나고 나니, 누구 시선이 느껴져서 말이오.”
물론, 한낱 귀족 가문에서 기를만한 수준의 무인 또한 아니다.
이만한 실력자는 적어도 구파일방급의 대문파가 심혈을 기울여 키워낸 전인이거나···한 국가에서 총력을 다해 만들어낸 고수.
이걸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이 졸부 사내의 직책은···.
[···우리 생각보다 대박을 뽑은 것 같은데?]
아무래도 화순도 나와 비슷한 결론을 이끌어냈던 모양인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말했다.
설마 진짜 토번 제국의 황제라고? 이런 인간이?
그런 나의 의문에 대한 대답은 저쪽에서 나왔다.
“미리 저희의 존재를 말씀드리지 못한 건 죄송합니다.”
거기 있던 무인 중 가장 경지가 높은 중년인이 황제로 의심되는 사내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허나 한낱 짐승도 자신의 집 앞의 안전을 생각한다는데, 성벽 바로 앞에서 일어나는 싸움을 무시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날카로운, 하지만 그렇다고 적대적인 기색은 풍기지 않으려 노력하는 중년인을 향하는 수많은 시선.
왜 앞에 나섰냐 타박하는 시선은 없이, 모두 ‘그라면 지금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거야!’라는 기대 어린 눈길을 보내는 걸 보니 이리저리 신용도 높은 사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그가 앞에 나서준 건 내게도 좋은 일이었다.
“그 말씀은 지금 제 앞에 있는 이분이 이 도시의 주인이다···라는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눈앞에 있는 이 사내가 확실히 황제라고 보증을 해줬으니 말이다.
“그럼 황제의 앞이니만큼 제가 예의를 차려야겠군요?”
“아니, 아뇨.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내 말에 뒤에 있던 졸부 사내, 아니, 황제는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이려는 듯했지만, 중년인은 대경실색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예의를 차릴 생각도, 이유도 없다는 걸 알아챈 모양새였다.
···뒤의 저 멍청이와는 달리 말이다.
자기의 직위가 나한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전혀 모르는 황제와 달리, 중년인은 가능한 내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할 뿐이었다.
가능한 저자세로, 그러면서도 혹시나 하는 돌발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조심하며 다시금 입을 여는 중년인.
“혹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대인께선 어떠한 연유로 그 악마와 결전을 벌이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딱히 대단한 이유는 아니오. 원래 고향에서부터 악연이 깊던 놈들이라, 여기까지 와서도 다투게 되었을 뿐이지.”
“고향이라면···혹시···.”
“예상하는 바가 맞소. 나는 저 사막 너머, 중원에서 넘어왔지.”
“오오오···.”
내 말에 중년인이 아니라, 뒤쪽에 있던 이들이 감탄 어린 목소리를 내뱉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중원에서와 마찬가지로 토번 제국에서도 사막 너머에서 누군가 건너온 건 역사서를 뒤져봐야 할 만큼 오래전의 일이니 말이다.
그제야 내 옷차림이 자국의 복장과는 다르다는 걸 깨달은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대인께서도 저들과는 적대적이란 말씀이시군요?”
“예.”
내 긍정적인 대답에 바로 화색을 띠는 중년인과 뒤에 있는 다른 이들. 그나마 얼굴을 찡그린 건 자신이 무시당한다 생각한 황제뿐이었지만.
“아까까진 그랬죠.”
그것도 뒤이어 나온 나의 대답에 순식간에 굳어졌다.
“아까까지···라는···말씀은···?”
“알고 보니 오해가 좀 있더군요. 종파? 계파? 그런 게 고향에 있던 이들과는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자기들도 그쪽에서 그놈들을 죽여준 건 고마운 일이라며, 오히려 제게 감사 인사를 하더군요.”
물론 거짓말이다.
애초에 저들에겐 계파라 할만한 것도 남아 있지 않거니와, 설사 있다고 쳐도 중원으로 건너왔던 놈들과 방금까지 싸우던 일 가주는 똑같은 계파였으니 말이다.
“그, 그렇습니까.”
하지만 계파는커녕 저들이 중원으로까지 손을 뻗었는지도 모르는 이들이 그걸 알 리는 만무.
혹시나 내가 ‘저놈들에게 구경 값으로 그쪽 목 좀 가져오라고 하던데요.’라고 말이라도 꺼내지 않을까 싶어 검병에 올린 손에 힘을 주는 눈앞의 중년인과 병사들을 바라보며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아, 그래도 걱정하진 마십시오. 제가 여기 찾아온 이유는 그거랑 관계가 없으니까요.”
“ㄴ, 네? 그 말씀은···?”
“딱히 여러분과 적대하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건 아니란 말이죠. 아니, 오히려 이쪽에도 좋은 이야기를 하려고 온 겁니다.”
“좋은 이야기···.”
내 말에 화색을 띠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의문인 듯 이마에 깊은 주름을 새겨내던 중년인은 곧 힐끔, 뒤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폐하께 해가 되는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물론이죠. 오히려 긍정적이면 긍정적이지, 절대 부정적일 일은 없을 겁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폐하.”
“으, 으응?”
아까 예의를 차릴 필요 없다는 대답에 아직도 신경을 쓰고 있었던 모양인지, 인상을 쓴 채 뭐라 뭐라 중얼거리고 있던 황제는 중년인의 부름에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무, 무슨 일이오, 대장군?”
“···이분께서 폐하께 전해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시는데, 어쩌시겠느냐 여쭸습니다.”
“전할 말···? 누가 내게 뭘 전한단 말이오?”
역시나 예상대로 우리의 이야기는 전혀 듣지도 않고 있었던 모양인지, 그는 지금까지 다 끝난 이야기를 다시 한번 대장군에게 물었다.
그런 황제의 모습에 대장군은 하아, 짧은 한숨을 내쉬며 아까 우리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읊어냈다.
“흐, 흐음, 그, 그랬구려.”
어떻게든 평온을 가장하려 하는 말투지만, 떨리는 목소리와 이마에 흥건한 식은땀을 막을 방도는 없었던 모양이다.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인 황제는 다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선 질문했다.
“전하고 싶다는 말이···무엇이오?”
“여기, 한 번 읽어보시죠.”
품 안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 그를 향해 내밀었다. 마치 종이에 독이라도 묻어있는 것마냥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만 뻗어서 종이를 챙겨가는 황제.
그런 그의 모습에 중년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보이지 않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 인간도 고생이 많군.
“이건···항복 문서요?”
천천히 종이에 적힌 글을 읽어내리던 황제는 경악과 화색이 반반 섞인 표정으로 나를 향해 물었다.
“항복 문서라기보단 사과문이라고 해두죠. 저쪽에서도 오해가 있었고, 그로 인해 토번과 전쟁을 벌이게 된 건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러니 서로 아직 큰 사단은 일어나지 않은 지금 끝내자···뭐, 이런 뜻이죠.”
“으, 으음···.”
내 대답에 황제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겨우 사과라고? 항복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폐하, 제가 감히 의견을 꺼내도 되겠나이까?”
그런 그의 태도에 마음이 달아오른 건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중년인, 토번의 대장군이었다.
현재 토번 제국과 천산의 무인이 맞붙었다간 어떻게 될지, 토번의 인물 중 제일 잘 알고 있는 이였다.
“무엇이오, 대장군?”
“대인께서 그들의 기를 살려주려 사과문이라 하긴 했으나, 이들의 발언을 보면 사실상 항복 문서라 생각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장군의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물론 정말로 일 가주가 그렇게 생각해서 적은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내가 그렇게 쓰자, 라는 의견을 내서 쓴 거긴 하지만.
“그러니 여기선 폐하께서 아량을 보이시어, 그들의 사과를 받아주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흠···장군의 저의는 알겠으나···기껏 제국 전체에 퍼져 있던 병력을 수도로 모이게 하였는데, 이렇게 떠나보내기엔···.”
“폐하, 이미 병사들의 피로도 극에 달했습니다. 혹시나 놈들이 폐하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날뛰기라도 했다간, 패배하진 않겠지만 저희 역시 피해가 클 수 있습니다.”
피해가 크긴커녕, 그날이야 말로 토번 제국 최후의 날이겠지만, 황제의 기를 살려주려는 생각인진 몰라도 대장군은 거기까진 말하지 않았다.
“으음···.”
“그리고 이들의 사과를 받아주지 않는 건, 여기까지 사과문을 전해주신 대인께도 실례되는 일입니다.”
움찔.
나의 이름이 대장군의 입에 오르자, 황제는 그제야 자신들의 현재 상황을 상기한 듯 몸을 떨었다.
그리고 그 말을 꺼낸 대장군 역시, 필사적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디 자신의 장단에 맞춰달라, 대인께서도 그럴 생각으로 오신 것이지 않으냐.
···눈으로도 참으로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을 정도로 그의 시선은 맹렬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저는 어디까지나 두 집단 사이에 낀 중립의 존재이지만···일단 그들에게 전언을 전해달라 받은 이상 최소한의 책임감은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긍정적인 대답을 받고 싶습니다만.”
“대인께서도 그리 말씀하시니, 폐하께서도 저들의 사과를 받아주시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알겠소. 대인과 대장군의 뜻이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지.”
후우, 황제의 말에 주변에 있던 모든 이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에겐 신하를 보내 사과를 받아들이겠다고 하겠소이다. 이 서찰을 전해준 대인께도 감사드립니다.”
“아뇨, 별일 아니었습니다.”
할 말이 다 끝났다 생각했는지, 황제는 그 말을 끝으로 부하들을 이끌고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그렇게 성벽 위에 나와 대장군. 그리고 그의 부하로 보이는 병사 몇 명만이 남자, 대장군은 나를 향해 고개를 깊이 숙였다.
“감사합니다, 대인. 대인 덕분에 대학살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저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을 뿐이오. 할 일을 했을 뿐이니 그리 감사할 필요는 없소.”
“아닙니다. 설사 대인 스스로께선 그리 생각하셔도, 제겐, 그리고 우리 제국에는 그 이상의 의미였습니다.”
저런 황제 아래에 있다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대장군은 제대로 된 인간이었다.
그렇게 몇 번이고 감사를 표하던 대장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무슨 문제라도 있소이까? 혹시 이렇게 끝나는 걸 원치 않았다거나?”
“아뇨, 그럴 리가요. 제가 생각할 수 있는 그 어떤 방식보다도 훌륭한 마무리였습니다. 다만···대인께서 중원에서 오셨다고 하니, 제 옛 친구가 생각나서 말입니다.”
“옛 친구가요?”
“네. 중원에 도움을 요청하고 오겠다며 떠난 옛 전우가 있는데···그가 떠나고 며칠 후 사막에 큰 모래 폭풍이 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지요. 그 친구가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면, 대인의 모습을 보고 무척 기뻐했을 텐데···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뭔가 어디서 많이 들은 이야기 같은 건 내 착각이냐?]
아니, 나도 똑같은 생각 하고 있었어.
“혹시 그 친우분의 이름이 갈첸입니까?”
“네, 그렇습···어, 어찌 대인께서 그 이름을?!”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대장군은 곧 내가 그의 이름을 꺼냈다는 걸 깨닫고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향해 되물었다.
“중원에서 여기로 넘어오기 며칠 전 그를 만났습니다. 모래 폭풍으로 인해 부하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으나, 그분만은 천운이 따랐던 덕분인지 저희와 만나 살 수 있었죠. 지금은 임지에서 성주 대리직을 맡고 있습니다.”
“아, 아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인!”
친우의 생존 소식에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며 내게 감사를 표하는 대장군.
아까 전 제국을 구해줬다고 할 때만큼. 아니, 그보다 더욱 진심을 담아서 감사를 표하는 대장군의 모습은, 전우의 생환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군인의 모습과 똑 닮아 있었다.
< 그리고 천산으로(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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