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산의 일 가주(2) >
‘그’와 처음 만난 순간을 일 가주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천산에서 살아가고 있는 열 개의 가문 중 가장 첫 번째 가문.
장자의 가문이자, 가장 강하고 위대한 가문의 후계자로 태어난 그에게는 태어난 그 직후부터 존재한 과제가 있었다.
강해지는 것.
첫 번째 가문을 이끌 자로서, 그리고 종래에는 열 개의 가문을, 그리고 천산을 이끌 존재로서 그는 반드시 강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을 이상하게 여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가문의 어르신이 밤새도록 가르쳤던 가르침 속에서도, 장래에 자신의 부하가 될 아이들과의 대화에서도, 수많은 서책에 기록된 천산의 역사서에서도 그것의 정당함을,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본디 천산에 난립했던 천 개의 가문 중 오직 우리 열 개의 가문만 살아남게 되었는지 절대 잊지 마십시오.”
매일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듣고, 또 들었던 바로 그 말.
“그들에게서 승리하고, 또 정복하여 우리는 이렇게 일어섰습니다.”
그것은 강함의 필요성을, 그리고 힘의 가진 자의 정당함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본인의 끝없는 노력 덕인지, 아니면 엄청난 재능 덕인지는 몰라도 단 이립(而立; 서른을 이르는 말)의 나이로 본인의 가문 중, 아니, 천산의 모든 이들 중 가장 강한 자가 될 수 있었다.
모두가 놀라고, 감탄한 일이었다. 셀 수 없는 시간 동안 쌓이고 쌓인 가문의 무의 정수를 그토록 짧은 시간 만에 습득한 일은 전에도, 그리고 후에도 없을 테니까.
그가 속한 첫 번째 가문은 물론 나머지 아홉 개의 가문에서도 진심으로 그의 성취를 축하했다.
수많은 동족상잔의 시간을 지나, 단 열 개의 가문만 남게 된 지금은 서로가 모두 동포요, 가족이란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그는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아직도 부족하다.
가문은 물론이거니와 천산에서 둘도 없는 강함을 손에 넣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강함에 목말랐다.
다른 이들이 경외하고, 선망하며, 질시하는 강함을 손에 넣었음에도 어째서 그런 감정을 품는 것인가?
끝없이 자문할 때마다 결국 나오는 결론은 단 하나.
본인이 부족함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천산에 남은 열 개의 가문은 그렇게 흘러간 이유와 경위는 다를지언정, 결국 다른 가문과 싸워 승리하고, 정복하여 지금까지 남을 수 있게 된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정복을 통해 그들 가문은 수많은 것을 얻었다.
수많은 보물, 뛰어난 인재, 강한 자식을 낳아줄 아름다운 여인까지.
하지만 그들 모두보다도 더욱 귀한 것은, 다름 아닌 무공이었다.
그 뿌리가 같기 때문일까, 기이하게도 천 개의 가문들의 무공은 그 형태나 방식이 모두 다르게만 보여도, 결국 어딘가 분명히 서로 합치고, 다듬을 수 있는 부분이 존재했다.
마치 물방울이 다른 물방울을 흡수하여 점점 커져 나가듯, 더욱 많은 가문을 정복해나갈수록 그들의 무공 또한 점점 더 강해졌다.
그렇게 발전하고, 또 발전해온 무공이었기에 지금까지 그것을 익혀온 가문의 다른 이들은 단 하나도 아쉬움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 뛰어나디 뛰어난 재능 덕분일까, 아니면 그것을 상회하는 어마어마한 노력 덕분일까.
그는 ‘그것’을 보고, 또 느낄 수 있는 축복을 얻었다.
원류.
본인의 무공의.
천산에 있는 열 개의 가문의.
지금은 대부분 사라진 천 개의 가문의.
그 모든 것의 원류가 된 최초의 무공을 보고,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 또한 그에 기쁨을 느끼며, 계속해서 무공을 단련했다.
하지만 그 기쁨이 절망이 되는 건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본인의 무공을 단련하고, 또 단련해도 그것에는 닿을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상향이, 지금까지 무공을 단련했던 이유 그 자체가 바로 눈앞에 있음에도 다다를 수 없다니!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재능을, 그리고 노력을 원망했다.
차라리 자신에게 이런 재능이 없었다면.
차라리 본인의 무공의 끝을 볼 수 있는 재능이 없었다면.
차라리 그 원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하지만 그의 재능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뛰어났고, 그가 원했던 것보단 훨씬 모자랐다.
매일 단련하고, 절망하고, 또 단련하며, 또 절망하던 그때.
“불쌍하구나.”
‘그’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 재능은 누구보다도 뛰어나다 할 수 있지만, 본인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라 얻을 수 없다니.”
그것은 그가 단 한 번도 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참으로 불쌍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이 ‘연민’의 표정이라는 걸 안 건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는 그가 원했던 모든 걸 보여주었다.
본인이 그토록 갈구했던 무공의 원류와 그것을 익히는 방법.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까지.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오직 당신만이.”
눈앞에 있는 이 존재야말로.
“나의 주인이며, 나의 신이십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따라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자신의 발언에 그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신? 그래···.”
입가에 기괴한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그거, 참으로 마음에 드는 호칭이로구나.”
그리고 그날 이후.
천산의 내전이 다시 시작되었고.
그로부터 삼십 년의 시간이 흘렀다.
*****
‘과연.’
그토록 자신이 원하던 ‘원류’의 무공을 손에 넣게 된 일 가주였기에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저 남자가 어째서, 왜, 무엇 때문에 그분과 유일하게 맞설 수 있는 자라 말씀하셨는지를.
“강한 자로구나.”
원류의 무공을 익힌 이후로 그를 제외하곤 자신보다 강했던 존재, 아니, 동등한 존재조차 본 적 없었다.
그분의 아래에 종속된 이후, 삼 가주와 칠 가주 또한 눈부신 성취를 이뤄냈지만, 그래도 자신보다는 한참 모자랐다.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분의 손길이 닿아 발전된 무공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아류.
본인이 익힌 원류와 비교하자면 한참 모자란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은 강했다.
천산은 물론, 그보다 몇십 배는 넓고, 사람은 수천 배는 더 많은 토번에서조차 그들보다 강한 자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눈앞의 사내는 그런 두 사람과 싸워 이겼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젠 다르다.
“너 또한 그것을 익혔구나.”
모든 무공의 원류.
저 위에서 자신과 다른 무인들을 내려다보는 그것이 가진 독특한 기세를 그는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그분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있는 것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었다.
“언제까지 그 위에서 있을 것이지? 싸우러 온 것이 아니었나?”
“싸우러 왔다고? 아니, 아니지.”
씨익.
그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앞으로 내려왔다.
주변의 수많은 부하가 그를 바라보며 각자의 무기를 들어 올렸지만, 일 가주는 아무런 행동도,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저벅, 저벅, 저벅.
마치 칼로 대나무를 가르듯, 순식간에 갈라지는 인파.
그 사이로 그가 천천히 일 가주를 향해 다가왔다.
“나는 그저 초대받아서 여기 나타났을 뿐이야. 이···연회에 말이야.”
“연회?”
“그래. 이렇게 준비를 다 끝낸 연회를 시작조차 하지 않는 이유가 뭐겠어? 주인공이 없어서 그런 거 아니겠어?”
“그리고···네가 그 주인공이라고?”
“아닌가?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지.”
쿠웅!
지금껏 평온을 유지하던, 혹은 그것을 연기하던 일 가주가 처음으로 기세를 내뿜었다.
“크억!”
“끄아악!”
“우웨엑!”
무겁고, 진중하며, 압도적인 힘.
마치 공기 자체의 무게가 수백, 수천 배가 되어버린 것만 같은 그 기세에 일 가주의 가까이에 있던 이들이 짓눌리거나, 혹은 피를 토했다.
그 기세의 범위 내에 있는 이들 중 멀쩡한 건 오직 두 사람.
“너는 이 연회의,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 기세를 내뿜고 있는 일 가주와 그런 기세를 유일하게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는 눈앞의 사내, 유현뿐.
“네가 말하는 그 연회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사람뿐이다.”
“그게 혹시 본인을 신이라 지껄이는 미치광이를 말하는 건가?”
“아니, 그분은 분명히 신이다. 가장 위대하며, 존귀하고, 절대적인 분이시지. 만약 신보다 더 높은 자리가 존재한다면, 그분이야말로 거기에 존재할 자격을 가지신 유일한 분이지.”
“아, 네가 그 미치광이를 신이라 떠받들 던 사람이구나. 하긴, 미친 짓도 다른 미친놈이 옆에 있으면 더 하기 쉬우니까.”
“멍청한 소리 하지마라.”
저벅, 저벅, 저벅.
이번에는 반대쪽에서 가까워졌다.
일 가주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유현에게 가까워질 때마다, 그쪽에 있던 천산의 무인이 얼른 뒤로 물러섰다.
먼저 쓰러져 있던 이들 중 일 가주의 기세 밖으로 벗어난 이는 있었지만, 그들 중 깨어나는 자는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기세에 짓눌려 오장육부가 모두 터져나간 인간이 일어날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멍청한 소리는 네가 하는 거지. 전쟁을 준비하라 해놓고, 시작하긴커녕 시간만 질질 끌고 있지. 그게 정상적인 명령이냐?”
“그분의 목적을 생각하자면 그렇지. 그리고 나는 그분의 목적에 맞춰 그분의 명령을 이행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 잘난 놈의 목적이 뭔데?”
“그분과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자를 지금 이 자리로 부르는 것. 그리고.”
퍽! 퍽! 퍽!
일 가주의 기세가 더욱 강해지자, 그의 기세 내에 있던 이들은 이제 더는 그 형태조차 남기지 못하고 낡은 가죽 부대처럼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네놈의 목숨을 거두는 것. 이 두 가지다.”
“기껏 초대한 손님을 죽이니 마니, 이 연회 개최자가 누군진 몰라도 예의가 전혀 없네.”
“이건 애초부터 연회가 아니다. 제물을 바치기 위한 제단의 준비였을 뿐.”
콰득!
일 가주가 손을 짐승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세웠다.
“그리고, 네가 그 산제물이다.”
쾅!
그 말과 함께 일 가주가 유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챙!
손과 창날이 맞닿았는데 어떻게 이런 소리가 들릴 수 있을까.
쇠와 쇠가 부딪히는 것보다 훨씬 둔탁하고, 무거운 소리에 주변에 있던 천산의 무인은 몇 발자국은 뒤로 물러섰다.
“소, 소리만으로도 이런 기세라니···.”
“가까이 가지 마라! 휘말려서 죽을 뿐이다!”
일 가주를 돕는다, 라는 선택지는 애초에 그들의 뇌리에 떠오를 수도 없었다.
도움은커녕 방해. 아니, 애초에 방해라도 된다는 것 자체가 자만일 정도로 저 둘은 그들과는 완전히 다른 영역에 있었다.
맨손과 창. 이렇게만 두고 보면 분명 유리한 건 유현 쪽이었지만, 두 사람의 싸움에 그 정도 차이로는 유불리를 감히 꺼낼 수가 없었다.
마치 사나운 짐승 수십 마리가 한 번에 발톱을 휘두르듯, 물 흐르는 연계를 보이는 일 가주.
손가락 하나하나에도 강대한 기세가 담긴 놈의 공격은 설사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체 중 하나라는 만년한철조차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만약 창을 둘러싼 유현의 기세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미 일 가주의 손이 가는 대로 수십 조각으로 나누어져 버렸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손해도 입지 않고 있다, 라는 건 당연히 아니다.
채채채채챙!
면면부절 이어지는 그의 공격에 유현의 창에서 기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무나 빠르게 이어지는 일 가주의 공격에 전의 공격을 막은 소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다음 공격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휘어질 듯 흔들리고, 부서질 듯 일그러지는 창.
퍽!
“크윽!”
일 가주의 공격은 양손으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공격에 복부의 방어가 살짝 느슨해지는 순간, 마치 번개처럼 꽂혀오는 일 가주의 무릎.
아슬아슬하게 뒤로 빠져나간 덕에 적중당하진 않았지만, 그저 스쳐 맞은 것만으로도 날카로운 도끼로 찍어버린 것만 같은 싸늘한 통증이 느껴졌다.
칠 가주의 강대한 내공과 삼 가주의 뛰어난 무공.
이 두 가지를 합치고, 그걸 더욱 강화한 듯한 그의 모습에 유현은.
꿈틀.
“···뭐냐, 네놈.”
유현의 명치에 무릎을 꽂아 넣는 자세 그대로 서 있던 일 가주가 눈가를 꿈틀거리며 유현을 향해 말했다.
만약 일 가주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그는 분명.
“왜 웃고 있지?”
분명히, 입가에 미소를 그리고 있었으니까.
“아니, 그냥.”
큭큭큭. 더 이상 미소를 그리는 것만으로는 무리라는 듯,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올린 유현이 그를 향해 대답했다.
“정말 오랜만에 내가 위험할 정도로 센 놈이랑 맞붙는 것 같아서 말이야.”
“강한 자랑 붙는 게···기쁘다고?”
“그럼 당연하지. 약자를 괴롭히는 게 무슨 재미고, 한순간에 끝나는 싸움이 뭐가 즐겁냐.”
챙!
등에 메고 있던 나머지 한 자루의 창을 마저 꺼낸 유현이 일 가주를 매섭게 노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 끝까지 제대로, 온전히 네 힘으로만 싸워라.”
< 천산의 일 가주(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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