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우렌의 이름으로(1) >
자리에 대한 정리가 끝난 직후, 더 이상 임지에 남아있을 이유가 사라진 나는 바로 성을 떠날 준비를 했다.
“사막을 건너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떠나십니까? 조금이라도 더 휴식을 취하고 가시지요.”
“아니, 괜찮소.”
갈첸 장군. 아니, 이제는 장군이 아니라 성주 대리의 직을 맡게 된 그가 그 소식을 듣고 찾아왔지만, 내 대답이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이 혼란한 상황에 저처럼 필요도 없는 사람이 오래 있는 건 실례거니와···할 일도 있으니까요.”
그 악마, 라는 것들이 중원의 그 무리와 똑같은 무공을 쓴다는 것이 확실시된 지금, 내가 할 일은 정해졌다.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여기;서부터 사막을 건너 중원으로 넘어올 수밖에 없었는지.
대체 권능이랑 네놈들이 무슨 상관관계에 있길래 이렇게 권능만 보면 무조건 달려드는지.
이 두 가지 의문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듣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었으니 말이다.
내 단호한 대답에 그는 더 이상 설득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알겠습니다. 은인의 생각이 그러하시니, 제가 더 말려도 소용없겠군요. 대신 부디 하려는 일마다 모두 일이 잘 풀어지길 매일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이건 약소한 것이지만···.”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품 안에서 자그마한 주머니를 꺼내는 갈첸.
그 짤랑거리는 소리를 듣자 하니, 그의 말과는 달리 적지 않은 돈이 담겨 있는 듯했다.
“···수도까지의 여정 동안은 충분히 쓰실 수 있도록 넣어놨습니다.”
“이건···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목숨을 구해주신 은인께 이 정도도 하지 못하겠습니까.”
말은 그리했지만, 갓 성주가 된 사람이 이만한 자금을 유통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러모로 성주 대리를 맡을 적임자로 인정받아 그 자리에 오르긴 했지만, 여전히 내부에선 불만을 품은 세력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이런 적지 않은 자금을 보태주다니.
···이것까지 거절하면 이미 그 자체가 실례다.
그가 건네준 주머니를 조심스레 품에 넣고, 바로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성주 대리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꼭 필요한 곳에만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긍정적인 대답에 갈첸은 그제야 어두웠던 표정을 밝게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길을 떠나기 위해 낙타에 올라타기 직전,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누군가의 얼굴에 다시 발을 내리고 갈첸을 향해 말했다.
“아, 그리고 곡산이 그놈은···.”
“그분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본인이 떠나시고 싶으실 때 떠나실 수 있는 일만 맡길 테니까요.”
떠나기 직전까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역시 곡산은 임지에 놔두고 가기로 했다.
가능하면 갈 수 있는 곳까지는 함께 가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지금 토번의 상황이 안 좋아도 너 안 좋았다.
최악의 격전지라는 수도에서 제일 먼 임지조차 성주가 당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는데, 수도 근처는 또 얼마나 심각하겠는가.
물론 그런 상황에도 내 한 몸 지키는 건 어렵지 않지만, 무공의 모자도 모르는 곡산까지 지키면서 여정을 이어나간다?
내가 지금 상대해야 하는 적이 명문 정파 급이거나, 하다못해 마교 정도만 돼도 어떻게 상대해줬을지 모른다.
하지만 저놈들은 우리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만약 칠 가주만 한 수준의 고수가 하나라면 어떻게든 곡산까지 지켜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가 본인을 칠 가주라 말한 이상 그와 비슷한 경지의 인물이 여섯은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다.
그들 하나야 몰라도, 둘, 어쩌면 그들 모두를 상대하면서 곡산이 저놈까지 지킨다는 건, 아무리 내가 강하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차라리 이곳에 몸을 맡겼다가, 제국 내 상황이 정리되면 그때 다시금 원래 계획했던 대로 여정을 이어나가기로 정한 것이다.
“무능력한 녀석은 아니니, 먹여주고 재워주는 만큼 일이라도 시켜주시면 됩니다. 웬만한 일은 잘 해낼겁니다.”
“하하! 기억하도록 하겠습니다.”
내 진심 섞인 농에 껄껄 웃던 갈첸이 진지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모든 일이 끝나고 중원으로 돌아가실 때, 꼭 한 번 들러주십시오. ···옛날 평화롭던 임지의 모습을 꼭 보여드릴 테니까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이랴! 그 한 마디와 함께 낙타에 올라타자마자 바로 고삐를 강하게 흔들었다.
피히힝~
말과는 전혀 다른 독특한 울음소리를 내며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는 낙타.
그렇게 나 홀로만의 여정이 다시금 시작되었다.
*****
임지에서 시작해 수도까지.
토번을 가로지르는 여정은 생각했던 것보단 순탄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곡산도 데리고 올 걸 그랬나?]
그것도 화순까지 그렇게 말할 정도로 말이다.
그렇다고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 같은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놈들의 침공이 수도에 집중된 탓인지는 몰라도, 다른 도시에 있던 놈들의 질이 임지에서 내가 상대했던 두 놈보다 훨씬 덜떨어졌다.
수준을 따지자면 나와 신승 어르신이 돌파했던 천라지망의 무인 정도일까.
하지만 수도의 도움을 바랄 수 없는 다른 도시는 그것만으로도 큰 위협이었고, 그 때문에 도시 간의 교류가 완전히 끊겨 버렸다.
물론, 내가 그 도시를 지나가기 전까진 말이지.
혹시나 그놈들 중 내가 원하는 정보를 가지고 있는 놈이 있을까 싶어 보이는 족족 모두 때려잡았고, 내가 그런 결과를 생각하고 일을 벌인 건 아니지만, 어쨌든 도시는 모두 원래의 삶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괜찮은 정보 가지고 있는 놈은 있어?]
“아니.”
쿵.
내가 잡고 있던 놈의 멱살을 풀자, 놈이 순식간에 땅으로 떨어져 머리를 부딪쳤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정신을 잃은 녀석을 버려둔 채, 주변을 쑥 흩어보며 입을 열었다.
“다른 놈들이랑 똑같아. 다 자기들이 왜 이런 짓을 하는지도 모른 채 명령만 따르고 있어.”
지금까지 여섯 개의 도시를 통과했지만, 거기서 만난 놈 중 제대로 된 정보를 가지고 있는 놈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본인보다 높은 직위의 누군가에게 명령을 받아 움직일 뿐인 정교한 인형에 불과했다.
“확실히 첫 도시보단 무공의 수준은 높아졌는데···아직은 부족한가?”
임지를 나와 처음으로 만난 놈들이 일류 고수 정도라면, 지금 이놈들의 무공은 대충 절정 초입에 이르는 수준이었다.
물론 어느 쪽이건 내게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도시의 규모 차이인지, 아니면 수도와 가까울수록 더 높은 수준의 고수를 보내는 건진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쪽이건 내가 원하는 정보를 하나도 가지지 않던 건 마찬가지.
[수도까지는 얼마쯤 남았냐?]
“이 지도대로라면 대충 두, 세 곳쯤?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화순의 질문에 예전에 들렸던 도시 중 한 곳에서 구한 지도를 펼쳐 보이며 대답했다.
보통 정보부에서 이용하는 지도와 비교하자면 엉망진창에 가까운 지도였지만, 그래도 도시 사이의 경계선 정도는 대충 알아볼 수 있었다.
“역시 정보는 수도로 가야 얻을 수 있나?”
[아무래도 그럴 것 같아.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수도의 소식도 그렇고···여기랑 저기는 나타나는 놈이 급이 다른 것 같은데.]
계속되는 놈들의 침공으로 인해 대부분 도시가 수도와의 교류가 완전히 끊겨 버렸고, 수도는 완전히 정보가 끊겨 지금 전쟁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단서는 거의 존재치 않았다.
하지만 정확한 정보가 부족할 뿐, 멀리서 봤다느니, 아는 사람에게 들었다느니 이런 식으로 흘러들어오는 이런저런 소문은 차고 넘쳤다.
물론 하나하나의 가치는 거의 무에 가깝지만, 그것도 수십, 수백이 쌓이면 진실에 가까워지는 법.
그 덕에 수도에서 나타나는 무인의 수준은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최소 절정 완숙에 이른 고수가 수천 이상, 거기에 종종 나타나는 괴물들은 천 명의 고수조차 어린아이로 보일 정도로 엄청난 괴물···이였나?]
“만약 정보가 사실이라면 이 괴물이 우리가 찾는 그놈이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가주 중 하나겠지.”
수천의 절정 무인도 물론 놀라운 일이지만, 그들을 쓰러뜨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금보다 훨씬 약했던 적에도 이미 그만한 고수가 모여 있던 천라지망을 돌파한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소문의 뒷부분.
“아마 우리가 찾던 그놈은 아닐 거야.”
[옥천의 몸을 빼앗은 그놈?]
“그렇지. 그놈이 전면에 나섰다면, 이 침공이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이어지고 있을 이유가 없어. 이미 진작에 침공을 끝내고 원하는 걸 얻고 사라졌겠지.”
나도 놈의 진짜 힘을 식견한 적은 없다. 그나마 옥천의 몸을 빌렸던 적에도 딱히 힘들다, 라는 생각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한순간, 자신을 가리고 있던 장막을 살짝 들추고 보여줬던 그 기세는.
“···놈은 정말 원한다면 나라 하나쯤은 원하는 대로 멸망시킬 수 있는 괴물이니까.”
중원과 세외를 넘나들며 온갖 고수를 만나고, 심지어 인간의 힘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자연의 정수와도 대면했지만, 놈의 힘은 전혀 달랐다.
아직 무공이 절정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적에도 설사 나보다 높은 경지에 있는 고수라고 해도 내가 그에게 패배할 거란 생각은 해본 적 없었고, 화경이라는 절대 경지에 오른 지금은 같은 ‘인간’이라면 패배할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
하지만 놈은 ‘인간’이 아니었다.
내게 중립에 가까운 기세를 풍겼던 빙정.
나를 적대하며 죽이려 들던 독정.
나를 받아들이며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선정.
이 세 가지 자연의 정수에서 느꼈던 그 비인간적인 기운을 그놈에게서도 느꼈으니까.
그래서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놈은 지금 이 침공에서 단 한 번도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라고.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머리를 멈춘 화순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나타나지 않는 걸까?]
“글쎄.”
화순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본인의 무력을 가장 잘 아는 건 당연히 본인일 테고, 그 말은 자신이 나타나면 모든 일이 정리되리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도 당연히 본인일 텐데.
“···애초부터 놈의 행동 중 이해되는 게 있었던 건 아니지만.”
옥천의 육신을 빌려서 마교를 개판으로 만든 것도, 그 뒤 내 앞에서 본인의 진짜 힘을 아주 살짝만 보여준 것도, 수도와 가장 멀리 떨어진 임지에 제일 중요한 인물인 가주와 초절정 고수인 그의 부하를 보낸 것까지.
대체 무슨 이유로, 뭘 원해서 이렇게 움직이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결국 답을 찾으려면 수도로 가서 놈을 아는 놈과 직접 잡아서 족쳐야 한다···라는 건가.]
“그렇지.”
혹시나 수도에 가까운 도시에 다다르면 원하는 대답이 나올까 싶었지만, 오히려 수도로 가야 한다는 게 더욱 확실해질 뿐이었다.
“부디 수도로 가서 답이 나오길 바라야지.”
“으으으···.”
내가 말하는 그 순간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신음.
[아직 다 처리 안 했냐?]
“질긴 놈이 하나 남아있었나 보네.”
퍽!
내공을 실은 발끝으로 신음이 흘러나오던 부분을 밟아 완전히 그 소리를 지운다.
별로 좋은 최후는 아니지만, 이놈도 이 도시에서 최소 수십에서 수백은 죽였으니 좋은 최후를 맞이할 생각은 없었겠지.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벌레를 처리한 후, 피비린내가 풍기는 건물 밖으로 나갔다.
이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이들의 틈바구니로 조용히 빠져나갔다.
이제 수도에 도착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진실을 알아낼 시간 또한 말이다.
*****
수도에 가장 가까운 도시의 분위기는 확실히 내가 지금까지 지나왔던 도시와는 전혀 달랐다.
침공에 대한 걱정도 있었지만 그래도 본인의 일상이 중요하다는 인상이 강했던 다른 도시와 달리, 이곳은 전쟁의 거센 화염을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는 만큼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죽음의 향기가 풍기는 도시, 이런 표현이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릴 만큼 시민들의 모습은 피곤과 고통에 찌들어 있었다.
[그리고 너를 엄청나게 쳐다보네.]
···그것도 있고.
외부인에 대한 어마어마한 적대심.
혹시나 옆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목을 자르러 온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연회 중간에 벌어진 비무대 위에서도 이렇게 열정적인 시선은 전혀 느껴본 적 없는데.
좀 과장해서 말하면, 거리에 있는 이들 모두가 나를 향해 시선을 집중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일단 자리를 뜨는 게 좋겠어. 시선이 집중돼도 너무 집중되는데?]
그래, 일단 도망치자.
화순의 의견대로 가능한 평상심을 가장하며 가장 근처에 있는 가게로 향했다.
간판도 안 보고 들어왔지만, 아무래도 옷가게였던 모양이다. 옷걸이에 잔뜩 걸린 옷과 한쪽 벽면에 가득한 옷감까지.
딱히 필요한 옷은 없지만, 어차피 시간도 끌어야 하니, 가능한 평범한 옷을 사서 갈아입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런 생각으로 옷들을 뒤지고 있자니, 어느새 옷가게에 하나, 둘 사람이 늘어나더니, 곧 움직일 때마다 사람과 스쳐야 할 정도로 가득 차버렸다.
···이상하지?
[완전 이상하지.]
좋아, 그럼 우리 두 사람의 의견이 모두 같은 것 같으니, 지금 당장···.
툭.
입구던, 출구던, 그게 아니라면 천장으로라도 도망치려던 그 순간, 내 어깨에 올라오는 누군가의 손.
“이봐, 자네.”
···가능한 민간인에게는 손을 안 대려고 했지만, 지금은 긴급 상황 맞지?
[누가 봐도 긴급 상황이지.]
좋아, 허락도 떨어졌다. 이젠···.
“라우렌을 참 많이 닮았군.”
···라우렌?
순간 그가 내뱉은 이름에 기억 속의 정보를 뒤지고, 뒤지고, 또 뒤지다···.
···이런 젠장.
양손에 불파를 일으키며, 조용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내 어머니의 이름과 얼굴을 아는 누군가를 부숴버리고 놈에게서 정보를 캐내기 전에, 최소한 얼굴이라도 봐두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 나는 자네의 적이 아니니. 아니.”
스륵.
그 말과 동시에, 옷가게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이 멈추고 나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우리 모두, 라고 해야겠지.”
< 라우렌의 이름으로(1) > 끝
ⓒ (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