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마와의 싸움(3) >
사건이 모두 끝난 후, 성 내에 있던 사람들이 가장 먼저 진행한 건 돈둡 성주(물론 가짜가 아니라 진짜)를 위한 장례식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악마가 그로 변장하였는지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 뚱뚱한 체구에 걸맞게 원래부터 밖으로 나가는 게 친숙한 사람은 아니었고, 악마의 침공이 시작된 이후로는 도시의 방위를 더욱 튼튼하게 해야 한다는 이유로 성 밖으로 나가는 경우도 손에 꼽았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물론 본인을 칠 가주라 발언한 그놈의 무공의 경지를 생각하면, 이런 성이 아니라 사방이 벽으로 막힌 밀실 안에 있었어도 얼마든지 바꿔치기할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지금부터 돈둡 성주님의 시신을 화장하도록 하겠습니다.”
갈첸 장군의 말에 돈둡 성주의 유해가 담긴 관이 나무로 이루어진 탑 위에 안치되자, 옆에서 횃불을 들고 있던 갈첸 장군이 거기에 불을 붙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거세지는 불길의 주변에서 돈둡 성주의 부하와 독특한 모양의 사제복을 입은 이들이 그들의 신앙에 따른 진언(眞言)을 외웠다.
지금 모습을 보면 알다시피, 돈둡 성주의 장례식을 주관하게 된 건 다름 아닌 갈첸 장군이었다.
본디 토번 제국에서 장례식을 주관하는 건 죽은 사람의 자식 중 장성한 사내가 하는 것이 기본이었지만, 돈둡 성주의 자식 중 성인은 딸 뿐이었고, 아들은 태어난 지 이년도 채 되지 않아 장례를 주관하는 건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성 내에 남은 인물 중에서도 가장 직위가 높은 갈첸 장군이 장례식을 주관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가 처리해야 할 후속 처치는 돈둡 성주의 장례식 하나만 남은 게 아니었다.
돈둡 성주의 장례식이 끝난 직후, 성주의 집무실에는 갈첸 장군을 포함한 우리 일행과 성 갈첸 장군의 처자식. 그리고 성 내에서 행정과 군사 업무를 처리하는 관리직들이 모두 모였다.
집무실의 반을 차지하는 넓은 탁자에 모인 이들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갈첸 장군이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성도 외곽의 상황을 아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의 발언에 여기 모여있던 이들 대부분은 침묵한 채 고개만 흔들었다.
“전대 성주님···의 명령에 성도 중심부에 대한 관리와 보호를 강화하고, 외곽의 인원은 중심부에 임시 거주지를 설립, 침공 간 그곳에서 거주하도록 한다는 계획은 있었으나···.”
“있었으나?”
“···모두 성주님 직속으로 처리되고 있어서 저희가 파악할 길은 요원했습니다.”
그나마 입을 연 관리가 있긴 했지만, 그도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의 대답에 갈첸 장군의 입에서 길고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사막에서 임지로 진입할 때, 제가 지켜본 외곽의 상황은 이러했습니다.”
그 말을 시작으로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임지 외곽의 상황.
가히 인세에 도래한 지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외곽의 이야기에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허어···.”
“···흐음.”
“그게 정말 사실입니까?”
“네, 다른 곳은 어떨지 모르나, 최소한 제가 사막을 건너오고 난 직후 봤던 외곽의 상황은 그러했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갈첸 장군을 향해 되묻는 이까지 있었으나, 그렇다고 진실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저 혼자만 본 것이 아니라, 일행분도 함께 보았으니 혹시 믿지 못하겠다면 이 두 분에게 여쭤보셔도 됩니다.”
그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나와 곡산. 아니, 정확히는 오직 나에게만 향했다.
“그렇다면···의심할 여지는 없겠군요.”
누가 내뱉었는지 모를 그 말에 집무실에 있던 이들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였다.
돈둡 성주.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를 죽이고 그의 몸을 이용해 그로 위장하고 있던 악마를 쓰러뜨린 덕에 이들 모두 내 말에 대해선 확실하게 신용하고 있었다.
그의 발언의 진위를 의심하는 사람이 없어지자, 갈첸 장군은 진짜 하려 했던 말을 드디어 입 밖으로 꺼냈다.
“지금은 혼란스러운 내부부터 정리해야 하는 건 분명하지만, 이 모든 일이 끝나면 바로 외곽의 상황을 처리해야 한다, 그게 제 생각입니다.”
토번 제국을 향한 악마의 침공이 거세지고 있다곤 하나, 그것은 대부분 수도에 집중되는 상황.
오히려 임지는 돈둡 성주가 바꿔치기 당한 부분을 제외하면 악마의 침공에 대해선 꽤 안전하다고 할 수 있었다.
내부의 상황만 정리되고 나면, 도시 외곽 부분을 되살리는 식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혹시 성내에 다른 악마는 없습니까?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시기에 어쩌면 성주님을 바꿔치기했던 것처럼 다른 이에게도 똑같은 짓을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일단 성 내에 다른 악마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성 내에 군을 통솔하는 관리자의 말에 이번에는 내가 대답했다.
“악마들은 여러분과 같은 전사들과는 다른 독특한 기운을 풍기는데, 현재 성내에 그들과 같은 기운을 풍기는 이는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임지는 침공과는 거리가 먼 곳이라 그런지 인원을 적게 보낸 듯합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지금 당장 악마들이 다른 사람의 모습을 할 걱정은 없다는 거군요.”
“한 시름 놓았습니다.”
내 발언에 처음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들.
돈둡 성주가 살해당한 뒤 바꿔치기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 혹시나 자신들도 그렇게 되면 어쩌나, 하고 생각했던 그들에게 내 발언만큼 안심이 되는 이야기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내 발언 전부가 진실은 아니지만, 그들은 내 발언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기에 문제 될 부분은 없었다.
임지가 수도와 거리가 먼 부분이라는 건 거짓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놈들이 침략을 게을리 한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따지고 보자면 차고 넘칠 정도로 했지.]
화순의 말대로였다.
돈둡 성주로 위장하고 있던 그놈, 칠 가주는 정말로 마음만 먹는다면 이 성은 물론이거니와 성도 전부를 주춧돌 하나 남기지 않고 파괴할 수 있는 괴물이었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그런 괴물을 침공이랑 별 상관도 없는 이곳에 보낸 걸까.
내가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는 사이에도 그들 사이의 회의는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었다.
“외곽의 정리에 대해선 분명 미뤄둘 수 없는 중한 일이란 건 사실이지만, 먼저 처리해야 할 건 그 부분이 아닙니다.”
“으음.”
“성주의 빈자리를 가장 먼저 채워놓지 않으면, 외곽 정리는커녕 내부의 혼란도 다 어찌하지 못할 겁니다.”
성 내부를 관리하는 시종장의 말에 회의를 진행하던 이들 모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은 분명 옳았다.
기적처럼 다른 이들은 다치지 않으며 관직을 맡은 이들 대부분은 당장이라도 일을 할 수 있었지만, 그들을 모두 총괄하고, 일을 주도해야 할 성주의 자리가 빈 이상 성 내의 모든 일이 완전히 멈춘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런 행동과 달리 그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수도의 혼란도 다 가라앉지 않은 상황에서 대리 성주를 보내 달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성주님의 아드님에게 일을 맡기기엔 너무 어리시니···이거 큰일이군요.”
성주는 지금 장례식도 주관하지 못해 갈첸 장군에게 맡겨야 할 정도로 어리다.
하다못해 열 살만 넘었어도 돈둡 성주의 아내를 섭정으로 두어 현 상황을 정리할 수 있겠지만, 아직 말 그대로 자기 똥오줌도 가리지 못하는 어린아이를 성주의 자리에 올려놓기엔 여러모로 문제가 있었다.
물론 토번 제국도 그런 상황이 일어날 걸 전혀 예상치 못한 건 아닌지라, 성주가 급사 등으로 인해 후계를 제대로 정하지 못했다면, 수도에서 대리로 성주 직을 이행할 관리를 보내는 게 기본적인 관례였다.
하지만 그들의 말마따나 지금 제국의 수도 또한 악마의 침공으로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으니, 도저히 누굴 보낼 상황이 아니었다.
“그럼 차라리···.”
모두의 침묵 속에서 홀연히 울려 퍼지는 누군가의 목소리.
“···갈첸 장군께서 임시로 성주 직을 맡아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녀는 다름 아닌 지금은 죽은 돈둡 성주의 아내였다.
“제가···말입니까?”
“네, 제 생각에는 가장 합리적인···그리고 가장 뛰어난 인선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녀의 발언에 집무실에 있던 이들 모두가 서로를 바라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발언대로, 지금 그에게 이번 일을 맡기는 게 여러모로 좋은 방법이긴 했다.
장군이라는 직위에 오를 정도로 사람을 부리는 방법을 잘 알면서도,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사람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직위에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지금 이 사태를 정리한 데에는 나의, 그러니까 갈첸 장군의 힘이 아주 큰 작용을 했으니 말이다.
홀연히 나타나 상황을 정리한 영웅, 그를 무시할 사람은 없었으니 무척 좋은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마님, 그렇게 되면···.”
그녀의 말에 시종장이 말을 꺼내려다 옆에 있던 갈첸 장군을 보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좋아도 너무나 좋은 선택이라는 점이었다.
종종 있는 일이었다. 너무나 실력이 좋은 사람이 성주 대리로 임명받아, 몇 년 사이 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통해 진짜 성주가 되어버리는 상황 말이다.
돈둡 성주가 모자란 성주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돈둡 성주의 아이가 장성할 때까지 최소한 몇 년. 어쩌면 십 년이 더 걸릴지도 모르고, 돈둡 성주가 바꿔치기 당하였던 동안 성도 중앙은 몰라도 외곽 지역의 인심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까딱 잘못하면 정말로 갈첸 장군이 성주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역대 성주 대리 중 최속으로 성주 자리를 뺏은 사람으로서 말이다.
갈첸 장군이 성주 대리를 맡는 게 합리적이라는 걸 알고 있던 관리들도 돈둡 장군을 위한 충성심 때문에, 혹은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정적에 의해 반란 분자로 몰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일부러 말을 꺼내지 않고 있었는데.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갈첸 장군?”
가장 그가 성주 대리를 맡는 걸 원하지 않아야 할 사람이, 오히려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아, 음, 저는···.”
“당신이 맡아주신다면 저는 물론, 성 내에서 일하는 관리와 시민들도 모두 안심할 겁니다. 장군의 명성은 이미 저희 도시에도 유명하니까요.”
“저를 높게 봐주시는 건 물론 감사할 일이지만···제가 앞에 나서는 걸 동의하지 않을 사람도 많을 겁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당신을 전적으로 밀어드릴 테니까요. 장군의 능력과 제 지지라면 혹시나 있을 불만도 모두 잠재울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대신 하나만 약조해주십시오.”
“···네?”
뭐라 거절해야 할지 고민하던 갈첸 장군의 발언을 끊고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제 아들이 열 살이 되면, 그땐 그 아이에게 성주 직을 반환해준다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아···그런 말씀이로군요.”
그녀의 말에 갈첸 장군이 이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한데?]
혹시나 다른 성주 대리에게 빼앗길 바엔, 차라리 성주 자리를 뺏을 생각 따위 전혀 없는 갈첸 장군에게 성주 대리를 맡기겠다, 이건가.
이 이상 도시를 방치하면 악마의 침공이 이어지기 전에 시민들이 먼저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지금 도시 내에 그걸 막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갈첸 장군보다 제격인 사람이 없긴 하니까.
문제가 있다면, 딱 봐도 강직한 성격의 갈첸 장군이 그걸 받아들이느냐는 건데···.
“···알겠습니다.”
오?
내 예상과 달리 갈첸 장군은 그녀의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평화 시에는 성주 직을 잘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런 혼란의 시기엔 이야기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최대한 빨리 혼란을 잠재우고, 돈둡 성주의 아드님이 장성하실 때까지 임시로 자리를 맡도록 하겠습니다.”
“오오오!”
“감사합니다, 갈첸 장군! 아니, 갈첸 성주님!”
“최선을 다해 당신을 보필토록 하겠습니다!”
그의 허락에 회의실 안에 있던 이들 모두가 기쁨 섞인 환호를 내뱉었다.
특히 자신과 자식의 자리를 보전할 약조를 받아낸 돈둡의 아내의 표정은 누구보다도 밝았다.
그렇게 임지에 불었던 혼란의 바람이 조용히 저물어갔다.
< 악마와의 싸움(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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