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와의 싸움(1)
“허허허, 저와 말입니까?”
유현의 대담한 말에 돈둡 성주는 마치 생각해보겠다는 듯, 담담하게 웃으며 매끈한 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두 사람의 대화에 오히려 소란스러워진 건 비무대 아래에 있는 사람들.
즉 비무의 관객들이자, 연회에 초대받은 사람들.
그리고 누구보다 ‘원래’ 돈둡 성주를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돈둡 성주님에게 비무를 신청한다고?”
“저런 고수가 왜 무공을 전혀 익힌 적도 없는 돈둡 성주님에게···?”
“설마 부하의 죄를 주인에게 묻겠다는 건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관객들의 목소리.
그 내용은 전부 다를지언정, 결국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저만한 고수가 돈둡 성주에게 싸움을 거느냐, 라는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흥을 돋우기 위한 비무라곤 하나, 중간에 갑자기 끼어들어 싸움을 중단시키는 돈둡 성주의 행동이 옳다고 할 순 없다.
더군다나 성주의 시종이 먼저 살기 어린 공격을 날린 것은 모두가 지켜본바, 유현이 반격하여 그를 어찌하려 했다고 해도 그것을 이상케 여기는 이는 없었으리라.
하지만 돈둡 성주와 유현의 싸움이라고 하면?
부하가 저지른 죄를 주인이 대신 갚는다, 라고 하는 건 흔히 있는 일이다.
돈둡 성주가 부하를 아낀다는 이야기는 이미 유명한 이야기고, 방금 그런 부하의 무력을 본 이들에게 한 번의 실수로 그 정도 고수가 목숨을 잃는다는 건 분명 아쉬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돈둡 성주에게 직접 싸움에 나서라고 하기엔 두 사람의 무력차이가 너무 압도적이다.
무에 대해 좀 안다고 자부하는 무인들조차 이 성에 저런 고수가 있었나, 하고 놀랄 정도의 무공을 선보인 시종.
그리고 그런 시종에게 유효타 한 번 당하지 않은 채 시종일관 여유롭게 싸움을 이끌어간 유현.
유현과 돈둡 성주의 격차는 이미 인간 대 인간으로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차라리 개미와 인간의 싸움이 더 가능성이 있어 보일 지경이었지만, 놀랍게도 유현의 말에 대한 돈둡의 반응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군요.”
턱을 쓰다듬던 손을 내려놓고선 슬쩍 미소를 짓는 돈둡 성주.
그렇게 말한 그는 자신의 발아래에 있는 부하의 신월도를 주워 올리더니, 날을 살피듯 그 위로 손가락을 데고 죽 긋는다.
날에서 손을 떼는 순간, 손가락 끝에서 살짝 올라오는 핏방울.
할짝, 혀끝으로 그 핏방울을 핥은 돈둡 성주는 그 맛을 음미하듯 잠시 침묵하더니, 싱긋, 입가를 크게 뒤틀리듯 웃더니.
“갈첸 장군님의 은인인 분의 실력을 한 번 몸소 체험해 볼까요?”
오싹!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여기 있는 모두의 온몸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채 놀라기도 전에, 그보다 먼저 발해진 차가운 기운에 모두의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그리고 그건.
‘미친놈.’
돈둡 성주의 정면에서 그 기세를 전부 받아들여야 했던 유현 역시 다를 바 없었다.
팔뚝에 울긋불긋 피어오른 닭살에 유현은 마음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우리가 착각했네.]
본인의 육신이 없는 화순은 다른 이들처럼 소름은 돋지 않았지만, 그렇다해서 그의 표정이 좋은 건 아니었다.
이마에 잔뜩 주름을 새긴 채 입을 연 화순은 쳇, 혀를 차며 유현을 향해 말했다.
[이 인간, 기세를 숨길 정도로 능력이 없던 게 아니었어.]
돈둡 성주는 정말 최선을 다해, 전력으로 자신의 기운을 숨겼다.
그렇다면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그의 기운은?
딱히 대단한 것도 아니다.
[본신의 기운 중 극히 일부, 겨우 삐져나온 기운이 그 정도라니···.]
주머니 속의 송곳이 아무리 잘 숨겨도 결국은 삐져나올 수밖에 없는 것처럼, 유현이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돈둡 성주의 기운 또한 그가 최선을 다해 숨겼음에도 불구하고 뿜어져 나온 잔향에 불과했다.
‘화산파에서 만났던 그 작자보다 좀 더 강해. 아마 우리가 상대했던 그쪽 놈들 중에서는 제일 강한···아니.’
순간 유현의 머릿속에 마교에서 맞상대했던 옥천이, 정확히는 그의 몸을 빌려 유현을 상대했던 정체 모를 누군가가 스쳐 지나갔다.
물론 유현은 그에게서 그리 어렵지 않게 승리를 거뒀지만, 아직 그의 진짜 강함에 대해선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옥천이라는 이름의 포박용 밧줄에 다리가 모두 묶인 짐승처럼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유현의 눈앞에 있는 돈둡 성주가 그를 제외하곤 가장 강한 인간이라는 건 분명했다.
“부하를 사랑하시는 그 마음, 아주 존경스럽습니다.”
존경은 개뿔.
이미 유현의 머릿속에는 이 싸움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심지어 그 당사자가 바로 발아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벌써 다 잊어버렸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 가득 들어찬 건 딱 하나.
“그렇다면 그 말씀만큼 실력이 대단하신지 한 번 식견 해볼까요?”
이만한 고수라면 아는 정보도 많겠지.
그 정보, 모조리 다 뱉어내라.
퍽!
유현의 대답에 돈둡 성주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발아래에 있던 부하를 발로 차 비무대 밖으로 날렸다.
비무대 밖으로 떨어졌음에도 비명 한 마디 없는 시종.
이미 목숨을 잃은 것일까? 하지만 슬프게도, 지금 그를 향해 시선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오오···.”
“설마 이런 비무를 보게 될 줄이야.”
“연회에 오길 잘했어!”
세계 어디를 가도 강한 사람은 인정받는다지만, 특히 토번의 사람들은 그 정도가 강했다.
그들이 신봉하는 종교의 교리에조차 ‘강자는 대우받아야 한다’라고 적혀 있을 정도이니,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괜히 비무가 연회의 흥을 돋우기 위한 제일 좋은 일이라고 하는 게 아니다.
특히 이번 비무는 보통 비무가 아니다.
지금껏 힘을 숨기고 있던 돈둡 성주와, 갑자기 나타난 절대 고수의 비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본인들이 그 전투를 직접 지켜볼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소란도.
후웅! 쿵!
“·········!”
돈둡 성주의 첫 번째 공격에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검을 휘두르는 순간 연회장 안을 가득 채우는 어마어마한 압박감!
쨍그랑! 쨍그랑! 쨍그랑!
그 기운에 가장 먼저 터져나간 건 식탁 위에 있던 접시와 잔이었다.
“이런 미친!”
그리고 그 압박감 사이에서 유현은 오늘 들어 두 번째 욕설을, 그리고 이번에는 육성으로 내질렀다.
천마보법의 오의, 군림과 비슷한 압박감!
하지만 유현이 사용하는 군림과는 전혀 달랐다.
오직 원하는 상대에게만 압박감을 주는 유현의 군림과 달리, 지금 돈둡 성주의 일격은 눈앞의 적은 물론, 그들이 싸우고 있는 비무장과 연회장까지 덮쳤다.
[내공이 무지막지하다 했더니, 이따위 무공을 쓰니 내공이 넘칠 수밖에 없지!]
연회장 내에 유일하게 이 압박감에 자유로운 화순이 열심히 상황을 설명했지만, 유현에게 한가롭게 그 설명을 듣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신월도를 든 채 천천히 다가오는 돈둡 성주를 바라보며 창을 들어야만 했으니까.
‘이만한 압박감에서 자유롭게 움직인다고? 진짜 군림이라도 쓴 거야?!’
물론 군림처럼 완벽하게 자유로운 건 아니었다. 저만한 무공을 가진 이가 이렇게 천천히 걸어올 이유 따윈 없었으니, 이 압박감을 유지하려면 저렇게 걸을 수밖에 없다는 소리겠지.
휘익!
검을 위에서 아래로 쭉 내려긋기만 할 뿐인 단순한 초식.
하지만 그런 시시한 초식도 지금 유현에게는 쉽게 막을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챙!
단전의 내공을 모두 끌어 올리고, 지금껏 단련한 근육을 모두 사용해 겨우겨우 창을 든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보며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곧바로 다시 웃으며 검을 휘두르는 돈둡 성주.
좌에서 우로 배기, 목과 단전을 향해 찌르기, 손목을 노려 베리.
첫 공격과 마찬가지로 단조롭고 평범한 공격들이었지만, 지금 유현에겐 전력을 다해야 막아낼 수 있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천천히 한계가 찾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이 두 사람은 모두 똑똑히 알고 있었다.
첫 번째 공격을 막을 때보다 두 번째 공격이, 두 번째 공격을 막을 때보다 세 번째 공격을 막을 때마다 돈둡 성주의 검이 유현의 신체에 더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자신의 옆구리를 향해 치켜들어오는 돈둡 성주의 검을 정말 아슬아슬하게 막아낸 유현의 귀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밌지 않나, 응?]
마치 동굴에서 큰 목소리로 내뱉은 것처럼 크게 공하게 울리는 돈둡 성주의 목소리.
이런 상황에서 전음을 쓴다고? 유현은 인상을 쓰며 이번에는 자신의 눈을 베기 위해 다가오는 검을 불파로 감싼 손바닥으로 쳐냈다.
[천천히 다가오는 죽음이란 이리도 감미로운 것이지. 가능하면 이 몸의 주인이 그랬던 것처럼 멋진 표정을 지어줬으면 좋겠어.]
씨익.
[당대 권능의 소유자라면 그 정도 능력은 있겠지?]
돈둡 성주를 죽이고 그 몸을 자신이 차지했다는 이야기에 더해 유현이 권능을 보유하고 있다는 말까지.
충격적인 내용이 가득한 돈둡 성주의 전음에도 유현은 전혀 놀라지 않고 인상을 쓰며 똑같이 전음을 날렸다.
[···알고 있었나?]
[처음에는 확신을 못 했지. 너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권능의 그것과 흡사했지만, 혹시나 중원의 도적 떼들이 권능의 힘을 베꼈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저 쓰레기와 싸울 때 알았다. 창끝에 어리는 그 기운은 분명 권능의 것이라는 걸.]
[부하를 보낸 이유도 그건가?]
[원래는 그냥 죽여버리려고 했지만, 네놈이 생각보다···우리의 것을 잘 훔쳐서 쓰더군.]
또 그 소리군. 유현은 돈둡 성주의,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몸을 차지한 악마 중 하나의 말에 입가를 뒤틀었다.
[또 그 개소리냐? 권능이 네놈들 거라고?]
[권능은 항상 우리의 것이었다. 중원의 가짜들이 어떻게 그것을 훔쳐 갔는지 의문이긴 하지만, 이젠 그것도 상관없다. 이미 우리는 모든 준비를 끝마쳤으니.]
[···준비?]
[그분의 영도 아래 권능은 다시 제 주인을 찾을 것이며, 우리는 이제 그 옛날 우리가 빼앗겼던 터전을 다시 찾을 것이니.]
번뜩!
[그 모든 일은 우리에게서 권능을 훔쳐 간 네놈의 피로 시작될 것이다.]
[그냥 평범하게 미친놈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아주 제대로 미친놈이구나.]
광기로 번들거리는 놈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유현은 짜증 어린 목소리로 내뱉자, 놈은 여전히 광기에
[마음껏 지껄여라. 네놈의 목숨은 이제 이걸로 끝이니.]
휙! 다시 위로 들어 올려진 놈의 검 끝.
아직 전의 공격을 막은 걸 회수하지도 못한 유현의 현 상태로는 그 공격을 막을 방법은 요원해 보였다.
[이제 이걸로 이 귀찮은 몸뚱어리도 버버리고, 일을 다 마칠 수 있을 것 같으니.]
[그래.]
그렇게 ‘보였다.’
[그 말을 원했어.]
쿵!
유현을 발끝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보이지 않는 파문.
가장 가까운 곳에서 비무를 지켜보고 있던 이들 중 하나가 그 파문에 닿는 순간, 경악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모, 몸이 움직인다, 몸이 움직여!”
그를 시작으로 다른 사람들도 점점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며 기쁨에 찬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아아아! 몸이 자유롭다는 게 이렇게 기쁠 줄이야!”
“조금만 더 이대로 있으면 숨도 못 쉴 뻔했어!”
그리고 그중에는 분노하는 사람도 있었다.
“돈둡 성주! 이게 어찌 된 일이오!”
“비무 상대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도 움직이지 못하게 하다니!”
“이런 무례를 참을 것 같소이까!”
그들 대부분이 돈둡 성주와 맞먹거나 그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었던 상석의 인물들이었다.
한 성의 성주인 돈둡도 어찌할 수 없을 만한 힘과 권력을 가진 이들.
“네놈, 대체 내게 무슨 짓을···?!”
“가짜 군림 잘 봤다. 꽤 쓸만하긴 하지만···뭐, 그래봤자 가짜는 진짜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지.”
다시 자유롭게 움직이는 팔로 창을 휭휭 휘두르며, 유현은 분노한 목소리로 자신을 향해 외치는 놈에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어때? 진짜 군림의 맛은?”
“전부 다 연기였단 말이냐?”
“네 어마어마한 내공이랑 비슷하게 흉내 낸 군림을 보고 놀란 건 사실이야. 그 효율적인 기술을 내공만 들입다 부어서 따라 하는 건 상상도 못 했거든. 하지만.”
휙!
유현이 창을 위에서 아래로 크게 휘두르자, 지금까지 연회장을 감싸고 있었던 압박감을 씻어내 주는 듯한 부드러운 바람이 모두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이젠 할 일을 해야지.”
“크크크···할 일을 한다고?”
유현의 한 마디에 음습한 웃음을 짓고 있던 돈둡 성주는 딱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아니.”
그리고 잠시 뒤.
우둑, 우둑, 우두둑!
찌지지직!
“돈둡 성주, 입이 있으면 말을···허억!”
“꺄아아악!”
“저, 저게, 저게 뭐야?!”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어지는 기괴한 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지는 순간, 거기에 있던 모두가 큰 목소리로 비명을 내질렀다.
비무대 위에 있던 돈둡 성주의 몸이 마치 물이 가득 찬 가죽 부대가 찢어지더니, 그 안에서 유현보다 더 작은, 돈둡 성주의 삼분지 일밖에 안 되는 홀쭉한 사내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내 진짜 모습을 본 이상 너도, 여기 있는 다른 놈들도 절대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다.”
호탕하던 돈둡 성주와는 비교되는 음습한 목소리로 입을 연 홀쭉한 사내가 모두를 향해 말했다.
“나는 천산의 두 번째 가문의 가주. 누가 네놈을 죽이고, 그분께 권능을 가져가는지, 죽어서도 기억할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