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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능으로 무림최강-159화 (159/185)

마교로의 귀환(4)

끼기기긱!!!

대지가, 기운이, 공간이 깎여나간다.

끼아아악!!!

땅이, 하늘이, 세상이 비명을 지른다.

마교의 모든 마인과 교도들은 그 기운에 최대한 멀리 물러섰다.

본산 바깥으로 밀려 나가고, 누군가 밟히기도 했지만, 그런 건 지금 그들에게 우선 순위가 아니었다.

피한다.

압도적인 기운, 초월적인 강함.

도망간다.

그들이 꿈꿔왔던, 바라왔던, 원해왔던 강대함.

달아난다.

약관에 이르러 처음 마교에 들어선 신참 교도부터, 백 년 넘게 마교에서 극한의 수련을 이어왔던 고수들까지.

그들의 앞에 일어나고 있는 그 광경에서 전력을 다해 도망쳤다.

인간은 물론, 한낱 날벌레, 심지어 움직일 수도 없는 돌과 나무까지.

저 둘 사이의 공간 안에 들어가는 순간,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쾅!

서로의 일격이, 서로를 향했다.

쩌저저적!!!

맞부딪힌 주먹, 맞부딪힌 기운, 맞부딪힌 두 사람의 주변으로 대지가 갈라지고, 하늘이 찢어졌다.

아니, 한낱 비유 따위가 아니다.

“으, 으아아악!”

미처 멀리 도망치지 못했던 마인 중 하나가 갈라지는 대지의 아가리 사이로 떨어졌다.

그의, 그리고 그 외의 몇의 비명이 아련히 울려 퍼졌다가 곧 사라졌다.

서로를 밀어내려 하지만, 밀려나지 않는 두 사람 때문에 대지가 먼저 포기하고 갈라진 것이다.

쩡!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주먹을 떼어놓는 순간, 다시 한번 반대쪽 주먹이 맞부딪힌다.

망가지는 공간, 산산이 조각나는 바람.

“도.”

강한 바람이 덮쳤다가, 끊겼다가, 다시 한번 전신을 감싼다.

그것을 가장 앞에서 맞은 이가, 지금껏 아무도 말하지 않고 그저 행동으로 옮겼던 그 말을, 드디어 뱉어냈다.

“도망쳐라!”

우와아아악!!!

고함, 비명, 괴성, 울음, 경련, 발작.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공포 앞에 섰을 때 나오는 온갖 반응을 다 보이며, 그들은 자신들과 똑같은 인간의 앞에서 도망쳤다.

···물론 저것을 인간으로 보는 이는, 여기에서 아무도 존재치 않았지만.

쾅!

쾅쾅!

쾅쾅쾅!

뒤를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던 마교의 사람들 뒤에서 강렬한 바람이 연이어 날아오더니, 그것은 곧 길고 긴 한 줄기의 바람으로 바뀌었다.

만약 그중에 뒤를 돌아볼 용기가, 아니, 만용이 있는 자가 있었다면 곧 알아차렸으리라.

그것이 바람이 아니라, 두 사람의 주먹과 주먹이 부딪히면서 만들어낸 기운의 폭발이라는 사실을.

빠르다.

너무나 빠르다.

조금 전의 그 일격, 일격이 탐색전이었기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은 끊임없이 서로를 향해 주먹을 날리고 또 날렸다.

아니, 주먹만이 아니다.

찔러오는 팔꿈치를 허벅지로 막는다.

초승달을 그리는 발끝을 어깨로 막는다.

올려 차오는 무릎을 팔뚝으로 막는다.

전신의 모든 무기를, 전신의 모든 방패로 막아선다.

말 그대로 전신을 다해, 전력을 다한 공격과 방어.

지금 그저 앞만 보고 도망치는 저 마인들은 얼마나 어리석고, 또 불쌍한 존재들인가.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절대적인 강함에 가장 가까운 두 사람이 싸우는 저 광경을 보지도 못하고 그저 어떻게든 멀어지려고만 하다니.

하지만 그들을 탓할 수만은 없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것에서 도망치는 건 인간으로서 당연한 본능이었으니.

하지만 그들에게 불행이자, 행운이었던 건.

챙!

두 사람 다 아직 자신의 전력을 다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이미 몇백 수를 마주 받은 그들이 살짝 거리를 벌리더니, 마치 짜기라도 한 듯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유현은 자신의 등 뒤에 메고 있던 두 자루의 창을, 옥천은 허리춤에 달고 있던 검집에서 검을.

서로의 행동은 확실히 알 수 있지만, 그러면서도 무기를 뻗는다고 해도 닿지는 않을 그런 미묘한 거리에서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은 곧.

쾅!

전에 없던 굉음을 퍼뜨리며, 다시 한번 맞부딪혔다.

*****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마교의 이장로, 마선 백순옥은 절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신이 약자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그였지만, 지금 저들 앞에선 너무나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건, 오직 그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

이미 유현의 강함을 가장 가까이에서 실감했던 귀철과.

“·········.”

지위는 곧 강함이라는 마교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자리하고 있는 육천장.

“·········.”

그리고 강함 그 자체를 숭상하는 수많은 마교도들까지.

저 두 사람의 대결. 아니, 전쟁 앞에선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 사이에서.

“어떤가요.”

그녀의 목소리가 고요히 울려 퍼졌다.

“강하죠? 저분.”

“아···가씨.”

교도들의 틈바구니에서 나타난 독고화를 바라보며 백선옥은 입을 열었다.

이제 새로운 천마가 옹립된 이상, 더 이상 그녀는 아가씨라 불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음을 알긴 했지만,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 호칭을 고칠 수 없었다.

여전히 그의 천마는, 진정한 주인은 독고삭이었기 때문이었다.

“저 사람은 대체 누굽니까.”

하지만 그런 충심조차 이 의문을 막을 순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엄청난 강자.

그 하나만으로도 그의 정체를 반드시 알아내야 할 이유로 충분한데, 거기에다가 독고화와 함께 나타나기까지 했다.

“저 인간은 대체 누구길래 저희 마교를 저렇게 적대하는 겁니까!”

“아뇨, 틀려요.”

“···네?”

“저분은 마교를 적대하는 게 아니에요. 보통 다른 중원인들에 비하면 그래도 긍정적으로 봐주시는 분이죠.”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대체 왜 천마에게 저리 적대적인 겁니까?”

“그것도 틀렸어요.”

움찔.

천마를 입에 올리는 순간, 갑자기 그 기세가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독고화의 모습에 백순옥은 몸을 떨었다.

그녀의 경지가 결코 낮은 편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자신이 경계해야 할 정도였을 줄이야.

하지만 그녀의 무공의 경지에 놀라움은 잠시 접어두고, 그는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무엇이···틀렸다는 겁니까?”

“옥천 저 인간은 진짜 천마가 될 자격도, 능력도 되지 않는 인간이에요.”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그는 정당한 계승자 아닙니까?”

물론 대대로 이어져 왔던 천마의 무공을 이어받진 못했지만,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마인과 교도에게 인정받을 만한 강함을 얻게 된 자가 바로 옥천이다.

천마가 될 이유는 이미 차고 넘쳤다, 그렇게 다른 이들은 생각했지만.

“그가 저의 아버지···전대 천마의 목숨을 노렸다고 해도 말입니까?”

그 이면의 진실은 달랐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그는 외부의 세력과 결탁하여 천마의 목숨을 노렸고, 그것은 실제로 성공했습니다.”

독고화의 입에서 나온 충격적인 발언에 모두의 눈이 커졌다.

독고삭의 죽음에 옥천이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것도 본인만의 힘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외부 세력의 힘을 빌어서 그런 짓을 벌였다!

그 충격적인 사실은 순식간에 일반 교도들 사이에도 퍼져나갔다.

“새로운 천마가 그런 일을 벌였다고?!”

“어찌···어찌 천마의 제자라는 자가 그리 악독한 짓을!”

“본인이 정당히 자리를 쟁취했다면 모를까, 어떻게 외부 세력과 함께 그런 짓을!”

제자가 스승을 죽였다는 사실보다 외부 세력을 끌어모았다는 것에 더 큰 충격을 받은 듯 행동하는 마교도들.

정파라면 이해할 수 없는 정신머리였지만, 마교에서는 달랐다.

충분히 강하지 못했던 천마가 그의 제자에게 목숨을 잃고, 그 제자가 강력한 천마가 된 역사는 마교의 역사서에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옥천의 경우는 다르다.

천마의 자리에 대한 욕심 때문에 외부 세력까지 데리고 와 자신의 스승을 죽이다니!

심지어 그 말을 꺼낸 대상은 다른 누구도 아닌 독고화다.

다른 사람, 하다못해 장로나 천장 중 하나가 이런 얘기를 꺼냈다면 개소리로 치부했겠지만 그녀는 달랐다.

정파와 마교 모두의 사랑을 받았던 여인, 서란.

마교의 길고 긴 역사에서도 손에 꼽힐 강함을 자랑했던 천마, 독고삭.

그런 두 사람의 딸인 독고화의 말은 설사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한 신용이 있었다.

물론 그녀의 말을 전부 다 믿는 건 아니지만···그래도 의심가는 부분은 많았다.

그에 대한 건 나중에 파헤치면 된다, 그리 생각한 백순옥은 입을 열었다.

“설마 그 외부 세력이···정파입니까?”

“아뇨, 정파는 아니에요. 애초에 정말로 정파였다면, 이런 전쟁을 벌일 생각도 하지 않았겠죠.”

“그렇다면 그 외부 세력이 대체 누굽니까? 누구길래 그런···말도 안 되는 일을···.”

“글쎄요. 저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유 소협의 말을 들어보니 우리 마교는 물론, 정파와 세외. 심지어 황실에까지 그 손길을 뻗었다고 하더군요.”

“화, 황실까지 말입니까?”

“유 소협은 혹시 저···옥천과 싸우고 있는 그 사람입니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암중 세력의 크기와 규모에 질려 하는 백순옥과는 달리, 귀철은 강자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인 듯 질문했다.

“네, 맞아요. 제 여정에도 큰 도움을 주신 분이죠.”

가출, 이라는 말을 꺼내려던 백선옥은 교도들의 눈치를 보고 바로 표현을 바꾸었다.

어색한 부분이 넘치는 표현이었지만, 다행히 그녀의 입에서 나온 충격 발언 덕분이었는지 이상하게 보는 이들은 없었다.

“그런데 저 사내는 대체 어떻게 그런 걸 다 아는 겁니까? 그리고 저 말도 안 되는 강함은···.”

쾅! 쾅! 쾅!

공중에서도 대지와 다를 바 없이, 아니, 더욱 격렬하게 싸움을 벌이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백선옥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강함을 옆에서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던 옥천의 진짜 힘도 어마어마하지만, 지금 저 사내는 그런 옥천과도 당당히 맞서고 있었다.

박선옥의 질문과 말만 하지 않았을 뿐, 주변의 다른 이들도 궁금해하는 그 의문을 독고화는 한 줄로 간단히 대답했다.

“제 아버지의, 천마의 힘을 이어받은 사내입니다.”

*****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와 상관없이 유현과 옥천. 이 두 사람의 전투는 더욱 더 격렬해졌다.

파앗!

옥천이 검을 휘두르자, 검과 똑같은 형색의 푸른 검기가 하늘을 가득 메웠다.

마치 수천 마리의 새가 하늘을 유영하듯, 하늘을 휘젓던 무수한 숫자의 푸른 검은 유현을 향해 쏟아져 내렸으나.

탱탱탱!

그것들은 감히 유현에게 다가가지도 못한 채, 간단히 부서지고 사라졌다.

와류.

창을 넘어 유현의 전신에 휘몰아치고 있는 강대한 폭풍 앞에선 수천 자루의 검도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유현의 폭풍은 한낱 방어 수단으로 끝날 것이 아니었다.

옥천의 검을 부수던 기세 그대로 옥천을 향해 치닫는 폭풍.

그리고 그 중심에는 두 자루의 창이 검고 붉은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쿠구구구궁!!!

한낱 인간 따위가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듯 거세게 휘몰아치는 폭풍 앞에서도 옥천은 두려워하지도, 떨지도 않았다.

그저 앞으로 검을 뻗어 강하게 휘두를 뿐.

스겅!

들릴 리 없는 소리가 들리고, 가능할 리 없는 일이 벌어진다.

폭풍이, 바람이 갈라진다.

그리고 그 검격은 그대로 유현을 향해 다시 한번 날아간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것을 맞받아치는 유현.

공격이 곧 방어가 되고, 방어가 곧 공격이 된다.

지금까지 전무후무했던 그 싸움 속에서, 유현은 매서운 눈빛으로 옥천을 노려보았다.

이 힘.

익숙해도 너무 익숙하다.

[야, 유현아. 이 무공 설마···.]

‘그래.’

그리고 그것이 자신만의 착각이 아니라는 걸, 화순의 대답으로 알아차렸다.

“그 작자들로부터 무공까지 배웠나?”

남만을 빠져나왔던 그 순간부터. 아니, 사실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마주했던 그들.

정체도, 근본도 알 수 없지만, 규모와 힘만큼은 지금껏 유현이 알고 있던 어떤 세력보다도 크고 강했던 이들.

지금 옥천이 사용하는 무공은 그들과 유사해도 너무 유사했다.

사실상 같은 무공이라고 생각해도 상관없겠지.

하지만 유현의 질문에 옥천은 씩, 입가에 진한 미소를 그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무공을 배워? 틀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의 주변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마어마한 살기.

“내가 가르쳤다.”

“···뭐?”

쾅!

기막혀하는 유현의 목소리가 옥천에게 닿기도 전에 옥천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마어마한 기세.

스치는 것만으로도 목숨까지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 강력한 기운이 잔뜩 깃들어 있었지만.

스윽.

유현에게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금강부동신법.

역전.

움직이지 않아도 모든 공격을 피할 수 있는 희대의 신법은 설사 세상을 무너뜨릴 기운 앞에서도 유현을 한 점의 상처 보존해 주었다.

“가르쳐? 네가? 무슨 개소리를···.”

“사후 세계는 즐거웠나?”

우뚝.

“···너.”

“재밌는 일을 벌여줬더군. 사후 세계의 왕을 둘이나 해치우다니···정말로 강해. 아니.”

히죽.

“권능. 아니, 폭우의 힘이라고 해야 하나?”

오싹!

처음 사후 세계에 관해 이야기할 때만 해도 독고화의 흔적을 읽었을 뿐이라 생각했던 유현은 곧 그 생각을 고칠 수밖에 없었다.

옥천이 권능에 대해 아는 건 그럴 수 있다.

독고삭의 아내, 서란도 알고 있었다면, 그것을 물려받을 제자, 옥천이 아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껏 수백 년 넘게 아무도 사용한 적 없어 기록에도 없던 천마창법의 극의의 이름을 아는 건.

그리고 유현이 그것을 사용할 줄 안다는 걸 아는 건.

“너···대체 뭐냐···?”

“크크큭.”

“정체를 말해!”

“역시나 대단하군! 권능! 정말로 재밌어! 훌륭해! 당신은 이토록 어마어마한 걸 만들었던 거로군! 크하하하하!!!”

광소.

하늘을 향해, 아니,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를 향해 내뿜는 광기 어린 웃음.

“하지만.”

그리고 그 웃음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건.

“나는 이미 그것을 뛰어넘었다.”

격렬하고도 싸늘한 증오.

지금껏 수많은 인간군상을 마주해왔던 유현도.

인간은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긴 세월을 살아온 화순도.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깊디깊은 증오심.

하지만 그 경악에 관계없이, 유현의 몸은 움직였다.

파앗!

두 자루의 창의 옆에서 나타난 수천, 수만 개의 창날.

그 형태는 아까 옥천이 날렸던 그것과 비슷하지만, 그저 형태만 검으로 한 채 기를 날려 보내는 것에 불과했던 옥천의 공격과 달리 유현의 공격은 그 궤를 달리했다.

한 자루, 한 자루가 이미 한 자루의 창 그 자체.

그렇게 만들어진 창은 그대로 옥천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폭우.

백만 대군조차 무너뜨릴 천마창법의 극의가, 십만대산의 하늘에서 나타났다.

쿠과과과과!!!

장대비에 옷이 젖듯, 아무런 방어도, 행동도 하지 못한 채 깎여나가는 옥천의 육신.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조차 옥천은.

“과연.”

수만 개의 목숨을 가진 사자들조차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목숨을 잃고 말았던 유현의 폭우 앞에서도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 듯 웃으며.

“이게 극의로구만.”

천천히, 천천히 유현에게 다가왔다.

살이, 근육이, 뼈가, 내장이.

모두가 산산이 부서지고, 망가지는 그 상황에서도 오직 머리만, 아니, 입만 남으면 그만이라는 듯 다가온 옥천은. 아니, ‘그놈’은 미소를 띤 채 사라졌다.

“알고 싶다면 서역으로 와라. 그곳에서 네 모든 궁금증이 풀릴 테니.”

그리고.

‘그것’이 사라진 옥천의 머리는 그가 지어낸 미소를 띤 채 조용히 추락했다.

마교에 피어난 한 송이의 꽃

싸움이 끝난 직후, 마교 본산을 정리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나와 옥천이 벌인 전투의 상흔은 대지를 넘어 본산 전역에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다섯 계층 이상의 고층 건물은 대부분 무너졌고, 낮은 건물들도 갈라진 땅 사이로 사라진 것이 많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두 가지.

천마를 포함한 마교의 고위층이 업무를 보는 본전은 일부를 제외하곤 대부분 살아있었다는 점이었고, 죽은 사람도 없었다는 점이다.

처음 땅에서 벌인 싸움 때문에 갈라진 땅속으로 떨어진 마인이 몇 있었지만, 그래도 그들 모두가 무공을 익힌 무인이라 그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은 없었다.

다만 경상이라고 가볍게 자리에서 털고 일어날 수준의 상처도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그들을 치료할 공간은 남아 있었고, 전쟁을 위한 물자인진 몰라도 약재 역시 잔뜩 남아 있어서 그들을 치료하는 데에는 별 차질이 없었다.

그리고 뭣보다.

“저희의 부름을 거절하지 않고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속 절차를 처리하기에 충분한 인원은 몸 멀쩡히 남아 있었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아뇨, 저도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으니까요.”

창문 너머의 바깥에선 아직도 이번 사태에 망가진 건물을 복구하는 공사에 한창이었지만, 이 안은 그것과는 별세계인 것처럼 조용하면서, 또한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원래는 좀 더 편한 자리에 모시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지금부터 꺼낼 이야기의 주제가 주제인지라 이곳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불편을 끼쳐 죄송합니다.”

여기 모인 열 한 사람을 대표해서 내게 말을 건네고 있는 건 마교의 이장로, 백순옥이었다.

본래라면 일장로, 귀철이 내게 설명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어제의 싸움에 대한 충격 때문인진 몰라도 그는 내 앞에선 입도 열지 못했다.

“상관없습니다.”

사실 아닌 게 아니라, 나도 여기 한 번쯤은 와보고 싶었다.

이곳이 어딘가에 대해선 나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일반 마교도들 사이에선 ‘신에 가장 가까운 자리’라는 이명으로 불리는 이곳.

마교를 지배하는 천마와 그를 보좌하여 마교를 다스리는 네 명의 장로와 여섯 명의 천장. 그리고 마교 역사에 다시 없을 정도로 크나큰 공을 세우는 교도만이 출입할 수 있는 바로 그 장소.

낙성 대전. 혹은 천마 대전이라고 불리는 이곳에 불리는 건 모든 평교도의 꿈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물론 오직 생존 하나만 생각하며 마교에 있던 내겐 물론 먼나라의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그럴 인맥, 능력, 그 외 모든 것이 존재하긴 했느냐, 는 둘째 치더라도.

“그럼 제일 먼저···그···무공은 정말로···.”

첫 질문부터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백순옥을 대신해 내가 먼저 대답을 날렸다.

“네, 맞습니다.”

그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아니, 그가 아니라 마교도라면 쉬이 입을 열지 못하겠지.

“제가 익힌 무공은 분명 천마의 무공입니다.”

흡!

내 말에 침묵하고 있던 다른 아홉 명의 마인들도 숨을 들이켰다.

그나마 유일하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건 이미 전후 사정을 모조리 파악하고 있는 독고화뿐이었다.

“그럼 그 무공은 그분께 사사한 것이 맞습니까?”

“그분이 전대 천마이신 독고삭 대협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역시 맞습니다. 취미로 벌이던 사냥 중, 사냥감을 물색하다 어느 토굴에서 기력을 다한 독고삭 대협을 뵙고, 그분께 무공과 함께 진실을 들었습니다.”

“그 말씀은 이미 행방불명 이야기가 나돌던 때부터 그분은 목숨을 잃은 지 오래였다···이 말씀이군요.”

“시간 순서를 생각하면 그렇겠죠.”

“그럼 왜 그동안 나타나지 않았죠?”

이번에 질문을 꺼낸 건 육천장 중 유일한 여인, 마교의 모든 정보를 관리하는 색천장 요화란이었다.

즉, 전생의 삶에서 나의 최고 상관인 분이었다, 이 말이다.

“만약 정말로 정당하게 전대 천마에게서 무공을 이어받았다면 진작에 마교로 와서 무공을 선보였다면 그만인데, 왜 이토록 오래 걸렸습니까.”

설마 내가 색천장과 대화를 넘어서 존대를 듣게 되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과거의 내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말투가 조금 사나운 것쯤이야, 이해해주지 못할 것도 아니다.

백순옥이 독고삭의 뜻과 의지의 이해자라면, 요화란은 그를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었으니까.

만약 서란이 없었다면, 혹은 마교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독고삭의 여인은 그녀가 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으니까.

그런 사랑하는 독고삭의 죽음을 마지막에 지켜본 인물에게 하는 말이 곱게 나오면, 그게 더 놀라운 거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죠?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당시 저는 제대로 된 무공 하나 익히지 않은 상황이었고, 그분에게서 천마의 무공을 물려받았지만 그 힘의 십분지 일, 아니, 백분지 일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미리 천마의 권능을 통해 익힐 무공을 배워두거나, 준비해둔 세 개의 영약을 흡수하여 일갑자의 내공을 얻는 역대 천마들과 달리, 그런 것도 없던 내가 강해질 수단은 극히 적다.

“그런 상황에서 마교로 향해봐야 제 말을 믿어줄 사람도 적을뿐더러, 설사 믿는다고 해도 옥천이 어떤 짓을 벌일지는 아무도 모르죠.”

“그래서 경지를 높이고 찾아왔다, 이거군요?”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요화란은 그거면 충분하다는 듯 조금 전의 분노가 거짓인 것처럼 모조리 지우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정당한 이유가 있었으니 이해하겠습니다. 감정이 앞선 탓에 말을 함부로 했던 점, 용서해주십시오.”

“아뇨, 괜찮습니다.”

[역시나. 그냥 확인 용도였구만.]

순식간에 돌변한 그녀의 모습에 내 옆에 있던 화순이 픽 웃었다.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걸 왜 이리 따지고 드는가 했더니만, 독고삭을 잃었던 게 퍽 슬프긴 했나 봐.]

뭐···전생에서도 이미 독고삭에 죽고 못 살던 사람으로 유명했으니까.

독고삭이 정파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선 옥천보다 더 정파를 증오하게 되었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괜히 정보부에서 제일 먼저 정마대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게 아니란 소리다.

하지만 그런 감정적인 이면 뒤엔 모든 마교의 정보를 다루는 수장다운 이성적인 면도 존재했다.

정당한 이유라면 금방 그 분노조차 죽일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크흠, 일단 그렇게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나타나신 이유는 알겠습니다.”

다시 이야기의 흐름을 자신 쪽으로 끌고 오기 위해 백선옥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렇다면 전대 천마의 여식과는 어떻게 동행을 하게 되셨습니까? 미리 약조되어 있던 겁니까?”

“아뇨, 저번에 옥천의 명으로 독고 소저를 쫓아오던 마인들과 교전을 벌였고, 거기서 소저에게 사정을 듣고 도움을 주기 위해 동행했을 뿐입니다. 그전까진 연락이나 만남은 없었습니다.”

“그럼 그···아까 듣기론 사후 세계에서 서란 님과 뭔가 대화를 나누고 오셨다 했는데···그게 정확히 어떤 이야기인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건···.”

그 뒤로 시작된 나와 독고화의 여정에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현실의 이야기라기보다는 마치 설화나 저잣거리의 괴이담에 가까운 이야기였지만, 이들 중 그 이야기를 믿지 않는 자는 없었다.

지금까지 마교를 딱히 마음에 들어 했던 적은 없지만, 이 부분에서만큼은 참으로 편하다.

이야기를 꺼내는 이가 강자라면 모든 행동과 말이 모두 정당화되는 것이다.

···뭐, 전생에서는 그런 부조리가 세상에 어딨느냐, 하고 투덜거렸지만.

더군다나 그 강함을 얻은 수단이 다름 아닌 천마의 무공이라 하니, 그들에겐 더욱 설득력 있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중간중간 독고화까지 이야기를 보충하고 있었으니,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해도 그들은 믿을 수밖에 없으리라.

“···그렇게 된 이야기입니다.”

“그렇군요···잘 알겠습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백선옥과 달리, 다른 사람들은 그 이야기가 아닌 다른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설마 교리가 사실일 줄이야···진짜 꿈에도 몰랐어.”

“어? 당신, 우리 마교의 교리를 믿지 않았던 거야?”

“아니, 그걸 믿으라고 하는 게 더 이상하지···.”

“그래도 우리의 교리인데 믿긴 해야지.”

“아니, 다른 부분이야 그럭저럭 믿지. 강한 자가 곧 법이라거나, 이런 거. 그런데 제일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사실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

“그러게 말이야.”

···나만 그렇게 생각하던 거 아니구나.

자기들 딴엔 조용히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내 귀가 그걸 듣지 못할 리 있나.

높은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높은 자리에 있기에 그들은 사후 세계에 관해선 믿지 않는 경우가 많았던 모양이다.

“크흠.”

그들의 소란스러운 목소리에 다시 헛기침을 내뱉는 백선옥.

하지만 이번에 내뱉는 헛기침은 조금 전의 그것과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

[역시 그 이야기를 꺼내려 하는 건가.]

조금 전 그 헛기침이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리기 위해 내뱉은 것이라면, 지금 헛기침은 정말로 어려운 이야기를 내뱉기 전,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것.

그리고 그처럼 높은 경지에 이른 무인이 그렇게까지 하면서 마음을 안정시켜야 할 질문은 딱 하나.

“만약 저희가 당신에게 천마의 직위를 드린다고 하면···받아들이실 겁니까?”

역시나.

그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여기 있는 모두가 침묵한 채 나만을 바라본다.

그들도 그저 생각 없이 꺼낸 말은 절대 아닐 것이다.

현 천마였던 옥천은 외부의 세력까지 끌어모아 전대 천마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 했던 것이 밝혀진 지금, 마교는 지금껏 없던 위기에 몰려 있었다.

천마의 자리는 공석인데, 그 자리에 오를 사람은 없는 것이다.

장로나 천장 중 하나가 대리로 서자니 이미 옥천 때문에 옛날엔 존재치도 않았던 천마 대리라는 이름은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진 이후고, 그렇다고 진짜 천마가 되자니 그걸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 수두룩하다.

결국 그들이 택할 방법은 딱 하나.

“만약 유 대협께서 천마가 되고 싶다···그리 공언하신다면 전력으로 돕겠습니다.”

마교도 대부분이 모인 앞에서 그 강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한편, 천마에게서 무공을 사사하였다는 증명도 있었으니, 천마의 자리에 오를 자격은 충분했다.

[네가 걱정하던 그대로 됐다, 야.]

그러게 말이다.

이미 사후 세계에서 서란과 이야기를 나눴던 그때부터 걱정하던 사태다.

옛날에도 딱히 그런 자리 바란 적은 없지만, 지금은 더더욱 천마의 자리 따윈 바라지 않았다.

더군다나 옛날이었다면 내 옆에서 신나게 부추겼을 화순도.

[천마의 자리···뭐, 네가 원하면 하던가.]

선정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이렇게 바뀌었던지라, 이제 내게 천마의 자리를 떠맡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유일한 이유라면···천마의 권능을 가지게 되었다는 책임감?

그런데 그건 여기가 아니라, 지금 나를 믿고 고향에서 기다리고 있을 가족과 내 부하들에게 보여줘야지.

서론은 길었지만, 결국 결론은 이거다.

“죄송하지만 힘들 것 같군요.”

“으음···그렇습니까···.”

내 대답에 백선옥은 물론, 다른 이들도 그리 놀라는 눈치는 아니었다.

애초에 중원의 사람들에게 마교가 어떤 의미인지 그들 또한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차라리 내가 약했더라면 힘을 써서라도 억지로 붙들어놨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니까.

강자의 뜻을 따르는 게 본능 수준으로 새겨진 그들에게 있어서, 그들보다 훨씬 강자인 내가 거절한 이상 더 제안할 의지가 꺾여버린 것이다.

그래도 천마의 무공을 돌려달라···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없어서 다행이네.

물론 지금 권능을 남에게 전수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하지만 그래도 마교다.

이것저것 좋지 않은 기억이 잔뜩인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번 생에서 이것저것 받은 것도 사실이니까.

“만약 천마의 자리에 오를 사람이 없다면···.”

조금은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한마디 보태주는 건 어렵지 않겠지.

“···독고 소저를 잠깐, 천마의 자리에 올려두시는 건 어떻습니까?”

“아가씨를 말입니까?”

“예.”

내 말에 불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는 장로와 천장. 그리고 그 사이에서 담담한 표정을 지은 채 앉아 있는 독고화까지.

“으음···아가씨는···.”

“물론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제일 나은 선택이긴 하지만···.”

새롭게 천마가 된 옥천이 첫 번째 대업을 벌이기도 전부터 전대 천마를 암살했다는 악명만 뒤집어쓴 채 목숨을 잃었으니, 성난 교도들을 달래기 위해선 그들이 믿고 따르는 이름.

전대 천마인 독고삭과 모두의 사랑을 받았던 서란. 이 두 사람의 딸인 독고화가 누구 보다 어울린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그녀가 천마의 자리에 오르는 걸 막는 것이 하나.

“아가씨의 강함을 선보여주시지 못한다면, 교도들 이전에 저희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바로 무공의 경지.

강함을 곧 제일의 미덕으로 삼는 마교답게, 그 가장 윗선에 있는 장로와 천장 또한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들이었다.

그런 그들의 인정을 받으려면 최소한 초절정 완숙의 경지는 보여야 할 터.

하지만 그들이 알고 있던 독고화는 절정 완숙, 설사 좋게 쳐준다 해도 초절정 입문의 경지 정도밖에 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의 독고화는 그때와는 전혀 다르다.

“만약 여러분들께서 제 무공을 보고 싶으시다 하시다면.”

고오오오.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대전의 저변에 깔리기 시작하는 그녀의 기운.

영약을 통해 쌓아 올린 무공을 대부분 포기하고, 새롭게 익힌 그녀의 무공은 짧은 시간 만에 놀라운 성취를 이루었다.

원래 미래에서도 젊은 나이에 초절정 완숙의 경지에 오르는 그녀지만, 새롭게 익힌 무공은 그 길을 훨씬 단축해줬다.

지금도 전과 달리 초절정 초입 경지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그때와는 풍기는 기세도, 느낌도 전혀 다르다.

천마의 무공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영산의 무공을 통해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천마의 무공에 익숙한 장로와 천장에게 무엇보다 강렬한 충격을 안겼다.

“이건!”

“아가씨···대체 어느 사이에 이만한 경지에?!”

“물론 이 정도로는 아직 천마의 이름을 자칭하기엔 한참 모자란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기세를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마교의 최고위들을 향해 독고화는 말했다.

“하지만 여러분의 도움이 있다면,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시기에 우리 마교를, 우리를 믿고 있는 이들을 지켜나갈 수 있을 만한 힘과 의지는 갖추고 있습니다.”

천하의 사랑을 받았던 서란.

그녀의 매력과 재능은 그 딸, 독고화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니, 천하에 손꼽히던 강자, 독고삭이 가지고 있던 권위까지 더해져, 오히려 한 층 강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터.

그리고 그 예상대로 장로와 천장의 이야기가 착착 진행되어갔다.

“아가씨의 의지가 이리도 강하시니···임시로라도 아가씨를 천마의 자리에 봉하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무공의 경지가 일천하다면 모를까, 이미 그 힘을 선보이셨습니다.”

“자세한 경지의 파악은 이번 혼란을 잠재운 뒤에 해도 늦지 않을 터.”

“저는 찬성입니다.”

“저 또한 찬성입니다.”

“그렇다면 저도···.”

점점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 회의에 미소를 짓는 독고화.

이걸로 마교에 닿은 놈들의 손길도 완전히 지울 수 있겠지.

그리고, 이제 남은 건.

‘서역으로 와라.’

‘그’가 남긴 한마디의 말.

그곳에서 모든 것이 끝나리라.

어머니의 이름

독고화가 정말로 훌륭한 천마가 될 수 있을까, 없을까는 나도 알 수 없었다.

미래에서도 독고화는 그저 옥천이 천마임을 증명하는 장신구에 지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도 최소한 마교 내전이나 동족상잔 같은 최악의 사태는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네 명의 장로나 여섯 천장. 혹은 그들과 전혀 상관없는 또 다른 천마의 핏줄을 찾아 올린다고 해도, 지금 저 마인들을 막아내기엔 무리가 있었으니까.

그런 점에서 지금 그녀만큼 천마의 자리에 걸맞은 사람도 없었다.

···이 정도면 최소한 독고삭 그 사람한테 받은 건 갚은 거겠지.

[사후 세계에서 딸을 구해주는 걸 지켜 보고 있다, 이런 식이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말이야.]

화순의 말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사후 세계에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더더욱 그의 말이 동감이 갔다.

그래 봐야 사후 세계에선 현세의 모습을 지켜볼 방법은 없거니와, 정작 그걸 말해줄 그는 사후 세계에도 없었다, 라는 게 현실이었지만.

마교에선 조금 더 계시다가 가는 편이 낫겠지 않느냐, 이런 말을 꺼내긴 했지만, 어차피 지금 같은 상황에서 나 같은 사람은 방해꾼에 지나지 않는다.

당장 얼마 전에 천마였던 사람, 지금은 사실상 흑역사 취급받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만한 자리에 있던 사람과 싸워 죽인 인간이니.

나를 멸망할 뻔한 마교를 구원해준 구원자라는 시선으로 보는 이도 있지만, 까딱 잘못 건들이면 폭발할지도 모르는 진천뢰로 보는 시선, 도 존재했으니까.

···아니, 정말로 내가 그를, 천마의 자리에 있던 인간을 죽인 게 맞나?

처음 내게 감정을 보였던 건 옥천이었던 것 같긴 하지만, 그 뒤에 나타난 ‘무언가’는 분명 옥천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그놈이 말했지? 네가 싸웠던 그들의 무공을 자기가 가르쳤다, 라고.]

그래, 분명 그랬지.

그렇다면 놈들의 스승? ···아니, 그것도 뭔가 말이 안 되는데.

분명 가주니 뭐니, 애초부터 태생적인 계급부터 완전히 다른 듯 보였던 놈들이다.

그런데 그런 인간들을, 오직 단 한 사람이 가르쳤다고?

물론 그 가문에선 그렇다, 같은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건 역시···알아봐야겠지?]

그렇지.

내 머리맡 위에 떠 올라 있던 화순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직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또 떠날 생각을 하는 게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그래도 왠지는 몰라도···.]

씨익.

[우리가 지금껏 품고 있던 의문의 끝에 다다랐다, 이런 생각은 드는데.]

그래···나도 어느 정도는 동감하고 있어.

중원을 넘어 세외 곳곳을 돌아다니며 내 전생의, 이 삶의, 무공에 있던 여러 의문이 풀리고, 또 생겨났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종착.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내가 품고 있던 모든 의문이 해결되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모두가 가봐야 아는 일이지만.

“앗! 도련님! 오셨습니까!”

“아, 음.”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는 사이 도착한 고향 집 앞.

여럿이 서있는 문지기 중 연배가 제법 되 보이는 사내가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 사람 이름이 분명···.

“춘성, 맞지?”

“예, 헤헤. 제 이름을 기억해주고 계셨군요?”

“벌써 십 년 넘게 가문에 종사 중인 사람의 이름을 잊을 리가 있나.”

물론 예전엔 하나도 생각 안 났지만, 그래도 정보 요원 특유의 기억법을 익히고 난 뒤로는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딱히 대단찮은 이유는 아니고, 전생에 부하들 이름도 기억 못 하는 상사를 만난 뒤로 나는 무조건 내 아랫사람의 이름은 기억해 둬야지, 하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그 인간은 최악의 상사였지만, 무공이 높다는 이유 하나로 진급해서, 내가 목숨을 잃을 시점엔 이미 전투단 하나를 맡고 있었다.

···내가 이래서 마교를 좋아할 수 없는 거라니까.

“지금 바로 문을 열겠습니다.”

“그래, 고맙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미리 연락이 갔었는지 저 멀리서부터 총관이 내게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녀오셨습니까, 유현 도련님.”

“예, 총관 어르신.”

이제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그는 의외로 이마보다는 눈가에 주름이 많이 새겨져 있었다.

인상보단 웃음을 많이 지었다는 증거였다.

옛날에는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친근감이 더 크다.

내가 그만큼 똑바로 살아왔다···이런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려나.

“아버지는 안에 계십니까?”

“네. 지금 집무실에 계십니다. 인사를 드리려 그러십니까?”

“네, 그것도 있지만···조금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할 이야기 말씀입니까?”

“네,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서요.”

내 진지한 표정을 읽은 것일까. 조금 전보다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그가 대답했다.

“그럼···알겠습니다. 주변의 시종들은 전부 물려놓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총관 어르신.”

이심전심인가. 말을 할 필요도 없이 내가 미리 부탁할 걸 생각하고 그리 말해주는 총관.

근처에 지나가던 시종에게 이런저런 명령을 내린 그는 바로 나를 아버지의 집무실로 이끌었다.

총관이 명령한 덕분일까. 아버지의 집무실로 향하는 길에는 시종 하나 지나다니지 않았다.

익숙한 듯, 익숙치 않은 듯 미묘한 가문의 주변을 둘러보던 도중, 앞에서 걷고 있던 총관이 나를 향해 물었다.

“달포 간의 여행은 어떠셨습니까?”

“그럭저럭 원하는 건 얻었습니다.”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그런데···.”

스윽. 걷는 발걸음을 잠시 늦추며,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그.

“아직 심적으로 부담인 부분은 있는 듯합니다만?”

“네? 아···.”

얼굴에서 티가 났나? ···아니다, 표정 숨기기는 무의식적이더라도 완벽하게 되어 있다.

내 말투, 발걸음, 행동 틈에서 그걸 읽어낸 것이리라.

···나보다 총관이 더 정보 요원에 잘 어울리는 거 아닐까.

“···조금 걱정스러운 부분이 있어서요.”

“이번에 다녀오신 것과 관련된 일입니까?”

“예, 뭐···그것도 있고, 제 무공에 관련된 것도 있고···조금 복잡하네요.”

“그렇군요.”

그 대답과 함께 다시 원래의 속도로 돌아가는 우리 두 사람의 발걸음.

잘 넘어갔나, 이렇게 생각한 직후, 앞에서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번에 떠나실 때는.”

“···네?”

“부디 그 마음속에 있는 근심을 다 해결하실 수 있으면 좋겠군요.”

집무실로 향하는 발걸음도, 내게 말하는 말투도 하나 바뀌지 않았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역시.

“감사합니다.”

나 같은 녀석보다 총관이 훨씬 더 정보 요원에 어울리는 것 같다.

그렇게 천천히, 가벼운 발걸음으로 아무런 맬 없이, 허나 많은 대화를 나누며 집무실로 향했다.

*****

“다녀왔느냐.”

“네, 다녀왔습니다.”

집무실로 들어가자마자 아버지는 서류를 정리하느라 숙이고 있던 고개를 살짝 들고선 내게 인사를 건넸다.

가볍고, 편안한 목소리.

마치 어젯밤 인사를 나누고, 다음 날 아침 문안 인사를 하는 듯한 기분까지 느껴졌다.

“원하던 건 다 알아냈느냐?”

“네, 그런데···그에 관해 아버지께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물어보고 싶은 것?”

“네.”

내가 이야기를 꺼내자 들고 잇던 붓을 내려놓고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아버지.

“혹시 어머니의···고향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아버지의 얼굴이 단단하게 굳으며 오랜 시간 침묵에 잠겼다.

“갑자기 네 어머니의 고향은···왜 궁금해진 것이냐?”

겨우 입을 열고 나온 말은 대답이라고 하기엔 한참 거리가 먼 무언가였다.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던 표정을 지은 아버지는 그 질문을 꺼내는 것조차 어려웠는지, 목소리가 크게 떨렸다.

“이번에 조금, 그에 관련된 일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혹시 말씀해주시지 못할 질문이었다면···.”

“아니, 아니다. 그저.”

다시 침묵. 그래도 다행인 건, 이번에는 아까보다 짧았다는 사실이었다.

“언젠가···이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 라고 각오는 하고 있었다만···역시 막상 말해야 할 때는 떨리는구나.”

“어머니에게 뭔가 비밀이라도 있으셨던 겁니까?”

“네 어머니는···중원의 사람이 아니다.”

“네? 그게 무슨···?”

“그녀의 본명은 라우렌.”

아버지는 나의 두 눈을 똑똑히 응시한 채, 지금껏 감춰뒀던 진실을 내게 말했다.

“저 멀리, 서역 땅에서 찾아온 여인이었다.”

서역!

아버지의 말에 다시 한번 그때 놈이 했던 말이 다시 한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설마, 어쩌면, 놈은 정말로···.

“그녀가 중원까지, 그것도 그 중심부에 있다 할 수 있는 섬서까지 넘어온 이유는 나도 알지 못했다. 그녀는 고향에 대해선 단 한 번밖에 꺼내지 않았고, 그것도 한번 말을 꺼낸 뒤에는 몇 날 며칠을 두려워했으니 말이다. 마치.”

그 당시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신 것일까.

아버지는 나조차 몸서리칠 정도로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한 번만 더 이야기를 꺼내면, 거기서 누군가 자신을 잡으러 오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그렇···군요.”

“그런데 갑자기 왜 네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묻는 것이냐? 대체 어디를 다녀온 것이길래?”

내가 다녀오자마자 다른 말 없이 어머니에 대해 먼저 물었기 때문일까.

아버지는 평상시의 당신답지 않게 나를 향해 몰아붙이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저는···.”

바로 지금인가.

지금까지 모두에게 숨기고 있었던 그 이야기를 꺼낼 때가.

“···마교에 다녀왔습니다.”

“마교라고?!”

“아버지.”

마교라는 대답에 경악하다 못해 비명을 내지르는 아버지를 향해 낮고 엄숙한 목소리로 나의 진실을 꺼냈다.

“지금까지 아버지에게도, 어느 누구에게도 말씀드리지 못했던 사실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막상 입을 연 나도 깜짝 놀랄 정도로 길었다.

내가 회귀했다는 사실부터 과거에 겪었던 일. 그리고 어쩌다가 회귀했는가.

그리고 회귀한 뒤 무공을 얻은 경위와 내가 군에 입대한 이후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일을 벌였는가.

그 뒤에 내가 어디를 다녀왔고, 무슨 일을 해왔는가, 아주 자세히, 하나하나 설명했다.

처음 꺼냈던 마교라는 말도 충격스러웠지만 그 뒤로 이어진 말은 그것보다도 더했는지, 아버지는 조금 전 굳은 얼굴이 풀리다 못해 턱이 빠지라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렇게 된 이야기입니다.”

사후 세계를 다녀오고, 거기서 천마와 한 판 붙은 이후, 그 직후 놈이 했던 말까지 하고 나자, 아버지는 정말 뭐랄까···.

[···나도 저런 얼굴은 처음 본다.]

아버지가 처음 짓는 얼굴을 넘어, 인류 전체도 한 번도 지어본 적 없을 기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버지.

기뻐하는지, 슬퍼하는지, 경악하는지, 분노하는지 전혀 모를 얼굴로 오래, 오래 침묵하고 있던 아버지는.

툭, 쿠당탕!

“엇! 크, 크흠.”

자신도 모르게 흔든 손에 부딪힌 벼루가 책상 아래에 떨어지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셨다.

“그, 그래···이것저것···참 많은 일을···겪었구나···.”

“···네.”

나도 이야기하고 나서 다시 한번 깨달았는데, 이거 진짜 온갖 일을 다 벌였구나.

···마교 교리가 뭣같다고 욕할 상황이 아니었어, 응.

자기 후회라고 해야 하나, 자기 객관화라고 해야 하나 그걸 다시 한번 상기하며, 아버지의 다음 말이 나오길 가만히 기다렸다.

눈을 감은 채 내가 꺼낸 이야기를 열심히 소화하던 아버지는, 곧 눈을 뜨며 낮게 대답했다.

“그래···참···많은 일을 겪었어.”

“···네.”

다시 한번 아까 했던 말을 반복하는 아버지.

···그럴 만한 상황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건 그렇고 너만 보이는 유령이라니···참 특이하구나. 지금도 네 옆에 있느냐?”

“네. 아버지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꺼내고 있습니다.”

“그래? 허허, 그러고 보니 네 친구와 만난 적은 처음이구나. 얼굴까지 보인다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럴 수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야.”

[네, 그 말씀대로입니다.]

“그 녀석도 아쉽답니다.”

화순 대신 대답을 건네자, 고개를 끄덕이는 아버지.

“그건 그렇고 그녀에게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전혀 예상치 못했구나. 원래 자기 일은 쉽게 꺼내지 않는 사람이었지만···아, 그러고 보니.”

어머니를 회상하듯 뭔가를 떠올리던 아버지는, 곧 무슨 생각이 나셨는지 입을 열더니.

“예전에···천산(千山)이 보고 싶다···라는 말도 했었지.”

“천산이요?”

“그래. 그 말에 함께 여행이라도 떠나겠느냐는 말을 해봤지만, 너무 멀어서 못 간다고···그렇게 말했지.”

“천산이 멀다고 하셨다고요?”

“그래. 혹시나 해서 요령성은 그리 멀지 않소, 하고 말을 꺼내 봤더니, 거기가 아니라고 하더구나. 아마 그녀가 말한 거긴···.”

“···서역의 천산, 을 말씀하신 거겠죠.”

아버지의 그 말을 듣고 확신했다.

내가 가야 할 곳을 찾았다, 라고.

아버지와의 약속

“서역의 천산이라. 들어본 적 없는 곳이구나.”

“네, 저도 그렇습니다.”

애초에 서역은 중원과 큰 연관이 있을 수가 없는 곳이었다.

북해는 국경지대가 딱 붙어 있어서 잘 알고 있고, 동이는 대부분이 정처 없이 떠도는 유목민들이 대부분이라지만, 그래도 고려처럼 국가의 형태를 띤 곳이라도 있어서 교류는 가능하다.

하지만 남만과 서역은 그들과 다르다.

남만은 남만 대우림 때문에 오랜 세월 오고 가는 것도 불가능했고, 그만큼 교류다운 교류는 제대로 이어질 수 없었다.

그나마 내 진양의 창날처럼 대우림이 아직은 숲 정도에 불과할 때에 오갔던 물건이나, 전에 우리를 안내해 준 현옥의 아버지처럼 중원과는 다른 신천지를 개척해보고자 하던 탐험심 강한 상단이나 겨우 교류하던 수준이었다.

지금에야 내가 독정의 기운을 통해 뚫어준 길 덕분에 어느 정도 교류가 생겨났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아직 북해나 동이처럼 국가에서 관리할 수준의 교류로는 발전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서역은?

서역과 중원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남만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머니도 건너오셨던 거겠죠? 그 사막을.”

“그런 말이 되겠지.”

남만이 대우림이라는 이름의 천혜의 울타리로 중원과 가로막혀 있다면, 서역과 중원을 가로 막고 있는 건 넓고 거대한 사막.

나무도, 물도, 사람도, 국가도 없는 척박한 대지.

중원의 성 하나에 맞먹을 만큼 넓고 거대한 사막이 서역과의 교류를 막는 최대의 장애물이었다.

[옛날에는 그래도 지하수는 풍부해서 그걸 이용한 농경 국가가 여럿 난립해 있었지만···이제는 그것도 다 옛말이야.]

오랜 세월을 살아왔던 화순은 아직 서역과의 교류가 남아 있던 시절도 어느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어쩌다 몰락하게 되었는지도 말이다.

[지하 수원이 다 말라버리자, 농사는커녕 사람이 마실 물까지 부족해졌고, 결국 사막에 건국했던 여러 나라는 자연스럽게 사양길로 들어갔지. 당시 거기 살던 사람들은 서역이나 중원, 둘 중 하나로 흘러 들어갔지만···이미 수천 년 전 이야기라, 자기가 그 핏줄인지 기억하는 사람은 전혀 없을걸?]

서역에 관해 연구하는 역사학도들의 주류 의견도 화순이 얘기해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차이라면 화순이 경험을 토대로 설명해줬다면, 그들은 자료와 연구를 통해 그런 결론을 내렸다, 정도일까.

어찌 되었든, 그런 사연 때문에 중원과 서역 사이엔 제대로 된 교류가 전혀 이뤄질 수 없었다.

“우리 같은 상인들에게도 옛날에는 비단길이라는 이름으로 서역과의 교류가 있었다, 라는 이야기는 있지만, 이제는 부하 상인들에게 해주는 옛이야기에 지나지 않지.”

나를 통해 화순의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혹시 아버지께선 서역에 대해서 알고 계신 것이 있습니까?”

“네 그 보이지 않는 친구만큼은 아니지만···그래도 네 어머니의 고향이기도 하고, 상인으로서의 궁금증 때문에 몇 가지 알아보긴 했지.”

확실히 남만이나 서역처럼 침략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침략당할 걱정도 없는 곳은 국가보단 아버지 같은 상인들이 더 관심을 표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물론 아버지는 오직 그런 이유만으로 찾으신 건 아니겠지만.

“개중에는 믿기 힘든 이야기긴 하지만···저 사막 너머에는 중원에 맞먹을, 아니, 그보다도 더욱 크고 거대한 대륙 위로 명나라만 한 대제국이 여럿 난립해 있다는 이야기도 있지.”

“중원보다 크고 거대한 대륙과···대제국···.”

만약 아버지께서 웃으며 말했다면, 나도 농담으로 받아들였을 만큼 믿기지 않는 이야기다.

하지만 아버지는 누구보다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건 그만큼 그 정보를 얻은 곳이 믿을 만한 출처였다는 소리거나···그 말을 믿을만한 증거가 있었다는 말씀이겠지.

스윽.

거기까지 말씀하신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 뒤쪽 서랍을 잠시 뒤적이더니 내 앞으로 무언가를 가져오셨다.

“자, 보거라.”

“이건···?”

아버지가 가지고 오신 건 다름 아닌 붉은색의 투명한 옥이었다.

비단으로 감싸진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옥은 책상 위의 불빛에 의해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 광채를 감상하듯 잠깐 그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던 아버지는 곧 입을 열었다.

“저 사막 너머의 땅에서 아주 귀한 취급을 받는다는 보석이다. 그들의 말로는 루비. 한어로는 홍보석(紅寶石)이라 부른다고 하더구나.”

“루비···특이한 이름이군요.”

“이것을 받았을 때 내가 왜 놀랐는지 알겠느냐?”

“아뇨,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봤을 적엔 그저 조금 투명한 홍옥(紅玉; 붉은 색깔의 옥)으로만 보일 뿐입니다.”

“그래, 보석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 그렇게 보일 수 있지. 하지만.”

조심스레 밑에 비단을 바친 채 그것을 들어 올린 아버지는 내 눈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어떻게 가공되었는지 알겠느냐?”

“이건···.”

그제야 나는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 수 있었다.

대각 모서리가 아주 짧은 팔각형을 띄고 있던 홍보석은 정말 완벽한 좌우대칭이자 상하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안력을 좀 더 끌어모으면 미세한 부분이 다르다는 건 알 수 있지만, 웬만한 고수가 아닌 이상 이 차이를 실감하는 건 불가능할 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버지도 역시나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하셨다.

“훌륭하지 않으냐? 이토록 정밀한 세공이라니. 우리 장신구의 조각도 물론 아름답고, 화려하지만 이렇게 깎아내는 기술 하나만을 단련하여 완벽하게 만들어내는 건 그것과는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지.”

다시 그것을 비단으로 감싸고 서랍으로 넣은 아버지는 고개만 돌린 채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더욱 놀라운 건 이게 서역 너머의 땅에서는 귀족이나 왕을 위한 진상품 같은 게 아니라, 돈만 있으면 구할 수 있는 장신구에도 사용한다는 거다.”

“그 말씀은 그렇게 보석을 가공할만한 기술력이, 그리고 그것을 개인 간에도 거래할 수 있는 부유한 국가가 있다, 이 말씀이로군요.”

“바로 알아들었구나.”

이 정도의 증거라면, 서역 너머에도 커다란 규모의 국가가, 그것도 명나라에도 지지 않을 기술력을 갖춘 국가가 있다는 걸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사막 건너의 국가는, 사람은 어떤 형태를 띠고 있을까.

그런 것을 고민하던 도중,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면 혹시, 아버지께선···.”

“서역과의 교역로를 뚫어보려 했냐고?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지.”

아버지의 그 한 마디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었다.

하나는 이득을 추구하고자 새로운 거래처를 뚫으려 하는 상인의 욕망이.

하나는 자신이 사랑하던 여인의 마지막 발자취를 찾고 싶어 하는 한 남자의 사랑이.

“하지만 불가능했다. 내가 원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횡단을 떠나기엔 사막은 너무나 길고, 크고, 넓었지. 긴 시간 동안 노력했지만, 손에 넣은 건 방금 그 보석뿐이었다.”

“·········.”

섬서의 유가장이라 하면 중원에서도 손꼽히는 대상단.

보통 그만한 규모의 상단이 어딘가 새로운 거래처를 뚫으려 하면, 당연히 다른 상단에서도 참여하려고 하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투자 정도는 하려는 움직임이 보이는 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말을 들어보면, 그런 일도 없었던 모양이다.

섬서의 유가장이라는 이름으로도 서역의 넓은 사막을 넘는 건 불가능했다, 라는 소리다.

“···그래도 떠날 테냐?”

“네?”

“이토록 험난한 길이다. 지금껏 네가 온갖 힘든 역경을 통과해왔다는 건 조금 전 그 말만 들어도 알겠지만···지금 네가 가려는 길은 지금까지의 길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길일 게다.”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려는지는 잘 알고 있다.

서역과 비슷할 정도로 교류가 되어있지 않은 남만을 뚫긴 했지만, 그래도 그 내부가 어떤 모습을 띠고 있고,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서역의 사막 너머는?

그 존재조차 불확실할 만큼 무지한 상태.

도착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라고 생각했던 남만과는 경우가 완전히 다르다.

심지어 그 너머에서 내가 상대해야 할 적 또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못 할 괴물일지도 모른다.

도착할지도, 도착해서 뭘 해야 할지도, 심지어 그 적과도 어떻게 싸워야 할지도.

무엇 하나 알 수 없는 여정.

미래에서 회귀하며 과거의, 그러니까 현재 일어날 일을 대부분 알고 있던 내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버지께서도 그런 부분을 걱정하고 계신 거겠지.

하지만.

“그래도 해야만 할 일, 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껏 여러 곳을 전전하며 모은 수많은 정보와 이야기들.

그것들은 모두 한 반향을 가리켰다.

“서역에 당도하여.”

그리고 산처럼 쌓인 의문을 해결할 수 있는 장소 또한 그곳뿐이었다.

“모든 것을 확실히 매듭 집고 오고 싶습니다.”

“그렇더냐···.”

내 대답이 아버지의 마음에 들었는지 어떻는지는 알 수 없었다.

미간에 잡힌 세 줄짜리의 주름에서 나에 대한 걱정을 읽어낼 순 있었지만, 딱 거기까지.

그 이상으로 아버지의 생각을 읽는 건 불가능했다.

그저 침묵한 채 아버지의 대답만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는 내게 당신은 곧 닫고 있던 눈을 뜨더니.

“피로하진 않느냐?”

“···네?”

전혀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안부 인사에 내가 놀라 되묻자, 아버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교에 동이, 거기에 다시 마교까지 들리고 왔으니 피곤하겠지. 듣자 하니 고향에 오자마자 내게 다고 하더구나.”

“그, 그렇긴 한데···.”

“피곤을 다 풀지도 못했겠구나. 오늘은 아무 일도 하지 말고 푹 쉬도록 하거나.”

“···아버지?”

“그리고 마음껏 회포를 풀어라.”

내 질문에 대답 없이 아버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가족, 친우, 부하. 누구라도 상관없다. 원하는 만큼 이야기를 나누고, 하고 싶은 걸 해라. 연인이 있다면 좋겠지만,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더냐?”

“아, 음, 저···.”

아버지의 말에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한 사람이 있었지만, 고개를 흔들어 바로 그분의 얼굴을 지워냈다.

그에 대한 반작용일까. 아버지의 정면이라는 것도 잊고, 과한 몸동작으로 몸을 일으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버지! 그보다 저는···!”

“그리고 모든 일을 끝냈다 생각했을 때, 다시 내게 오거라. 그러면 네게 모두 주마.”

그 순간, 정면으로 마주한 아버지의 눈길에서 깨달았다.

“내가 서역에 대해 모아왔던 모든 정보, 사막을 건너기 위해 했던 모든 준비, 그에 관련된 모든 사람. 그것을 모두 정리한 책자를.”

아버지는 내 질문을 회피하신 게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대답을 해주셨다.

“서역행은 위험천만한 길이다. 어쩌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지. 아니,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해야 하는 게 맞겠지. 만약 오 년 전의 너였다면, 나는 전력을 다해 너를 막았을 게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지금의 난 널 믿고 있다.”

“아버지···.”

“떠났을 때 한 줌의 후회도 남지 않도록, 하고 싶은 말을, 일을 모두 끝내거라.”

싱긋.

아버지의 함박웃음.

아주 옛날, 어머니가 살아계실 적에 딱 한 번 보았던 그때 그 미소가, 아버지의 입가에 가득했다.

“그게 네 아버지로서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인 듯하구나.”

“감사···합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과 예상치 못한 미소.

그 두 번의 기습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대답이 조금 늦어버렸다.

하지만 당신에 대한 감사는 숨기지 않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버지!”

위험천만한 길을 나아가겠다는 아들을 응원하는 그 마음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는지, 하지만 그와 동시에 얼마나 대견하였는지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버지의 걱정대로, 그리고 기대대로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뿐.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나면 그때.

“다시 한번, 다녀오겠습니다!”

그녀와의 만남

아버지와의 대화가 이후, 시간은 마치 쏜살같이 흘러 지나갔다.

내 복귀에 가장 기뻐한 건 역시 기정이와 폭풍단 시절 부하들이었다.

내가 떠난 뒤에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 내가 거기 가서 무슨 일을 했는지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꼬박 하루가 지나갈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 뒤 업무에 복귀.

내가 없는 사이에도 기정이와 다른 사람들이 꾸준히 표국 외 여러 사업을 발전시켜 놓은 덕분에 예전보다 훨씬 늘어난 업무량으로 잠깐 헤매기도 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전처럼 익숙하게 업무가 가능해졌다.

“모두 오늘 하루도 노력합시다!”

“네, 국주님!”

매일 아침 해가 비칠 시간에 일어나.

“오늘도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달과 별이 뜰 때까지 일해야 했지만.

“피곤하시진 않으세요, 도련님?”

“피곤하긴 무슨. 완전 쌩쌩하기만 한데.”

피곤하거나 힘들다는 느낌은 조금도 없었다.

그만큼 전의 여정이 힘들고 험난한 것도 있지만, 역시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편했다.

그래, 편안함.

내 옆에서 함께 걷고 있던 기정이의 머리를 쓰다듬자, 처음에는 놀라던 녀석도 곧 미소를 지으며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지금까지 다치지도 않고, 피곤하지도 않고,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은 육신이라 얼마든지 혹사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착각이라는 걸, 이번 휴식 동안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육신에는 피로 한점 쌓이지 않았을지 몰라도, 정신에는 그동안의 여정에 의한 피로가 그대로 쌓여 있으리라는 걸 지금에야 자각했으니까.

어쩌면, 조금 조급해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신승 어르신의 죽음 이후, 정말 쉬지 않고 끊임없이 달려왔다.

남만에서 소림까지. 거기에 화산파에 동이, 그리고 마교까지.

보통 사람이라면, 아니, 중원을 떠돌아다니는 낭인들도 손사래를 칠만한 여정.

이번에 휴식을 취하며, 그 여정 동안 쌓이는지도 몰랐던 정신적 피로가 점점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일만 하면서 피로를 지운 건 아니다.

“그럼, 우리 현정표국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위하여!”

회귀 이후론 일부러 발길을 끊었던 단골 식당에 찾아가 회식을 하거나.

“합!”

“하압!”

“팔을 좀 더 올리고! 어깨는 내리고! 허리는 항상 곧추세우고! 좀 더 힘을 실어서!”

기정이를 포함하여 무공을 익히고 있는 신입 표사들을 가르치거나.

“오늘은 제 차례입니다!”

“넌 사흘 전에 이미 했잖아! 오늘은 내 차례라고!”

“대련이라면 언제든지 해줄 테니까 싸우지 마라, 이것들아.”

부하들과 대련을 하는 둥, 지금까지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하지 못했던 일들을 마음껏 즐겼다.

그리고.

“도, 도련님.”

“응? 왜 불···.”

한창 묘강성 부근 물류에 관한 서류를 살피던 중, 갑자기 나를 부르는 기정이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리자.

“소, 손님께서···오셨습니다···.”

“···그래.”

벌벌 떨고 있는 기정이의 뒤로 한 명의 여인이 싱긋, 미소를 지은 채 날 바로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공주마마.”

“반가워요, 폭풍단장.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는데, 혹시 실례였나요?”

“아뇨, 실례일 리가요. 저도 잠깐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습니다.”

이제야 두어줄 읽었던 서류를 서랍에 넣고,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한 기정이를 향해 말했다.

“밖에 시종한테 차 두 잔만 가져와 달라고 해줘. 너도 잠시 쉬도록 하고.”

“넵! 알겠습니다!”

척! 군인처럼 거수경례까지 하며 후다닥 밖으로 튀어 나가는 기정이.

성하 공주는 그런 기정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입가를 가린 채 쿡쿡 웃으며 입을 열었다.

“참 재밌는 부하로군요. 기정이라고 하였나요?”

“그렇습니다. 제 전속 시종이었던 녀석이죠.”

“시종 출신이면서 이만한 사업체를 관리할 정도의 능력이라니···잘 가르치셨나보네요.”

“다 본가의 총관님 덕분이죠.”

딸칵.

기정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밖에 있던 시종이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실례하겠습니다, 국주님. 차를 가져왔습니다.”

“아, 그래, 고맙네.”

능숙한 솜씨로 찻잔을 나와 성하 공주 앞에 소리 없이 내려놓은 시종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밖으로 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밖에선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 거로 보아, 먼저 나갔던 기정이가 사람을 모두 물린 모양이었다.

잘했다, 기정아. 명령하나 없었는데도 혼자 잘 해냈구나.

시종이 내온 차로 입가를 간단히 적시는 그녀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늘은 어쩐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딱히 대단한 일은 없어요. 그저 폭풍단장이 돌아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얼굴이나 볼까, 싶어서 온 거죠.”

얼굴이라도 볼까, 라니요···북경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얼만데.

나야 천마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나 혼자 뛰어가면 며칠 내에 주파 가능한 거리라 쳐도, 공주님은 이야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물론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우행은 벌이지 않는다.

기껏 얼굴 보고 싶다고 와준 사람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있지만···솔직히 이렇게 와주신 것에 대해서 고맙다고 할까, 기쁜 마음도 있었으니까.

싱긋싱긋 웃는 그녀를 바라보며, 괜히 온도가 올라가는 가슴을 식히기 위해 차를 삼켰다.

꿀꺽. 차 한 잔을 모두 들이켠 다음엔, 바로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네?”

“다음에 오면 제가 먼저 뵙기로 하였는데, 또 공주마마께서만 이렇게 움직이게 하였군요.”

마교로의 여정을 떠나기 전, 이번엔 내가 먼저 그녀에게 가기로 약조했건만, 결국 또 그녀가 먼저 찾아왔다.

잊었다, 라는 건 당연히 아니다.

그녀의 미소도, 얼굴도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었다.

다만, 그런데도 가지 못했던 이유는.

“아, 그거 말인가요.”

내 사죄에 성하 공주는 입꼬리를 올리며 살짝 쓴웃음을 짓더니,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매번 황궁 안에만 있는 건 질리거든요. 하지만 폭풍단장의 이름만 나오면 오라버니도, 대장군도 밖에 나오는 걸 허락해주시니까요.”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내 대답 이후, 성하 공주는 다시 말을 꺼내지 않고, 그저 침묵한 채 계속해서 차만 마실 뿐이었다.

후루룩, 후루룩.

한입에 이미 바닥을 들어냈던 내 찻잔과 달리, 그녀의 찻잔은 여러 번 입가로 가져갔는데도 여전히 차가 가득 남아 있었다.

마시는 게 아니라, 그저 입술만 축이고 있는 건가? 설마 그녀도 긴장하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대체 왜?

“또.”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창에 비친 햇빛이 눈에 띄게 움직이고 나서야 그녀는 겨우 입을 열었다.

“또 떠나실 생각이신가요?”

그렇게 그녀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는 내 정곡을 찔렀다.

“···네?”

마치 가슴을 찔린 듯, 신음처럼 대답을 뱉어낸 나와 달리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놀라시는 걸 보니, 아무래도 맞나보네요.”

“공주마마, 그건···.”

“혹시 절 찾아오지 않았던 이유도 그 때문인가요?”

다시 한번 담담한 말투로 내 가슴을 찌르는 한 마디.

···그녀의 말대로다.

그토록 보고 싶은데도, 만나고 싶은데도 갈 수 없었던 이유.

너무나, 너무나 편안했다.

사랑하는 가족과, 믿고 있는 동료와, 나를 따라주는 부하들과 함께 하는 지금이 너무나도 편하고, 행복했다.

내가 회귀 전 원했던 걸, 회귀 직후 얻으리라 마음먹었던 모든 것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정말로 이제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생각할 정도의 행복.

만약 여기에 내가 사랑하는 여인까지 있다면, 나는 무슨 선택을 할까.

만약 그녀까지 옆에 있다면, 더는 떠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 일말의 긴장감이 내가 그녀에게 향하는 걸 방해했다.

그녀 한 사람만 있다면, 이젠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정도의 기쁨이, 행복이 샘솟아 날 것이라고 직감했기에 갈 수 없었다.

그렇기에 모든 일이 끝나면 진지하게 모든 걸 밝힐 생각이었건만.

“그랬나요?”

“···그렇습니다.”

이미 성하 공주는 내가 숨기고 있던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무슨 말로 사죄를 드려야 하나.

머릿속으로 전생 동안 익혀놨던 여러 사과 방법 중 성하 공주에게 가장 좋은 방법은 뭘까, 하고 고민하고 있던 그때.

“그렇군요.”

···응?

왠지 아까보다 목소리가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고개를 들어 올린 그 순간.

스윽.

입가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

“저와는 정반대였네요?”

싱긋.

그리고 살짝 뒤로 물러나 싱긋, 웃으며 말하는 성하 공주.

···진짜야?

공주님 방금, 정말로···내게 입을 맞춘 건가?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땐 기다려야 한다, 기다려야 한다···그렇게 쭉 생각했는데···나도 모르는 사이에 허락을 맡고, 또 어느새 이렇게 와버렸네요.”

“공주마마.”

“혹시, 싫으셨나요?”

말을 꺼내면서도 살짝 어두워지는 분위기에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대답했다.

“아뇨! 전혀요!”

“정말인가요? 표정이 그래서야, 잘···.”

그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말을 멈춘 게 아니라, 내가 그 말을 멈추게 했다.

다시 한번 부딪힌 우리 두 사람의 입술.

아까보다 더 길게, 아까보다 더 깊이.

긴 시간 맞닿은 입술이 떼어지자, 그 사이에 투명하고 얇은 다리가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가 이런 일을 벌일 걸 예상 못 했던 걸까.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에게 웃으며 대답했다.

“싫었다면, 이랬을 리 없잖습니까.”

“폭풍단장.”

그리고 다시 다가오는 그녀의 얼굴. 그리고 똑같이 그녀에게 다가가는 나.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닿은 입술과 혀.

부드러우면서, 따뜻하다.

짜릿하면서도, 은은하다.

서로를 품에 안으며, 길게, 아주 길게.

살결 중 닿지 않은 부분보다 닿은 부분이 더 많아질 정도로 아주 깊숙하게 그녀를 품 안에 안는다.

아까와 같은 침묵이 길게 이어졌지만, 지금은 다르다.

언제까지 이어지든 상관없는 침묵. 아니, 오히려 가능한 한 길게, 또 길게 이어지길 바라는 침묵.

집무실에 비치고 있던 햇빛이 은은한 달빛으로 바뀔 때까지, 우리는 서로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유현.”

내 품 안에서 들려오는 내 이름.

처음으로, 그녀가 내 이름을 직접 말했다.

“네, 성하.”

“이번 여정은···험난한가요?”

“아마도. 아니.”

그녀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거짓을 말하려 했지만, 곧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내 마음을 들여다보듯 읽고 있는 그녀에게 그런 쓸데없는 배려는 필요 없다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반드시, 그렇겠죠.”

“그렇군요.”

스윽. 성하 공주는 대답과 동시에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래도 돌아올 거죠?”

긴장으로, 그리고 걱정으로 떨리는 목소리.

그 옛날, 불치병에 걸렸던 그때보다 더욱 연약하게 보이는 그녀를 꼭 안으며 대답했다.

“그것도 대답은 똑같습니다.”

그녀의 걱정을 완전히 지워버리듯, 그 어떤 때보다도 곧은 의지를 담아.

“반드시, 그러겠습니다.”

*****

그리고 그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찾아간 아버지의 집무실.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그곳에 계셨지만, 그곳은 언제나의 집무실과는 완전히 달랐다.

항상 산처럼 쌓여 있던 서류도, 항시 쓸 수 있도록 먹이 가득한 벼루도, 아버지의 손때가 묻어 원래의 색도 모를 정도로 닳은 붓도.

아무것도 없이, 아버지는 그저 가만히 앉아 계셨다.

“아버지.”

“준비는 되었느냐.”

내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내 부름에 가타부타 없이 입을 여는 아버지.

“네.”

“그래.”

스윽.

품 안에서 한 첩의 봉투를 나에게 내민 아버지는 계속해서 말씀을 이어나갔다.

“내가 전력을 다해 찾아낸, 중원 제일의 서역 전문가다. 네가 사막을 건너는 데 분명 큰 도움을 줄 거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걸 쓰는진 모르겠지만, 내가 전에 발품을 팔아서 구했던 서역의 돈도 얼마 정도 넣어놨다. 그곳에서 금을 쓰지 않으면, 그걸로 대신 사용하도록 해라.”

“네.”

아버지는 내 예상대로.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확실하게 준비를 해둔 뒤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까지 생각하여 그 모두를 대비한 아버지의 선경지명.

···여전히 이분을 따라잡으려면 한참 멀었구나.

“잘 다녀오거라.”

“네, 감사합니다.”

떠나기 전 마지막 대화로는 너무나 가볍게 들리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은 그 여느 때보다도 크고, 무겁다.

반드시 다시 돌아오라는 부탁과, 반드시 이뤄내겠다는 대답.

서역으로의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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