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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능으로 무림최강-154화 (154/185)

서란과 독고화. 그리고 독고삭(1)

바람의 왕이 목숨을 잃는 순간, 그녀의 세력은 순식간에 와해하였다.

원래부터 충성심 따위는 없이 오직 사후 세계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왕이라는 이유로 모여 있던 것들이니, 딱히 대단할 것도 없지만.

그리고 그들의 빈자리를 차지한 건 서란이 이끌고 있던 저항 조직이었다.

사후 세계의 모든 왕이 사라지자 자신이 다음 왕이 될 거라며 날뛰는 놈들이 나타났지만, 이미 왕에 견주는 무력이 있을뿐더러, 주민들의 호응 역시 높은 서란의 조직을 막아설 수 있는 이들은 없었다.

물론 그 손길이 사후 세계 전역에 닿는 건 아니었던지라 여전히 소란스러운 곳은 남아있었지만, 그곳을 평정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설마 정말로 모든 왕이 몰락하는 날이 올 줄이야···.”

사후 세계를 탐험하는 괴짜들의 대장, 성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바람의 왕이 패퇴하고, 서란이 구출됐다는 소식이 퍼지자 성중은 바로 우리를 찾아왔다.

그 소식이 정말 사실인지 확인하는 한편, 우리의 안전도 확인할 겸, 이라는 이유를 대고 왔지만···뭐, 진짜 목적은 명도의 안부겠지.

이제는 주인이 사라진 바람의 왕의 궁전 최상층에서 의자에 몸을 맡긴 채 한숨을 푹푹 내쉬는 그녀에게 말했다.

“이렇게 될 줄 전혀 예상 못 했냐?”

“그걸 대체 누가 알아? 수만 년이야. 무려 수만 년간 그 네 명이 이곳을 지배하고 있었다고. 어느 날 갑자기 셋이 다른 세상으로 날아가고, 하나가 누군가에게 죽었다는 그런 이야기를 어느, 누가 예상해?”

하긴, 그렇긴 하겠지.

수만 년간 이어져 왔던 상식이 파괴된 일이니, 사자들에게 있어선 지금 이 일은 우리로 치면 해가 서쪽에서 떠오른 것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서란은?”

“지금은 잠깐 휴식 중이야. 내공의 근원은 어떻게든 지켰지만, 기운을 너무 많이 뺏겼으니까. 회복할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리겠지.”

“흠···그럼 그 아가씨와는 만났나?”

“직접 얼굴을 마주하진 못했어. 바람의 왕이 목숨을 잃은 걸 보자마자 바로 기절해서 아직도 못 일어나고 있거든.”

“그 아가씨도 애가 타겠구만. 기껏 찾은 어머니가 그렇게 주무시고만 있다니 말이야.”

“조금 힘들긴 하겠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잘 지내고는 있어.”

바람의 왕을 처리한 후, 기뻐하며 나에게 다가온 독고화는 서란이 기절한 걸 보곤 비명을 질렀지만, 서란이 살아있다는 걸 안 이후에는 정성을 다해 그녀를 보필하고 있었다.

“참 고생 많았네, 너희도.”

“너희 덕분에 그 고생이 좀 덜했지. 정보는 고마웠어.”

“대가에 따라 일을 했을 뿐이야. 그래서···.”

가벼운 분위기로 이야기를 나누던 것도 잠시, 진중한 표정이 된 그녀는 아까보다는 좀 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질문했다.

“명도는···좀 어때?”

그녀를 본 이후, 처음으로 외견에 어울리는 모습에 피식, 웃으며 말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어떠냐니? 무슨 말이야?”

“이익! 무슨 말 하는지 다 알 거 아니야!? 그 녀석 마음은 좀 추슬렀냐고!”

“아, 그거? 뭐,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어.”

사실 그럭저럭 잘 지낸다, 정도로 넘겨짚을 수준은 아니다.

우리 일행 중 가장 큰 변화를 맞이한 게 다름 아닌 그 녀석이었으니까.

괴짜도, 그렇다고 무법자도 되지 못한 명도는 의외로 서란의 휘하 저항 조직에는 잘 어울렸다.

처음에는 그저 일손이 모자란 저들을 도와주자, 같은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실력을 인정받아 부하들까지 생길 정도로 착실히 일하고 있었다.

나와 여행하면서도 숨길 수 없던 음울한 분위기도 이제는 완전히 사라져, 옛날과는 정말 몰라볼 정도로 달라졌다.

내 설명을 들은 성중은 안도한 듯,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이제 그 녀석도 자신이 편할 곳을 찾은 거구나.”

“뭐, 능력은 있지만, 마음이 너무 약했던 녀석이니까. 이렇게 본인 주도로 치안을 지킬 수 있는 일이라면 녀석도 마음 편히 먹고 일할 수 있을 거야.”

“이것도 다 네 덕이라고 봐야 하나? ···고마워. 내 옛 부하이자, 생명의 은인을 구해줘서.”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었어. 그저 계기가 필요했을 뿐이니까.”

내 말에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떠날 거냐?”

“한곳에 오래 머무르는 건 취향이 아니라서 말이야. 보고 싶은 사람들 얼굴도 봤고, 필요한 정보도 다 얻었으니 이제 가야지.”

“그 녀석 얼굴 정도는 보고 가는 게 어때?”

우뚝.

내 말에 그녀가 몸을 일으키던 게 잠깐 느려졌지만, 그건 말 그대로 잠깐일 뿐이었다.

다시 몸을 쭉 일으킨 성중은 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기껏 일 잘하고 있는 놈 앞에 나타났다가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보기도 싫은 옛 상사는 이제 그만 떠나줘야지.”

“그래, 잘 지내라고 안부 전해달라고 말해둘게.”

“쓸데없는 오지랖이야.”

내 말에 투덜거리긴 했지만, 부정하는 말은 꺼내지 않는 그녀.

속으로는 내심 그녀도 명도에게 잘 지내라는 한 마디 정도는 해주고 싶었던 거겠지.

“만나서 반가웠어. 다음에 다시 여기로 올 땐, 좀 더 재밌는 이야기나 해달라고.”

“···하, 그래.”

이미 알고 있었던 건가.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을 날리며 방을 떠나는 성중에게 나도 한쪽 손을 까딱이며 배웅했다.

그렇게 다시 만날 일 없는 사후 세계의 인연이 조용히 떠나갔다.

*****

성중이 떠나고 며칠 후.

쿵!

“유 소협!”

“서란 님은 깨어나셨습니까?”

다급한 발걸음과 목소리로 내 숙소로 들어온 독고화의 모습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챈 나는 그녀가 입을 여는 것보다 빨리 대답했다.

너무나 담담한 내 반응에 그녀도 머리가 차가워졌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은 진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네. 깨어나시자마자 지금 당장 유 소협을 뵙고 싶다고 하셔서···.”

“함께 가시죠. 저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좀 있었으니까요.”

원래 계획대로라면 독고화와 이야기를 마치고 나면 그때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지만, 서란이 먼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말해왔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궁전 상층에 자리하고 있는 내 숙소와 달리, 독고화와 서란의 숙소는 한참 아래에 있었다.

혹시라도 서란을 노리는 적들이 그녀의 위치를 착각하게 만드는 한편, 부하들을 주변에 배치함으로써 기습을 막기 위한 방도였다.

독고화는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와 가깝게 지내는 한편, 옆에서 보좌하고 싶다는 생각이었고.

이제 바람의 왕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일 층에는 익숙해진 면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 독고화 아가씨! 좋은 아침입니다!”

“지난밤은 편안하셨습니까.”

“유현님도 잘 지내셨습니까?”

대부분은 독고화를 향해 인사했지만, 문득문득 나에게 고개를 숙이는 이들도 있었다.

인사를 하나하나 다 받아주는 독고화와 달리, 나는 그냥 적당히 손이나 흔들며 떠나보냈지만 말이다.

그리고 일 층의 방에서도 가장 끝에 있는 방. 본디 바람의 왕이 살아있을 땐 가장 계급이 낮은 녀석들의 숙소였던 그곳이 지금은 바로 서란의 숙소였다.

물론 그 상태 그대로는 쓰지 못하고 이것저것 보수를 하긴 했지만, 크기나 규모는 여전히 그때와 다를 게 없었다.

똑똑.

“어머니, 들어가도 될까요?”

“그래, 들어오렴.”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맑고 고운 목소리.

독고화만 한 딸이 있는 여인의 목소리로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런 내 감상과 달리 화순은 그 목소리에 오히려 미소를 띠었다.

[와아, 목소리는 진짜 옛날이랑 똑같네. 하나도 달라진 게 없어.]

그 정도야?

[너야 서란이 죽고 나서 마교에 들어와서 모르겠지만, 죽기 직전에도 딱 저런 목소리였어.]

하긴, 사후 세계는 죽을 당시의 외모와 목소리를 그대로 가져온다 했으니, 오히려 그게 당연한 일이겠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우리가 전에 묵었던 숙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깔끔하게 바뀐 숙소가 우리를 반겼다.

먼지 한 톨 없는 방 안과 뭘 칠했는진 몰라도 새하얗게 바뀐 방. 그리고 한켠에 위치한 적당한 크기의 침상과.

“어서 오렴. 그리고.”

그 침상 위에 상체만 일으키고 있는 젊은 여성이 한 사람.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해야 하나요?”

독고화와 무척 닮았지만, 독고삭의 외견이 섞여 매서움이 외견 군데군데 느껴지는 그녀와 달리 조금 더 부드러운, 그러면서도 눈에는 외견과는 정반대의 강직함이 깃든 여인.

그녀가 바로.

“통성명은 하지 않았으니, 첫 만남으로 치죠. 반갑습니다. 유현이라고 합니다.”

“네, 저도 반가워요.”

정파와 마교, 절대 섞일 수 없는 두 집단의 사랑을 받은 여인이자.

지금껏 나와 함께 했던 독고화의 어머니이며.

내 힘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권능을 물려준 독고삭의 아내.

“서란이라고 불러주세요.”

싱긋.

그렇게 대답하며 미소를 지은 그녀는 확실히 지금까지 듣던 대로의 모습이었다.

“화아(花兒)에게는 전부 들었습니다. 이 아이의 우격다짐을 들어주셨다고···.”

“아뇨, 아닙니다. 그저 이해관계가 맞았을 뿐인걸요.”

독고화는 이미 그녀에게 우리가 죽은 게 아니라 현세에서 잠깐 넘어왔다는 사실을 다 말해준 듯 했다.

미리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해 못할 상황은 아니다.

자신의 딸이 갑자기 사후 세계로 넘어왔는데, 충격받지 않을 어머니가 어디 있겠는가.

어차피 나중에 밝혀질 거짓말을 할 바엔, 조금이라도 안심할 수 있는 진실을 말해주는 게 옳겠지.

“이해관계니 뭐니 해도, 그만큼 힘든 여정을 함께 해줬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죠. 아이의 어미 된 사람으로서 전하는 감사 인사까지 거절하진 말아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저를, 그리고 제 부하들을 도와주신 일에도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바람의 왕을 처치한 것보다 독고화를 도와준 것에 먼저 감사를 표할 줄이야.

아무리 누구를 이끄는 자리에 있다고 해도, 역시나 어머니는 어머니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잠깐 내 위아래를 훑어보던 그녀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제 착각이 아니었던 것 같군요.”

“네?”

“그 힘은 역시···그이에게서 받은 것입니까?”

“그이라니, 그게 무슨···?”

아니, 설마, 그럴 리가.

전혀 예상외의 말을 줄줄이 꺼내기 시작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말을 줄줄 끌었다.

그런 내 말투에 오히려 확신을 얻은 듯, 그녀는 조금 전 부드러운 목소리와는 상반된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천마의 권능을 이어받은 분이시여, 제 지아비, 독고삭의 최후는 어떠하였습니까?”

꾹.

서란의 입에서 권능과 독고삭의 이름이 오르내렸음에도 내가 창을 뻗지 않았던 건, 정말 초인적인 인내심이 필요했다.

만약 그 이야기를 꺼냈던 사람이 서란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말을 꺼낸 이는 물론, 이 방까지 모두 날려버린 뒤였을 테니까.

“네? 아버지의···최후를···유 소협이···?”

“그때는 제 착각인 줄 알았지만, 기운을 회복하고 나니 알겠네요.”

믿을 수 없다는 듯 더듬거리며 나와 서란을 번갈아 보는 그녀와는 반대로, 서란은 오히려 확신을 담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속이는 것도 무리인가.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이렇게 한눈에 알아보시다니. 대단하시군요.”

“그래도 가장 가까이서 그와 함께했던 사람입니다. 비무 횟수로 쳐도 다른 사람과 견줄 수준이 아니고요. 기운을 착각하는 우행(愚行)은 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서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마음속으로는 화순을 향해 외쳤다.

야! 왜 서란이 알 거라는 말을 미리 안 해줬어?!

[아니, 설마 나도 알 줄은 몰랐지. 애초에 이런 일 자체가 처음인데 내가 어떻게 알겠어?]

···권능의 유출 자체가 처음이라 몰랐다, 이거야?

[그런 말이지. 그리고 서란이 몰랐더라도 너도 이 두 사람에게는 말해야 하지 않겠어?]

목소리에서 뻔뻔함을 지운 화순은 정색한 채 말했다.

[독고삭의 최후와, 그의 죽음에 엮인 일을.]

·········.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건 아니다.

그녀의 말마따나, 이런 위험천만한 여정에 힘을 실어준 것도 독고삭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없다곤 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그에 관해 말하기 제일 좋은 것이 이때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

“제가 두 분에게 지금부터 말씀드릴 것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천하가 들썩일 비밀이 내 입에서 술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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