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란 구출 작전(3)
내 예상대로.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쉽게 우리는 바람의 왕에게 받아들여졌다.
나나 다른 이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인력난이 훨씬 심했던 모양인지 별다른 확인도 없이 바로 우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부하들이 몰래 침입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없는 걸까요?”
“어차피 서란님이 자신들의 손아귀에 있으니 오합지졸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거나···그게 아니라면 그 정도야 받아줄 수 있다는 소리겠죠.”
둘 중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쪽이건 우리에겐 잘된 일이었다.
거기에다가 우리에게 행운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바람의 왕이 병사들을 모두 거점으로 불렀다고?”
“그래, 그렇다니까. 무슨 선포를 한다던가? 긁어모을 수 있는 사람은 모조리 모아 오라고 하더라.”
우리가 이곳에 전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이야기가 나돌기 시작하더니, 곧 정말로 침략군은 물론이거니와, 신병까지 본진으로 데려가는 게 아닌가.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바람의 왕의 명령에 우리야 편했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하, 젠장. 언제는 열심히 침략이나 하라더니, 이제는 또 다 모이라고 아주 난리구만, 난리야.”
“그 여자 성격 지랄 맞은 게 하루 이틀 일인가? 그냥 까라면 까야지.”
“나도 그냥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냥 현세로 넘어갈 걸 그랬어.”
“후회해봐야 이미 늦었어. 이미 저쪽에서도 다 나눠 먹을 만큼 나눠 먹었을 텐데, 이제 가봐야 뭐하겠어?”
일선 병사들이 심심하면 하는 게 상사 욕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바람의 왕의 부하들은 그 수준을 한참 넘어섰다.
그녀에 대한 부하들의 신임이 딱 그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서란 님을 납치하지 않았다면 저놈들도 위태로웠겠는데요.”
“내 생각보다 훨씬 개판이긴 하네. 그래도 덕분에 일은 훨씬 쉬워졌잖아.”
윗대가리가 그러한데 아래에 있는 인간들이라고 그리 다를 수 있을까.
본진으로 향하는 동안 우리는 정말 볼꼴, 못 볼 꼴 잔뜩 보았다.
“불침번? 아~우리를 덮칠 놈들이 어디 있다고. 그리고 설사 있다고 해도 우리 위치는 안쪽이니 죽을 일은 없을 거야.”
근무 태만부터.
“아웅. 나 한숨 자고 올 테니, 너희는 알아서 잘 지키고 있어라.”
근무지 이탈.
“쳇, 평생 그 여자 수발만 들고 살 바엔 차라리 내 세력을 만들겠어. 저런 여자도 왕인데, 나라고 왕이 못 될 이유는 뭐야?”
심지어 탈영까지.
내가 전입해 오기 전 막장 중 막장이었다는 북방 국경부대에서도 상상도 못 할 일이 여기서는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금 사후 세계에서 자신들을 막을 세력이 없다는 오만 때문에 이렇게 행동하는 건지는 몰라도, 삼 년 동안 군에 있었던 내가 봤을 땐 금방이라도 무너질 잡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정말 서란만 어떻게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서란의 부하들에 의해 산산이 무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하지만.
“···지금 병사들의 이런 상황을 바람의 왕이라고 모를까?”
“네?”
바람의 왕의 본진으로 향하던 도중, 하나의 의문이 문뜩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물론 바람의 왕이 부하들을 다루는 용병술이 없다는 건 유명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부하들이 떠나든 말든 내버려 두는 건 도저히 이해가 안 가.”
“이미 설란 님도 제압했겠다, 이제 사후 세계 제패를 막을 사람도 없으니, 결국 다 자기 말을 따르게 되어 있다···이런 자신감 아니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부하 하나 없이 자신이 직접 제패를 하고 다닐 생각이 아니면 이렇게 내버려 두는 건 말이 안 돼.”
“그럼 그녀는 무슨 생각으로 병사들을 이렇게 모은 걸까요?”
여전히 긴가민가한 명도에게 내 머릿속에서 나온 해답을 말했다.
“···그걸 모두 감당하더라도 사람을 모아야 할 이유가 있는 거겠지. 자기 힘을 위해서건, 위엄을 위해서건.”
그리고 어쩌면.
그 일에 서란이 엮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저 불길한 예감일까.
부디 내 생각이 틀렸길 바라며, 고개를 들고 우리의 목적지를 다시 한번 두 눈에 새겼다.
아직 갈 길이 한 참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자신의 위용을 자랑하듯 하늘 높이 치솟은 백색의 궁전.
바람의 왕이 품고 있는 욕망을 그대로 현실에 구현해놓은 듯한 건물을 향해, 우리는 점점 나아갔다.
*****
그렇게 바람의 왕의 명령으로 출발한 여정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일찍 목적지에 당도했다.
이렇게 예정보다 일찍 도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참으로 모순적인 이야기지만, 다름이 아니라 내가 그토록 욕했던 그 덜떨어진 병사들 덕분이었다.
지휘부 측에서 이 이상 병사를 잃었다간 정말로 큰 사단이 일어날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어쨌는지 몰라도, 전에는 휴식을 취하고 다니던 것과 달리 이제는 휴식이고 뭐고 무조건 일단 도착부터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근무 자체가 사라지자 태만도 부리지 못하게 되고, 무조건 앞으로 향하기만 하니 도망칠 기회도 얻지 못한 것이다.
언제든 탈영할 기회만 노리고 있던 놈들에게는 안된 이야기지만, 지금 우리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이야기였다.
아무런 의심도, 방해도 받지 않고 들어오게 된 바람의 왕의 궁전.
그 위용은 정말 어마어마하다는 말로 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물론 죽은 자들은 누군가 죽이지 않거나, 자신이 환생을 원치 않는다면 사후 세계에서 평생을 살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우공(愚公)은 산을 옮겼다지만···이 인간들은 사실상 산을 새로 만든 것과 다름이 없군요.”
처음 궁전을 세우다가 세력의 힘이 크게 약화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정말로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궁전이라고 해봐야 얼마나 크다고, 그걸 짓는다고 힘을 약해졌다는 말이 사실 좀 우습긴 하잖아?
하지만 그들이 이뤄낸 결과물을 바로 앞에서 마주하자,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만한 궁전을 짓기 위해 대체 어디서 건축 물자를 공수해 온 걸까.
아니, 애초부터 산을 깎아서 직접 만든 게 아닐까?
그런 의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만큼 바람의 왕의 궁전은 정말 엄청난 크기를 자랑했다.
그러고 보니 전석에게 듣기론 저기 솟은 궁전만큼 지하에도 똑같은 크기의 궁전이 지어져 있다고 들었는데···.
···왜 그들이 궁전에 갇힌 서란을 찾지 못하겠다 말했는지 이제야 좀 이해가 간다.
저 안에 바람의 왕의 부하들이 계속 돌아다닐 걸 생각하면, 보통 능력으로는 찾기는커녕 잠깐 돌아다니는 것도 위험천만한 일이었으리라.
“모두 따라오느라 고생했다.”
궁전을 보고 놀라는 건 대부분 다를 게 없었던 모양인지, 우리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지휘부들은 신병들이 충분히 구경할 시간을 준 뒤 잠시 후에 입을 열었다.
“보다시피 우리의 주인, 바람의 왕님의 궁전은 그 규모가 그대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압도적으로 크다. 물론 그만큼 관리하는 인원은 많지만, 너희 같은 말단까지 안내할만한 인원은 없다. 그러니.”
거기까지 말한 지휘관이 뒤쪽에 서있던 두 사람에게 눈짓하자, 그들은 두 사람이 들어야 할만큼 커다란 상자를 들고 다가왔다.
쿵!
“이건 모두 지상과 지하 1층에 있는 숙소의 열쇠다. 각자 하나씩만 들고 가도록.”
···이게?
내 몸보다도 더 큰 상자도 작다는 듯 솟아오른 열쇠의 산.
이게 겨우 두 개 층의 열쇠라고?
···진짜 무지막지한 규모구만.
“저, 그···.”
“뭐냐.”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신입 중 하나가 손을 들자,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며 한 마디 툭 던지는 지휘관.
그 눈빛에 몸서리치던 신병은 꿀꺽, 침을 삼키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정말 아무거나 가져가도 됩니까? 저희가 막 들어가선 안 될 곳이 있을지도···.”
“흥. 그것도 생각 못 하고 이걸 줬을 것 같나? 어차피 지상이나 지하 1층은 중요한 시설따윈 하나도 없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2층도 딱히 다를 건 없다. 너희가 신병이라 1층의 열쇠만 준 거지, 2층까진 기본적으로 일반 병사들의 숙소니까. 지금이야 이렇게 마음껏 원하는 대로 쓸 수 있게 해놨지만, 언젠가 우리가 이 땅을 모두 정복하고 나면 각자 숙소가 정해질 것이다. 그때까지 신병 소리 듣기 싫으면 더 공을 세우도록!”
그러니까 2층도 딱히 다를 건 없다, 이 말이지?
엄청나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전혀 도움 안 되는 정보는 아니다.
신병들이 마구 돌아다닐 수 있는 곳에 서란을 가둬놓았을 리는 만무하니, 최소한 제일 크고 넓은 네 개 층에는 서란이 없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혹시라도 지휘관님에게 보고해야 할 일이 있다면 어느 층으로 가면 되겠습니까?”
“음? 누가 질문했지?”
“네, 접니다.”
지휘관의 질문에 손을 번쩍 들어 올리자, 그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리며 대답했다.
“신병 중에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있는 놈이 있어서 다행이군. 만약 너희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일이 있다면, 바로 5층으로 올라오도록 해라. 그 앞에는 층을 관리하는 시종이 있으니, 그에게 내 이름을 말하면 어렵지 않게 찾으러 올 수 있을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지휘관급의 숙소가 오 층이라···여기서도 지상, 지하를 똑같이 취급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렇다 치면 무려 열 개 층을 탐색에서 제외할 수 있었다.
새롭게 얻은 정보는 그뿐만이 아니다.
설사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더라도, 각 층의 입구에 시종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 또한 중요한 정보였으니까.
“그럼 각자 숙소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도록.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주인께서 그대들을 부를 터이니, 그때가 되면 모두 모이도록.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좋아.”
우렁찬 대답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 그는 곧 하늘을 날아올라 오층에 뚫린 구멍으로 쏙 들어갔다.
···지금껏 고층 건물은 몇 번 본적 없어서 어떻게 들어가나 했더니, 저렇게 들어가는구만.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 우리는 그가 가져온 열쇠의 산에 다가가 각자의 숙소 열쇠를 찾아 들었다.
함께 들어온 신병들은 가능한 가까운 숙소를 잡아보려 했지만, 이렇게 산처럼 쌓인 열쇠의 틈바구니에서 그러기가 쉬울까.
그러다가 시간을 끈 신병들은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의 목소리나 시선을 느끼고 곧 뒤로 물러섰다.
그것이 몇 번쯤 반복되었을까. 전부 포기하고 그냥 각자의 열쇠만 들고가던 그때 내 차례가 다가오자.
푹.
열쇠의 산에 손을 집어넣어, 정확하게 딱 세 개의 열쇠를 꺼낸다.
“자, 붙어 있는 세 숙소입니다. 원하는 걸 가져가십시오.”
“네, 고마워요.”
“그럼 전 가운데 있는 숙소로 하겠습니다.”
“너는 끝에 숙소로 해. 내가 가운데 할 테니까.”
“윽, 알겠습니다···.”
기본적으로 무림에선 절정에만 이르러도 인간을 초월했다는 얘기를 듣지만, 화경의 경지에 이르면 그런 절정조차 일반 양민 정도로 생각할 만한 능력이 있었다.
내 앞의 사람들이 열쇠를 몇 번 뒤적이는 걸 본 것만으로도, 이미 진작에 우리가 원하는 장소의 열쇠가 어디 있는지 전부 파악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뭐···그렇다고 이 숙소에 있을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지만.
궁전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우리 일행은 바로 가운데에 있는 내 숙소로 모여들었다.
일단 첫 번째 목적을 달성하였으니, 이제 다음 계획에 관해 이야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층 수가로 올라갈수록 규모는 작아지는 것 같더군요. 즉 가장 넓은 열 개 층은 파악할 필요도 없다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그럼 남은 곳만 알아내면 그만이라는 뜻이군요?”
“그런 이야기지.”
명도가 내 말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사이, 뭔가를 궁리하고 있던 독고화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제 생각일 뿐이지만, 지상은 아닐 것 같아요.”
“지상은 아니다···뭔가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저번에 전석 님에게 들어보니, 가장 위층은 바람의 왕의 숙소라고 했어요. 만약 그녀가 듣던 대로 제 어머니를 심하게 질투하고 있다면, 일부러라도 높은 곳보단 낮은 곳에 어머니를 가둬놓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흠···가능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는 아니군요. 어차피 위나 아래나 한쪽을 먼저 찾아야 하니, 지하를 먼저 수색해보도록 합시다.”
그걸로 작전 회의는 끝. 우리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였다.
휴식은 생각한 적도 없었다. 이미 여기까지 오는데에도 시간을 길게 끌었다.
지금은 서란을 구출하는 게 급선무였다.
콰직.
숙소 바닥을 가볍게 움켜쥐자, 단단한 흰색의 벽이 마치 모래처럼 으스러졌다.
곧 두 번째 층과 이어진 구멍이 뚫리고, 그것을 몇 번 반복하자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층과 이어진 구멍이 뚫린다.
제일 먼저 궁전에 도착한 덕분일까. 그곳까지 뚫는 동안 누구 하나 우리를 막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지하 육층에 들어서는 순간.
“잠깐.”
내 뒤를 따르던 두 사람의 발걸음을 멈추고, 나는 바닥에 손바닥을 대고 가만히 기를 끌어올렸다.
“이정도면···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네?”
“저번에 신정의 기운을 이용해서 독고 소저의 기운을 숨기던 그때, 독고 소저의 기운을 한 번 읽어봤거든요.”
“네···그런데 그걸 왜···?”
“어디까지나 제 예상일 뿐이지만···어쩌면···운이 좋으면···.”
우우웅.
단전의 내공을 끌어올려, 팔을 통해 궁전 전체로 퍼뜨린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내공의 양 때문에, 내공의 양이 많다면 그 제어 때문에, 내공의 제어력이 뛰어나다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양 때문에.
그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일을 통해, 또 다른 말도 안 되는 일을 실현한다.
지금 우리가 있는 여섯 번째 층을 넘어 일곱 번째. 여덟 번째. 아홉 번째. 열 번째.
좀 더, 좀 더 깊게.
물론 지극히 옅고, 또 옅게 기운을 퍼뜨리고 있는지라 어디에, 누가, 몇 사람이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나에겐 상관없다.
내가 알아야 하는 건 딱 하나뿐이고.
“찾았습니다.”
그것을 찾는 건 이 정도로도 가능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