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 세계의 왕(3)
그렇게 새롭게 받아들인 일행, 명도와 함께 우리는 서란을 찾기 위한 여정을 다시금 시작했다.
명도를 받아들인 건 어디까지나 변덕이었다.
성중의 추천도 있었지만, 사실 그의 삶 자체가 과거의 나와 꽤 닮아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흘러가듯 마교로 들어가 평생 남의 명령만 받다가 죽음을 맞이한 나나, 병사로 부림만 받다가 자신도 모르게 목숨을 잃은 그놈이나 전혀 다르지 않았다.
다만 나는 죽음 이후에 새롭게 부여받은 삶에서 성공 가도를 이어나가고 있는 것에 반해, 이놈은 사후 세계에서조차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만약 나도 품 안의 부적이, 어머니의 유품이 없었더라면 이놈과 하등 다를바 없는 삶을 살고 있었겠지.
거기에 성중의 추천까지 더해지자, 그에게 손을 뻗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그런 측은지심에서 나온 행동이었지만, 여정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이 선택이 우리에게도 좋은 일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사후 세계에서 오랫동안 여행을 다녔다는 게 거짓말이 아님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명도는 사후 세계 곳곳을 자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아, 그 마을이라면 이쪽으로 가시면 빠릅니다.”
성중에게 받은 정보를 토대로, 가장 빠르게 서란에게 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는 걸 시작으로.
“이 마을은 이곳으로 가는 게 제일 빠릅니다. 절 따라오시죠.”
크고 길이 복잡한 마을에서도 빠르게 길을 찾을 줄 알며.
“식사요? 아,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여기에 저만 아는 맛집이 있는데, 벌써 이백 년 넘게 우육면만 만들어서 그런지 국물 맛이 정말 끝내줍니다.”
현세에서보다는 덜하지만, 아무래도 산자의 육신이라 그런지 종종 배가 고픈 독고화를 위해 여러 맛집을 알려주는 둥, 그의 해박한 지식은 우리의 여정에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너는 왕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어? 지금 우리가 찾아갈 영역의 지배자라는 바람의 왕이나 그 외의 다른 왕들은?”
그렇게 그의 도움을 받아 여정을 이어가고 있던 어느 날.
독고화의 배를 채우기 위해 들렸던 식당에서 나는 명도에게 질문했다.
그저 식사 동안 시간을 때울 심산으로 날린 질문은 아니었다.
지금도 여전히 서란이 왕과 대립하고 있다면, 혹시 나도 그 왕과 싸움을 벌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 질문에 명도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도 지금까지 왕을 본 적은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열심히 피해 다녔다는 말이 더 맞겠지만요.”
“피해 다녔다고? 왜?”
“왕은 저희 같은 떠돌이들을 싫어하거든요. 사자 하나하나를 곧 본인들의 힘이자 두 번째 목숨으로 생각하다 보니, 저희같이 마을에서 마을로 떠돌아다니는 인간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물론 같은 의미에서 무법자도 싫어하고요.”
“하긴, 그들이 보기에 무법자는 자기 힘을 야금야금 갉아 먹는 쥐새끼로 보일 테니까.”
“괜히 뒷골목이나, 마을 바깥에 주둔하는 게 아니죠.”
그렇다면 지금 왕에 관해 알 수 있는 건 성중이 서란에 대한 정보와 함께 주었던 만인록의 정보뿐인가.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아무래도 둘 다 최신 정보가 아니다 보니, 조금 신경이 쓰인다.
정보 요원의 직업병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래도 정보는 최신 정보가 아니면 영 믿음직스럽지 못하달까.
···일단 그쪽에 도착하면 최대한 빨리 서란과 바람의 왕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볼까.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할 일을 상기하며, 이제는 그럭저럭 익숙해진 사후 세계의 차를 한 모금 삼킨다.
*****
바람의 왕은 누구보다 본인을 뽐내는 걸 좋아한다.
다른 왕들에게 자기 영역의 사자나 지켜야 할 마을. 심지어 부하들까지 빼앗기는 순간에도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걸 우선시하는 탓에 다섯 왕 중에서도 가장 약하다는 평가였지만, 모순적이게도 가장 위험한 왕이라는 이명 또한 함께 붙여 있었다.
차라리 행동에 일관성이라도 있는 다른 네 명의 왕과 달리, 그녀는 오직 자신의 욕망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어제는 증오하던 걸 오늘은 무엇보다 사랑할 수 있고, 어제는 너무나 바라던 걸 오늘은 쳐다보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천변만화라는 말이 무엇보다 어울리는 그 성격 탓에 그녀가 다스리는 땅은 다른 왕이 다스리는 마을에 비해 생활이 팍팍하다는 이야기도 함께 적혀 있었다.
온갖 마을을 다 돌아다니는 괴짜들도 가능한 한 들리지 않고 피해갈 정도라니, 대충 그 악명이 짐작이 가리라.
하지만 애초부터 그녀의 영역의 숫자가 타 왕들에 비해 크게 적어 딱히 문제 될 건 없었으나···.
“흠···.”
“무슨 문제라도 있나?”
우리의 목적지인 바람의 왕의 영역.
그곳에 들어가면 이젠 움직이는 것도 힘들 것이라는 명도의 제안에 마지막 마을에서 최후의 휴식을 취하려던 그때, 갑작스레 마을 입구에서 발을 멈춘 명도를 향해 물었다.
“아니요, 문제···네, 아무래도 문제가 맞는 것 같군요.”
내 말에 순간 고개를 저으려던 명도는 태도를 바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을의 입구 근처에 있는 깃대를 가리켰다.
“이곳이 바람의 왕의 영역임을 뜻하는 깃발이 달려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녀의 손길이 여기까지 닿은 듯하군요.”
“사후 세계의 왕들이 현세로 넘어간 지 겨우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을 텐데, 벌써?”
마을과 마을이라 하니 그리 체감이 가지 않지만, 관도로 이어져 있는 현세의 중원과 달리 사후 세계에선 마을과 마을 사이의 교류가 거의 없었다.
사실상 서로 독자적인 성이나 도시. 조금 극단적으로 보자면 국가와 다를 바 없을 정도.
그런데 아무리 제일 가까운 마을이라지만, 겨우 달포 만에 그만한 거리를 돌파하고 이곳을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 줄이야.
···우리 생각보다 그녀의 행동이 훨씬 빠르다는 의미였다.
“매일 원하는 것이 바뀌는 그녀에게 유일하게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사후 세계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면 이제 쉬엄쉬엄하는 건 끝났다는 말인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들어갈까요?”
질문을 던진 명도는 물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침묵하고 있던 독고화도 나를 바라보았다.
내 의견에 두 사람 다 전적으로 따르겠다는 확실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내가 먼저 가서 상황을 파악해볼까?]
···아니.
화순이 말을 꺼내기도 전부터 그를 먼저 정찰 보낼까, 하는 생각도 하긴 했지만, 역시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듯했다.
여러 해를 함께 하는 동안, 분명 믿음직한 동료가 된 화순이지만 지금과 같이 정보를 수집하는 일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분명 엄청난 장점이었지만, 어떨 때는 단점이 될 수도 있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탐문을 통해 정보를 얻어야 할 경우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일단 최대한 자연스럽게 마을로 진입하자.”
“괜찮겠습니까?”
“어차피 그녀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는 건 정해진 일이었어. 그게 조금 더 빨리 이뤄진 것에 불과해.”
“하지만···.”
“더군다나 지금처럼 타 세력의 침략을 받았을 때야말로 우리 같은 외부인이 침입하기 가장 좋을 때 아니겠어? 갑자기 나타난 우릴 보고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거 아냐.”
초보 정보 요원이 으레 착각하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미 적의 영역이 된 곳에 쳐들어갔다가 자신이 위험해질 수도 있지 않겠냐는 그런 의문.
하지만 그런 그들의 생각과 달리, 적이 침략을 끝낸 곳이야 말로 정보를 수집하기 가장 최적의 장소였다.
누구에게도 의심받지 않고, 적에 대한 정보와 그 장소에 대한 정보 두 가지를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는 기회였으니 말이다.
“그렇긴 하지만···.”
“그리고 어차피 여기서 정보를 얻지 못하면, 적들의 본진에서 정보를 얻을 수밖에 없어. 안전하기로 따지면 여기가 훨씬 안전할 거다.”
내 말에 긴가민가한 표정을 짓던 두 사람이지만, 거듭된 설득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진입한 도시는, 역시나 여느 침략받은 도시처럼 병사로 보이는 자와 원주민으로 보이는 사람이 적절히 섞여 있었다.
자신의 터전을 침략한 병사를 짜증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보는 원주민들과 그런 그들의 날카로운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일만 하는 병사들.
정말 원하는 정보를 얻기에 이보다 최적인 공간이 또 있을까.
병사들에게 불만이 가득한 원주민들에게 적당히 말 몇 마디 맞추다 보면 자기들이 아는 정보를 산처럼 쏟아내고, 병사들은 또 병사들대로 이런 곳에 자신을 몰아넣는 상사들을 욕하며 정보를 토해낸다.
괜히 이런 침략 후의 도시가 우리 정보 요원들에게 노다지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이제 조금만 건드리면 곧 정보를···.
“이봐, 저 사람···.”
“아니, 설마, 그럴 리가···.”
···응?
어느 쪽부터 건드려 볼까 입맛을 다시고 있던 내 귀로 누군가 숙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보아하니, 원주민은 물론이고, 병사까지 힐긋힐긋, 우리를 향해 눈을 흘기며 곧 자신의 옆에 있는 동료에게 뭐라고 말을 하는 것 아닌가.
···뭐지? 뭔가 느낌이 이상한데?
마치 한 겨울날 강제로 석빙고에 들어간 것처럼 전신이 싸늘해진다.
이렇게 우리에게 시선이 집중될 이유가 대체 뭐가 있다고 우리를 이렇게 바라보지?
아직 원주민의 얼굴에 익숙하지 않을 병사들도, 갑자기 바깥에서 몰려 들어온 인간들을 다 파악하지 못했을 원주민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우리를 응시했다.
내가 생각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병사로 보이는 사내 세 명이 우리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잠시 실례하지.”
“무, 무슨 일이오?”
다른 두 사람이 먼저 입을 열기 전에 내가 먼저 대답했다.
원주민 특유의 외부인을 향한 배척과 불만, 그러면서도 힘에 굴복한 그런 느낌을 적절히 섞은 그런 말투로.
어떠냐? 이 정도라면 절대로 우리를 의심하지 못할걸?
하지만 내 그런 바람과는 달리, 병사들은 여전히 딱딱히 굳은 얼굴로 우리를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쪽의 여자.”
내 뒤편에 있던 독고화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주받은 그 자와는 무슨 관계지?”
“저주받은 그 자라니···그, 그게 대체 누구길래 우리에게 이런단 말이오! 우리는 그저 선량한···!”
“네가 선량하건 말건 상관없다. 너희와 그자의 연관성을 확실히 파악하기 전까진 너희의 신병은 우리가 맡도록 하지.”
한 치의 반론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듯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대답하는 병사들.
아니, 애초에 그 인간이 누구길래 우리에게 이렇게 지랄 맞게 구냐고!
···좀 조용히 정보만 얻고, 우리의 존재는 최대한 숨기려 했지만 이렇게 되면 그런 다짐도 무의미하다.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이놈들을 여기서 모조리 제압하고, 왜 우리를 잡으려고 했는지 철저히 파헤친다!
내 눈빛을 받은 두 사람도 전투태세에 들어간 그 순간.
“눈과 귀를 막으십시오!”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급박한 목소리.
이미 긴장감을 잔뜩 끌어올린 상황이라 그런가, 우리 세 사람의 행동은 빨랐다.
하지만 그에 반해 우리를 끌고 갈 생각만 가득했던 병사들은.
번쩍!
펑!
“끄아악!”
“으아아악!”
어디선가 터져 나온 굉음과 광채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말았다.
“이쪽입니다! 어서요!”
병사들이 고통스러워하는 사이, 우리에게 알 수 없는 도움을 준 사내가 급박한 목소리로 외쳤다.
“곧 다른 병사들이 몰려올 겁니다! 그 전에 빨리 몸을 숨겨야 합니다!”
이 인간의 정체부터 우리를 도와준 이유. 그리고 그것 외에도 묻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있었지만···지금은 이 남자의 말대로 몸을 숨기는 게 우선이다.
그의 뒤를 따르자, 주변에 있던 다른 원주민들이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우리가 지나간 길을 빠르게 숨겼다.
순식간에 만들어진 사람의 벽 덕분에 추격자 없이 완벽하게 도망친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성중과 괴짜들이 모여 있던 뒷골목만큼 어두운 곳으로 도착했다.
“여기라면 이제 안전할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서도 특히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건물 안으로 들어간 우리는 그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당신. 아니, 당신들은 대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휴식이나 취하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아까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의 말을 듣고 따라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 남자를 완전히 믿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방금 그 일사불란한 움직임.
···절대 우연히 만들어진 건 아니었다.
“우리에 대한 설명은 조금 있다 하겠소. 그것보다 당신들에게 묻고 싶은 게 있소.”
“···뭡니까.”
“혹시···서란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소이까?”
서란!
그 사내의 입에서 튀어나온 전혀 의외의 인물의 이름에 우리는 놀랐지만, 그것도 잠시, 독고화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분은···제 어머니이십니다.”
“아아···역시···역시!”
독고화의 대답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사내.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 기운, 그 기세! 그분의 아이가 아니라면 절대로 낼 수 없는 그 고고한 위엄을 어찌 몰라보겠습니까!”
“다, 당신은 제 어머니를 알고 계신 건가요?”
“그분을 모르는 분은 저희 중 아무도 없습니다! 최후의 희망! 사후 세계의 구원자! 유일한 왕의 대적자!”
···아주 온갖 미사여구를 다 붙이시는구만.
내가 질린 눈으로 바라보건 말건, 서란을 한참이고 찬양하던 사내는 독고화의 한 마디에 겨우 그것을 멈췄다.
“자, 잠깐만요!”
“네, 부르셨습니까?”
“저, 그···그럼 저희 어머니가 계신 곳도···혹시 알고 계신가요?”
떨리는 목소리로 서란의 위치를 묻는 독고화.
···그리고 그 말을 듣자마자 급격히 어두워지는 사내의 표정.
[아, 이미 대답이 나오기도 전부터 알겠는데.]
너도 그러냐? 나도 그런데.
저런 표정이 나오면 절대 일이 쉽게 풀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지.
그리고 사내의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은.
“서란님은 지금···바람의 왕에게 잡혀 있습니다.”
나나 화순의 예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