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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능으로 무림최강-146화 (146/185)

사후 세계의 왕(1)

“하, 젠장.”

독고화의 대답이 나오자마자 성중은 이마를 치며 탄식과 욕설을 함께 내뱉었다.

“···진짜야?”

“네, 그렇습니다. 이분이 저희 어머니이십니다.”

“하, 젠장.”

혹시나 하는 희망을 담아 다시 한번 물어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역시나 똑같다.

처음 내뱉었던 욕설과 똑같은 욕설을 내뱉으며, 그녀는 독고화가 그토록 찾던 그녀. 서란의 인적사항이 적인 쪽을 천천히 손으로 훑었다.

“일단 보시다시피, 그 작자···아니, 그 사람은 이곳 사후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야. 사후 세계를 지배하는 다섯 명의 왕과 대적하고도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존재 중 하나지.”

그녀의 설명에 그녀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다른 이들까지 목소리를 높였다.

“설마 저 소저가 그녀의 딸일 줄이야.”

“아까 그 일 때문에 우리가 위험해지는 건 아닐까?”

“아니, 그녀는 우리의 사정을 알고 있으니, 설명만 잘하면 적대적인 기색을 취할 일은 없을 거야.”

몇몇 이들이 서란을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긴 했지만, 그녀를 잘 아는 듯한 이들은 오히려 그런 일이 부정했다.

마교인 답지 않게 공명정대하던 그녀의 성격은 사후 세계에서도 다를 게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대체 그녀가 대적하고 있다고 하는 사후 세계의 왕이 누구지?”

성중의 발언 중 다시 튀어나온 그 이름.

사후 세계로 넘어온 순간부터 여러 번 듣긴 했지만, 그들에 관한 자세한 제반 사항 따위는 전혀 알지 못했다.

내 질문에 성중은 그것도 모르냐는 듯 살짝 인상을 썼다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둘 다 여기로 넘어온 지 얼마 안 됐었지? 하긴, 그런 정보는 좀 오래 있던 놈들 아니면 얻기 쉬운 정보가 아니니까.”

그럴만하다고 중얼거린 그녀는 자신이 들고 있던 만인록을 앞부분으로 돌려 그들의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만인록에 왕의 이름도 적혀 있나?”

“당연하지. 우리 당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알아야 할 정보가 왕에 관련된 정보니까. 왕의 성격은 곧 왕들이 지배하는 땅의 성질. 그곳을 여행한다면 무조건 알아 둬야지.”

성중은 만인록을 살피는 한편, 내 질문에도 착실하게 대답해주었다.

독고화가 서란의 딸이라 좀 더 대우를 해주는 것인지, 아니면 물어본 건 대답 못 하곤 못 배기는 성격이라 그런 건진 몰라도, 덕분에 원하는 정보를 얻는 게 쉬워졌다.

“내가 그냥 이야기해줘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책으로 보여주면서 하나하나 설명하는 편이 좀 더 뇌리에 박히니까. 자, 여기.”

팔락.

만인록의 앞부분을 펼친 그녀는 그들에 관해 아는 부분이 거의 없는 우리를 위해 사후 세계의 왕에 관해 우리에게 설명해주었다.

“다섯 왕은 아주 오래전부터 사후 세계를 지배하던 괴물들이야. 이제는 신화로밖에 내려오지 않는 시대를 살았던 놈들은 죽기 전에도 소국의 왕이나 대형 부족의 족장이었던 놈들은 현대의 무인은 상상도 못 할 기상천외한 무공을 익히고 있었고, 그것은 사후 세계에서도 똑같이 사용할 수 있었지.”

“그리고 그 무공을 기반으로 이곳에서도 왕이 될 수 있었던 거고?”

“그렇지. 사실 이곳이 놈들에게는 현세에서보다 더욱 강해지기 편한 환경이긴 했어. 그들의 내공은 너무나 특별해서 평범한 수련법으로는 제대로 익힐 수도 없어서 온갖 기상천외한 짓거리를 다 해야 했으니까.

펄펄 끓는 용암에 들어가거나, 폭풍우 치는 밤에 산 정상에서 벼락을 맞거나, 괴이와 괴물들을 죽이고 그들의 내장을 파먹는 일까지. 모두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지.”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며 그들이 해야 했던 수련에 관해 설명하는 성중의 목소리는 마치 그 시대를 살아왔던 것처럼 생생했다.

···그냥 누군가에게서 들은 이야기겠지? 설마 정말로 그 시절부터 살아온 건 아니겠지?

내 의문과 관계없이 그녀의 설명은 주욱 이어졌다.

“하지만 여기선? 한 놈 죽이면 나도 한목숨 더 늘어나니, 죽을 걱정을 해야 하는 수련도 죽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지. 놈들에게는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딨겠어? 문제가 있다면···그게 다른 놈들한테까지 행복한 이야기는 아니었다는 거겠지만.”

“사후 세계가 진짜 지옥이 된 거군.”

“그렇게 힘을 가지게 된 이후, 놈들은 사후 세계를 각각 나눠 가지기 시작했어. 물론 땅이야 이미 죽은 인간들에게는 아무런 상관없는 이야기였지만···그 안에 있는 건 다르지.”

“사람인가?”

내 말에 성중이 놀란 듯 동그랗게 눈을 뜨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보통 삶을 산 건 아닌가 봐? 그거 바로 알아차리기 쉽지 않은데 말이야.”

“현세에서야 땅이라고 하면 식량이나 거주지를 중요히 여기지만, 여기선 애초부터 그게 필수가 아니니까 다른 걸 원해서 땅을 나눈 거겠지. 그리고 그런 놈들이 욕심을 가질만한 건 자기 목숨을 늘릴 수 있는 사자. 즉 인간일 테고 말이야.”

“바로 맞췄어. 그 직후 왕의 허락이 없으면 각자가 살던 땅에서 벗어나는 것조차 금지되었지. 뭐, 그래도 지금에 와선 유명무실해졌지만.”

“유명무실해졌다? 그게 무슨 말이지?”

“아무래도 현세에는 그렇게 소문이 널리 퍼지지 않았던 모양이지? 이번에 사후 세계의 강자 중 여럿이 현세로 넘어가는 일이 생겼거든. 아마 그것 때문에 지금 현세도 꽤나 시끄러울 거야.”

···그거라면 이미 정리 다 끝났는데.

하지만 그녀의 예상이 아주 틀리다곤 할 수 없었다.

만약 내가 없었다면 다른 사자들은 몰라도 번개의 왕은 정말 현세를 뒤집어 놨을지도 모르니까.

“현세에서 여기로 온 지 얼마 되지도 않는 너희 앞에서는 이런 말 하기 조금 그렇지만, 그래도 덕분에 사후 세계는 조금 더 살만해졌어. 이젠 정말 심심하다고 죽을 일은 없어졌으니까.”

“아니, 상관없어. 우리도 이젠 이쪽 주민이니까.”

“그래, 그런 긍정적인 생각, 아주 좋아!”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내 등을 두드리며 껄껄 웃는 성중.

한창 기쁜 듯 웃고 있던 그녀는, 곧 정신을 차리고선 헛기침을 몇 번 내뱉더니 다시 설명에 집중했다.

“뭐, 어찌 됐든, 그 덕분에 우리가 지금껏 모아온 정보들은 기쁘게 파기할 수 있게 되었지. 실제로 이 만인록의 1권에 적힌 사자 대부분은 이제 현세로 넘어갔으니까. 딱 두 사람. 네 어머니, 서란과.”

그녀의 손가락이 방금까지 펼치고 있던 만인록의 한 부분, 눈꼬리가 아래로 내려간 부드러운 인상의 미녀가 그려진 초상화로 향했다.

“사후 세계의 다섯 왕 중 유일하게 사후 세계에 남아있던 한 사람. 바람의 왕밖에 남지 않았지.”

“나머지는 모조리 현세로 넘어간 거야?”

“그렇지. 아무래도 현세는 그들에게 탐스러운 먹잇감일 수밖에 없으니까. 아무리 현세와 사후 세계가 비슷하다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형태일 뿐. 거기 담긴 생명력은 전혀 다르지. 사자라면 정말 누구라도 나갈 수밖에 없을 거야.”

“그럼 바람의 왕은 왜 나가지 않은 거야?”

“그 여자는 자신의 분수를 알고 있었거든.”

바람의 왕에 대해 말을 꺼내는 성중의 표정은 그리 곱지 않았다.

혹시 그녀와 원한 관계가 있었던 것일까? 정확한 사증은 알지 못했지만, 증오를 숨길 기색 하나 없이 그녀를 호칭하는 성중의 태도를 보아하니, 절대 좋은 사이는 아닌 듯했다.

“자기가 현세로 넘어가 봐야 여기서처럼 다른 네 왕에게 치여서 제대로 강해질 수 없다고 생각한 거겠지. 실제로 홀로 독보하는 번개의 왕은 그렇다 쳐도, 남은 세 명의 왕과 비교해도 그녀는 본인의 강함은 물론, 부하들의 숫자도, 강함도 그들보다 한참 못했으니까. ···뭐, 그 잘난 부하들도 이제는 좀 쌔다 싶은 놈은 모조리 다 현세로 튀어 나갔지만.”

“허, 부하들이 자신의 왕을 버린 거야?”

물론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상사를 포기하는 것쯤이야 현세에서도 자주 있던 일이지만, 그래도 한 국가를 다스리는 왕의 부하들이 모조리 도망치는 일은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성중은 내 경악과 관계없이,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부하라곤 하지만 사실 힘으로 찍어누르며 내 명령을 따르라고 윽박지른 거나 마찬가지야. 더 강한 힘을 얻을 기회만 있다면 언제든 그 인연의 끈 잘라버리고 떠날 수 있는 사이라는 거지.”

“그리고 그 바람의 왕인가 뭔가 하는 여자는 부하까지 모조리 포기하고서라도 여기 있으려고 한 거고?”

“현세보다 모을 힘이 모자라 다지만, 그건 다섯 명이 나눠서 얻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 혼자만 모으면 현세에 나가지 않고도 강해질 수 있다···아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뭐···그녀는 알지 못했지만, 그쪽이 오히려 옳은 선택이긴 했다.

지금 현세로 나간 사자들은 나와 선인들이 모조리 구축해서 하나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번개의 왕 그 인간도 역시 왕 중 하나였구나.

자기를 그렇게 자칭하길래 설마설마하긴 했지만, 설마 진짜로 다스리는 땅까지 있는 왕일 줄이야.

하지만 부하도 없이 홀로 다니다니···아니, 그래서 그렇게 계속 공격을 맞고도 살아난 건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부하들에게 다른 사자를 건네줘야 했었던 다른 왕과 달리 그는 모든 사자의 목숨을 온전히 자신만 취했을 테니 말이다.

그걸 가만하면, 아무리 죽여도 죽여도 또 부활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내게 나쁜 일도 아니었다.

그는 현세에서 전력을 다하고도 나에게 패배했다.

그 말인즉 지금 사후 세계에선 나와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다만.

“그렇다면 지금 바람의 왕은 다른 왕들의 영역을 침략하겠네?”

이곳에 남은 바람의 왕이 지금보다 훨씬 강해지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지만.

내 걱정 어린 목소리에 그녀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면서도, 살짝 어두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아마 그럴 가능성이 크지. 웬만한 강자들은 전부 현세로 넘어갔다는 건, 달리 말하자면, 덜떨어진 녀석들은 여기 그대로 남아있다는 소리니까.”

“놈들이 순순히 그 땅을 다 넘길 가능성은···역시 없겠지?”

“당연하지. 어느 누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포기하려 들겠어? 그리고 혹시나 자신들의 왕이 다시 돌아올 일말의 가능성을 생각해서라도 놈들은 절대 자신의 땅을 포기하지 않을 거야.”

···현세가 좀 괜찮아지자마자 이제는 또 사후 세계가 이런 꼬락서니라니.

아니, 현세가 안정되니까 오히려 이런 꼴이 되어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현세가 안정된다는 건 곧 사후 세계로 넘어오는 사자의 숫자가 줄어든다는 소리니, 한정된 사자들을 얻기 위해서 놈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영토를 하나도 뺏기지 않으려 할 것이 분명했다.

“독고 소저의 어머니는? 아까 왕과 대적하고 있다 하지 않았나? 그녀는 어떻게 움직이고 있지?”

“···솔직히 그녀에 관한 정보는 우리도 자주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아무래도 대적하는 놈들이 그런 괴물들이다 보니, 최대한 비밀스럽게 움직이는 사람이라서 말이야. 마지막 목격 위치 정도야 알지만, 현재 위치 같은 최신 정보는 몰라.”

절대로 무리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성중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아무리 제일 약하다곤 하지만, 바람의 왕은 여전히 한 영역을 지배하고 있다.

서란 본인의 강함은 나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 홀로 열 개의 손을 막아낼 수는 없는 법.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은, 역시나 치고 빠지는 식으로 최대한 그들의 힘을 야금야금 깎아 먹는 방법이었다.

···그렇다면 제일 좋은 이야기지만.

[이봐.]

옆에 독고화가 듣지 못하도록 성중에게 전음을 날리자, 잠깐 놀란 듯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곧 표정을 원래대로 돌리고선 내게 대답했다.

[왜? 갑자기 왜 전음을 다 날리냐?]

똑같이 전음으로 대답을 날리는 그녀.

혹시 전음을 날리지 못하는 건 아닌기 싶었지만, 다행히 전음은 옛날에도 자주 사용했던 것인지 그녀는 입도 벌리지 않은 채 내게 편안히 대답을 날렸다.

[독고 소저의 어머니께서 이미 당한 뒤라 정보를 얻지 못했다···그런 가능성은 없나?]

내가 제일 걱정하는 건 이 부분이었다.

저런 전법이 홀로 강대한 세력과 맞상대 해야 할 땐 좋지만, 문제는 그렇게 되면 그녀의 생사를 다른 이들이 전혀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 가능성도 전혀 예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일단 그럴 확률은 낮을 거야.]

[이유는?]

[일단 홀로 활동한다곤 하지만, 그렇다고 아군이 전혀 없는 건 아니야. 왕의 폭정을 싫어하는 이는 어디든 있는 법이니까. 물론 그녀의 싸움을 직접 도울 수 있을 정도의 강자는 거의 없지만, 그래도 다른 부분에선 도와줄 수 있지.]

[몸을 숨기거나···정보를 얻거나···그런 식으로?]

[그렇지. 그들의 정확한 규모는 확인된 바 없지만, 다섯 명의 왕이 있던 시절부터 그녀가 들키지 않도록 도와줬어. 왕 한 명이 있는 지금이야 더욱 쉽겠지.]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성중의 설명에도 왠지 모를 불안감은 여전했다.

정보 요원의 본능인가, 아니면 영기가 가득한 곳에 있는 탓에 육감이 발달한 것인가.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런 싱숭생숭한 마음을 숨기듯 성중에게 마지막 전음을 날렸다.

[···부디 안전하길 바라야지.]

*****

사후 세계에 있는 건물은 현세에 비해 단순하고 조촐한 경우가 많았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보수를 해야 하는 현세의 건물과 달리, 사후 세계의 건물은 아무리 긴 시간이 흘러도 상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왕이라고 하여 다를 바는 없었기에, 그들의 집도 다른 사자들처럼 평범한 장원에서 생활했다.

딱 한 사람을 제외하고 말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른 하얀색 궁전은 이곳 사후 세계에서도 무척 유명한 곳이었다.

사후 세계를 지배하는 다섯 왕 중 하나. 바람의 왕의 거점이자, 오직 그녀의 욕심 하나로 만들어진 사후 세계 최고층의 건물로서 말이다.

이 궁전을 짓느라 비슷비슷하던 힘의 균형추가 그녀에게 많이 불리하게 되긴 했지만, 그녀는 그것을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는 것 하나뿐이었으니 말이다.

또각, 또각, 또각.

그리고 지금 그녀의 이 발걸음도 마찬가지였다.

궁전은 저 검은 하늘을 찌를 만큼 높이 치솟아 오른 높이 만큼이나, 지하 또한 마찬가지로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게 파여 있었다.

보통 이 이야기를 들으면 많은 이들이 의문을 표하곤 했다.

저 치솟아 오른 천장은 남들에게 과시하기 위함인 걸 알겠지만, 이 깊은 지하는 대체 왜 만들어 놓은 것인가, 하고.

그런 그들의 질문에 그녀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미소만 보일 뿐, 제대로 된 대답을 날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젠 그것도 끝이다.

그녀가 그토록 바라고 또 바라던 것이 드디어 손에 들어왔으니까.

지하 제일 깊은 곳.

아무도 들인 적도, 보여준 적도 없는 그 공간에 누군가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아주 느릿느릿한 발걸음으로 그것에게 다가가, 그것의 턱을 잡고 천천히 들어 올렸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부드러운 인상에 걸맞은 부드러운 목소리.

허나 거기에 담긴 감정은 그런 부드러움과는 천만 리 정도 떨어진, 끔찍하고 음습한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제 곧 의식은 진행된다. 그때가 되면 나는 진정 사후 세계를 다스리는 왕이 될 수 있을지니.”

그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여인.

그것도 무척 아름답고, 강직한 인상의 여인이었다.

“그러니 그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거라.”

“네 속셈은···.”

이곳에서 얼마나 긴 세월을 갇혀 있던 것일까.

그녀의 목소리는 가뭄에 빠져 있는 논처럼 쩍쩍 갈라졌지만, 그 목소리에 담긴 굳건한 의지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

바람의 왕은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가만을 위로 올린 미소만 보일 뿐.

툭.

잡고 있던 턱을 내려놓고, 바람의 왕은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 그 소리도 사라지고, 오직 영원한 침묵만 남은 그곳에서 그녀의 목소리만이 아련히 울려 퍼진다.

“천마이시여···.”

조금 전 그 강직한 목소리의 주인공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여리여리하지만, 그 진심만큼은 여실히 느낄 수 있는 그런 목소리로.

“부디 우리를, 이 땅을 구원하소서.”

바람의 왕에게 잡혀 지하에 갇힌 그녀. 서란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다시 침묵에 잠긴 궁전의 지하.

그 침묵이 깨지는 날이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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