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 세계로(4)
결국 우리는 명도를 마을 바깥에 내버려 둔 채 마을의 뒷골목으로 향했다.
그를 놔두고 가는 게 마음이 편치는 않았지만, 지금 그에게 설득에 설득을 거듭해도 움직일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찾아온 뒷골목은 아까의 소란이 거짓말인 것처럼 깊게 깔린 어둠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까 놈들이 공격에 사용한 무기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안력을 높여 바닥을 살펴봤지만, 무기는커녕 뭔가 떨어져 있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정말 모조리 다 회수해 간 건가?
가능한 외부인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기 위해 살인 외에는 무슨 짓이라도 벌인다, 라고 명도에게 듣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숨기는 건 자신의 무기뿐만이 아닌지, 아무리 기감을 높여도 주변에서 인기척조차 느낄 수 없었다.
사자인 탓에 맥박이나 호흡. 그리고 냄새를 찾을 수 없는 탓도 있었지만···그래도 이건 숨어도 너무 잘 숨는데?
내 옆에 있던 독고화도 사정은 마찬가지인지, 주변을 둘러보며 나처럼 뭔가를 찾아보려 애쓰고는 있었지만, 당연히 수확은 없었다.
“···가능하면 그 사람이 준 건 쓰지 않고 도움을 구해보려 했는데 안 되겠네요. 이거 도움은커녕 찾는 것도 평생이 걸리겠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명도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아까와 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주저하고 있을 겨를은 없다.
품 안을 뒤적여 아까 명도에게 받았던 종이를 높이 들고선 입을 열었다.
“성중은 그에게 받은 은혜를 다시 떠올려라! 성중은 그에게 받은 은혜를 다시 떠올려라! 성중은 그에게 받은 은혜를 다시 떠올려라!”
명도가 이것을 건네주며 말했던 대로 세 번 반복해 외치자, 순식간에 아까처럼 무수히 많은 검은색 그림자가 골목을 이룬 건물 위에 나타났다.
하지만 아까와 같은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호감을 보이느냐고 묻는다면, 절대로 아니지만.
풀썩.
그리고 그런 그림자 중 하나가 아래로 내려와 내게 다가왔다.
머리를 포함한 전신을 검은 천으로 감싸고 있어서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체격이나 발걸음으로 그의 정체를 대충 알 수 있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성중이 그대에게 약조했던 은혜를 갚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녀, 라고 해야겠지.
독고화와 비교하자 확연히 차이가 느껴진다. 물론 독고화는 다른 여인들과 비교했을 때 제법 장신인 편이긴 하지만,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성중의 몸집은 매우 작았다.
소저라기보단 아이라 부르는 게 더 어울릴 정도로 자그마한 체구의 그녀는 불퉁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내게 화답했다.
“약조의 증거를 제게 보여주십시오.”
“여기 있습니다.”
가지고 있던 종이를 내밀자 그것을 홱!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내 손에서 채간 그녀는 머리를 덮고 있던 천을 벗어 던졌다.
[뭐야, 완전 꼬맹이잖아?]
···그러게. 이건 예상보다 더한데.
그녀의 외견은 내 생각보다 훨씬 어렸다.
이제 겨우 나이가 두 자릿수에 다다랐을까 싶은 모습.
하지만 외견과 달리 그 태도와 표정은 마치 오랫동안 여러 전장을 전전한 용병과 같은 완숙함이 담겨 있었다.
현세에서는 말도 안 되는 광경이지만···사후 세계에서 오랜 기간 살아왔다면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닐 테지.
내 손에서 채간 종이의 내용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던 그녀는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종이를 꽉 쥐었다.
“···약조의 증거를 확인했습니다. 우리의 규칙에 따라 그대가 원하는 것을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쌀쌀맞은 태도긴 했지만, 그래도 그것을 부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말하지는 않는 거로 보아 정말로 이것과 관련된 약속은 굳건히 지키는 듯했다.
성중의 대답에 바로 독고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가 설명하는 것보다야 그녀가 설명하는 게 훨씬 낫겠지.
내 시선을 받은 독고화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성중에게 대답했다.
“찾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사람 찾기···?”
독고화의 말에 의외라는 듯 인상을 편 성중. 하지만 그건 잠깐일 뿐, 곧 아까보단 덜하지만 역시나 이마를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거라면 우리보다 훨씬 잘하는 사람이 지천으로 깔렸을걸? 우리는 얼굴 보이기 싫어서 이렇게 몸도 꽁꽁 감싸고 다니는 인간들이라고. 차라리 다른 일을 부탁하는 게 어때?”
약조에 대해 말할 때와는 달리 바로 하대하는 말투로 바뀐 성중은 독고화의 부탁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억지로 한 티를 풀풀 풍기던 존대에 비해 훨씬 자연스럽긴 했지만, 내용 면에선 웃을 수 없었다.
빙 돌려 말하긴 했지만 결국 거절과 다를 바 없는 대답. 하지만 성중의 그런 대답에 독고화는 재빨리 목소리를 높였다.
“아뇨, 사람을 찾아달라 하긴 했지만···이미 여러분들도 알고 계실만한 분이에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독고화의 대답에 인상을 쓰며 되묻는 성중에게 그녀는 품 안에서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저 종이라면 분명···.
[같이 다니면서 심심하면 펼쳐봤던 그거 아냐?]
본인 딴에는 어떻게든 숨긴다고 했겠지만, 화순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내가 보이지 않을 때마다 펼쳐보던 정체불명의 종이.
화순의 존재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던 그녀였기에 화순이 그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지만, 그런 화순도 거기에 뭐가 적혀 있는지 까진 알 수 없었다.
독고화가 건넨 종이를 받아 펼친 성중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초상화···?”
“젊었을 적 그려 놓은 거라 지금은 정확히 어떤 모습이신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도움은 될 거에요.”
“···왜 우리를 찾아왔는지 알겠네.”
딱!
성중이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자, 그림자 하나가 마치 땅에서 솟아나듯 나타났다. 그녀의 부하 중 하나였다.
“사자만인록(死者萬人錄)은 누가 관리하고 있지?”
“천평이 관리하고 있습니다.”
“당장 가져오라고 전해. 찾을 사람이 있다.”
“네, 알겠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등장했을 때처럼 순식간에 사라지는 그림자. 저것도 사자라 가능한 일인 것일까, 아니면 저들의 무공인 것일까.
어느 쪽이든 본인을 숨기기엔 무척 좋은 능력이었다.
그렇게 부하를 심부름 보낸 성중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이 들고 있던 종이. 약조의 증거를 북북 찢어 조각으로 만들더니, 하늘을 향해 흩뿌리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의 예상이 맞았다.”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느껴지는 말투로 말의 포문을 연 그녀는 우리를 향해 설명했다.
“그 초상화에 그려진 사람은 본 적 있다. 네 생각대로 완전히 똑같진 않지만, 그래도 확실히 현재의 모습이 남아있긴 해.”
“그 말대로라면 사람을 찾아 보낼 필요까진 없는 것 아니었나?”
그녀의 말에 문뜩 떠오른 질문을 던지자, 성중이 인상을 쓰며 나를 노려보았다.
“하대라···뭐, 외견이 이 꼬락서니니 어쩔 수 없나.”
“왜? 존대를 듣고 싶어?”
“아니, 뭐, 상관없어. 어차피 오래 볼 사이도 아니고. 이번 일만 끝내면 만날 일도 없으니까, 원하는 대로 해.”
“그럼 나 편하게 할게.”
내 대답에 이번에는 별 불쾌한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성중. 흠흠, 헛기침을 몇 번 내뱉은 그녀는 입을 열었다.
“뭐, 어쨌든 아까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자면, 내가 그걸 가져오라고 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어. 하나는 확인이지.”
“확인이라···생각보다 꼼꼼하네.”
“받은 게 있으니 확실한 답을 내줘야겠지. 너희들은 그냥 편한 마음으로 이걸 넘겼겠지만, 이건 이래 보여도 우리 집단에선 꽤 중요한 물건이거든. 만약 소지자가 원한다면 정말 목숨까지 줘야 하는 물건이니까. ···이걸 그놈에게 건네줄 때만 해도 설마 사람 찾기용으로 써버릴 줄은 전혀 몰랐지만 말이야.”
“그거 외엔 딱히 당신에게 부탁할 게 없거든. 그래서, 두 번째는?”
피식.
내 질문에 그녀는 힘 빠지는 웃음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현실 부정.”
“···뭐?”
현실 부정?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그 초상화에 그려진 사람이, 부디 내가 아는 그 인간이 아니면 좋겠다···그런 의미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라고 내뱉으려던 그 순간 내 눈에 들어오는 그녀의 손.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그 손에는 숨길 수 없는 긴장이 가득했다.
···진심이다. 그녀는 진심으로 지금 자신이 본 것이 부디 사실이 아니길 바라고 있었다.
대체 거기 적힌 사람이 누구였길래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혹시나 대답해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독고화를 바라보았지만, 지금 그녀에게 그것을 설명해 줄 겨를은 없어 보였다.
“아아, 드디어···.”
양손으로 초상화를 꽉 쥔 채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독고화.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아래에서 살펴보고 있던 화순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야, 얘 진짜로 우는데?]
···처음 여정을 시작할 때만 해도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던 일이니, 이렇게 감동하는 것도 이해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지금 품고 있는 초상화 좀 꺼내서 보여주세요, 하면 분명히 욕하겠지?
[원한다면 내기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화낸다는 것에 걸래.]
···나는 애초에 질 내기 같은 건 안 한다.
슉!
그렇게 한창 화순과 대화를 나누던 그때, 성중의 옆에 아까처럼 그림자가 하나 나타났다.
다른 그림자와 비교해도 확연히 기다란 그림자는 옆에 성중이 있는 탓에 더욱더 비교되었다.
“단주님의 부르심에 찾아왔습니다.”
그 큰 키에 비례하듯 공손함을 담아 성중에게 고개를 깊이 숙이는 사내.
아마 그가 아까 그녀가 불렀던 바로 그 사내, 천평이겠지.
“지금 사자만인록 관리하는 게 너라고 하던데, 지금 그것들 어디 있냐?”
“근처에 있습니다. 지금 가져올까요?”
“응, 바로 가져와.”
“전부 다 가져올까요, 아니면 원하시는 권이 있습니까?”
천평의 질문에 그녀는 영 내키지 않는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쉬다 대답했다.
“1권. 첫 번째 책으로 가져와.”
“첫 번째 책···말씀입니까?”
성중의 말에 천평은 자신이 들은 것이 진짜인지 확인하듯 되물었다.
“···내가 농담하는 거로 보여?”
“아뇨, 그럴 리가요, 절대 아닙니다. 다만···.”
“나도 알아. 그냥 입 다물고 가져오기나 해.”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천평이 말한 ‘잠시’는 정말 말 그대로 잠시였다.
그림자가 순간 사라졌다 싶더니, 순식간에 다시 나타났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손에는 한 권의 두꺼운 책이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사자만인록 1권입니다.”
“그래, 고맙다.”
성중이 책을 받아들자, 천평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잠깐 응시하다 다시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자만인록은 우리 사후 여정단의 기록의 완성판이라 할 수 있는 물건이지. 그 숫자를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사자 중 가장 강한 만 명을 뽑아 세밀하게 기록해둔 서적이야. 이름은 물론, 사용하는 능력이나 기술, 원수와 은인 관계 등,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그들에 관한 정보란 정보는 모두 수록되어 있지. 물론.”
스윽.
“네가 보여 준 그 사람도 말이야.”
“그런데 일 권이라는 건 무슨 말인가요?”
“아, 딱히 대단한 건 아냐. 만 명 전부를 한 권에 몰아넣을 순 없으니까, 한 권당 100명씩. 총 100권으로 나눠 놓은 거일 뿐이야. 권수가 낮으면 낮을수록 더욱 강한 자가 적혀 있지.”
“그럼···.”
그녀가 천평에게 받은 건 일 권. 가장 낮은 숫자의 책.
그 말인즉.
“그래. 네가 원하던 그 사람은···내 예상이 맞다면, 이 사후 세계에서도 가장 강한 100명 중 하나. 아니, 그걸 넘어서.”
팔락.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라는 말이다.”
성중이 펼쳐 내민 부분엔는 한 장의 초상화와 함께 그 초상화의 주인에 대한 인적사항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초상화의 주인공은.
“···독고 소저?”
아니, 독고화가 아니다.
물론 한순간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닮긴 했지만 분명 그녀는 아니다.
독고화가 조금만 더 나이를 먹으면 이렇게 될까, 싶을 정도로 닮은 초상화.
···나는 그녀를 알고 있었다.
이름과 사는 곳. 그리고 그녀의 지아비까지.
아니, 모를 리가 없잖아.
“그냥 우연히 닮은 사람···은 아니지?”
“네.”
성중이 혹시나 하고 내뱉은 마지막 희망을 단칼에 자르며 독고화는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분이 저희 어머니. 서란이십니다.”
중원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여인이었지만, 단 한 사람의 사랑으로 족했던 여인.
독고삭의 아내, 서란의 초상화가 사자만인록의 첫 번째 책에 그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