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3)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광채를 내뿜는 조각상에 당도하는 순간, 어디선가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포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까지 오면서 생겼던 정신적 피로(몸이 없는 덕분에 육체적 피로는 없었으니까)를 한순간에 씻겨주는 듯한 목소리에 기뻐하는 것도 잠시.
[···응?]
곧 우리 둘밖에 없는 공간에선 그런 소리가 들려올 리 없다는 걸 깨닫고선, 나보다 조금이라도 더 길게 유령으로 살아왔단 선배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야, 화순. 유령이 되면 환각까지 들리나?]
[그럴 리가 있냐.]
[그럼 이 목소리는···.]
한심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화순의 눈빛은 무시한 채, 빙글, 고개를 돌려 시선을 조각상으로 향했다.
[방금···이 조각상이 말을 한 건가?]
“그렇습니다.”
[오?]
다시 한번 들려오는 맑고 청량한 목소리.
이번에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 목소리에 맞춰 조각상의 입 부분이 분명히 움직이고 있음을.
끼기긱.
뭔가가 땅에 끌리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몸 전체를 내 쪽으로 돌린 조각상은.
번쩍!
선정을 눈에 박아넣은 듯 찬란한 안광을 뿜어내며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이런 모습으로 당신을 마주하게 되어 슬프군요. 본래는 좀 더 제대로 된 모습으로 만나고 싶었지만, 지금은 긴급사태라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른 근육이나 피부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입과 눈만 움직이는 조각상. 아니, 그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예전에 빙정과 독정을 마주했던 때를 떠올리며 질문을 던졌다.
[혹시 당신이 선정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띤 조각상이라.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그랬지.
수천이 넘는 아이의 모습으로 나와 마주했던 빙정이나, 분노와 공포로 크게 뒤틀린 모습이긴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인간의 형상을 띠고 있던 독정을 생각하면, 선정의 이런 모습도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라는 건···?]
“지금은 이렇게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지만, 제가 원래 이러한 건 아닙니다. 설사 이런 모습이더라도 마치 여러분처럼 아주 부드럽고, 또 매끄럽게 움직일 수 있었죠. 하지만 지금은···.”
스윽.
그녀의 눈동자가 나를 벗어나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왔던 그곳.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색의 광채가 끝나는 곳이자, 끝없는 심연이 가득한 그곳으로 그녀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저것으로 인해 제 몸을 함부로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어졌습니다.”
[저건 원래 여기 있었던 게 아니란 말입니까?]
“물론이지요. 아니, 좀 더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저것은 애초부터 현세에 있어선 안 될 것입니다.”
[저게 대체 뭡니까?]
저 심연으로 끌려들어 갈 뻔했던 기억 때문일까. 나 자신이 생각해도 그리 곱지 않은 말투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걸 이해한 듯, 단단한 육신과는 전혀 다른 부드러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미 당신은 저기서 나온 것과 한 번 겨뤄보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럼, 설마?]
그녀가 던져준 자그마한 단서 하나에 순식간에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아니, 애초부터 왜 금방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저기서 빠져나왔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아니면 익숙하지 않은 상태라 깨닫지 못했던 걸까.
[사후세계에서 도망친 누군가가 뚫어놨다는 구멍이 저것이었습니까?]
그것에게서 느낄 수 있는 기운은 불과 내가 사흘 전, 치열하게 겨뤘던 번개 유령과 비슷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는데 말이다.
다시 기억을 떠올리고 나서야 그걸 깨달았다는 것이 우습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탓하는 기색 없이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제가 움직일 수 없었던 이유도, 제가 그것에서 더 이상 뭔가가 빠져나올 수 없도록 이렇게 막고 있기 때문이죠.”
[왜 현세로 나온 사자의 숫자가 선인들 정도로만 막아낼 수 있었나 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던 거군요.]
사후세계에 환생을 거치지 않고 힘을 기르고 있는 사자가 얼마나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현세로 넘어온 사자의 숫자는 터무니없이 적었다.
넓게 잡아 현세의 강자가 존재하는 숫자만큼만 있다고 쳐도 이보다는 훨씬 그 숫자가 많을 텐데 말이다.
알고 보니, 그 이면에는 선정의 이런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래도 정말 도를 넘는 강자는 어찌할 수 없었지만요. 지금 당신께서 쓰러뜨려 주신 번개의 왕처럼 말입니다.”
[사후세계에 그만한 강자가 더 있습니까?]
지금껏 겨뤄왔던 상대들과 비교해도 세 손가락 안에 들만한 강함을 가졌던 괴물, 번개 유령.
사후세계에는 설마 그만한 강자가 널려 있는 것인가?
잔뜩 긴장한 채로 선정에게 질문하자, 그녀는 바로 부정의 목소리를 내뱉었다.
“아뇨, 그럴 리가요. 그는 사후세계에서도 특출난 강자. 그보다 강하다고 단정할 수 있는 자도 둘 이상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하아, 그건 다행이군요.]
“그렇죠. 정말 당신이 아니었다면 현세에 아주 큰 일이 벌어졌을 거예요. 제 아이들은 물론, 그자가 제힘을 얻기라도 했다면···아, 물론 순순히 줄 생각은 없었지만요.”
깊은 안도와 함께, 그녀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농담일까? 만약 웃는 모습으로 이야기했다면 알아차리기 쉽겠지만,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목소리의 높낮이만 바뀌니 그런 걸 파악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 녀석을 일부러 이렇게 영혼만 끌고 온 것도 그거 때문인가?]
그때였다.
선정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침묵하고 있던 화순이 입을 열었다.
“···네, 그렇습니다.”
내 옆에 딱 붙어 있던 화순을 향해 시선을 옮긴 그녀는 긍정의 대답을 꺼냈다.
“이곳은 현세도, 사후세계도 아닌 제 삼의 공간. 중앙에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 둘과는 전혀 다른 곳이라 해도 되죠. 혼(魂)밖에 남지 않은 사자건, 육(肉)을 가진 현세의 사람이건 오래 있을 공간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일부러 백(魄)만 꺼내서 이곳으로 데리고 온 것이지요.”
[뭐, 그 덕에 이 녀석이 사후세계로 끌려갈 뻔했다는 건 둘째치고.]
화순은 눈을 번뜩이며 선정을 향해 그답지 않게 진지하면서도 매서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부러 백만 꺼내와서 이야기를 나누려 했다는 건, 할 이야기가 많다는 말이겠지? 어디 한번 들려줘 봐.]
[저도 듣고 싶네요. 제게 할 이야기는 물론.]
툭.
이제는 원하는 대로 만질 수 있게 된 화순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나 역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녀석에게 할 이야기도 말입니다.]
“·········.”
내 말에 선정의 입이 꾹 닫혔다.
시선도 옮기지 않고, 거기에 입까지 꾹 다물고 있으니 정말로 조각상. 그것도 최고의 장인이 평생을 걸친 역작처럼 보이는 그녀.
그리고 곧,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알고···계셨습니까?”
[처음에는 몰랐죠. 하지만 의심은 하고 있었고, 조금 전 그 한 마디에 확신했습니다. 저는 물론, 화순을 데리고 온 것도 이유가 있어서란 사실을요.]
빙정이나 독정은 어딘가 내가 알 수 없는 공간으로 떠나서 만난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내 정신세계. 화순에게서, 그리고 권능으로 인해 익힌 수련법을 역으로 사용, 둘의 정신세계 안에 내가 파고든 거나 마찬가지다.
화순이 그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녀석과 내 정신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지, 빙정이나 독정이 함께 들어오길 원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그 둘이 그럴만한 지각능력을 갖추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하지만 지금 선정의 경우는 다르다.
살아있는 인간과 긴 시간 접촉해서 그런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진 몰라도 그녀는 훨씬 인간다웠고, 그만큼 그 뜻과 의지를 갖추고 그녀가 원하는 곳으로 나를 데리고 왔다.
그것도 육신과 혼백 전부를 함께 데리고 오는 게 아니라, 일부러 백만 꺼내 데리고 온다는 귀찮은 방식까지 사용해서 말이다.
거기에 그녀는 나만 데리고 온 것이 아니다.
정신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 말고는 분명 나와 독립된 개체인 화순까지 일부러 끌고 오는 고생까지.
선정의 그런 행동에는 분명 확실한 이유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군요···알겠습니다.”
조금 전 웃음기 섞인 목소리와는 정반대로 씁쓸한 목소리로 입을 여는 그녀.
“일단 오해를 살까 봐 말씀드리자면 숨길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저···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그의 의지가 이런 기적을 일으킨 것인가···그런 생각도 들고요.”
[그가 대체 누굽니까?]
“···그는 제 첫 번째 제자의 친우이자, 제게도 깊은 의미가 있는 사람.”
지금까지 감정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있던 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여러 감정을 담고 있는 그녀의 눈.
그리움, 추억, 슬픔. 그리고 그 외에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감정을 담아, 우리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그녀는 다시 입을 열어.
“그리고 두 사람에겐···초대 천마라는 이름으로 익숙할, 바로 그 사람 말입니다.”
흡!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호칭에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초대 천마!
내게는 물론, 화순에게 그 무엇보다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바로 그 이름.
전혀 예상치 못한 그 이름에 난 고개를 바로 화순 쪽으로 돌렸다.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며 화를 내거나, 다른 민감한 반응을 내보이는 게 아닐까.
혹시나 그런다면 나는 녀석을 막아야 하나, 아니면 도와야 하나.
하지만 내 걱정과는 달리 화순은 오히려 나보다도 담담했다.
마치 그녀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올 줄 알았다는 것마냥.
[너, 너 괜찮냐?]
[뭐가?]
[아니, 방금 그···.]
[뭐, 내가 초대 천마의 이름을 들었다고 미쳐 날뛸 기라도 할 줄 알았냐?]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럴 줄 알았다.
초대 천마라 하면 불이라도 뿜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화순은 그녀의 말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 아닌가.
[···솔직히 말하면, 사실 짐작은 하고 있었어. 이 사람···아니, 선정이 어떤 식이든 나랑은 엮여 있다는 사실을.]
[그, 그래?]
[산도 그렇고, 저변에 깔린 기운도 그렇고···뭔가 익숙하다, 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렴풋이 뭔가 머릿속으로 스치는 것 정도는 있더라고. 그래서 여기구나, 하는 생각 정도는 가지고 있었지. ···설마 그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을 마주하게 될 줄은 진짜 몰랐지만.]
[그래···그것도 그렇네.]
원래 목적부터가 초대 천마와 권능의 흔적을 찾기 위해 온 것이었으니, 초대 천마의 이름이 나오는 정도야 마음먹고 있었을 수도 있겠다.
물론 그 당사자를 만나게 되리라곤 생각 못 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당신은 그에 관한 모든 걸 기억하고 있는 겁니까?]
“여러분이 그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얼마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여기서 한 일은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그 힘이 만들어진 그 순간도, 그리고 화순, 당신이 거기에 엮이게 된 이유도.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둘을 번갈아 응시하던 그녀의 눈이 오직 나에게만 향했다.
“당신이 그 옛날, 목숨을 잃을 때 품에 품고 있던 그 부적의 진실도.”
[···네?]
그 이야기가 왜 거기서 나와?
[어, 어떻게 내가 회귀했다는 사실을···.]
“그가 내 첫 제자에게 받아갔던 세 장의 환생부(還生符) 중 마지막 환생부가 어떠한 연유로 당신에게 이어졌는지 알 순 없으나, 운명이란 본디 기이한 법. 그렇게 만들어진 인연이 당신과 권능을 만날 수 있게 해줬고, 그를 만나게 하였으며, 결국 저와도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것이야말로 한 줄로 이어진 연(聯)이라 할 수 있겠죠.”
[당신이 그걸 만들었다는 말입니까? 제가 어머니에게서 받았던 그 부적을?]
“아뇨, 그 부적을 만든 건 제 제자입니다. 애초에 그것은 인간밖에 만들 수 없습니다. 자신의 영혼의 일부를 뽑아 실로 만들어, 그것을 소유자의 혼과 엮어 놓아야 하니까요. 영혼이 없다면 만들 수 없죠.”
[그럼···제가 목숨을 잃은 뒤 과거로 회귀했던 이유도?]
“당신의 영혼과 얽혀 있던 환생부가 당신의 위험을 알고 과거로 보내준 것이지요. 본디 죽은 자를 되살려 줄뿐인 환생부가 어찌하여 당신을 과거로 보내준 건지는 저도 알 수 없지만, 그 덕에 이렇게 우리 세 사람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랬나.
그랬던 것인가.
내 어머니께서 내게 마지막으로 남겼던 유품이, 설마 여기서 만들어진 것이었다니.
아무래도 나와 이 땅의 인연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