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2)
중얼중얼중얼.
선정을 꺼내겠다 말한 동자는 긴 시간 사당 앞에 무릎을 꿇고 뭔가를 읊조렸다.
지금껏 들었던 언어와는 전혀 다른 특이한 언어.
아마 법문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지금은 잊힌, 고대의 언어인 듯했다.
중얼중얼중얼.
우우웅.
[음? 뭔가 시작되나 본데?]
그가 읊조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화순의 말대로 한참 동안 이어지던 그의 목소리에 반응해 사당 또한 잘은 떨림과 함께 점점 찬란한 광채를 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번쩍!
“우웃!”
[우읏?!]
사당에서 한순간 뿜어져 나오는 은빛의 광채에 눈을 가리고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큭, 빛 때문에 눈이 아픈 적이 대체 얼마만···응? 잠깐만.
내 비명 뒤에 들려온 또 다른 누군가의 있을 수 없는 비명에 나는 고개를 돌려 그 비명을 내뱉은 사람을 바라보며 물었다.
화순, 너도 지금 뿜어져 나온 빛에 눈이 아픈 거야?
[어···그러고 보니···.]
자신이 비명을 질렀다는 사실에 놀람 반, 떨떠름함 반 섞인 표정으로 화순은 눈을 비볐다.
고통도, 아픔도 알 수 없는 화순이 겨우 빛 하나 때문에 비명을 지르고, 또 눈을 비빈다고?
영문을 알 수 없는 화순의 행동에 뭔가 더 질문하려는 찰나.
“다 됐습니다.”
어딘가 피곤한 듯한 동자의 목소리가 앞에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빛 때문에 돌렸던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리자, 은빛으로 물들어 있던 사당을 그 빛을 다 한 듯 오래된 흑색의 나무로 바뀌어 있었고, 그런 사당의 열린 문 안에는···.
“이게 선정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사당의 크기만큼이나 작은 은색의 돌멩이가 두툼한 방석 위에 놓여 있었다.
지금껏 내가 봤던 다른 자연의 정수와 비교하자면 절반···아니, 십분지 일도 안될 그런 자그마한 선정이었지만.
“···강하군요.”
“그렇죠.”
꿀꺽. 내가 침을 삼키며 한 마디 내뱉자, 동자가 예상했다는 듯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힘.
한 나라의 땅을 꽁꽁 얼어 붙였던 빙정이나, 한 국가 전역에 독을 퍼뜨렸던 독정에도 절대로 지지 않는 강력한 힘이 선정에서도 똑똑히 느껴졌다.
“지금 이 산에 있는 선인은 물론, 이번 일을 정리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 선인. 그리고 지금껏 산 위에서 선인이 되기 위해 수련을 걸쳤던 선인들 모두가 이 선정에게서 힘을 받았으니까요. 물론 저도 예외는 아니고요.”
역시 그랬나.
아무리 긴 세월 영산에서 고절한 수련을 했다곤 하지만, 그의 선술은 너무나 강력했다.
물론 그가 겉모습으로는 판단할 수 없을 만큼 오랜 세월을 살아온 건 알지만, 그렇다 해도 그보다 긴 세월을 살았으면 살았지, 절대 짧게 살진 않았을 번개의 왕과 백중지세를 이루었으니 말이다.
물론 패배하긴 했지만, 그건 그가 전투에 익숙하지 않았던 탓이지, 그의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만약 그가 나만큼이라도 전투에 익숙했다면, 승패가 뒤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강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 선정이었다.
처음 문이 열렸을 때보다는 그 광채가 훨씬 약해진 선정을 바라보고 있던 동자는 그것을 방석 채로 조심스레 들어 나를 향해 내밀었다.
“본래 이것을 직접 보는 것도 다른 이에게는 허용치 않는 일이나···지금은 보통의 경우가 아니니, 당대 선정의 관리자로서 당신만은 예외로 허용하겠습니다.”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꿀꺽.
동자의 말에 침을 삼키며 선정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빙정을 처음 마주했을 땐 그것의 정신세계 안으로 들어갔었고, 독정은 그것과 겨루며 과거를 지켜봤다.
선정과 만남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지만, 어떤 경험을 하건 놀라지 않도록 미리 마음을 먹어둬야겠지.
그리고.
툭.
그것이 손끝에 닿는 순간.
고오오오오!!!
내가 손을 닿는 곳에서부터 뿜어져 나온 강렬한 기운과 광채.
[우오오오오!]
그 두 가지로 인해 나는, 정확히 나의 정신은 어딘가로 순식간에 끌려나갔다.
마치 세찬 강물 위에 떨어진 한 장의 나뭇잎처럼 이리저리 치이며 어딘가로 떠나가는 정신.
나는 이대로 어디로 흘러가는 것인가.
그저 눈을 감은 채 멍하니 그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던 나는 갑작스레 귀에서 들려오는 고함에 눈을 떴다.
[어이! 정신 차려!]
[화, 화순?!]
휙!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다급한 표정의 화순이 어딘가로 실려 가는 나와 똑같은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잠깐만, 어디론가 실려 간다고?
흡!
화순의 고함에 그제야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차렸다.
어두컴컴한 어둠 속, 한 줄기로 이어진 거대한 은빛 광채.
나는 그 광채에 몸을 실은 채 어디론가 떠내려가고 있었다.
[큭?!]
어떻게든 거기서 벗어나 보려 발버둥 쳤지만, 마치 온몸에 힘이란 힘은 모두 빠진 듯 움직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손을 흔드는 것까진 가능하지만, 이토록 세찬 물결 속에선 손으로 막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바로 그때.
[야!]
하늘을 난 채로 어떻게든 나를 따라오고 있던 화순이 큰 소리로 나를 부르며 손을 뻗었다.
[내 손을 잡아!]
마치 생명의 동아줄처럼 보이는 화순의 손.
···하지만 이걸 잡는다고 살아날 수 있을까?
···겨우 손만 들어 올릴 힘으로 꽉 잡을 수 있을까?
이런저런 걱정이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보다도 몸이 그보다도 빠르게 움직였다.
콱!
내가 그 팔을 잡자마자 양팔로 바꾼 화순은 나를 전력으로 끌어올리려 했지만, 강의 기세는 화순의 힘으로는 어찌하지 못할 만큼 맹렬했다.
콰과과과!
[큭?!]
갑자기 강해진 기세에 나를 잡고 있던 화순의 손이 살짝 미끄러졌다.
한 번만 더 이런 충격이 덮친다면 이제 놓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다짐한 순간.
[하늘! 하늘을 날 수 있다고 생각해봐!]
갑자기 고함을 내지르는 화순.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하늘을 날 수 있다고 생각하라니, 그런 게 가능할 리가···앗?!
화순의 외침에 ‘하늘을 날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여러 방향으로 휩쓸리던 몸이 곧 한쪽으로만 이끌리기 시작했다.
위.
그러니까, 하늘로 말이다.
[우오오옷!]
조금 전 휩쓸리던 기세 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빠르게 공중으로 떠오른 육신.
누운 상태 그대로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보자, 내가 조금 전까지 휩쓸리고 있던 강이 마치 자그마한 실선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다시 정신을 집중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자,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화순이 시선 내에 들어왔다.
[휴, 이젠 어디로 휩쓸려가진 않겠네.]
[그래,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싸우다 죽는 거면 몰라도 이렇게 죽으면 안 되지. 화경의 고수가 돌멩이 하나 만졌다가 정신이 죽을 뻔했다고 하면 뭔 소리를 듣겠냐.]
[큭, 그건 그렇지.]
조금 전 그 공포를 지운 채, 웃으며 말하는 화순의 옆에서 누운 채 떠다녔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부유감.
공중에서 싸워본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용천혈을 통해 내공을 분출시켜 날아오르거나, 발바닥에 기를 끌어모아 공중을 억지로 대지처럼 만든 것에 불과했다.
이렇게 아무런 힘도 없이 공중에 떠올라 있었던 건 처음이었다.
···일단 평생 누워있을 순 없지.
빙글.
으음, 역시 이 상태로 움직이는 게 익숙하진 않네.
앞으로 돌아 똑바로 서려 했지만, 오히려 반대로 돌아가는 육신.
그래도 반 바퀴하고도 한 바퀴를 더 돌아, 원래 목적했던 건 성공했다.
공중에 둥둥 뜬 상태로 화순과 마주한 상태로 아래를 바라봤다.
마치 화순이나 전에 싸웠던 번개 유령처럼 반투명한 내 몸 아래로, 수은으로 만든 것처럼 은색으로 빛나는 강이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저 강···어디로 향하는 거지?]
[글쎄다.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내버려 두면 네가 어딘가로 떠나버릴 것 같아서 일단 급하게 붙잡았어.]
[그래, 고맙다.]
끝없이 이어진 은빛 강.
화순의 말대로 저 끝이 어디가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또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른다는 건데···.
···아니, 그것보다.
[너는 어떻게 여기 있냐?]
[응?]
[아니, 방금 그 감각이나, 내 상태로 보나,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정신세계는 아닌 것 같은데 네가 있잖아.]
내 말에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던 화순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
[나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어. 네가 그걸 만지는 순간, 나도 엄청난 힘으로 이끌려서 네 옆에 떨어졌거든. 나야 날 수 있으니까 금방 탈출했지만, 너는 계속 흘러가고 있길래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한 거지.]
[그러면 여기가 어딘진 너도 모른다는 거네?]
[그렇지. 뭐, 그래도 어디로 가야 할진 대충 알겠지만.]
[음···.]
화순의 말에 나는 그 녀석이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끝을 도저히 알 수 없는, 어둠으로만 가득한 강의 하류와 달리 강의 상류는 아까 신정에게서 봤던 그 광채와 똑같은 은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만약 화순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아무 짓도 못 한 채로 저 안으로 흘러 들어갔겠지.
[물론 빛이 있는 쪽이 무조건 좋다는 건 아니지만···그래도 저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것보단 낫지 않겠어?]
화순의 말대로였다.
평범한 어둠이라면 별 두려움 없이 걸어가겠지만, 강의 하류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은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마치 들어가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범의 아가리와 같은 느낌이라 할까.
화순이 나를 건져 올린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화순의 제안에 동의한 나는 바로 상류 쪽으로 올라갔다.
다행히 그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곳은 그리 멀지 않았던 모양인지, 우리가 점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 광채도 힘을 더해갔다.
그래도 뛸 수도, 날 수도 없는 이런 상태에선 그것도 만만치 않게 긴 거리였다.
[그건 그렇고 나도 너처럼 될 줄이야···.]
반투명한 육신에 땅(이라고 부를 수 있는진 모를 어둠이긴 하지만)에서 한치쯤 떠올라 있는 다리까지.
지금 나는 화순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영혼. 혹은 번개 유령과 같은 유령이 되어 있었다.
[그러게. 영혼이 되어보니 어떠냐?]
[글쎄···일단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가볍다는 걸 넘어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지금 상태에선 힘을 들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근육도, 내공도 없는 육신은 이토록 무력한 것인가.
내 말에 화순은 콧방귀를 뀌면서 입을 열었다.
[헹. 그러면서 내 팔은 용케도 꽉 잡더라?]
[응? 아···그러고 보니···.]
까딱 잘못하면 저 은빛 강에 휩쓸려갈 뻔하긴 했지만, 그건 저 강이 흐르는 기세가 너무나도 강했던 탓이다.
오히려 그걸 잠깐이나마 버텼던 건, 분명 내가 그만큼 화순이 내 팔을, 내가 화순의 팔을 꽉 잡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영혼 상태에서는 육신의 힘은 쓸 수 없어. 근육도, 내공도, 하다못해 억지로라도 쓸 무게도 없으니까. 그 대신.]
툭툭.
[의지가 있지.]
[···의지?]
화순이 가슴을 두드리며 꺼낸 단어를 다시 한번 되뇌자, 그 녀석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같은 영혼 상태에선 의지가 곧 근육이고, 내공이야. 네가 내 팔을 잡았을 땐 내 팔을 잡겠다는 의지로 잡을 수 있었던 거고, 하늘을 날려고 했던 것도 그런 의지가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지.]
[호오, 그렇구나.]
의지, 의지라···.
화순의 말에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그럴 의지만 있으면 나도 내 원래 힘도 이 상태로 쓸 수 있는 건가?]
[그건 좀 힘들지. 네 힘이 어디 보통 힘이냐? 그 정도 수준의 힘을 쓸 의지라면, 영혼 세계 자체가 네 의지에 좌지우지되는 수준일걸?]
[흠···그 정도인가···그럼 내 의지로는 어느 정도 쓸 수 있을까?]
[너는 아직 영혼 상태가 익숙한 게 아니라서 그런 거지, 조금 익숙해지면···그래도 절정이나 초절정 수준은 될 수 있지 않을까?]
절정에서 초절정···.
···물론 지금처럼 팔 한 짝 들 힘도 없는 상황에서 그 정도라면 감사하다 못해 엎드려 절을 해야 할 정도지만, 원래 힘을 생각하면 역시나 아쉽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아니, 아니지. 내가 왜 그런 걸 아쉬워해.
애초부터 영혼 세계에서 싸울 일이 또 언제가 있다고 이런 걸 아쉬워하냐.
나는 평생 내가 꿈꾸던 대로 살다가, 죽으면 바로 인간으로 환생할 건데.
[아, 다 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나보다 앞서서 가고 있던 화순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앞에는.
눈이 멀 것만 같은. 아니, 진짜 보통 육신으로 왔다면 분명히 눈이 멀어버렸을 찬란한 오색 광채와 함께.
[·········.]
은으로 조각한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은색으로 물든 한 여인이 그 광채 중심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