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1)
“끄, 끝났나?”
숨어 있던 선인 중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밖으로 나왔다.
그런 그의 질문에 아무 말 없이 하늘에 떠다니는 반투명한 하얀 재를 응시했다.
번개 유령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최후의 증거.
완전히 사라진 영혼의 마지막 흔적.
···뭐, 느껴지기만 그런 거고, 사실은 사후 세계로 추방당했다, 이럴 수도 있긴 하지만.
“그래, 다 끝났네.”
“선주님!”
그의 말에 대답한 건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낮고 고요한 목소리로 말하며 동자는 자신을 안고 있던 선인에게서 벗어나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거뭇거뭇한 재가 남아 있긴 했지만, 아까보다는 확연할 만큼 회복된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움직이지 않는 발걸음을 천천히 옮겨.
“고맙소, 당신 덕분에 우리 모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소.”
나를 향해 고개를 깊이 숙으며 감사를 표한다.
그런 그의 모습에 주변의 다른 선인들이 놀란 듯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선주님이 존대를···.”
“어찌 저렇게 공손히···.”
뒤편에서 떠드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그의 변화에 적잖이 놀랐다.
아까와 달리 반 존대로 변한 말투에 공손한 반응.
겉모습으로는 오히려 이쪽이 더 걸맞을지도 모르지만, 만난 지 겨우 반나절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이미 만들어진 인상과는 많이 달랐다.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린 동자는 이번엔 시선을 왼편, 그러니까 내 쪽에선 오른팔로 돌렸다.
슬슬 녹아가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하얀 서리가 내려 있는 오른팔.
혹시나 놓칠 수 있다는 생각에 철혼까지 함께 얼려놨던 손바닥은 피부가 살짝 벗겨져 붉은 흔적도 남아 있었다.
뭐, 잠시 뒤엔 이것도 금방 회복될 테지만.
“빙정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예상외의 것이 그의 입에서 태어나오자 퍽 놀랐지만, 곧 진정하고 생각하니 이해하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선정이 만약 빙정과 독정. 이 둘과 같은 자연의 정수라면, 그것을 관리하고 있던 그가 빙정을 아는 것이 아주 이상한 건 아니니까.
“당신의 과감한 선택 덕분에 모두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아뇨, 저도 살려면 당연한 선택이었죠.”
현세의 정복을 목적으로 현세에 나타난 사자, 번개의 왕.
무섭도록 강했던 그놈이 만약 선정까지 얻었다면?
정말로 나뿐만 아니라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괴물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영원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될 정도의 번개와 보통 사람이라면 죽어도 몇만 번은 죽을 공격에도 저만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괴물이 더 강한 존재가 된다면, 정말 현세에 다시 없을 재앙이었으리라.
차라리 지금 이리 그가 나오자마자 이렇게 만난 싸운 것이 행운이었을 정도였다.
“상처는 어떻습니까?”
“저는 이제 괜찮습니다. 놈의 일격에 회복 선술을 사용하기 조금 힘들었지만, 지금은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지금은 썩 괜찮아졌습니다.”
내가 놈의 공격을 일부러 오른팔에만 집중시켜 오른팔만 마비되었던 것과 달리, 그는 옆구리를 당해 전신을 다 마비당했고, 결국 그것이 패배의 단초가 되고 말았다.
확실히 몸을 저리게 만드는 그 공격은 여러모로 성가셨다.
차라리 혈도를 점하는 공격은 그 순간만 불편할 뿐이지, 내공만 있다면 푸는 건 어렵지 않은 것에 반해, 그의 공격은 한 번 맞으면 장시간 마비되어 있어야 했다.
회복 선술을 사용하는 그나, 회복력이 다른 사람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나도 회복하는데 이렇게 길게 걸리는 걸 봐선, 다른 사람이었다면···어쩌면 평생 움직이지 못하는 꼴이 됐을지도 모른다.
“이것저것···여쭤볼 것이 많겠군요.”
“네, 그리고 대답할 것도 많고요.”
처음에는 독고화의 부탁 때문에 왔지만, 이제는 내가 물어볼 것이 더 많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 말에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 동자는 밖으로 나와 옷을 털고 있는 독고화를 잠깐 응시했다, 다시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사후 세계와의 연락은 며칠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군요. 해결을 위해 떠났던 다른 선인들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일부러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독고화의 대답은 듣지 않았지만, 어차피 죽은 사람과 이야기하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이 평생을 살아왔던 마교에서 뛰쳐나온 아가씨다.
겨우 며칠 좀 더 여기 머물러야 한다는 이유로 떠날 리는 없으니까.
“아직 젊은 두 분이 있기엔 조금 갑갑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최고의 대우를 해드리겠습니다.”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조금 난감한 부탁을 하려는 듯, 동자는 조금 주저하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곳의 정리가 다 끝나면, 한 번 봐주십사 하는 것이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무엇입니까?”
“아니, 봐달라 보다는, 만나 달라고 하는 게 좀 더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군요.”
봐달라는 게 아니라 만나 달라···.
그 한 마디만으로 나는 그가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가타부타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어쩌면, 내가 별다른 이유 없이 독고화의 동행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던 것도 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불러주시면 언제든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그걸로 끝났다.
그나 나나 몸 상태도 온전치 않았거니와, 이곳을 정리하기도 했으니까.
이제 기다리는 것만 남았다.
동자가 독고화를 부르길.
···그리고 그 전에 나를 부르기를.
*****
동자가 나를 호출한 건 그로부터 사흘 후의 일이었다.
번개의 왕이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던 이곳을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리는 데 필요한 시간이기도 했다.
우리가 묵고 있는 방으로 찾아온 그는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났다는 말과 함께 말의 포문을 열었다.
“숙소는 좀 마음에 드십니까?”
“네, 편안히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껏 지내왔던 숙소에 비하면 초라하다 할 만큼 좁고 별다른 가구도 없는 방이었지만, 그만큼 이런저런 편의와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당장 마교에서 온갖 좋은 대접이라면 다 받아왔을 독고화 또한 한 마디 불평 없이 지냈으니 말이다.
“그러시다니 다행이군요.”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저번에 말씀드렸던 그것, 기억하십니까.”
“아, 네.”
역시나 그 이야기인가.
뭔가 이야기할 것이 있으면 무조건 독고화를 함께 불렀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혼자만 불러 이야기를 하는 걸 보고 대충 예상하긴 했지만, 역시 이야기가 나오니 조금 떨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 슬슬 정리를 막바지에 이르렀으니, 때가 되지 않았나 싶어서 말이죠.”
“그럼 드디어···.”
“네.”
언제나처럼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며 그는 천천히 입을 열어 고했다.
“선정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함께 가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감사히 따르겠습니다.”
내 몸에 있는 첫 번째 자연의 정수 빙정과 두 번째 자연의 정수, 독정.
그리고 세 번째 정수이자, 마지막 정수인 선정까지.
설마 이 모두를 만나볼 수 있게 되는 기회가 올 줄은 몰랐지만, 어쩌면 이것도 운명이 아니었을까.
[아니, 너무 감성적인 거 아니냐.]
···하긴, 그렇지?
이런 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화순의 말에 나는 웃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번에 선정의 기운만 얻으면, 이제 정말 전 중원에서는 너를 대적할 사람은 없을 거야. ···내가 기억하는 역대 천마 중에서도 독보적인 내공이니까.]
그래도 초대 천마는 제외하고···겠지?
[내가 기억도 못 하는 사람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순 없지만···일단 적게나마 남아 있는 기억으로는···진짜 엄청나게 강한 사람이긴 했지.]
아련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화순. 권능과 화순을 만들어낸 사람···이라고 예상하고는 있지만,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다른 누군가에게서 만들어진 권능을 그가 우연히 얻고, 화순은 자신을 그가 만들었다, 이런 이야기도 아주 있을 수 없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밖에는 아직도 한참 정리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 바위산에서 어디서 챙겨왔는지 모를 나무로 무너진 건물을 다시 세우고 있는 선인들은 숙련된 목수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각자의 일에 매진한 그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걸까. 선술을 사용해 안개로 우리의 몸을 숨긴 그는 그곳을 가로질러 점점 위로 향해갔다.
구름조차 뚫고 올라간 높은 산 위에서 더욱 높게 올라간다.
하늘에 닿는 걸 넘어 하늘을 뚫고 지나간 게 아닌가 할 정도로 높이, 또 높이 올라선 우리의 앞에 나타난 건 내 삼 분의 일도 안 되는 자그마한 사당이었다.
“이것···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모양새 자체는 어디서나 볼법한 평범한 사당이었지만, 흔히 사당을 만들 때 나무를 쓰는 것과 달리 이 사당은 은빛의 광물로 만들어져 있었다.
과연 신정을 담아 놓은 사당이라 해야 할까.
“독특한 사당이군요. 이런 광물을 사용한 건 처음 봅니다.”
“아니요, 사당의 재료 자체는 평범한 나무입니다.”
“네? 이것이?”
사방으로 빛을 뿜어내는 은빛과 무른 은이나 백금으로는 도저히 낼 수 없는 단단함까지.
평범한 나무라 하기엔 그 색도, 강도도 기이하기 그지없다.
혹시나 농담인가 싶기도 했지만, 최소한 내가 알기로 그는 이런 거로 농담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답은 딱 하나.
“이것도 신정의 힘인가 보군요.”
“네. 삭아도 이미 예전에 삭았어야 할 이 사당이 이렇게 있을 수 있었던 것도 그렇고요.”
동자는 그렇게 말하며 조심스레 사당의 지붕을 쓰다듬었다.
“그리고···저희의 스승이기도 하죠.”
“스승이요?”
“네. 저희가 이곳에 모인 것도, 이렇게 선술을 익힐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 선정이 여기 자리하고 있었던 덕분이죠.”
사당을 쓰다듬던 걸 멈춘 동자는 나에게 그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본디 이 산의 정상에는 이런 사당 없이 선정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그저 자연적으로 생성된 것일까요? 아니면 누구도 모르는 누가 놔둔 것일까요? 무엇이 진실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정확한 건 이것이 여기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빙정과 독정도 그에 걸맞은 자리에 있었죠.”
영원히 얼어붙은 대지, 북해에 존재하던 빙정.
만독이 태어나고, 사라지는 땅, 남만에 존재하던 독정.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에 존재하는 신정처럼, 그들 또한 각자가 있어야 할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빙정과 독정이 그러했든, 자연의 정수가 존재하는 땅에는 그것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모이기 마련이죠. 신정 역시 다를 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생태계를 이뤄냈던 빙정이나 독정과 달리, 신정은 그저 하늘보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관망하듯 지켜볼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여러분들은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심처에 있다고 해도, 그에 대한 소문이 전혀 알려지지 않는 건 아니었습니다. 가장 높은 산, 인세에 다시 없을 위대한 보물이 잠들어있다는 소문은 모두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죠. 그리고 그것이 진실인지 답을 찾으려고 했던 사람도 있었죠. 그게 바로 저의 사조님이자, 선정에게 처음으로 가르침을 받은 분이었습니다.”
사조(師祖)님···설마 이 사조가 스승의 스승이라는 뜻인가?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렇게 오랫동안 살았겠어?
그냥 모든 선인의 스승이라는 의미로 붙인 거겠지. 그런 거겠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건 말건, 동자는 상관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선정의 가르침을 받은 그분은 이 땅 위에서 끊임없이 단련을 거듭했죠. 그리고 그사이, 그분께서 다시 대지로 내려오지 않음을 이상케 여긴 다른 이들도 하나, 둘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중 몇몇은 그분의 가르침을 받고 같이 선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죠.”
“그 말씀은···?”
“···전에 나타났던 번개의 왕처럼, 선정의 힘에 탐욕을 품은 자들이 나타난 것이죠.”
하긴 번개의 왕과 같은 강자도 탐욕을 품을만한 물건이다.
심지어 빙정과 독정처럼 지키는 이들의 숫자도 적으니, 더욱 더 욕심을 품을 수밖에 없으리라.
“처음에는 그들을 격퇴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으나, 결국 지키려는 자는 소수요, 얻으려 하는 자는 다수였습니다. 힘에 부친 사조께선 결국 특단의 조처를 내리셨죠. 선정의 존재를 영원히 비밀에 부친 후, 오직 선택받은 몇몇만이 그 존재와 실물을 만날 수 있도록 하신 겁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당신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싱긋, 미소를 지으며 동자는 대답했다.
“본래대로라면 오직 저와 제 뒤를 이은 제자만이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하지만···당신은 특별한 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한 운명···이요?”
“빙정과 독정의 인정을 받은 자이자···뒤틀린 운명의 주인.”
그는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내게 대답했다.
“선정을 통해 당신의 운명의 방향을 알아내실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