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권능으로 무림최강-129화 (129/185)

동쪽의 파란(2)

“그것이···그래서···.”

“아니, 그 정도면 됐네.”

눈앞의 유약한 사내의 말을 중간에 끊고, 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필요한 정보는 다 얻은 것 같군. 자네의 도움에 진심으로 감사하네.”

“아, 아닙니다. 헤, 헤헤헤···.”

내가 떠난다는 말에 진심으로 기쁨을 표하는 사내.

내가 그와 만난 후 기쁜 표정을 한 건 이때가 유일했다.

후우, 짧은 한숨과 자리에서 나를 배웅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를 손을 들어 만류했다.

“안 그래도 바쁜 사람의 시간을 이토록 빼앗았는데 무슨 양심으로 배웅까지 바라겠나. 그냥 앉아있게.”

내 말에 우물쭈물, 겨우 자리에 다시 앉는 사내.

밖으로 나가자 방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독고화가 보였다.

심심함을 죽이듯 땅을 퍽퍽 차고 있던 그녀는 내가 방에서 나오자 환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어때요? 이야기는 잘 끝났어요?”

“아뇨.”

그녀의 질문에 나는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

“제가 원하던 정보는 하나도 안 내놓더군요.”

방 안의 사내. 이 현의 현령과 나눈 이야기는 정말, 말 그대로,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조금 전 봤던 문지기와는 극과 극 수준으로 다른 인간.

···하긴, 무리도 아니다.

문지기나 병사의 질은 혹시나 있을 외국의 침략을 대비하여 최상의 상태로 두지만, 현령은 딱히 그럴 필요가 없다.

사실상 이런 국경 지역은 관보단 군에서 관리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일반 백성보다 병사들이 더 많은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그 때문에 중앙에선 이런 현에서는 정치적 인맥. 소위 끈이 없는 사람이나 정말 무지해서 어디에도 써먹을 수 없는 사람을 앉혀놓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인간은···.

“그냥 제가 얼른 나가기만을 바라는 인간이었습니다.”

바로 후자.

그중에서도 가히 최악이라는 말이 전혀 부끄럽지 않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조차 무서워하는 그런 인간이었다.

“말도 너무 많이 떨어서 알아먹을 수도 없고, 기억력도 나빠서 그 사람들이 한 말도 전부 기억 못 하는 데다가, 자기 기억에 자신감도 없는지 정말 맞는지 아닌지 모른다고 수십 번은 더 반복하더군요.”

“···그런 사람도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거에요?”

“일단 그냥 앉혀놓는 건 가능하죠.”

“아무리 그래도 현령이면 한 지부의 지부장급은 되는 사람 아닌가요? 대체 왜 그런 중요한 자리에 저런 인간을···.”

실력 우선주의가 팽배한 마교에서 살아온 그녀에게 있어선, 이런 인간이 한 현의 주인이라는 현령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모든 곳을 최고의 인물로만 채울 수는 없지요. 최고의 인물을 준비해 놓은 곳이 있다면, 최악의 인물이 있을 수밖에 없는 곳도 있습니다. 여기가 그런 곳이라는 건, 우리에겐 조금 불행이지만요.”

“그럼 저희는 완전히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건가요?”

“아뇨, 그건 아닙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지만, 다행히 자그마한 희망은 남아 있었다.

“전대 현령은, 지금 저 인간만큼 무책임하진 않은 것 같더군요.”

아무리 얘기해도 어느 수준을 넘어가지 못하는 이야기에 결국 답답한 마음이 폭발. 좀 제대로 된 건 없냐는 질문에 그는 깜짝 놀라 옆에 있던 책장을 뒤지더니 한 권의 책을 꺼내 들고 왔다.

“이건···?”

“대충 삼십 년 전 동이 측 세력 분포도입니다. 전대 현령이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위협을 대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라 하더군요.”

북해나 남만도 그렇지만, 동이는 중원 인간들에게 말 그대로 미지의 땅이었다.

사실상 고려와 이어진 교역로 말곤 중원 사람들이 아는 곳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나 매한가지니까.

전대 현령은 그 부분을 꽤 신경 쓰고 있었던 것 같았다.

“조잡하긴 하지만 지도의 모양새도 갖추고 있고, 타 세력의 위치도 적혀 있습니다. 물론 삼십 년이란 세월이 지난 이상, 얼마나 정확한지는 알 수 없지만요.”

지금의 현령과 비교하면 천지 차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행정처리다.

어쩌면 동이의 신선인가 뭔가 하는 인간들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현령에게 찾아와 이런 이야기를 남긴 건, 전대 현령을 기억하고 찾아 왔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떠오를 정도로.

···뭐, 그보다는 그냥 문지기한테 제일 높은 사람한테 데려달라고 말했을 가능성이 조금 더 농후하지만 말이다.

“그럼 저희는 어디로 가면 되나요?”

“고려는···아무래도 제 개인적인 일에 타국을 끌어들이는 건 조금 문제도 있고, 그렇다고 지도를 보고서도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실치 않은 신선들을 찾기보단···역시 이쪽을 먼저 해야죠.”

툭.

길림성의 바로 앞 평원, 그곳에 길게 그려진 들과 중간중간 채워진 자그마한 동그라미.

그리고 그중에서도 길림성과 제일 가까운 동그라미를 꾹 누르며 대답했다.

“유목민의 거점 중 한 곳이자, 지금은 유목민이 자리하고 있을 곳이죠.”

*****

길을 찾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던 현령이지만, 그래도 중원을 떠나기 직전에는 한 가지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이걸 가져가시지요.”

내 주먹과 비슷한 크기의 전낭. 손 위에 올려보니, 꽤 묵직한 감각이 거기서부터 느껴졌다.

“이건 뭔가?”

“황금입니다.”

“황금?”

“네. 거기선 대부분 저희 명나라의 돈은 쓸모없는 금속 취급하고, 은도 거의 쓰지 않기에 황금으로만 거래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호오, 그렇군.”

북해나 남만에서는 내가 돈을 쓸 일이 거의 없어 잊고 있었지만, 국가마다 각자의 돈을 쓰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럴 땐 공용의 가치를 가진 무언가가 필요한 법.

“이 정도면 흥청망청 낭비하는 게 아닌 이상, 몇 년은 거뜬히 버티실 겁니다.”

확실히, 이 정도라면 북경에서도 괜찮은 집 한 채는 살만한 황금이다.

웬만한 양민들은 평생을 가도 모을 수 없을 만한 황금.

“그런데 이만한 황금이라면 현의 일 년 예상보다 더 많아 보이는데, 어떻게 이만한 황금을 가지고 있지?”

···그리고 이런 오지의 세금으로는 마음먹고 모아도 십 년은 넘게 모아야 할만한 황금이기도 하다.

내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그는 대경실색하며 손을 마구 흔들었다.

“아, 아뇨. 어사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건 당연히 아닙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긴급 자금입니다!”

“긴급 자금?”

“네. 혹시 외부에 나가야 할 경우가 생길 때를 대비하여 구비해 놓은 것입니다. 최소 삼대 전 현령 때부터 이어져 오던 물건이지요.”

“그래···확실히···.”

당신 같은 사람이 세금 삥땅 칠 방법을 알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겨우 집어삼킨다.

아무리 그의 무능력에 화가 났다지만, 그래도 자기 능력껏 최선을 다해 도와준 사람한테까지 뭐라 할 정도는 아니다.

“···이번 도움은 잊지 않겠네.”

“아뇨, 뭘요. 다른 필요한 일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돌아와서 요청해주십시오.”

황금이 들어 있는 전낭을 품 안에 넣고, 그의 배웅과 함께 성문을 나섰다.

성문 너머로 나타난 동이의 땅은, 내가 지금껏 다녀왔던 다른 두 곳의 세외와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온몸이 얼어붙을 듯한 한기가 느껴지는 북해.

온갖 기상천외한 동식물들이 가득한 별세계같은 남만.

하지만 동이는 겉으로 봤을 땐 중원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물론 겨우 성문 하나 나섰다고 뭐가 그리 다르겠냐마는···.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동이는 너무나 익숙한 느낌이었다.

“중원과 딱히 다르진 않네요···그러고 보니 기후도 큰 차이는 없다고 했죠?”

“네. 아까 그 문지기가 그리 말했으니 확실할 겁니다.”

나오기 전 문지기를 포함해 그나마 바깥 사정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정보를 구하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질은 그리 좋지 못했다.

지금 우리에겐 동이는 미지의 영역이나 마찬가지.

한시라도 빨리 우리에게 동이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지금 제일 먼저 만날 유목민 부족에서 부디 괜찮은 정보를 얻을 수 있기를.

풀과 나무가 드문드문 자라 있는 평원은 아무리 달려도 풍경은 바뀌지 않았다.

시간도, 공간도,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말 만큼 똑같은 땅.

유목민이 살아가기에 이만큼 완벽하고, 또 최악인 땅이 있을까.

평생을 떠돌아야 할 만큼 척박하지만, 평생을 떠돈다면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은혜 또한 품고 있다.

중원과 기후는 다를 것 없으면서, 살아가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마치 거울로 본 듯, 비슷하면서도 정반대의 땅.

히히힝~!

한창 평원을 달리던 도중, 어디선가 들려오는 말의 힘찬 울음소리.

당연히 그녀가 타고 있는 이 녀석의 소리는 아니다. 애초에 이놈이 이토록 힘차게 우는 일은 지금까지 없었다.

그 말인즉···.

“지평선 너머까지 들려오는 울음소리라니···명마도 보통 명마가 아닌가 보네요.”

“유목민의 말은 북해의 말과도 비견된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나 봅니다.”

성을 떠나기 전 들었던 정보 중 하나였다.

아무래도 부족이나 국가같이 큰 규모로 성사되는 북해의 말과 달리, 유목민의 말은 어쩌다 만난 상인이 자기들이 쓸 용도로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일까. 천하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북해의 명마들과 달리, 유목민의 말들은 정말 아는 사람들만 아는, 이른바 숨은 명품 취급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북해의 명마라면 웬만큼 알고 있는 나지만, 그런 나도 지금 들려오는 울음소리만큼 깨끗하고 우렁찬 소리는 들어본 적 없었다.

“일단 울음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가보죠.”

우리가 목적으로 했던 유목민인지, 아니면 그냥 풀을 먹이러 나온 건진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평원을 달린 지 몇 시진 만에 찾은 사람의 흔적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놓칠 수 없었다.

내가 속도를 높이자, 그녀가 타고 있던 녀석도 분위기를 읽고 속도를 높였다.

보통 말의 전속력도 걷는 정도로 낼 수 있는 녀석이다. 내가 진심으로 뛰어가는 것도, 아슬아슬하지만 쫓아올 수 있을 만한 속도로 붙어 있었다.

“꺄악!”

녀석의 등 위에 타고 있던 독고화가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고삐와 녀석의 갈기를 꽉 쥐었다.

아무리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라지만, 지금 녀석의 속도는 그것조차 아득히 상회. 갑자기 표변하는 바람의 세기와 풍경은 그녀에겐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으리라.

그래도 그 덕분에 지평선 너머로 사람의 흔적이 두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평원에 자란 녹갈색의 풀을 한가로이 뜯고 있는 백여 마리의 건장한 말과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튼실한 말 위에 올라타고 있는 소녀가 한 명.

그녀는 마치 주변을 살피는 정찰병처럼 말 위에 앉아 목을 높이 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말 대부분이 목을 들고, 남은 몇몇 말도 먹는 속도가 한없이 느려졌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 또한 주변보단 말을 향해 더 오랜 시간 머물렀다.

말의 식사가 끝나가고 있다는 소리였다.

지체할 순 없다. 그녀가 떠나기 전에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후웅!

“앗!”

녀석의 등 위에 타고 있던 그녀의 한줄기 비명이 내 귀를 찔렀지만, 그것은 잠시.

소리보다 더욱 빨리 움직인 내 몸에 의해 그 비명은 곧 지워진다.

아까 전 달려올 때보다도 더욱 세차게 느껴지는 바람. 얇디얇은 칼날로 피부에 상처를 새기는 듯한 알싸한 통증이 전신에서 느껴졌지만, 지금은 내 몸보다 우선할 게 있었다.

툭.

떨어지는 속도에 비하면 너무나 가벼운 소리. 한창 풀을 뜯고 있는 말조차도 놀라지 않을만한 소리였지만.

“!!!”

바로 앞에 건장한 사내가 떨어진 걸 지켜봐야 했던 소녀에겐 우렛소리보다 더 컸으리라.

그녀의 반응은 재빨랐다. 말의 옆구리에 메어놨던 장궁을 꺼내, 자신의 등에 있던 통에서 화살을 멘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은 말 그대로 눈 깜빡할 새. 웬만한 고수조차 하지 못할 기예였다.

내공도 느껴지지 않는 그녀가 이만한 대응을 하다니. 그녀가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그녀를 공포에 질리게 한 요소 하나가 된 건 분명 미안한 일이지만.

꾸욱.

지금은 그것보다 급한 일이 있어서 말이야.

그녀가 시위를 손에서 놓기가 무섭게 내가 다시 시위와 화살을 동시에 쥔다.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시위. 날아가지 못하는 화살. 경악한 그녀의 눈동자.

그것을 차례대로 응시하다, 최후에는 그녀의 두 눈과 마주한 채 입을 열었다.

“중원의 말을 할 줄 아는 사람 있나? 긴히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