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의 파란(1)
동이(東夷).
내가 다녀왔던 북해(北海), 남만(南蠻)과 함께 사이(四夷)라 일컬어지는 장소.
우리의 한 성만 한 크기의 땅덩어리에 세워진 국가, 고려와 그 너머의 평원에 있는 유랑민들을 한 번에 싸잡아서 우리 중원의 한인들은 동이라 부른다.
···솔직히 까놓고 말하자면, 나도 이 이상은 모른다.
이미 무림은 물론 국가조차 두려움에 떨 만한 무력과 집단성을 지니고 있던 북해.
온갖 독물의 근원지이자, 중원에 존재하지 온갖 진귀한 보물들이 넘치는, 흥미로운 점이 넘쳐나는 남만.
이 두 가지의 정보에 대해선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지만, 동이에 관해선?
한 번 거래만 틀면 상단의 규모를 몇 배. 아니, 몇십 배 키우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말이 있는 고려 인삼에 관심 넘칠 상인들을 제외하면, 딱히 큰 흥미가 돌지 않는 곳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어떤 곳이 우리에게 이득이 되냐, 손해가 되냐 보다는 ‘그놈들 강하냐?’ 가 가장 먼저 튀어나오는 마교에서는 더더욱 불필요한 동이에 관한 정보.
그래서 웬만한 중원인들보다 정보에 빠삭한 나조차도 동이에 대한 정보는 극히 적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래도 마음이 놓인다.
최소한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은, 뭔가 큰일은 없다는 소리니까.
내가 알던 미래의 북해는 명나라와는 완벽한 철천지원수이자 빙정의 폭주로 멸망한 북해를 대신해서 자신들이 살아갈 땅을 얻기 위해 중원으로 쳐들어오고 있었고, 미래의 남만은 공포와 광기에 물든 독정(毒情)으로 인해 남만 전역은 물론 중원에까지 그 손을 뻗치고 있는 지경이었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진 몰라도, 어찌저찌 그걸 내가 다 막아내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런 위험 요소만 없었더라면, 북해나 남만도 동이처럼 별다른 정보가 없는 영역으로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건 반대로 생각하면, 지금의 동이는 평화 그 자체.
지금 내 여정도 지금까지의 다른 여정들에 비하면 편할지도 모른다, 라는 자그마한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더군다나 마교에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독고화를 처음 만났던 숲을 빠져나온 이후론 그녀를 잡으러 오는 마교의 무인들도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흔히 마교에서 접선지로 사용하는 곳을 찾아가 보거나, 그들을 끌어모으기 위한 비밀 암호도 사용해봤지만 모두 허사.
정말로 지금 마교에선 그녀의 존재 자체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를 포기한 것인가, 아니면···지금 그녀의 존재보다도 더욱 중요한 일이 있는 것인가.
[·········.]
···평상시 같았다면 내 말에 이런저런 유용한 의견을 내놓는 화순도 최근에는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초대 천마가 권능을 창조했던 땅으로 간다는 사실이, 그에게 작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하긴, 나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나부터가 마교로 향했던 이유가 나와 내 어머니의 혈통. 그리고 그것과 권능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그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마교로 가던 것이었으니까.
설마 그것이 권능이 최초로 만들어진 곳으로의 여정이 되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뭐···정작 그 여정의 시발점이 된 우리 아가씨께선.
“와! 이건 뭔가요?”
“응? 낭자께선 이거 드셔본 적 없으신가? 이게 우리 도시의 명물이라고, 누구든 우리 도시에 오면···.”
바깥세상을 마음껏 만끽하고 계셨다.
천마의 자식들은 암살 위험 때문에 천마 본인이 함께하거나, 그가 믿을 수 있는 부하들을 대동하지 않는 한 밖에 나갈 일이 없으니, 아마 독고화에게 있어선 이번이 첫 외출이겠지.
그것을 생각하면 그녀가 이렇게 들뜬 것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당신도 이거 한 번 드셔보세요. 엄청 맛있어요!”
“···네, 감사합니다.”
조금 전 이야기를 나누던 노점상에게서 얻어온 당과를 내게 내미는 그녀.
···그걸 생각해도 조금 과하게 들뜬 감이 없진 않지만.
황실의 숙수와도 비견되는 실력을 갖췄다는 천마의 주방장이 만든 요리를 매일 먹던 그녀에겐 불량 식품에 불과하겠지만, 그녀는 전혀 불쾌한 기색 하나 없이 웃으며 그 당과를 입에 물고 있었다.
그래도 뭐, 이 정도야 상관없겠지.
마교의 습격이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어느 정도 생긴 이상, 이제 그녀를 위협하는 요소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멋모르는 젊은 무인 몇몇이 그녀의 미모를 보고 유혹하려 들거나 내게 시비를 걸지도 모르지만, 겨우 그 정도를 ‘위협’이라 칭하기엔 나나 그녀의 무공은 그들을 아득히 능가했다.
그녀를 위협할 다른 위험 요소가 없는 이상, 억지로 지금 같은 분위기를 깰 필요는 없어 보였다.
물론···.
“···무슨 생각 하세요?”
“아뇨, 아닙니다.”
독고화가 건네준 당과를 손에 든 채 먹지도 않는 날 보며 이상한 듯 묻자, 나는 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 편안한 여정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
마교의 습격이 완전히 멈췄다는 걸 안 이후, 나는 바로 여행 방식을 바꿨다.
마교의 첩보 요원에게 들키지 않도록 일부러 돌아서 숲이나 강을 가로질러 가지 않고, 무조건 가도를 사용해 최단, 최속으로 동쪽으로 향했다.
물론 여전히 마교나 정파를 뒤집어놨던 괴집단(그들의 머리로 예상되는 사내는 물론 죽였지만, 여전히 잔당은 있을 수 있으니까)의 습격은 있을 수 있었기에 만반의 대책은 항상 하고 있었지만, 그런 대책이 무색하게 여정은 너무나 편안하고 안락하게 흘러갔다.
그리고.
“호패를 제시해주십시오.”
지금껏 관문을 지나오며 만났던 여느 문지기들과는 달리, 무림의 고수를 연상케 하는 매섭고 날카로운 기세를 눈동자 안에 품은 문지기가 정중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이 문지기만 혹시 특별한 것인가? 아니.
중원의 최동단. 길림성의 동쪽 성문을 지키고 있는 문지기는 모두가 하나하나 일당백의 고수와 다를 바 없었다.
천혜의 국경, 남만우림 때문에 딱히 성문을 만들 이유도 없던 남만과 달리, 북해는 언젠가 적이 될 수도 있다는 경각심 때문에 국경부대는 물론, 성벽에도 다른 곳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정예병을 문지기로 두고 있었다.
···그리고 국경부대에서 삼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몸담고 있었던 내 경험에 따르면, 지금 이들 또한 그들과 겨룰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여기있네.”
“감사합니다.”
지금껏 사용했던 가짜 호패(관에서 황실 어사라는 거 들키지 말라고 만들어 준 물건이다. 절대 내가 만든 거 아니다.)와 달리, 이번에는 내 진짜 인적 사항이 적힌 호패를 내밀었다.
별다른 위험은 없다곤 하지만, 그래도 동이 또한 외국. 국가에서 허락받은 몇몇을 제외하곤 출입을 엄격히 금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런 허가는 받지 않았지만, 황실 어사에게는 그런 것조차 무시할 수 있는 초법적인 권한이 있었다.
‘반역을 제외하곤 어떤 것으로도 죄를 묻지 않는다.’ 그것은 농담이 아니라 사실인 것이다.
지금껏 백금 호패를 봐왔던 모든 문지기가 경악하기 여념이 없었던 것과 달리 이 문지기는 마치 이 일을 예상이라도 한 듯 덤덤히 내 호패를 받아들었다.
물론 내가 나타날 걸 미리 알고 있었다기보단, 그만큼 그들이 훈련을 잘 받고 있었다는 방증이겠지만.
“감사합니다. 이걸로 확인은 끝났습니다. 옆에 계신 일행분은···?”
“함께 수행 중인분이네. 더 묻지 않았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내 말 한마디에 잠깐이나마 서려 있던 의문을 순식간에 지우는 문지기.
···이거 진짜 북해의 그 문지기 수준인데? 혹시 파견 나온 건가?
“혹시 최근 동이의 정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는가?”
“정세라면 어디 측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고려, 유목민, 혹은 영산에서 들이박혀 사는 괴짜 선인들···누구라도 상관없네. 최근 특이한 동세를 보이는 이들이 있는가?”
독고화가 건네준 쪽지. 그러니까 갑골문에는 그녀가 찾고 있는 이들이 동이에 있다는 건 확실하게 적혀 있었지만, 그들이 정확히 어떤 존재이고, 어디에 속해 있는가에 대해선 전혀 적어 놓지 않았다.
애초에 적혀 있었다고 해도, 무려 수천, 어쩌면 수만 년 전의 존재들일 테니, 그 세력이 지금까지 온전히 남아있으리라는 법도 없다.
하지만 반대로, 이런 초월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흔적이 모조리 사라졌다? 그런 것도 말이 안 되긴 매한가지.
그 후손이던, 제자던,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어떠한 방법이건, 그들은 분명 어떤 식으로라도 남아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들이 아직도 그런 힘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면, 지금 중원을 병들게 하고 있던 그들의 존재를 느끼고 있을 수도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어느 정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일 터.
내 질문에 드디어 처음으로 이 문지기의 표정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기색을 내비쳤다.
“으음···.”
이마에 깊은 주름을 새긴 채 침음성을 흘리는 그.
···역시나 무리인가.
조금은 희망적인 관측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쩌면 완전히 맨땅에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고민의 기색을 내보이고 있는 그에게 나는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아니, 없다면 괜찮네. 무리한 질문을 했군.”
“아뇨, 그게 아닙니다.”
응? 그게 아니라고?
내 말에 바로 고개를 흔드는 문지기. 그는 쓰던 인상을 풀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말을 잊지 못한 건 그런 경우가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어느 부분부터 설명해 드려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많다니···설마 동이 쪽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이상해지기라도 했다는 건가?”
“이상해졌다, 라고 말한다면 너무 극단적이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보이던 것과 다른 태도를 보이는 이들이 많습니다.”
문지기는 하나하나 손가락을 꼽으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최근 저희 명의 상단과 거래를 하고 있던 고려는 그 거래 선을 끊었고, 평원을 떠돌던 유목민들은 각자의 터전을 잡은 채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거 이상하군.”
고려에서 거래를 일시 중단하던 일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자국 내에서 사용하기 위한 인삼을 수량을 확보하기 위해서라거나, 타국에서 밀려들어 온 질 떨어진 인삼들 때문에 가격 보전이 힘들어서라거나, 그게 아니라면 고려 내 정치 상황으로 수출을 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거나, 같은 여러 이유로 말이다.
···하지만 이번 거래 중지는 그런 이유에서 나온 건 아닌 듯했다.
인삼은 기본적으로 약재. 심한 전염병이 돌거나, 아니면 뭔가 큰 전쟁이 없는 한 일부러 보관할 이유는 없는 물건이다.
“고려에 최근 큰 재해라도 있었나?”
“아니요, 그런 보고도, 이야기도 없었습니다.”
문지기의 말이 사실이라면, 갑자기 고려 내 인삼 수량이 떨어질 이유는 없다는 소리였다.
더군다나 고려 인삼은 현재 최고가를 찍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닐 정도로 중원 전역에서 팔리고 있었고, 지금 고려의 정치 상황도 태평성대는 아니더라도 크게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 없었다.
즉, 현재 명나라에서 보기엔 고려는 정말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인삼 수출을 갑자기 끊어버린 것이다.
유목민의 경우는 더했다.
자신들이 기르는 가축을 먹이기 위해 끊임없이 평야를 떠돌며 풀을 찾는 이들이, 갑자기 한곳에 정착했다는 것은 사실상 자신의 가축을 모두 포기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들도 생각이 있다면 어느 정도 풀이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겠지만, 그래도 그것도 무한하진 않을 터.
그들에게 가축은 곧 자신의 모든 것.
그것조차 포기할 정도로 큰일이 지금 그들에게 닥쳤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가 있나?”
“아니요, 정확히는 문제라기보단 소문입니다만···.”
말해도 되나, 안 되나. 그런 고민하는 기색을 잠깐 보이던 문지기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최근 저희 현의 현령님에게 자신을 신선이라 칭하는 이들이 몇몇 찾아왔습니다.”
“신선? 동이의 영산에 살아가는 그들 말인가?”
“네. 아시다시피 그들은 산에서 도나 선술을 익히는 데에만 주력하기 때문에 도시를 찾아오는 일이 없기에 현령님께서도 뭔가 중요한 이야기인가 싶어서 그들을 들이라 하셨죠. 그런데 거기서 그들이 꺼낸 이야기가 좀···기괴했습니다.”
“기괴하다?”
“···네. 사후세계의 것이 현세에 찾아와 큰 혼란을 초래할 터이니, 그것을 방지하라···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사후세계라는 단어에 가만히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독고화도 귀를 기울였다.
“다른 이들이 말했다면 헛소리 취급했을 이야기지만, 아무래도 말을 꺼낸 이들이 이들인지라 현령님께서도 저희에게 단단히 일러두셨죠. 혹시나 수상한 자가 있으면 바로 보고하라고요.”
“···현령은 지금 현 내에 있는가?”
“아, 네. 현청에 계십니다.”
“좋아.”
문지기에게서 호패를 돌려받고, 그걸 품 안에 다시 넣은 뒤 바로 그에게 말했다.
“현청으로 안내해주게. 현령과 이야기를 좀 나눠봐야겠어.”
“네, 알겠습니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뒤를 따라, 나와 독고화는 현청으로 향했다.
어쩌면, 이번 일도 다른 여정들처럼 만만치 않을 것 같다는 예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