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교제일화(1)
내가 말을 꺼내자마자 짙게 깔리는 끈적한 살기.
보통 간 큰 무인이라도 몸서리치게 할 끔찍한 살기였지만, 내게는 오히려 숨겨놨던 과거를 떠올리게 만드는 계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 방식은 진짜 몇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구나.
“살기는 날카롭지만 내공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구나. 무공을 익히는 대신 살기를 뿜는 법이라도 익혔더냐?”
움찔.
내 말에 맨 앞의 사내를 제외한 다른 첩보 요원들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왜냐고?
내 말이 사실이거든.
이건 농담이 아니다. 첩보 요원이 적을 마주쳤을 시 최선의 대책은 자신이 물러나는 것이고, 차선은 상대가 물러나게 만드는 것이다.
서로 피 터지게 싸우는 건 하수 중 하수. 첩보 요원이라면 절대로 지양해야 할 사태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독고화를 무조건 데려가야 상황. 그런 중에 먼저 피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내게 물러나도록 만들 생각이었던 모양이지만···.
이미 그들의 수법 모두를 알고 있기도 하거니와, 애초에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 정도 살기에 두려움을 품기엔 무공의 격차가 너무나 심했다.
살기에도 당당한 내 모습에 맨 앞에 선 사내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가 지금 생각한 걸, 그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다.
하긴, 저 녀석이 정보 쪽에서 첩보 쪽으로 넘어간 건 눈치가 빨라서인 것도 있으니까.
잠깐 고민에 빠져 있던 녀석은 바로 뒤에 있던 부하 중 하나를 바라본다.
저 녀석을 제외하곤 가장 내공이 높고, 다리 근육도 튼실한 놈이다. 일부러 저렇게 바라본다는 이유는···.
물으나 마나다.
아마 다른 놈들이 나를 공격하고, 저놈이 아군을 데리고 온다, 그런 속셈이구만.
“쳐···!”
하지만, 상대가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았다.
그놈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창을 휘두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저 아무렇게나 휘두른 것처럼 보이지만, 웬만한 경지에 이른 자라면 지금 내가 한 일을 보고 엄청 놀랄 것이다.
“흡?!”
봐봐. 내 말 맞잖아.
여기서 가장 무공의 경지가 높은 독고화는 내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 깨닫고 숨을 들이켰다.
창에서 뿜어져 나온 여섯 개의 무형의 기운은 곧 바늘처럼 얇게 변해 놈들의 전신에 박혀들었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빳빳하게 굳은 채 뒤로 넘어지는 여섯 명의 사내들. 그 모습에 놀란 독고화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비명을 내지르듯 내게 물었다.
“다 죽인 거예요?!”
“아니, 그냥 다 점혈만 해놓은 거요. 더 쫓아오지 못하도록 수혈을 짚었고, 깨어나고도 말을 못 하도록 아혈도 짚어놨지. 아마 하루 이틀은 꼬박 아무 말도 못 할 거요.”
내 말에도 여전히 의심스러운지 쓰러진 여섯 사람에게로 다가가는 독고화. 한 사람, 한 사람 진맥을 짚어보고 나서야 내 말이 사실이라는 걸 깨달은 그녀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안해요, 기껏 도와줬는데 의심해서.”
“아니, 상관없소. 그보다.”
다시 내게 다가온 그녀를 의심스럽다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들은 당신 적이 아니었소? 왜 그토록 죽고 사는 것에 신경을 쓰는 거지?”
흠칫.
내 말에 순간 그녀의 안색이 표변했다.
물론 내가 전후사정을 몰라서 이런 말을 꺼낸 건 아니다.
내가 알려고 하는 건 딱 하나.
왜 마교 안에서 평생을 살아왔던 그녀가 밖으로 뛰쳐나왔냐는 것과, 왜 첩보 요원이 그녀를 잡으려고 이렇게 뛰쳐나왔냐는 것.
전자는 전혀 감이 안 잡히지만, 후자는 조금은 감이 잡힌다.
물론 아주 만약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그건···일단 사정이 있긴 하지만, 이쪽 사람들은 저희···가문의 사람이에요. 명령 때문에 저를 잡으러 온 거긴 하지만, 그들이 죽는 건 바라지 않으니까요.”
“가문의 명령···흠, 가문이라.”
그거 더럽게 크고 넓은 가문이네요, 이 아가씨야.
내가 의심스럽다는 듯 턱을 매만지면서 생각에 빠진 척을 하고 있자, 그녀는 자신의 거짓말이 들키기 전에 내 신경을 다른 데로 돌려야겠다고 생각한 것인지 바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 그것보다! 지금 일단 빨리 이 자리에서 떠야죠! 저를 쫓아오고 있는 사람은 이들뿐만이 아니라고요!”
그렇긴 하겠지.
이 첩보 요원은 어디까지나 척후병. 목표의 위치를 다른 사람한테 알리는 게 최우선 임무다.
아마 여기에 겨우 여섯 명밖에 없는 이유도 몇 명을 후방에 보내 다른 부대에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지금 여기서 싸우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래 봐야 들키는 건 시간문제.
뭐···나야 어느 쪽이건 상관은 없지만.
“···알겠소. 궁금한 건 나중에 묻고 지금은 일단 움직이지.”
마교에 가기는 해야 하지만, 일단은 이 아가씨가 대체 어디로 가려는지부터 알아볼까.
어차피 이 아가씨도 내가 마교로 가려던 이유 중 하나였으니까.
그녀를 뒤따라 오는 적들은 어쩌냐, 하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내겐 그리 큰 문젯거리가 되지 못했다.
정보부와 첩보부는 거의 형제와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서로 가까웠다.
첩보부에서 정보를 얻어오면 우리 정보부에서 그걸 관리하고, 정보부에서 수상쩍은 정보가 있으면 가장 먼저 알려주는 것도 첩보부였으니까.
덕분에 그들의 전법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어떻게 작전을 진행하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알고 있다는 건 아니더라도, 몇 년 전 전법이야 모조리 파악하고 있지.
처음에는 너무나 느릿하게 자리에서 벗어나는 내 모습에 답답하다는 표정이었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찾아오지 않는 추격자의 모습에 뭔가를 알아차린 듯 입을 다물고 내 뒤를 따라왔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슬슬 숲을 벗어날 낌새를 보이자 바로 그녀를 향해 말했다.
“그놈들의 추격은 어느 정도 벗어난 것 같군요.”
“네···. 그렇네요.”
“이제는 낭자의 이야기를 좀 자세히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일단 당장 내 정체를 알리는 건 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그녀가 마교를 나온 이유를 알아내는 데에 ‘내가 당신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봤고, 당신 아버지에게서 마지막 부탁을 들었다’라는 걸 말해주는 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듯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그녀가 먼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는데, 내가 나서서 ‘당신 독고화지? 내가 당신 아빠 독고삭한테 부탁을 받았는데 당신한테 미안하데.’라고 말하면 뭐라고 생각할까?
아! 아버지의 유언을 전해주시러 오신 분이군요. 고마워요, 흑흑, 이라고 할까, 아니면 너 내가 어떻게 독고화인줄 알았냐 이 새끼야, 하면서 달려들까.
뭐···일단 내가 아는 성격대로라면 절대 눈물을 흘릴 사람은 아니라는 것만 말해두자.
지금이야 마교에서 도망치는 몸이고, 내 무공의 경지가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는 걸 알아서인진 평범한 아가씨 행세를 하고 있지만, 내가 그녀의 정체를 안다는 걸 알면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
내 말에 잠깐 뭔가를 고민하던 그녀는(아마 어떻게 마교 소속인 걸 밝히지 않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한 거겠지)곧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저는 청해의 한 지방에 있는 가문의 장녀로, 오직 가문 내에서만 평생을 살아왔던 몸입니다.”
“흐음, 그랬구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있던 숲은 청해와 신강의 사이에 위치해 있었으니, 그녀의 대답에 모순은 없었다.
“제가 어릴 적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저는 아버지의 명에 의해 가문에만 갇혀 있었죠. 사실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밖으로 나가는 것 외엔 정말로 모든 걸 할 수 있었으니까요.”
“축복받은 삶을 살아오셨구려.”
“뭐···틀린 말은 아니네요.”
천마의 딸이면 축복받긴 했지.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하지만 제가 나이를 먹고, 혼인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이야기가 달라졌어요.”
그래, 이게 문제지.
“아버지께서 제 혼약자라 데려온 남자가 있었지만···저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확실히 옥천이 딱히 좋은 신랑감은 아니지.
보통 천마의 배우자인 역대 마화들은 마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게 세간의 인식이지만, 사실 절대 밖으로 못 나간다는 건 아니다.
대부분 평생 마교에만 사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원하는 건 마교 내에서도 얻을 수 있으니 단지 마교를 나가지 않으려 할 뿐, 나가길 원한다면 얼마든지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옥천은 그 모든 것을 금지시켰다.
독고화가 무공을 익히는 것도, 지식을 쌓는 것도, 심지어 밖으로 나가는 것도 금지한 채 오직 자신의 숙소 내에만 갇혀 있도록 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녀가 나올 수 있었던 때는 딱 하나. 천마가 직접 참여하는 행사에 오직 그를 위한 장신구가 되어줄 때뿐이었다.
아마 그녀가 자신 이상으로 다른 이들의 존경을 받는 걸 원치 않는 거겠지.
그 성격은 이미 예전부터 그랬는지, 그녀는 옥천의 이름을 직접 꺼내지 않았음에도 벌써부터 혐오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도망쳐 나온 거군요?”
“···꼭 그 이유 하나 때문만인 건 아니에요.”
그녀는 내 말을 작게 부정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말씀드렸죠? 저희 어머니께선 제가 어릴 적 돌아가셨다고요. 아버지에겐 한 번도 말씀드린 적 없지만, 저는 항상 그 죽음이 수상했어요.”
그녀의 어머니라면 분명···천하제일화 서란인가?
보통 마교 내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인은 마교제일화의 이름을 받기 마련이다.
하지만 딱 그뿐.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해도, 천하제일화라고 불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르다.
[마교의 아이면서 천하의 사랑을 받은 아이는···그 아이가 처음이었지.]
마교의 역사가 곧 삶이나 마찬가지인 화순이 그렇게 말할 정도로 그녀는 정말 천하 만민의 사랑을 받았다.
마교 고수의 딸로 태어나, 그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강호 무림으로 나가 여성의 몸으로 수많은 협명을 남긴 그녀.
본디 마교에 적대적인 정파조차 그녀의 업적에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고, 수많은 정파인이 그녀를 친우라 부르기 주저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명성은 마교에서도 똑같은 위력을 발휘했다.
높은 직위에 있는 마교인이라면 공공연하게 마교 밖으로 나돌 수 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조용히 나왔다가, 조용히 들어간다는 느낌에 가깝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 없이 자신의 이름을 어디서든 당당하게 밝혔으니, 본래대로라면 마교 안으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어야 했지만···.
그녀의 명성과 무공은 그런 철의 법규조차 무시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당시의 천마였던 독고삭의 아버지. 독고귀조차 함부로 쫓아낼 수 없을 정도였으니, 어쩌면 대대로 전해지던 천마의 이름을 그녀에게 건네야 할지도 모른다, 라는 말까지 나돌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당시 후대 천마로 예정된 사나이는 바로 역대 천마 중에서도 손가락 내에 꼽히는 강함을 가진 괴물. 독고삭이었으니까.
당시 마교는 누가 천마의 이름을 얻게 될지 매일 내기판이 벌어졌다는 말까지 있었다.
약관의 나이로 이미 천하에서도 이름을 날리고 있던 여장부, 서란?
당대 천마인 아버지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올랐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던 독고삭?
하지만 무슨 기이한 운명의 장난인가.
서로 천마의 자리를 놓고 다툴 줄 알았던 두 사람은, 오히려 서로 사랑에 빠지고 만 것이다.
결국 천마의 자리는 자연스럽게 독고삭이 물려받게 되고, 서란은 그의 아내가 되어 독고화를 낳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독고화를 낳고 난 뒤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서란이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그 아이가 죽은 날, 괜히 천하가 울었다고 마교에서 슬퍼한 게 아니야. ···독고삭 그 녀석이 정파와 평화 기류를 만들게 된 이유도, 그 아이가 엮여 있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였으니까.]
당시에는 나도 마교에 없었던지라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정보부에 남아있던 당시의 정보에 따르면 화순의 말은 정말 한 치의 과장도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죽음이 수상했다는 말은···무슨 소리지?
[글쎄···? 물론 고강한 무인이 갑자기 병으로 목숨을 잃는 건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전혀 없었던 건 아닌데.]
독고삭의 옆에 거의 붙어살았던 화순조차 모르는 의문의 죽음.
그러고 보니 독고삭도 내게 부탁했지.
독고화에게 서란의 일은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
···뭔가 나도, 그리고 화순도 모르는 비밀이 세 사람 사이에 있는 건가?
“그 말인즉···당신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 가문을 나왔다는 말씀입니까?”
“네. 그런 말이죠.”
“그렇다면 가문 내에서 알아내는 것이 더 좋을진대, 어째서 가문 밖으로···?”
내 말에 그녀는 잠깐 주저하듯, 입을 열었다가 멈추길 몇 번이고 반복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음···지금부터···그 이유를 말씀드리긴 할 건데···.”
···뭐야, 왜 이렇게 말을 끌어?
이 아가씨가 원래 이런 성격이 절대 아닌데, 대체 뭘 말하려고 이러는 거지?
“그···절대 미친년으로 보지 마시고요.”
아니, 이미 반쯤은 그렇게 보니까 그런 건 걱정하지 마세요.
“저, 혹시···당신은···사후세계를 믿나요?”
“사후세계라면···죽은 자들이 가는 곳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뭐···저희 가문은···그, 조금 특이한 종교를 믿는데, 그 종교에선 사후세계를 아주 특별한 공간으로 보거든요. 그리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품을 뒤적이더니, 한 장의 자그마한 쪽지를 내밀었다.
“···찾아냈어요.”
“뭘 말입니까?”
“이미 사후세계로 떠난 죽은 자와 이야기할 수 있는 방법을요.”
“···네?”
그녀의 기막힌 말에 나는 순간 연기를 해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옆에 있던 화순의 한 마디.
[···지금까지 천마의 핏줄 중에서 미친놈을 여럿 봤지만, 얘도 만만치 않구나.]
···내 말이 그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