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파로(2)
“잠깐! 멈추시오!”
성도의 입구의 앞 문지기의 우렁찬 고함에 고삐를 늦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오?”
“이곳은 신분이 확실히 보증된 사람만 들어올 수 있소. 호패(號牌; 명나라 시대의 신분증명서)를 보여주시오.”
딱딱하게 굳은 표정과 꽉 다문 입까지. 겉으로 봤을 땐 맡은 바 임무를 끝까지 관철하는 훌륭한 문지기처럼 보이지만···.
힐끔.
그의 뒤편에 열린 성문과 그 너머로 보이는 화려한 불빛.
도가의 명문이라는 화산파의 코앞에 만들어진 화류계의 불빛을 후광처럼 두른 그를 믿기란 쉽지 않았다.
“여기 있소.”
소림사를 떠날 때 성하 공주에게 이것저것 도움이 될만한 물건을 여럿 받아왔다.
이 호패 역시 그중 하나. 이 조작된 호패는 내 신분을 완벽하게 숨겨줄 수 있었다.
아니, 조작되었다곤 말하기 힘들려나.
다름 아닌 황궁에서 직접 발급한 호패이니, 오히려 진짜라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 호패와 내 얼굴을 몇 번 번갈아 본 문지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호패를 내게 내밀었다.
“실례했소. 최근 이 근처의 소문이 영 심상찮은 것이 많아 출입자의 신분을 철저히 증명하라는 명령이 있어서 부득이하게 막았소.”
“아니, 괜찮소. 윗대가리가 다 그렇지. 아랫사람들 힘든 건 생각 안 하고 일단 시키기만 하거든.”
출처는 내 인생이다.
“하하하! 내 말이. 자, 신분증명은 확실히 되었으니, 어서 들어가시오.”
내 농지거리에 조금은 표정이 풀어진 문지기. 그런 그에게 손을 흔들고선 거리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내가 발걸음을 옮긴 곳은 당연히 화산파···가 아니라, 그 정 반대편.
무인이라면 발을 들이는 일도, 들이고 싶지도 않은 그곳.
“누구n!”
아까의 문지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창까지 들이밀며 나를 향해 외쳤다.
“이 멍청한 무인 놈이 실성했나? 여기가 어딘지 알고 온 것이냐?! 현령께서 기거하시는 현청이란 말이다”
할 말 못 할 말 다 섞어서 외치는 문지기 하나와 그 옆에서 킥킥 웃고 있는 두 번째 문지기.
···문지기들 꼬락서니가 이런 걸 보니, 일단 제대로 오긴 왔네.
심상찮아 보이는 무기 두 자루를 등에 멘 무인에게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일 수 있겠지만···.
스윽.
그것도 사람을 가리면서 해야지.
평상시였다면 그냥 넘어갈 실수도, 지금은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내 진짜 원수에게 복수할 수 있는 순간이 코앞으로 다가온 이때는 더더욱.
아까 성도의 문지기에게 건넸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검게 염색된 상아 호패를 그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냐?”
“그쪽 윗대가리한테 보여줘. 그럼 알아서 나올 테니까.”
“뭐? 그게 무슨···?”
“아, 참고로 말은 길게 안 하는 편이 좋을 거야. 입은 재앙이 나오는 구멍이거든.”
꿀꺽. 내 말에 입을 다문 문지기는 허겁지겁 현청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뒤.
우당탕탕!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달려오는 두 사람. 하나는 내 호패를 들고 갔던 문지기고, 새로운 하나는 고급스러운 비단옷을 입고 있는 덩치 큰 사내였다.
“헉, 헉, 헉.”
여기까지 뛰어오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몇 번이고 숨을 몰아쉬던 사내는 꿀꺽, 침을 삼키고 고개를 숙였다.
“화, 황실 어사께 소인이 고개를···!”
“아, 됐고. 그냥 안으로 들어가기나 하지. 앞으로 할 일이 많으니까.”
“아, 넵! 그, 그럼 이쪽으로 오시지요.”
딱히 인사받으러 온 것도 아니고, 지금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내 말에 몸을 일으킨 현령이 앞서서 나를 현청 안으로 안내한다.
흠칫!
현청 안으로 들어가기 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웃기 바쁘던 문지기가 내 시선을 느끼고 몸을 떨었다.
“그쪽은 입 말고 행동을 좀 조심하지. 입 나불거리다가 죽는 사람도 많긴 하지만, 행동 잘못하다 죽는 사람이 더 많긴 하거든.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좋아. 우렁차니 좋네.”
툭툭.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준 뒤,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현령의 뒤를 따라 현청 안으로 들어섰다.
복수를 위한 준비는 여전히 진행중이었다.
*****
황실 어사.
동창이나 암행부 등 황궁의 비밀 감찰 기구가 정보를 얻기 위해 파견하는 다른 어사들과 달리, 황실 어사는 오직 황제나 그의 대리인만이 임명할 수 있다.
물론 임명되는 경우는 극히 적었지만, 한 번 임명되면 그 권력은 절대적.
말 그대로 황실을 제외하곤 모든 사람을 즉결 처분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원한다면 금군을 포함한 모든 병력을 징집할 수 있었으니, 말 그대로 황실의 대리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 때문에 현이나 군. 그리고 성에서는 황제와 같은 권세를 누리는 현령과 도독. 성주들도 황실 어사만은 황제의 숨겨진 은장도라 부르며 두려워했으니.
오들오들.
“꿀꺽.”
···지금 내 앞에 불려온 관원들이 이토록 두려움에 떠는 것도 당연했다.
지금 현령의 자리에 앉아있는 내 앞에는 화산파가 있는 현의 현령은 물론, 태수와 도독까지 와서 내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현령에게 명령하여 그들을 부른 지 단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다.
만약에 내 부름에 거절했다면?
혹시 내 명령을 듣지 못할 정도로 구린 점이 있는 게 아닌가, 하면서 완전히 뒤집어 놨을 테고, 그들도 군관인 이상 구린 점 한 둘은 나올 터.
그걸 역모로 엮어서 황실에 알리는 것쯤이야, 내겐 일도 아니었다.
뭐, 이 인간들도 그걸 다 알고 당장 이쪽으로 달려와서 고개를 박은 거겠지만.
“오기 전에 이미 현령에게 이번 일에 관해선 이야기를 다 들으셨소?”
“네, 넵!”
고개를 박고 있던 세 사람 중 도독이 대표로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반응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최근 명성 높은 도문인 화산파의 타락에 대해선 그대들도 잘 알고 있겠지요?”
“·········.”
“·········.”
“·········.”
내 말에 순식간에 입을 다무는 세 사람.
으음, 이 반응만 봐도 다 알겠네.
[셋 다 아주 배 터지게 받아먹었구만.]
뭐, 당연한 일이지.
화산 아래에 있는 화류계의 구 할이 화산파와 엮여있다는 건 이미 신승 어르신이 남겨놓은 서책으로 다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것들을 만들 돈과 권력을 어디서 얻었느냐는 것.
돈은 아마 온갖 더러운 짓을 다 하면서 모았을 테고, 그것을 만들 수 있는 기반은 이들에게 적당히 이득 좀 먹여주면서 닦았겠지.
내 등장에 그들이 필요 이상으로 벌벌 떠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최근 명성 높았던 도문, 화산파의 타락에 황상께선 아주 크게 실망하고 계시오.”
흠칫!
갑자기 달라진 말투와 진중한 목소리에 세 사람의 몸이 크게 떨렸다.
“그런데 그것이 화산의 독단적인 문제인지, 아니면···우리 명의 관원이 엮여있는 일인지···황상께선 그것을 궁금해하신다는 말이오.”
내 말이 점점 이어져 나갈수록, 고개를 숙인 그들은 몸을 크게 떨기 시작했다.
이거 식은땀이 삐질삐질 나오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구만.
“저, 저희는 그저 황상에 대한 충성심만 있을 뿐입니다. 그들의 편의를 봐준 것도, 오직 그런 마음으로···.”
“아, 아아아. 괜찮소, 괜찮아. 그렇게 변명할 필요 없소. 다 서로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애초에 대단한 것도 받아먹지 않았을 거고. 안 그렇소?”
하지만 이들의 처벌은 내가 할 일이 아니다.
내가 할 일은, 해야만 일은 딱 하나.
그것을 해내기 위해선, 필요 이상으로 이들을 몰아붙이는 건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다.
그래서 그들이 빠져나갈 구멍도 하나 만들어줬고.
“그, 그렇습니다!”
“그저, 그저 의례 주고받는 것만 받았을 뿐입니다!”
“황상께서 신경 쓰실만한 그런 큰일은 없었으니, 황실 어사께서도 심려치 마시옵소서!”
이야, 목숨 하나 걸렸다고 그 노련한 관원들도 바로 고개 박고 비는구만.
하긴, 원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도 이 사람들을 즉결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하지만.”
툭.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한 번 두드리며 입을 열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뭐라 나불거리던 이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나야 이해하고 그냥 넘어 가준다 해도, 황상께선 확실한 대답을 원하오. 그냥 항상 있던 일이다, 전부터 그랬다, 넘어가도 딱히 상관없는 일이다. ···그런 보고를 올렸다간 세 사람의 목 옆에 내 목을 위한 자리도 마련될 판국이거든.”
“그, 그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 사람이 이번 일에서 벗어날 방도가 아무것도 없느냐?”
쿵.
“그건 또 아니지.”
“어떤 방도입니까?”
“간단하오.”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 아래로 내려가, 그들을 하나하나 직접 일으켜 세운다.
마치 금방 강에서 나온 듯 흠뻑 젖은 세 사람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치며 그들이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설명했다.
“예부터 과를 지우는데 제일 좋은 방법은 공으로 덮는 일이라 하였으니, 세 사람이 이번 과업에 훌륭한 공을 세운다면, 황상께서도 그대들의 죄를 눈감아주실 것이오.”
“···뭘 하면 되겠습니까?”
“곧 화산파에 직접 쳐들어갈 생각이오. 그들이 벌인 죄를 낱낱이 밝히고, 그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하니 말이오.”
“그 말은···황상께선 화산파의 멸문을 바란다는 말씀입니까?!”
“멸문···정도는 아니오. 그저 옳은 뜻을 품은 이들만 남겨놓을 것이란 소리지. 물론 그 규모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줄어들겠지만, 대신 천하 만민이 알던 옛 화산파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오.”
“그렇다면 저희는 거기서 무얼 하면 되겠습니까?”
세 사람은 이미 어떤 식으로라든 공을 세우기 위해 잔뜩 혈안이 되어 있었다.
만약 내가 당신들이 칼을 쥐고 화산파로 뛰어가라 해도 당장 따를 만큼 말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만한 일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대들이 차출할 수 있는 병력을 모두 모아, 내가 정한 일자. 그리고 일시에 화산을 둘러싸시오.”
“화산을 둘러싸라···화산파로 직접 진격하시진 않는 겁니까?”
“필요 없소. 화산파로 올라가는 건 나 하나면 충분하니.”
혼자 올라가겠다는 말에 세 사람이 의문의 눈초리를 내게로 향했지만, 나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건 나의 복수다.
나만의 복수여야 한다.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는 일은 절대로 없다.
이번 일을 위해 소림사 밖을 나왔던 그때부터 이미 정해놨던 일이다.
“그대들은 혹시라도 아래로 도망쳐 내려올 화산파 무인을 잡아주기만 하면 되오.”
“아, 알겠습니다.”
“단, 정말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막아야 할 것이오. 한 사람이 도망치면···.”
스윽.
손날을 세워 그들 중 제일 높은 관직인 도독의 목에 가져다 댄다.
칼보다도 더욱 싸늘한 예기가 느껴지는 손날에 도독의 눈동자가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세 명의 목숨은 내가 직접 거둘 것이오.”
“며,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좋아.”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현령의 자리로 돌아가다, 깜빡하고 미처 말하지 못한 부분을 말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아, 물론 이번 일은 절대 알려져선 안 되오. 만약에 오늘 이후 화산파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면···.”
싱긋.
“역적을 도운 것으로 알고 관련된 사람들의 구족까지 멸할 터이니, 절대로 오늘 일이 세어나가지 않도록 하시오. 알겠소?”
“넵!”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대답을 꺼내는 세 사람.
역모라는 단어에 기껏 멈춘 땀을 다시 흘리는 세 사람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본디 내 성격답지 않은 일이라는 건 알지만, 이번 일만큼은 어쩔 수 없다.
어느 때보다도 철저하게, 누구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내 복수를 위한 무대를 준비해야만 하니까.”
세 사람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