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파 내전(3)
화산파의 형제들 맞은편에 선 순간, 도인현의 마음은 오히려 편안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기이한 일이었다. 평생을 함께했던, 그리고 함께할 줄 알았던 사형제들의 맞은편에서 검을 들어 올리는 데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니.
물론 찝찝함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지금껏 어렴풋이 짐작만 하고 있던 최악의 가정이 현실이라는 걸 알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형제에게 칼을 뻗는 게 어찌 기쁠까.
하지만 그런 일말의 찝찝함조차 사형제 중 몇이 자신의 편에 서서 검을 뽑은 순간, 마치 봄날의 눈처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혹시나, 라는 자그마한 미혹. 내가 틀린 게 아닐까 했던 후회도 함께.
“네놈들도 저놈과 다를 바 없어! 모두 똑같은 놈들이야!”
고오오!
본색을 드러낸 명석천은 더 이상 힘을 숨기지 않았다.
화산파의 무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온색 계열의 기운과는 전혀 다른, 차갑고 싸늘한 푸른 기운을 뿜어내며 다가오는 그는 몇 번 마주한 적 없던 도인현은 물론, 어느 정도 연배가 되는 다른 화산의 고수들 또한 경악하게 만들었다.
“명석천 네 이놈! 대체 무슨 무공을 익힌 것이더냐!”
“흐흐흐, 왜? 부럽나? 네놈은 평생 가져본 적 없던 무공을 얻은 것이 그토록 부럽더냐?”
“이노옴!”
파앗! 명석천을 향한 분노를 감추지 않던 화산파의 노고수는 명석천의 비꼼에 더 참지 못하고 몸을 날렸다.
사방을 잠식한 푸른 기운을 뚫고 지나가는 한 줄기의 붉은 기운. 푸른 기운의 중심지로 파고 들어간 붉은 기운은 곧 그 심장부를 꿰뚫을 것처럼 보였지만.
“커억!”
“큭큭큭! 멍청한 놈!”
푸른 기운의 심장부, 명석천에게 아직 채 닿기도 전에 노고수는 공중에 뜬 상태 그대로 비명을 내질렀다.
“내 영역 안에 순순히 들어오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우드득, 우드득!
“끄아아악!!”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들려오는 노고수의 비명. 사방으로 퍼져 있던 푸른 기운은 그저 허장성세가 아니라, 명석천의 공격 방식이었다.
물리적 실체를 가진 푸른 기운은 이미 그 자체로도 무시무시한 무기!
방금 그 기운 안으로 파고 들어간 노고수는 말하자면 잔뜩 경계하고 있는 적진으로 쳐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소원대로 해주마! 죽어라!”
“아, 안 돼!”
스걱!
노고수가 통한의 비명을 내지르는 그 순간, 한 줄기의 자색 검격이 전장을 가로질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하신공을 운용한 도인현의 검이었다.
노고수를 감싸고 있던 푸른 기운이 그 검격에 의해 명석천과 멀어지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노고수를 부수려 들었던 푸른 기운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푸른 기운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제야 주변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던 다른 화산파의 제자 몇몇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쿨럭, 쿨럭, 쿨럭.”
“괜찮으십니까!”
“나, 난 괜찮네.”
“죄송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살기에 구하러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아니, 잘했네···그런 것에 들어왔다간 자네들도 위험했을 게야. 그리고.”
노고수는 고개를 들어 자신과 다른 제자들을 지키듯 앞에서 검을 든 채 명석천과 그를 따르는 다른 화산파 제자들을 막고 있는 도인현을 바라보았다.
“도 사질···고맙네. 자네 덕분에 살았어.”
“아닙니다. 제 말을 믿고 옆에 서주셨으니,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목소리는 쾌활했지만, 표정과 행동은 그렇지 않았다.
마치 생사 대적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으로, 남은 힘을 끌어모아 검을 세우는 도인현.
조금 전 자신들의 옆에 서 있던 형제들을 향한 표정이라곤 믿기 힘들었지만, 그런 그를 마주하고 있는 그들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 오히려 얼굴 위로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들의 수는 약 칠십. 지금 도인현 측에 있는 제자의 두 배에 가까운 수였다.
스윽.
그런 명석천 측 제자 중에서도 가장 앞에 서 있던 사내가 도인현에게 다가갔다.
“흐흐흐, 도인현. 안 그래도 한창 화산파 제일의 기재니 뭐니 하며 뻗대던 네놈에게 이 힘을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사내의 적대심 가득한 말에 도인현은 인상을 쓰고 그를 바라보았다.
···기억에는 없는 사내다. 화산파를 오가며 얼굴 한두 번 마주쳤을 가능성은 있지만, 최소한 도인현의 기억에 남을 만한 사내는 아니었다.
“그래, 그 얼굴을 보아하니 기억이 나나 보지?”
···아니, 안 나는데.
하지만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을 꺼낼 순 없었다. 지금 이 분위기를 깨기도 뭣할뿐더러, 도인현의 예상이 맞다면···지금 이 수순대로라면···.
“그래! 내가 바로 화산파 내 연무대회에서 너에게 패배해 준우승으로 끝나버린 기순홍이다! 내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네놈에게 복수할 수 있다는 일념 하나로 지금까지 명석천 대협 옆에 있었다!”
파앗!
명석천이 조금 전 뿜어내던 것보다는 훨씬 못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경시할 수 없는 푸른 기운을 뿜어내는 기순홍.
“이제 진짜 누가 더 강한가를 강호 동도의 옆에서 똑똑히 알려주마!”
···역시나.
도인현이 말을 꺼낼 필요도 없이 먼저 시비를 걸어오는 기순홍의 모습에 도인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도인현은 거의 모든 내공을 사용한 상태.
조금 전 푸른 기운을 베어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한계에 가까웠다.
지금 이 상황에서 명석천이 직접,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저쪽에서 네다섯 명만 나서도 위험한 상황.
그런 상황에서 먼저 나서주는 기순홍을 도인현은 반가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겠소.”
자신만만한 기순홍을 향해 도인현은 ‘힘들지만, 힘내보겠다’라는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도전을 받아들이지.”
···남궁 소협과 함께 다니면서 배운 걸 드디어 써먹는군.
아무도 보이지 않게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도인현은 앞으로 나서는 그를 향해 검을 뽑았다.
이기기 위한 승부가 아니라, 오직 버티기만을 위한 승부를 겨루기 위해.
*****
[저 녀석 연기 괜찮네. 이젠 저런 것도 할 줄 아는 건가?]
아마 남궁무진 저 사람한테서 배웠겠지. 무림맹에서 그 인간이 하던 짓이랑 비슷해.
예상했던 것보다 상황은 복잡해졌지만, 그래도 우리 쪽으로 좋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남궁무진은 남궁세가를 이끌어 싸움을 멈추는 한편 도인현 측 화산파 제자들을 돕고 있었고, 도인현은 그런 그들을 최대한 지키기 위해 시간을 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 덕분에, 나는 더 이들을 막을 필요 없이 백팔나한을 돕기 위해 나설 수 있었다.
“전방을 지켜라!”
“최대한 막아!”
“죽여선 안 된다! 저들은 그저 약에 취했을 뿐이야!”
광전사로 화한 무인은 본인의 고통조차 무시한 채 백팔나한진에 몸을 부딪치고 있었다.
나한들이 이들과 싸움에 애를 먹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죽이지 않고 제압한다는 건 나한들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평상시의 그들에겐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다. 백팔나한진을 펼친 이상 그들은 분명한 강자요, 덤벼오는 자들은 모두 약자니까.
강자가 약자를 제압하는 방도야 간단하다. 죽지는 않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의 고통과 피해를 준다. 본디 맨손의 무공을 주로 사용하는 소림승들에게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싸우고 있는 이들은 어떤가.
고통도, 피해도 모두 무시한 채 그저 앞으로 달려들기만 할 뿐인 광전사.
설사 죽음에 가까운 통증과 상처를 준다 해도 무시한 채 마구 달려들 괴물들이었다.
아무리 수많은 실전 경험을 통해 완성된다는 나한들도 이런 싸움은 머리털 나고 처음일 것이다.
[쟤들 머리털 없는데?]
미친놈아···이럴 때 그런 농담을 하고 싶냐.
아니, 진짠데 왜 그래···궁시렁궁시렁 거리고 있는 화순을 싹 무시한 채, 진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대선을 향해 다가갔다.
“대선 대사님.”
“아! 유 시주. 어서 오십시오.”
진의 중심에서 다른 나한들에게 내공을 보내고 있던 대선은 내 부름에 빠르게 대답했다.
“저쪽 상황은 어떻습니까?”
“남궁 공자와 도 공자가 나서준 덕분에 잠시 소강상태입니다. 명석천이 직접 나오면 힘의 균형추가 조금 뒤틀릴 수 있으니, 최대한 빨리 이곳의 일을 끝내고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으음···하지만 지금 상황도···.”
진의 중심에서 진 전체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대선은 내 말에 인상을 쓰며 광전사가 몰려있는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광전사들은 그저 앞으로, 앞으로만 외치고 있었기에 좌우를 동시에 노린다거나, 혹은 진 전체를 둘러싸서 공격한다는 그런 생각은 전혀 못 하고 있었다.
대신 전방의 나한들은 죽을 맛이었지만.
“···제가 전방에 함께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유 시주. 허나 조심하십시오. 저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쇼.”
걱정 어린 기색으로 내 안전을 비는 대선을 향해 씩 웃으며 대답했다.
“누구 하나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싹 정리해드릴 테니까요.”
···안 그래도 최근 새로운 기술을 시험해보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황이었다.
신승 어르신이 남겨 놓은 서책을 정리하며 제대로 된 수련을 못 하는 동안, 나는 다른 한편으로는 혹시 내 무공들을 다른 방향으로는 쓸 수 없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소림십관에서의 경험 때문이었다.
원한다면 소림십관 따위는 원하는 대로 부수고 나올 수 있었음에도 힘을 억제한 채 빠져나왔던 그 경험.
그런 경험을 겪고 나서야 나는 나의,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익힌 천마의 무공의 문제점을 깨달았다.
너무나 공격적이고, 또 파괴적이다.
내가 원한다면 하늘조차 무너뜨릴 수 있는 오의와 극의지만, 반대로 한 번 사용하고 나면 주변을 초토화해버리기도 한다.
지금까지 나 혼자 나서는 싸움에서야 그래도 상관없었지만, 지금부터는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찌 못할 놈들을 아군과 함께 상대해야 할 일도 많아질 터.
그런 상황에서 오의나 극의를 사용했다간, 적이 아니라 아군에게 더 큰 손해를 끼칠지도 모른다.
거기서 생각했다.
혹시 내 오의와 극의의 크기나 힘을 줄일 수는 없지 않을까, 하고.
사실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일은 아니었다. 예전 성하 공주를 치료할 때, 와류를 정말로 작고 또 작게 만들어서 그녀의 혈도를 뚫었던 적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때는 정말 극한의 요행.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튀어나온 기적에 가까웠다.
하지만 앞으로 있을 여러 전투에까지 기적을 바랄 수는 없는 법.
그 기술을 완벽히 나만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어차피 시간은 넘쳐났다. 암호를 해독하기 위한 독해본을 만들 땐 내 도움이 많이 필요했지만, 그 뒤로는 그저 점검만 하면 끝날 일이었으니까.
그동안 나는 심상 수련 속에서 지금껏 상대했던 여러 무인을 꺼내 들었다.
그것도 내가 알던 강자가 아니라, 엄청난 약자들로만.
오의나 극의를 사용할 필요도 없이 손짓 한 번이면 날아갈 삼류 무인부터 그저 가만히 서 있는 것으로도 위태위태한 병자들까지.
목표는 그들에게 다섯 번의 오의와 극의를 사용하면서도 절대 쓰러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평상시의 심상 수련보다 배는 어려웠다.
상대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한 감각을 최대한 세우는 동시에 오의와 극의에 사용할 내공의 양까지 완벽하게 조절해야 한다.
무한한 내공 때문에 그저 최대한 강력한 공격만 사용하기 바빴던 내게 그런 수련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 노력에 관한 결과는?
뭐, 말할 것도 없지.
“모두 뒤로 물러서시오!”
내 말에 한창 전방을 막고 있던 나한승이 일시에 뒤로 물러난다.
미리 말을 맞춰놨기에 할 수 있는 일사불란한 움직임.
그 덕분에 만들어진 일 척의 공백.
그곳을 파고들기 위해 광전사들이 몰려드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창을 날린다!
후웅!
하늘을 가르고 광전사들을 향해 날아가는 한 자루의 창.
슈슈슈슈슉!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날아가는 수십, 수백, 수천 자루의 창!
천마창법 극의 폭우!
평상시라면 휩쓸리는 순간 주워줄 뼈는커녕 그 흔적조차 남지 않을 강맹한 공격이지만.
퍽!
“키야악!”
지금 그 공격을 맞은 광전사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은 분명하지만,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오히려 쓰러진 상태로 한껏 비명을 내지르기만 할 뿐.
어떻게든 움직여보려 하지만, 지금 놈은 그것조차 무리다.
아무리 고통도, 상처도 모르고 달려든다고 하지만 결국 인간의 몸.
마혈만 제대로 집어주면 제압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물론 자기 몸 아까운지 모르고 선천지기를 마구 사용하는 놈들의 마혈을 짚으려면 엄청나게 내공을 들여야겠지만, 내가 누구냐.
내공 하나만은 절대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인간 아닌가.
덕분에 이런 미친 짓도 가능한 거지만.
파바바바박!
“끼야아아아악!”
“키에에에에엑!”
뒤이어 날아오는 수천 자루의 창을 맞고 날아가는 수백의 광전사.
모두가 마혈이 집힌 채 땅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뒤에서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전방의 나한승들에게 말했다.
“저 사람들 좀 잘 맡아주십시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려, 지금 한창 서로 싸움을 벌이고 있는 화산파 쪽을 바라보았다.
“저는 아직 할 일이 남아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