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의 비무(1)
이렇게 그의 앞에 서는 것도 대체 얼마 만인가.
이제는 그리운 추억이 되어버린 용보대전을 떠올리며, 도인현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유현을 바라보았다.
삼천의 무인···아니, 군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들 앞에서도 유현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좌우에 서 있는 소림의 나한들 덕분이다? 아니다.
물론 백팔나한은 그 어떤 때라도 듬직한 아군이 되어줄 수 있는 이들이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수준이 비슷할 때의 이야기다.
열 배, 스무 배를 넘어 서른 배나 되는 이런 인파 앞에선, 그들도 그저 폭풍 앞의 등불.
압도적인 수의 폭력 앞에선 천하제일의 무력 집단이라는 백팔나한들 조차 그 빛이 바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도인현이 아는 유현이라면, 그 사실을 여기에 있는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저 모습.
그 이유를···도인현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강하다!’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 문파, 소림사.
그리고 그런 소림사 중에서도 최고의 인재, 최강의 무승만 모아놓은 백팔나한.
어느 누가 앞에 서도 빛이 바랠 수밖에 없는 그들의 틈바구니에서도 유현은 마치 밤하늘에 홀로 빛나는 별. 아니,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처럼 그들을 모두 압도하고 있었다.
물론 유현이 자신보다 강하다···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꿀꺽.
도인현은 유현을 바라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유현의 무력이 두려워서 침을 삼켰느냐고?
물론 두렵지 않은 건 아니다. 그저 한두 수 정도 차이라면 어떻게든 임기응변으로 대처라도 해보겠지만, 지금 유현과 자신에게는 그 정도로는 어찌할 수 없는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두려움 이상으로 도인현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다름 아닌 호승심.
한낱 두려움으로는 도저히 꺼뜨릴 수 없는 화려한 불꽃이 뜨겁게 마음을 지피고 있었다.
수년간의 폐관 수련. 그동안 수십, 수백, 수천 번을 되뇌고, 또 되뇌었던 유현과 신승의 대결.
어떤 때는 유현의 자리에 자신이 있었고, 어떤 때는 신승의 자리에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겨난 하나의 꿈.
당장이라도 검을 뽑고 그에게로 달려가고 싶다.
설사 일격에 목숨을 잃더라도, 지금껏 자신이 수련해왔던 최고의 일격을 그에게 선보이고 싶다.
이 순간에는 유현이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또 두 사람이 서로 죽고 죽여야 한다는 상황이라는 것까지 모두 잊었다.
챙.
“오오오!”
“용봉대전의 우승자가 검을 뽑았다!”
“우리의 기세를 위해 먼저 나설 셈인가?”
도인현이 검을 뽑는 순간, 척살대 측에서는 열렬한 환호가.
“으음···.”
“아직 이립도 안된 청년이 저만한 공력이라니···.”
“과연 화산에서 이번 대사를 믿고 맡길 만하군.”
소림사 측에서는 깊은 시름이 퍼져나갔다.
하지만 그런 두 집단의 분위기는 전혀 상관치 않는 듯, 두 사람은 오직 올곧이 두 사람만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멀리 떨어져 있던지라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이들은 정파의 영웅과 무림의 대적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증오로 가득 찬 목소리로 내뱉으리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유 소협. 제가 감히···.”
“얼마든지요, 도 공자.”
마치 자신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정중히 비무를 요청하는 모양새를 취하는 도인현과, 그런 도인현의 요청이 채 끝나도 전부터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유현.
지금의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는 그 모습이었지만, 오히려 두 사람에게는 이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뽑은 검을 다시 집어넣으라 하는 것만큼 무인에게 힘든 일이 없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제 억지를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살짝 고개를 숙임으로써 감사를 표한 도인현은 바로 자세를 취했다. 이제는 가만히 서있는 것보다도 더 편안한 매화검의 기수식.
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화산의 매화 향기가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누군가가 보면 일촉즉발의 상황이라 생각할, 서로의 합의 하에 이루어진 비무가 진행되려는 그 찰나.
“잠깐! 자암깐~!!!”
두 사람이 있는 곳에서부터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는 굵직하고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두 사람을 가릴 정도로 큰 그림자가 드리우더니.
쿵!
누군가가 커다란 굉음과 함께 자욱한 흙먼지를 피우는 게 아닌가!
툭툭.
“아이고, 술맛이 하도 좋아서 밤새워 마시다 보니, 벌써 출발한 지도 몰랐네, 허허허.”
겨우 가라앉은 흙먼지 사이로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터는 커다란 체구의 사내.
각자가 자기주장을 하듯 또렷한 이목구비를 미청년은 옆으로 빗겨나간 허리춤의 검을 다시 원래 자리로 돌린 뒤, 씩, 웃으며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제가 안 늦었죠? 아직 싸움 안 했죠?”
“남궁···소협···.”
도인현은 위에서 떨어진 사내, 남궁무진을 기가 막힌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야, 유 소협도 오랜만입니다. 어휴, 신수가 아주 그냥 훤하시네. 고기 없는 절밥 먹으면 그렇게 됩니까? 저도 요새 피부가 안 좋아서 좀 걱정인데, 한 며칠 숙박해도 될까요? 으하하!”
하지만 도인현이 놀라건 말건, 자기 할 말만 꺼내는 남궁무진은 지금 이 자리가 일촉즉발의 싸움터라는 사실조차 잊게 할 정도였다.
물론.
“안 그래도 언제 오시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유현은 진작부터 그의 속셈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남궁 소협도 만만치 않게 강해지셨군요.”
“흐흐, 저도 노력 좀 했습니다.”
챙!
···성격은 검에도 고스란히 나오는 것일까.
연검과도 비견될 만큼 얇디얇은 도인현의 검과 달리, 남궁무진의 검은 두꺼운 도와 비슷할 정도로 굵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쾌(快)와 환(幻)을 중심으로 하는 화산의 검과 패(覇)와 중(重)을 중히 여기는 남궁의 검의 차이겠지만, 두 사람의 성격 또한 빼다 박았다.
“자, 그럼.”
척.
방금 꺼낸 검을 쥔 채 포권을 취한 남궁무진이 저 뒤에까지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로 말했다.
“용봉대전 삼위! 창천삼검이 유 소협에게 비무를 요청하는 바이오!”
*****
응? 용봉대전 삼위라고?
안 그래도 남궁무진이 기를 끌어모으고 있는 것이 저 멀리서부터 느껴지고 있던지라 그가 언제, 어디서 튀어나온다고 해도 딱히 놀랄 이유는 없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방금 발언이 더 놀라웠다.
···혹시 과거가 또 바뀌었나?
내가 아는 과거에는 분명히 도인현이 우승했고, 남궁무진이 준우승이었는데, 왜 또 이 인간이 삼위고, 창천삼검이야?
내가 무림맹에 간 것 때문에 누구 하나가 또 고수가 돼서 준우승한 건 아니지?
···진짜 아니지?
내가 남궁무진의 대답에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뒤편으로 밀려나 있던 도인현도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남궁무진에 뒤지지 않는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용봉대전의 준우승자! 화산이검이···!”
···이젠 도인현이 준우승자라고?
아니, 남궁무진이야 까놓고 말해서 당시 도인현보다 반수. 아니, 한 수 아래여서 그사이에 낀 사람이 있으면 삼위가 된다고 쳐도, 도인현까지?
용봉대전에 나올만한 도인현의 동년배 중에 저 사람보다 강한 사람이 누가 있다고···.
“···용봉대전의 우승자! 무명일검에게!”
···네?
“비무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응?
아니, 잠깐만···.
···내가 일룡이야? 내가 용봉대전 우승자라고?
아니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신승 어르신이랑 계약 때문에 용봉대전이 다 끝나기도 전에 뛰쳐나갔는데 어떻게 그게 돼?
···그런데 저 두 사람이 동시에 나한테 고개를 숙이는 걸 보면 그럴지···도······?
아니아니아니, 그래도 이상하잖아. 왜 그때 없던 사람이 우승자가 되냐고?
저 두 사람이 동시에 내게 승복할 이유도···이유도······.
···잠깐만, 설마?
[아무래도 본 것 같은데? 너랑 신승이랑 한바탕하는 거.]
역시 그거냐!
화순의 말에 바로 그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두 사람에게 고개를 돌린다.
도인현이야 애초부터 진지한 사람이라 진상을 파악하는 데에는 도움이 안 되고, 중요한 건 남궁무진!
저 사람이라면 분명히 표정에라도···젠장.
입가에 그려진 장난스러운 미소와는 반대로, 호기가 가득한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남궁무진.
저 사람이 저렇게 호승심을 보내오는 이유야 딱 하나.
···본 거다.
이 두 사람 다, 내가 무림맹에서 신승 어르신이랑 한 판 붙은 걸 본 거다.
바로 앞에 있던 신승 어르신의 기운에 미처 주변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에서 나온 실수.
왜 겨우 몇 년 만에 두 사람 다 초절정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됐는지 이제야 알겠구만.
내 일격과 그것을 막아서고 오히려 공격을 날리는 신승.
그런 광경을 바로 앞에서 지켜봤는데 어찌 몸이 달아오르지 않을까.
“무, 무명일룡이라고?”
“지금껏 밝혀지지 않았던 용봉대전의 우승자가···정혈탐마였다고?”
“그때 정파의 정보를 빼앗아 간 거였군!”
두 사람의 발언에 시끌벅적 목소리를 높이는 주변의 관객들.
···예상했던 것과는 방향성이 좀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겠지.
어차피 내가 할 건 최대한 많은 시선을 끌어모으는 것.
처음에야 좀 놀라긴 했지만, 이번 일은 오히려 내게도 잘된 일이었다.
챙!
등에 메고 왔던 두 자루의 창.
철혼과 진양.
그것을 꺼내 양손에 꽉 쥔 채, 두 사람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두 사람의 비무 요청, 받아들이겠습니다.”
꿀꺽.
조금 전만 해도 이미 이번 싸움에서 승리를 쟁취한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던 척살대 측에서는 그 음량이 많이 낮아지고, 반대로 소림사 측에선 목소리가 커진다.
“무명일룡···당시에도 초절정 고수라는 소문이 들리던데, 과연 지금은 어느 정도지?”
“아냐, 아무리 초절정 고수라고 해도 현세대 정파 제일, 제이 고수 둘의 합공이라고? 쉽지 않을걸?”
“그렇다고 저놈은 가만히 놀고 다녔겠어?! 저놈도 어마어마한 고수가 되어 있을 거라고!”
“그래서 우리가 질 거라는 소리냐?!”
“혹시라는것도 생각하라는 소리지!”
사방에서 들려오는 예상을 들으며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싸움이 끝난 후에는 저 예상들이 과연 어떻게 바뀔까.
그런 기대와 함께.
스윽.
내 왼편에서 매화검의 기수식을 도인현.
척.
내 오른편에서 제왕검형의 기수식을 취하는 남궁무진.
···이 두 사람은 어떤 무공을 보여줄까.
또 얼마나 성장했을까.
너무나 압도적인 차이에 이제는 시시할 정도의 싸움임에도 불구하고, 이 또한 기대된다.
내가 신승 어르신의 유산을 보고 금강부동신법을 깨우친 것처럼, 그들 또한 나와 신승 어르신의 무를 보고 무엇을 깨달았을까.
그들이 완성한 무를 보고 싶다.
각자가 품고 있는 목적이니, 자신의 이름값이니, 정파에 속해있다는 소속감이니 뭐니, 그런 건 전혀 상관없는 순수한 무의 겨룸!
그러니 와라.
“선수를 양보하겠습니다.”
당신들의 무공을 내게 보여줘!
“들어오시지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사람이 동시에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