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맹 척살대(3)
파라락.
한 번의 손짓에 수십 장의 쪽이 동시에 넘어간다.
한 번에 그걸 다 볼 읽을 능력은 없지만, 상관 없다.
이미 책의 내용은 모조리 기억하고 있으니까.
“이게 마지막 권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내 질문에 바로 옆에 서 있던 대각 대사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피곤에 찌든 얼굴과 눈에 잔뜩 낀 기미.
아무리 소림사의 고수라 해도, 고령의 나이와 연이은 밤샘 업무는 그에게도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이렇게 완성할 수 있었다.
아니, 그 뿐만이 아니다.
그의 옆에서 마찬가지로 피곤한 얼굴로 서 있는 수십 명의 학승.
똑같이, 혹은 더 심하게 피곤한 얼굴에도 그들 모두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여러분들의 도움 덕분에 드디어···완성했습니다.”
쿵!
열 명이 넘는 사람도 한 번에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책상 위에 조금의 틈도 없이 가득 쌓여진 백 여권의 책.
신승 어르신이 남긴 유산.
어떤 내용 인지조차 알 수 없는 수십 권의 암호 본을 해독한 결과가 바로 이것들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이걸로···.”
“···네.”
나를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대각 대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자신들을 정파라 부르며 천하를 속인 그 자들을···벌할 수 있겠지요.”
신승 어르신이 남겨놓은 유산을 해독하는 동안, 대각을 포함한 다른 학승들 또한 점점 진실을 알 수 있었다.
그들 또한 암호를 해독하면서 거기에 담긴 내용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절망했다.
올곧다 믿었던 것이 사실은 뒤틀렸고, 바르다 믿었던 것이 사실은 악하다는 걸 알았다.
그 현실 앞에서 어느 누가 절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들은 이겨냈다.
그들이 알던 현실이 거짓이라면, 그 거짓을 현실로 만들어내겠다는 일념으로 일어섰다.
그렇게 내 옆에 서서, 그들은 함께했다.
나의 꿈이, 신승 어르신과의 꿈이, 그들의 꿈 또한 된 것이다.
그리고 눈앞의 이것이 바로 그 결과물.
수십, 어쩌면 백 개가 넘는 문파가 그동안 정파라는 이름으로 행한 온갖 범법 행위.
이 안에는 감히 나조차 상상하지 못한, 최악의 범죄까지 여러 섞여 있었다.
쿵쿵쿵!
“유 시주, 유 시주! 계십니까?!”
밖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모두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쿵!
내 대답이 채 나오기도 전에 장경각 안으로 들어 온 젊은 승려는, 몇 번이고 숨을 고러면서 두려움에 찬 얼굴로 날 바라봤다.
···정파의 진실을 알아낸 건 학승들만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소림사의 승려들. 최소한 이런 진실을 알고도 미쳐버리지 않을 만한 수련을 쌓은 사람들은 전부가 그 진실을 알고 있었다.
내게도 최소한의 아군은 필요했으니 말이다.
이 진실을 거짓이라 매도하지 않고, 순수한 진실이라 믿어 줄 사람들이.
그 덕분에 최소한 소림사만큼은 확실한 아군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들이 왔습니까?”
“···네.”
꿀꺽.
그는 겨우 숨을 고르며, 침을 삼킨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무림맹 척살대가 이 앞에 도착했습니다.”
쿵!
그 한 마디에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들떠있던 사람들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드디어 때가 왔다.
···그 사실을 모두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유 시주?”
“···준비 됐습니까?”
어떤 대답을 꺼낼진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그들의 각오를 듣고 싶었다.
“정파 전부를 적으로 돌릴 준비요.”
“···진실을 알았던 그 순간부터, 우리는 가장 앞에 서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입을 여는 이는 대각 대사 혼자 뿐이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모두 똑같았다.
“당신의 옆에 서겠습니다. 유 시주.”
“감사합니다. 그럼 가보죠···.”
툭.
백여권의 책 중 가장 맨 위에 있는 한 권.
지금 저들의 주축이자, 가장 큰 악행을 저지른 문파.
화산파의 악행이 적힌 책을 들고 그들에게 말한다.
“정파와의 한 판 전쟁을 벌여보자고요.”
*****
정파의 이름 아래에 모인 대군!
지금껏 정마대전 외에는 모인 적 없던 엄청난 인원에 놀란 건 유현 뿐만이 아니었다.
···물론 그 방향성은 크게 달랐지만 말이다.
“기분이 어떤가, 도 사질.”
“···명 사숙.”
도인현은 자신에게 말을 걸며 다가온 사숙을 올려다 보았다.
현재 이들을 이끌고 있는 건 표면 상으로는 용봉대전의 우승자인 도인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배분이 제일 높은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 모인 인원 대부분은 배분으로만 따지자면 도인현보다 높은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지금 도인현에게 다가온 명석천 또한 그런 경우에 포함되는 인원 중 하나였다.
···어쩌면 그 정도로는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 일지도 모르고.
“···그저 얼떨떨합니다.”
“하하하! 그럴 만도 하지! 자네 이름만 믿고 따라 온 사람이 무려 수천이야, 수천. 오히려 떨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할 일이지.”
“그렇습니까···?”
도인현은 명석천의 말에 힘없이 대답했다.
어떻게든 대답은 날리고 있었지만, 지금 도인현의 머릿속으로 명석천의 말은 거의 들어오지도 않았다.
'···결국 이렇게 됐나.'
지금 정파란 이름 하에 벌어지고 있는 이 광기 어린 행동을 멈추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물처럼, 점점 가속하고, 또 가속하기만 할 뿐.
무림맹에서 출발한 이천의 무인은 소림사까지 오는 동안 무려 천이나 더 늘어나, 이제는 삼천이 넘었다.
···겨우 한 사람을 잡기 위해선 차고 넘치는 병력이었다.
쪼르륵.
무언가가 흐르는 소리에 도인현은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봤다. 자신의 앞에 있는 조그마한 잔에 명석천이 술을 붓고 있는 소리였다.
“자, 한 잔 하게. 마음이 좀 풀어질 거야.”
“···아니요.”
그때 남궁무진과 함께 했던 한 잔의 술은 참으로 기분 좋았는데.
···지금은 아니다.
지금 마시는 술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몸과 정신을 망칠 게 분명하다.
“지금부터 중요한 일이 앞에 있으니까요. 술은 삼가겠습니다.”
“에잉, 사내 대장부가 남이 주는 술을 거절하면 쓰나. 딱 한 잔만 하지.”
“아뇨, 오늘은 역시···.”
“마시라니까.”
이제는 재촉을 넘어 강요에 가까운 명석천의 말투.
그리고 그 분위기까지.
'···갑자기 왜 이러지?'
사실, 그와는 자주 만나던 사이는 아니다. 애초에 화산파에 나간 적도 손에 꼽는 자신과 달리, 그는 화산파 안에 있는 시간보단, 밖에 있는 시간이 몇 배는 길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무공의 수준은 도인현보다 한참 낮지만, 대신 무림의 인맥은 도인현보다 훨씬 크고 넓었다.
표면 상에 불과한 단장인 도인현과는 정 반대 같은 사내.
사실상 이번 척살대의 단장 역시 그라고 할 수 있었다.
모일 땐 도인현의 이름값만 믿고 모인 사람들이라도, 척살단에 소속된 이후엔 대부분 도인현의 명령보단 명석천의 명령을 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도인현은 그 부분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이런 이유 불명의 척살단의 대장 놀이따위, 애초부터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그 일을 대신해주는 명석천이 고마울 법도 했지만···그 속내는 그렇지 못했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냐고?
그냥···그저······.
···그 사람 자체가 혐오스러웠다.
분명 같은 화산파의 일원임에도 자신과는 정 반대의 인물인 명석천이 본능적으로 혐오스러웠다.
···도인현 자신이 생각해도 분명 기이한 일이었다.
물론 그가 사람을 잘 사귀는 성격은 아니다. 그래도 남궁무진을 포함한 몇몇 사람이나 화산파의 인물과는 그나마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이 남자는···아니다.
그냥 아니다.
상극? 반대? 그런 걸 뛰어넘어, 그냥 싫다.
지금 그가 건네주는 술을 받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래도.
그래도 이 한 잔만 받아주면 이 개 같은 일도 끝나려나.
그런 생각을 담아 그가 건넨 술잔을 향해 손을 뻗는 바로 그 순간.
쿵!
“왔습니다!”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 온 건장한 사내에게 두 사람의 시선이 모두 그쪽으로 돌아갔다.
문을 박차고 쳐들어 온 사람의 모습에도 두 사람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이미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도인현은 그가 문고리를 잡는 순간부터 이미 그가 건너편에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어디 사람이더라···분명 지방에 있는 중소 정파의 대제자라 했나.'
하지만 도인현의 기억력으론 딱 거기까지밖에 알 수 없었다.
누가 척살단에 들어오는지도 대부분 잊고 있던 도인현이 자신의 흐릿한 기억 속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어떻게든 떠올리려던 그때, 옆에 있던 명석천이 살기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신옥의 순가장의 대제자라 했나? 분명 급한 일이 있으니 아무도 들어오지 마라고···!”
“그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움찔!
그 한 마디에 살기가 가득하던 명석천조차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 남자라면···!”
“정혈탐마!”
순가장의 대제자라는 그 사내는 진심을 담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현이 지금 바로 앞에 나타났단 말입니다!”
*****
사내와 함께 자신의 검을 쥐고 순식간에 밖으로 뛰쳐나간 도인현과 달리, 명석천은 방 안에 홀로 남아 조금 전 도인현에게 따랐던 술잔을 들어 올렸다.
“···그 남자 따위가 뭐라고 이토록 다들 헛소리를 하는지.”
유현이 나타났다는 말에도 명석천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도인현이 앉아있던 자리에 앉아 잔을 입으로 가져다 댔다.
그 순간 방 안을 잠식하는, 술과는 전혀 다른 기괴한 향.
그것은 무림맹에서 화산파의 대표가 그 장문인에게 받아 먹었던 약물과 비슷한 향을 내고 있었다.
“우흡.”
끅끅끅.
그 한 잔을 마시는 순간, 명석천의 입가와 눈매가 기이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미소로도, 다른 한편으로는 슬픔으로도 보이는 기괴한 표정.
방금 그가 따랐던 술잔에는 그때 화산파의 대표가 흡입한 마약의 몇 배가 넘는 약이 담겨 있었지만, 명석천은 그걸 마시고도 순식간에 본래의 신색을 되찾았다.
아무리 많은 마약이라도 그에게는 한순간의 여흥밖에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이 마르지 않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선 이런 마약 따위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으니.
그런 욕망을 채우기 위해선 단 하나.
"이번 일만 끝나면···."
쪼르륵.
술병 깊이 가라앉은 마약의 원재료인 독초가 잔에까지 떠올랐지만, 명석천은 그런 것 따윈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그 독초까지 포함해 술까지 모두 한입에 털어넣었다.
"···이제 누가 진짜 천하제일의 문파인지 똑똑히 알 수 있겠지."
오직 천하제일이라는 그 한 단어만이 그의 욕망을, 상실감을 채워줄 수 있었다.
와그작, 와그작.
짐승의 그것과 다를 바 없는 지독한 누린내를 풍기는 독초를 씹어먹으면서도, 명석천의 눈빛은 마치 날이 잘 든 칼날처럼 번뜩였다.
그가 그토록 원하던 것.
화산파에 몸담은 이후로 단 한 번도 잊지 않았던 그것을 드디어 이룰 수 있는 순간이 찾아 온 것이다.
*****
"오랜만입니다, 유 소협."
"마찬가지요, 도 공자."
백수십명의 승려의 옆에 선 유현.
수천여명의 무인들 앞에 선 도인현.
정파 무림의 운명을 바꿀 두 사람의 싸움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