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승의 유산(1)
후루룩.
크으, 이게 대체 얼마만의 마실 거냐.
아무리 안 먹어도, 안 마셔도 팔팔하게 움직이는 몸이라 해도 전생 현생 합쳐서 근 사십 년 넘게 해왔던 식사를 금지당하는 건 역시나 좀 힘들더라.
그래서일까. 지금 마시는 이 한 잔의 차가 마치 감미로운 꿀물 같은 느낌이었다.
“석청(石淸)은 좀 마음에 드십니까? 대부분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저희 숭산에서 나오는 석청은 중원 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오랫동안 수련하다 나온 사람이 힘내기도 좋고요.”
···진짜 꿀물이었네.
옆에서 비쩍 마른 체구의 고승이 꺼낸 말에 나는 ‘그렇군요.’하고 단답만 내놓고 찻잔에 있던 차를 마저 입에 털어 넣었다.
“그래서.”
내가 차를 다 마실 때까지 인내심 넘치는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던 방장 대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대선 사제에게 한 그 말씀···사실입니까?”
“제가 금강부동신법을 익힌 거요? 사실이죠. 안 그러면 어떻게 그 또라이 같은 곳을 빠져나왔겠습니까.”
“또, 또라이···.”
또라이 같은 곳이라니···우리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승려 중 하나가 침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그곳을 이보다 고상하게 말하는 건 불가능했다.
“못 믿으시겠으면 직접 가보시던가요. 왜 제가 이렇게 말하는지 아실 테니까.”
“으음···.”
“허어···.”
내 말에 다른 고승들은 그저 탄식만 내뱉을 뿐, 호기롭게 가겠다 나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자기들도 듣거나 읽어서 아는 거지.
저기가 얼마나 괴상한 곳인지.
물론 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미친 짓의 결과물이긴 하지만.
만약 내가 저 안에 있는 만년한철의 양과 그 가치를 설명해준다면 눈이 벌게져서 들어가겠지만···.
말 안 해줄 거다.
처음 나올 때만 해도 나와 같은 불상사를 겪을 사람들이 불쌍하기도 하고, 저 많은 만년한철을 그냥 동인으로 만들어 놓는 게 아까워서 말해주려고 했는데, 내가 어쩌다 십관으로 들어왔는지 알게 되고 나선 그런 생각도 싹 사라졌다.
나중에 내가 하나씩 떼어와서 팔아먹어야지. 이제 금강부동신법도 완성했겠다, 내가 몰래 들어온다고 알아차릴 사람이 어디 있겠어. 응?
뭐···일단 그에 대한 작전은 좀 있다가 짜고.
지금은 내가 찾아온 원래 목적부터 달성해야지.
“그런데 혹시 폐가 되지 않으신다면 하나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뭐요?”
“사조님의 심득을 온전히 전수하였음에도 어찌 처음 만났을 땐 거짓을 고하셨습니까. 만약 사실을 말씀해주셨다면 이런 사단도 일어나지 않았을 터인데요.”
아···.
···사실 방장의 말이 맞다.
내가 처음부터 신승 어르신의 심득을 받아서 그걸 쓰는 모습만 보여줬다면 내가 저런 고생은 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때만 해도 진짜 신승 어르신의 무공 같은 건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하지만 그에 대해 변명 하나 만드는 것쯤이야, 내겐 어려운 일도 아니지.
“그건 몇 가지 사정이 있습니다.”
“무슨 사정입니까?”
“신승 어르신과 이야기를 나눠 본 분은 아시겠지만, 그분은 뭔가를 전해주실 땐 선문답 같은 이야기를 자주 하셨습니다.”
당연히 거짓말이다.
중원에서부터 남만까지 다니면서 그분이 뭔가를 돌려 말하는 건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직답.
싫은 건 싫다. 좋은 건 좋다.
귀찮고 피곤한 말 돌리기 같은 건 딱 질색이라시던 분이니까.
하지만 이 사람들은 그런 걸 모른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잔뜩 미화된 신승은 어딘가 허허로우면서도 이미 반쯤 부처가 된 사람으로 생각되고 있을 테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고?
본인이 웃겨 죽겠다는 듯 끅끅거리며 말해주는 데 모르면 그게 더 바보지.
그래서 소림사에 있을 땐 억지로 자기가 아닌 척해야 한다고 답답해서 밖에서 돌아다닌다는 분인데.
“으음···확실히 사조님이라면 그럴 분이시지.”
“말 한마디에 천 가지의 뜻이 담겨 있는 분이니까.”
“하물며 그분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무공에 관한 심득이라면 몇 년이 걸리더라도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
봐봐, 속잖아.
이제 여기서 나도 좀 진지한 얼굴을 하면서, 이렇게 말해주면···.
“제 깨달음이 모자라 그분의 심득을 미처 이해하지 못해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 말씀드린 것입니다.”
“허어···그렇다면 시주의 탓을 할 수 없지요.”
“오히려 달포도 되지 않아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그러니 사조님과 함께 여정을 떠나는 걸 허락받은 거겠지요.”
강호 무림에서 묵을 대로 묵은 노고수들이 사조님이라는 한 마디에 이토록 어리석어진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아니면 오히려 내가 이상한 사람인 걸지도 모르겠네.
어찌 됐건.
“이제는 제가 장경각에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얻은겁니까?”
“·········.”
“·········.”
“으음···.”
조금 전만 해도 조곤조곤 할 말 다 하던 고승들이 내 한 마디에 다 침묵을 하거나, 아니면 임도 열지 못하고 침음성만 흘렸다.
답답하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이런 행동도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이토록 주저하시는 이유는, 아마 제가 위선타파라는 명호를 가졌기 때문이겠지요.”
아닌 게 아니라, 현재 강호 무림에서 나는 말 그대로 최악의 죄인이 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시주께서 사조님과 남만까지의 여정을 함께했던 일행인 이상, 우리 소림에선 시주를 전적으로 믿고 있소.”
내가 십관에서 나왔을 때 제일 먼저 나를 맞이해 준 노승. 대각의 말에 나는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저 또한 소림의 신용에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허나 강호 무림이란 어쩔 땐 말도 안 되는 거짓도 확고한 진실이 되는 법. 아무리 소림이 시주께서 그런 죄를 짓지 않았다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 흐름을 막을 순 없습니다.”
대각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본디 강호 무림의 소문이란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는 건 순식간이니까.
그리고 그렇게 한 번 뒤바뀐 소문이 원래의 자리를 되찾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당장 내가 전생에 하던 일도 그중 하나였으니 잘 알고 있지.
그리고 이번 소문 같은 경우는 그 성질이 더욱 악랄했다.
“···소문의 일부는 사실입니다.”
십할의 거짓을 진실로 바꾸는 건 어렵지만, 칠 할의 거짓에 삼 할의 진실을 섞으면, 그건 정말로 진실이 된다.
이번에 놈들이 퍼뜨린 소문도 그런 류의 소문이었다.
가장 중요한 진실은 완전히 감춘 채, 사건의 한면만을 보여주는 방식.
상대가 고단수임을 알 수 있는 수단이었다.
“사실이라니···그 말씀은 설마?”
“실제로 저는 정도 문파 몇 개를 멸문시킨 적이 있습니다. 그곳의 장문인과 제자들의 목숨을 거두었고요. 하지만.”
당혹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여러 고승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하며,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에는 분명한 사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정에 대한 해답이 장경각에 있고요.”
“혹시 그 사정이···사조님께서 찾으시던 그것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대각의 말에 주위의 다른 고승들이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사형은 알고 계셨습니까?”
“나도 옆에서 지켜본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그 흐름 정도는 알고 있네. 기이하게도 여러 정파의 과거 행적이나 자금 상황에 관한 정보가 많아 혹시···하고 생각했던 거지.”
“신승 어르신과 제가 여정을 함께할 수 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얼마 전부터 정파의 정기가 크게 훼손되고 있다고 생각한 어르신은 제게 부탁하여 그들의 끄나풀을 처리하는 한편, 거기서 나온 정보로 그들의 실체를 알아내기 위해 백방으로 움직이셨죠.”
아까 말했던 거짓 칠 할에 진실 삼 할.
지금 내가 꺼낸 이 말도 그런 경우다.
전후가 뒤바뀌긴 했지만, 둘 다 사실인 건 맞으니까.
“그럼 혹시 이번 남만행도 그와 관련된 일입니까?”
“남만행은 그 경우가 조금 다르지만, 이번 일로 인한 인연으로 일행으로 여정을 떠난 건 맞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사조님을 이렇게 만든 세력이 설마···?”
고승 중 한 사람이 꺼낸 말에 다른 이들도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정확한 사실은 저도 신승 어르신이 남겨놓은 정보를 확인하여야 알겠지만, 아마 그 예상이 전혀 잘못된 건 아닐 겁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대충 그러리라고는 예상했다.
지금껏 잘 숨겨졌던 진실이 밝혀지는 것도 그렇고, 무려 삼천이 넘는 일류와 절정 고수와 수십의 초절정 고수. 거기에 두 명의 화경급 고수를 부릴 수 있는 집단이라면 명문 정파들을 이토록 타락시키는 것도 어렵지 않겠지.
물론 서로 다른 집단이 벌였을 수도 있지만···그렇다면 무림 전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암중 세력이 둘이나 된다는 소리잖아?
···솔직히 그게 말이 되냐고.
무림을 뒤흔들 암중 세력이 둘이나 있으면, 이미 서로 싸우다가 한쪽은 망했겠지.
만약 정말로 두 집단이면 정파의 타락에 대한 진실을 밝히려 했던 우리 두 사람을 어찌 할 리도 없고 말이야.
“그리고 신승 어르신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남겨놓은 정보라면, 지금 무림을 어지럽히고 있는 그들을 뿌리 뽑을 수 있다고.”
여기서 한 번 숨을 돌리고, 욱하는 목소리로.
“···그것이 지금껏 소림에 몸담았던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고요.”
“아아아!”
“사조님이 그런 말씀을!”
“자신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우리 소림과 무림을 아끼신 그 마음! 곧이 새기겠습니다!”
···신승 어르신을 이렇게 쓰는 건 좀 죄송하지만, 그래도 지금 혹시나 있을 의심을 지우기 위해선 그분의 이름을 꺼내는 것보다 좋은 건 없었다.
지금 이렇게 감탄하는 이들의 눈에는 아까만 해도 남아있던 의혹이나 걱정을 이젠 전혀 찾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저는 꼭 장경각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분의 마지막 유언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다른 이들보다는 낫지만, 역시나 마찬가지로 눈가에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던 대각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본디 거래했던 것을 넘어서 백팔나한진과의 겨루기도 승리를 거두셨으니, 반대할 이유는 없지요. 얼마든지 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대각 대사님의 허락과 소림의 은혜, 깊이 감사드립니다.”
꾸벅, 여기 모여있는 고승 모두에게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인다.
“이리 오시지요. 장경각으로 모셔드리겠습니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대각의 뒤를 따라 방장실을 나선다.
대자 배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손님이 방장실로 들어갔다, 라는 소식이 소림사 전역에 퍼진 모양인지, 가지각색의 승려들이 방장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리를 가만히 주시하고 있었다.
이미 백팔나한진을 파훼했다는 소문도 퍼진 것일까.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있는 것도 종종 느껴졌다.
하지만 나를 이끄는 대각은 그런 시선은 모조리 무시한 채, 앞에 서서 오직 장경각으로 향하는 발걸음만 빠르게 놀릴 뿐이었다.
그 대쪽같은 성격 덕분에 막힘없이 장경각에 도착한 우리 두 사람.
[장경각···하나도 바뀐 게 없구만.]
아니, 정확히는 세 사람인가.
너도 소림에 온 적은 몇 번 있나 보네?
그리운 눈으로 장경각을 바라보던 화순이 내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산이라지만 소림사가 그리 대단한 전략적 요충지는 아니니까. 마정대전이 벌어지면 꼭 필요한 챙겨서 무림맹으로 날랐지.]
그래? 그렇다면···.
끼기긱. 그 규모만큼이나 거대한 장경각의 문이 열리는 동시에, 훅하고 풍겨오는 진한 책과 먹의 향기.
···이렇게 꽉 들어찬 장경각은 본 적 없겠네.
[뭐, 그렇지.]
한 사람이 평생 가도 다 읽지 못할 엄청난 숫자의 책 앞에 화순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조님이 정보를 숨겨둔 곳은 저도 미처 듣지 못했습니다. 혹시 시주님께선···.”
“아,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전에 말씀해주셨으니까요.”
“그거 다행이군요. 그럼 저는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다면 불러주시지요.”
고개를 숙이고 장경각의 문을 닫는 그에게 나는 목례를 취하고 바로 장경각 안으로 들어섰다.
내가 정보는 다 구하셔 놓은 것 맞죠? 라고 물으면 꼭 잘 있다고 말씀해주시던 바로 그곳.
“여기구나.”
···왜인진 전혀 모르겠지만, 장경각 한쪽에 잔뜩 쌓인 춘화.
그 사이에 강호 무림을 전부 뒤흔들 수 있는 정보가 있다 하면 어느 누가 믿을까.
하긴, 승려들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이곳이 제일일지도 모르겠다.
“어르신.”
신승 어르신이 직접 집필한 수십 권의 서책이 가득한 커다란 바구니.
최후의 순간, 그가 내게 맡긴 최후의 부탁.
“당신의 마지막 의지, 반드시 실현해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