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부동신법(2)
‘무슨?!’
십관의 출구로 나온 유현을 마주한 순간, 대각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그가 살아 돌아왔다는 것에?
지금껏 누구도 통과하지 못한 십 관을 돌파했다는 사실에?
그가 십관에 들어간 지 겨우 칠 주야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물론 그 세 가지 모두 놀라운 일이었지만, 정작 그가 이토록 경악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사내가, 그때 그 사내란 말인가!’
대각이 유현과 마주했던 건 딱 한 번. 유현이 소림십관으로 진입하던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때 대각이 본 유현은 엄청난 고수였다.
대각이 알고 있는 최고의 고수인 신승과 비교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절대 고수.
그저 가만히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기세에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칠 정도였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만한 사람이 아니면 어찌 사조님의 동행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자신은 장경각을 지키는 장경각주. 아무리 심증이 확실하다 해도 실질적인 증거 없이는 그를 장경각으로 들여보내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대각은 그런 제안을 꺼낸 것이다.
그라면 분명 십관을 넘어설 수 있으리라고.
대현과 대선이 와서 그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줬을 때도 대각은 그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직접 보지도 못한 세간의 이야기를 믿을 바엔 자신이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모셨던 사조님의 안목을 믿겠다.
사조님은 그를 믿고 자신의 일행으로 선택했고, 그는 사조님이 요청하신 대로 당신의 유품과 유해를 안전히 소림에 모셔왔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그와의 약속을, 그리고 속세의 손길에서 그를 지키기 위해 이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지금은 완전히 바뀌었다.
‘내가 이 사내를 지킨다?’
자신을 향해 살기등등한 백 팔 명의 나한의 앞에 서서도 저런 미소라니.
당장 자신은 그들이 자신을 적대할 리가 없다는 걸 확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온몸이 떨리거늘, 어찌 저 사내는 저렇게 웃을 수 있는가.
그뿐만이 아니다.
소림 십관에 들어서기 전만 해도 세상조차 무너뜨릴 만큼 어마어마하던 그 기세가 지금은 씻은 듯 사라진 것이 아닌가.
십관 내에서 사고를 당해 내상을 입고 무공을 소실했다?
그런 상상까지 할 정도로 유현에게서는 어떠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대각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 지었다.
‘어떻게 이런 사내를 지킨단 말인가.’
지금은 장경각주라는 한직에 있는 몸이지만, 젊었을 적만 해도 수많은 실전을 경험했던 무인이었다.
그런 대각의 머릿속을 스치는 하나의 격언.
‘강호에선 아이와 노인. 그리고 여인을 누구보다 조심하라.’
이 격언이 뜻하는 것이 정말로 무림에 있는 모든 아이와 노인과 여인을 조심하라는 말은 아니다.
약한 것처럼 보이는 자. 어수룩한 것처럼 보이는 인간들을 주의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유현은?
만약 바뀌기 전의 그를 보지 못했다면 소림의 나한들이 일반 양민을 핍박한다며 화를 냈을 정도로 평범한 사내로 보였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 저 소림 십관 안에서 저 시주, 유현은 엄청난 기연을 얻었다고.
“백팔나한은 명을 들으라!”
하지만 대각의 그런 생각과는 정반대로 대선은 붉게 물든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저 악독한 자는 진실을 숨기고 소림으로 몸을 숨긴 죄인이니! 소림의 제자들은 그를 제압하는 데 힘을 아끼지 마라!”
“충!”
“백팔 나한은 진을 펼쳐라!”
백팔 나한들은 금지의 지하에서 갑자기 나타난 자의 정체를 알 수 없었으나, 그들의 수좌인 대선의 명령을 어길 순 없었다.
순식간에 진을 갖추는 백팔 나한과 그런 진의 중심지에 자리를 잡은 대선.
대각보다 더욱 많은 전장과 실전을 경험한 대선이 유현의 변화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의심과 자만.
이 남자가 어찌 자신이 감히 알아볼 수조차 없는 강자가 될 수 있겠냐는 의심.
소림 제일의 무력집단 전부가 모였는데 겨우 사내 하나를 이길 수 없겠느냐는 자만.
그리고 그 두 가지 감정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 지금 이 현실.
“개진(開陣)!”
정마대전이 코앞이라던 옛날에도 등장한 적 없는,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한 백팔나한진 이었다.
쿵!
대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 전체에서 어마어마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천지를 무너뜨릴 기세로 퍼져나가던 기운은 곧 유현의 주변에 있는 대여섯의 나한들에게로 옮겨가더니, 그들의 육신에 깃들었다.
백팔나한진이 무림 제일의 진법으로 이름을 날린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미 절정의 경지에 이른 고수로 이루어져 있는 것도 충분히 무시무시한 일인데, 거기에 백여 명의 절정 고수의 힘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것까지 가능하다.
그 말인즉, 그들이 원하는 숫자만큼 절대 고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강제로 내공만 늘려낸 반쪽짜리 절대 고수에 불과하다는 건 분명 사실이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이미 무시무시한 고수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
하물며 한 사람만 있어도 강한 고수가 둘이 될 수도, 넷이 될 수도, 여덟이 될 수도 있었으니, 어찌 최고의 진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꿀꺽.
대각은 생전 처음으로 완전하게 개진한 백팔나한진을 보며 침을 삼켰다.
···아니다.
지금 대각이 보고 긴장한 건 전력으로 펼쳐진 백팔나한진이 아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살벌한 진의 중심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저 사내.
유현을 보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혹시···.
정말로 만약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그가 정말로 백팔나한진을 단신으로 무너뜨리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순식간에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
···이 인간들 대체 뭐야.
소림 십관을 전부 통과한 직후, 이레 만에 겨우 밖으로 나온 나를 맞이한 소림 승을 보고 순간 진심으로 기뻤다.
혹시 내가 탈출했다고 축하해주러 이렇게 와준건가, 하고 말이다.
물론 그런 희망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지만 말이다.
[이야, 내가 살다 살다 한 사람한테 백팔나한진을 쓰는 모습을 보네.]
···그러니까, 이 인간들이 역대 천마들한테도 쓴 적 없던 걸 나한테 썼다고?
[뭐, 그런 말이지.]
이 인간들이 미쳤나 진짜.
천마들의 바로 옆에 있는 화순의 말이니 거짓일 리는 없었으니, 이 빌어먹을 소림의 중놈들이 정말로 천마에게도 펼친 적 없던 진을 지금 내게 펼친 것이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이런 짓을 하는 건데?!
[십관 나올 때 통짜 만년한철 동인 하나 가져갈까 생각했던 게 걸린 거 아냐?]
···아니, 물론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어르신도 못 익혔던 타심통을 누가 익혀서 내 마음을 읽었겠냐고!
은근히 찔리는 말을 박아 넣는 화순을 바라보며, 지금 내 앞에서 기세를 끌어올리고 있는 나한승을 보니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온다.
하, 참나.
누구는 평생 한 번 보기도 힘든 전설의 진법 두 가지를 겨우 한 달 차이로 보는 영광을 누리게 될 줄이야.
···다 내 운이지, 내 운이야. 젠장.
전에 겪었던 천라지망보다야 인원수는 몇 배는 적지만, 그렇다 해서 백팔나한진이 약하다는 건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다.
천라지망이 나를 향해 끝없이 날아오는 수백 발의 화살이라면, 백팔나한진은 내 머리를 쪼개려 드는 거대한 부(斧)와도 같았다.
···어느 쪽이건 더럽게 막아내기 힘든 진이라는 거지.
그런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이상해.
한 달 전에 천라지망이랑 맞닥뜨렸을 때는 옆에 신승 어르신과 함께 있는데도 어쩌나 싶었는데.
지금은 왜 백팔나한진을 보고서도 별로 무섭지가 않을까.
“흡!”
“하앗!”
“갈!”
한참 기세를 뿜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전혀 움직이지 않자, 결국 나한승이 먼저 움직였다.
격체진기를 받은 여섯 승려 중 세 명은 내가 피할 길을 막고, 다른 셋은 내가 쉬이 도망칠 방향을 선점해 공격을 찔러 넣었다.
상, 후, 좌.
하나를 막을 순 있어도 둘을 막을 순 없으며, 둘을 피해도 하나는 반드시 명중한다.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피하기엔 공격을 나서지 않은 세 사람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들을 쓰러뜨린다면 공격을 받을 걱정도 없지만, 내공만 생각하면 화경에 가까운 여섯 사람을 모두 쓰러뜨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당장 나조차도 이들을 쓰러뜨리려면 극의를 사용해야 가능할 텐데, 이제는 그럴 시간도 없다.
이번 공격으로 반드시 나를 쓰러뜨릴 수 있다는, 그런 확신이 가득한 나한승들의 눈빛.
그리고.
“헉!”
“어억?!”
“이 무슨···!”
그런 눈빛이 한순간에 경악으로 물들어가는 모습이란!
경악에 찬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들을 향해 손을 뻗는다.
느릿~느릿~
느리다 못해 나비가 앉았다가 쉬고 갈 정도로 평범한 일격에 절정의 나한승 세 명이 대경실색하며 물러났다.
내 공격 그 자체에 놀라 도망친 게 아니다.
지금 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이런 평범한 공격까지 지레 겁먹고 도망친 것이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어찌···!”
도저히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합공을 아주 간단하게 피해냈으니까.
아니, 피해냈다는 말은 좀 어폐가 있나.
“어찌 그 공격을 맞추지 못한 것이냐!”
진의 중심에 있는 노승. 아마 이 백팔나한의 수좌로 보이는 노승이 방금 공격을 날린 세 나한승을 향해 분노에 찬 고함을 내뱉었다.
하긴, 무리도 아니다.
분명 그들이 보기엔 지금 나는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그들이 공격을 못 맞춘 것처럼 보일 테니까.
하지만 그들은 공격을 맞추지 못한 게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한 것이냐? 그것도 아니다.
스윽.
“마, 막아라!”
노승의 고함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던 세 나한승은 내가 움직이자 비명과 같은 목소리를 내뱉으며 내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그래 봐야 일어나는 일은 아까의 반복뿐.
그들이 뻗은 손이 무색하게도 나는 유유히 그들을 벗어나 진의 중심으로 향했다.
“지, 진기를 보내라! 얼른! 저자를 막아서란 말이다!”
내가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진에 깃든 기의 주인이 바뀐다.
어떤 때는 뼈가 보일 정도로 홀쭉한 나한승이 주먹을 휘두르고, 어떤 때는 살이 잔뜩 찐 나한승이 장을 내뻗는다.
전신이 근육인 나한승도,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나한승도, 다른 나한승과 비교하면 훨씬 어려 보이는 나한승도.
각자가 익힌 무공에 따라 전력을 다해 나를 공격한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가 동일.
진의 중심을 향해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 유유히 걸어나가는 나를 그 누구도 맞추지 못한다.
목에 힘줄이 돋을 정도로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지르던 노승도 이제는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입을 닫고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한다.
그리고.
“안녕하십니까?”
“·········.”
백팔나한진의 중심이자, 가장 중요한 위치.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노승의 코앞까지 당도한 나는 웃으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소림사는 환영 인사가 꽤 거창하군요. 평생 열 사람 이상 보기도 힘들다는 나한승들을 백여덟 분이나 데리고 와주시다니···하긴, 소림십관을 통과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네가 어찌···.”
“백팔나한진을 통과해서 왔느냐고요?”
경악에 찬 눈빛으로 내 전신을 살펴보고 있는 그를 향해 나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무인이란 본디 궁금한 점이 있다면 직접 알아보는 게 정답 아니겠습니까?”
“네게···일격을 날려보란 말이더냐?”
“아무래도 백 번 설명해주는 것보다 한번 경험해보는 게 더 빠르겠지요.”
내 도발답지도 않은 도발에 노승은 눈을 살며시 감더니.
번뜩!
강렬한 안광을 뿜어내며 나한진의 내공을 모두 자신에게 끌어모았다.
그러자 그의 주변 공간이 기이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백 팔 명의 절정. 혹은 초절정 고수의 내공이 한 사람의 육신에 몰려들면서 일어나는 괴이.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백팔나한진의 진짜 위력을 발휘하기 위한 준비였다.
고오오오오!!!
그렇게 모여든 거대한 기운은 그 자체만으로도 초월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압!”
그것이 천하제일의 문파, 소림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의 손에 들어간 순간, 세상에 다시 없을 거대한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 힘이 그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것일까. 조금 전만 해도 이해할 수 없는 괴사에 두려움에 크게 떨리던 그의 눈은 오직 내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이번 공격만큼은 절대로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절대적인 확신!
쾅!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힘만큼이나 엄청난 속도로 내려꽂힌다!
그 강력한 힘에 비해 주변의 여파는 극히 적었다. 그만큼 이 노승의 기의 조종이 능숙한 것일까, 아니면 백팔나한진의 또 다른 효용일까.
하지만 그것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바라는 건 이 대결의 결과 뿐일지니.
그리고 작게 피어오른 흙먼지가 가시고, 그 결과가 명확히 나타난 순간.
“허어···.”
다른 나한승들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결과는 확연했다.
서있던 자리에서 조금도 피하지 않은 나와 거기서 한 치 이상은 비켜나간 그의 권.
“이건···.”
땅에 주먹을 꽂아 넣은 채로, 그는 나를 보지도 않은 채 물었다.
“이건 무엇이오?”
“움직이지 않으니 부동(不動)이요, 그러고도 모든 공격을 피하니 신법(身法)이라. 그렇게 되면 패할 리 없으니 금강(金剛)을 더하노라.”
내 말에 그 상태로 고개만을 돌려 나를 바라본 노승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금강부동신법···!”
“역전(逆轉)”
그리고 그 진짜 이름을 내가 뒤이어 말한다.
“내가 피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움직여 공격을 비켜 세우니. 그것이 곧 부동이랴.”
그 옛날. 신승과 처음 만났던 그때.
그가 나를 향해 지어 보였던 미소를 똑같이 그에게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신승 어르신께서 제게 마지막으로 남기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