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림십관(3)
쩡!
쿵!
나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다가오던 두 개의 동인에게 장을 날리자, 다가오던 속도 이상으로 빠르게 날아가 땅에 쓰러졌다.
땅에 쓰러진 동인은 완전히 움직임을 멈춘 것처럼 보였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네 개의 관을 통과하면서 이것들이 한 번 쓰러지면 멈추는 게 아니라, 잠깐만 시간을 줘도 곧 다시 일어난다는 걸 알아냈으니까.
끼기기긱!
···심지어 점점 높은 숫자의 관으로 갈수록 일어나는 속도가 빨라진다는 것도 알아냈지.
물론 나는 전혀 알고 싶지 않았지만 말이다.
어찌 됐건 저것들이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체할 생각은 없었다. 두 개의 동인을 쓰러뜨림으로써 생긴 잠깐의 틈에 얼른 앞으로 달려나갔다.
끼기긱!
하지만 몇 발자국 나아가기도 전에 바로 내 앞을 막는 동인이 수두룩하게 튀어나왔다.
마음 같아선 다 날려버리고 가고 싶었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아까보다야 나아졌다지만, 움직임은 여전히 단순하다. 아무리 높게 쳐줘봐야 일류 고수 수준일까?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쩡!
“웃!”
불파를 두른 상황에서도 어깨까지 전해지는 충격에 나도 모르게 입에서 침음성을 흘렸다.
통짜 철로 이루어진 일관.
철과 묵철의 합급으로 이루어진 이관.
그리고 점점 그 비율을 높인 삼관과 사관을 넘어, 지금 오관에서는.
쩡!
“도대체 얼마나 돈을 쳐 발랐길래 이 동인 전부를 통짜 묵철로 만들 생각을 한 거야!”
불파로 깃든 주먹을 날려도 부서지긴 커녕 조금 우그러지는 정도로 끝나는 동인들.
물론 내공을 더 실어 주먹을 날리면 더 큰 충격은 줄 수 있겠지만, 거기에 쓸 시간도, 힘도 아깝다.
내가 해야 할 건 이것들을 모조리 박살 내 가루로 만드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여기서 빠져나가는 것뿐이니까.
끼기기긱!
물론 그게 쉽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금속으로 만든 만큼 움직임은 딱딱하고, 또 느릿했지만, 그만큼 또 무겁고, 파괴적이다.
심지어 이놈들은 아무런 규칙도 없이 그냥 움직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섯 개의 관을 통과하면서 지금 이 동인들의 움직임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백팔나한진(百八羅漢陣).
소림 최강 무력 집단인 백팔나한이 사용하는 네 개의 진법 중 가장 크고, 또 강력한 진법.
지금 동인들의 움직임은 그것 외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일부러 다섯 개 관에 있는 동인 전부를 딱 백여덟 개로 맞췄겠는가.
바로 그 때문에 나보다 훨씬 느리고, 움직임도 단순한 동인들을 단숨에 뚫고 지나갈 수 없었다.
한 번의 공격에 대여섯 동인을 쓰러뜨려도 그 자리를 똑같은. 혹은 더 많은 개수의 동인이 가로막는다.
심지어 그것 때문에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면 아까 쓰러뜨렸던 동인들이 다시 일어나 공격을 날린다.
결국 시간을 끌어봐야 나만 손해.
눈앞의 몇 놈들만 쓰러뜨리고 앞으로 향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놈들이 내공을 사용할 줄 모른다는 점이다.
만약 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진을 이루는 자들 간의 격체진기까지 사용한다면, 이렇게 공격 한 번으로 쓰러뜨리고 넘어갈 수는 없을 테니까.
대신 그만큼 진의 축(軸)이 존재하지 않는 만큼 한 번에 진을 무너뜨리는 건 힘들지만, 그건 무한한 내공과 순식간에 회복되는 육신으로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었다.
“흡!”
까가가각!
키기기긱!
지금껏 등에 메고 있던 창을 크게 휘두르자, 주변에 있던 동인 다섯이 한 번이 날아가고, 출구까지 일직선의 통로가 만들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도약. 앞에 있던 출구로 몸을 날렸다.
끽···끼긱···.
내가 출구에 다다르자, 지금껏 내게 다가오던 수십 개의 동인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다시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조금 전 내 공격에 당해 쓰러진 놈들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혹시 저놈들 나중에는 쓰러지자마자 바로 일어나서 나한테 달려드는 거 아냐?”
[···솔직히 말도 안 된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이젠 그것도 확신을 못 하겠다.]
마교에서 온갖 미친놈과 또라이를 봐왔던 화순조차 지금 이 소림의 도를 넘은 돈지랄에는 완전히 질렸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내 말에 동의했다.
처음에는 이놈들도 이런 점이 있었네, 하고 웃던 녀석이 통짜 묵철 동인을 보고는 진심으로 질렸다는 표정을 내보였으니까.
[이런 미친 짓을 하는 데 쓸 돈을 모았으면 혼자서 마교랑도 싸워 이겼을 텐데···.]
하고 말이다.
뭐, 어찌 됐건.
“이제 이 짓도 다섯 번만 더 하면 끝인가.”
한 관, 한 관 넘어갈 때마다 휴식을 취하며 먹으라고 놔둔 듯 벽곡단이 담긴 항아리와 빗물을 받아 정수하는 항아리가 있긴 했지만···.
···이거 대체 얼마나 지난 거지?
[나 먼지가 한 치 이상 쌓인 거 평생 처음 본다.]
···나도 보고 싶지 않았어. 심지어 나 먹으라고 놔둔 건 특히.
물은 그나마 빗물을 정수하는 식이라 좀 정상적으로 보이긴 했지만, 옆에 이런 먼지 벽곡단을 본 상황에서 선뜻 그것을 먹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먹지도, 마시지도 않아도 체력을 보존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리 기쁜 순간은 처음이었다.
수북한 먼지···아니, 음식들을 뒤로한 채 여섯 번째 관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도중,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옆에 있던 화순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통짜 묵철로 만든 동인도 나왔는데 또 뭐가 나올까?”
[글쎄다. 그냥 이 정도로 다른 다섯 관도 똑같이 나오는 거 아닐까? 통짜 묵철도 충분히 미친 짓인데, 여기서 더 나가면 진짜 소림사에 있는 대전 기둥뿌리까지 뽑아서 만든 수준이잖아. 아무리 그래도 이놈들도 그 정도가 한계···.]
후웅!
···응?
후웅! 후웅! 후웅!
뭔가 지금까지와는 소리가···전혀 다른데?
지금껏 각 관에 진입할 때마다 동인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지금 들려오는 소리는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아무리 묵철을 섞고, 나중에는 통자 묵철로 했다지만, 묵철이 어디 전설 속의 금속도 아니고, 관리를 못 하면 녹이 스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지금껏 동인이 움직일 때마다 내부에서 녹이 슨 것처럼 기괴한 소리가 났던 거고.
그런데 지금 들리는 소리는 아무리 들어봐도···녹이 슨 것 같진···않은데······.
힐끔.
나는 지금껏 제대로 관리도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녹은커녕 눈에 띄는 흔적조차 없는 두 자루의 창을 바라봤다.
아니, 설마. 그래도 그렇게 미친 인간들일 리가···아무리 그래도 최소한의 상식은···.
하지만 그런 내 기대. 혹은 소원은 육관의 입구에 다다르는 순간 모조리 사라졌다.
들어서는 순간 몸을 스치는 이 스산한 기운.
단전에 빙정의 파편이 자리 잡은 이후,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냉기가 지금 내 전신을 찔러오고 있었다.
지금 내게 이런 냉기를 느낄 수 있게 하는 건 딱 두가지.
빙정 그 자체나, 그게 아니라면 빙정에게서 만들어진 ‘무언가’.
“·········.”
[·········.]
그것의 정체를 알아챈 우리 둘은 입을 쩍 벌린 채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을 보이는 동인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소림의 승려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이 미친 작자들이···!
“동인을 만드는 데 만년한철을 쳐넣었다고?!”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될 일이, 지금 이 자리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
유현이 육 관의 동인들을 바라보며 이런 미친 짓을 벌인 소림의 승려들을 향해 온갖 욕설을 내뱉고 있던 그때.
휘적, 휘적, 휘적.
“귀가 가려우신가 봅니다, 사형.”
“최근 이런저런 일이 있다 보니 몸이 먼저 반응하는 모양이야. 요즘 들어 귀가 종종 가렵더군.”
귀가 가려운 이유가 현재 지하에서 자신을 향해 온갖 욕설을 다 내뱉고 있는 누군가 때문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방장은 입을 열었다.
“그 시주가 소림십관에 들어간 지도 벌써 사흘이 지났군.”
“네. 이제 슬슬 삼 관을 통과하고 있겠지요.”
물론 방장과 대선은 지금껏 한 번도 소림십관을 내려가 본 적은 없지만, 장경각에 남아있던 정보들을 토대로 유현이 지금 어느 정도까지 통과했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물론 유현은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곳에서 한참 앞서가고 있었지만, 유현의 무공 수위를 파악할 수 없던 그들은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대각 사형은···?”
“아직도 십관의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후우. 역시 그런가.”
유현이 처음 소림십관에 들어간 그 날, 유현이 신승에게 무언가를 받았다는 사실에 자신의 목숨까지 걸었던 대각은 사흘 내내 십관의 출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현 사형.”
“음.”
방장은 대선이 자신을 직책이 아니라 법명으로 부르자, 무엇을 말하려는지 깨닫고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시주가 소림십관을 전부 통과할 가능성···사형은 어느 정도로 점치십니까.”
“역시 그 얘기인가.”
“물론 편치 않은 이야기라는 건 알고 있지만, 대현 사형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찻잔의 따뜻한 온기로 마음을 풀 생각일까.
방장은 긴 시간 대답 없이 찻잔만 만지작거리다가, 짧은 한숨과 함께 대답을 꺼냈다.
“장경각에 기록된 소림십관에 대한 이야기가 전부 사실이라면···백중 백 실패라고 보는 것이 맞겠지.”
소림이 개파한 이래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재능을 가졌다는 신승조차 겨우 아홉 개의 관을 통과한 게 전부.
하물며 소림십관을 통과하기 위해선 필수 불가결이라 일컬어지는 금강부동신법도 익히지 못한 유현이 갈 수 있는 곳은 정해져 있다.
기껏 해봐야 칠관. 그가 정말로 방장이 예상하는 대로 화경의 경지에 오른 절대 고수라 해도 팔 관이 한계.
십 관은 물론, 그 전 단계인 구 관을 통과하는 것조차 그에겐 절대 불가능하리라.
“그렇다면.”
여기까지는 대선도 짐작하고 있던 바다. 방장보다 무공의 경지가 한층 높은 대선은 유현의 경지를 좀 더 자세히 파악할 수 있었지만, 그도 유현이 소림십관을 통과할 수 있으리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았다.
진심으로 대선이 궁금해하는 건 그 이후의 이야기.
“그 시주가 안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대각 사형은 어찌하실 겁니까.”
“·········.”
다시 한번 입을 다무는 방장.
하지만 지금 입을 다문 이유는 아까와는 다르다.
아까 전 침묵이 뭔가를 고민하다 나온 답인 것에 반해, 이번 대답은 이미 마음속에선 이미 정해뒀다.
그럼에도 대답을 늦추는 이유는 딱 하나.
“···아무리 약속했다 해도 사형의 목숨을 그리 버릴 순 없지.”
이 선택이 과연 옳은 선택인가.
그것을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수많은 사형제를 떠나보냈네. 이처럼 불필요한 일에 대사형의 목숨을 떠나보낼 수는 없지.”
당시 대자 배 항렬이 현역이던 당시, 강호는 말 그대로 무법지대라는 말이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곳이었다.
중원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현 천마 독고삭과 달리 그의 전임 천마는 중원의 침략 야욕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본디 정파와 합세해 마교의 중원 침략을 막아서던 관의 상황도 썩 좋지 못했다.
지금껏 데면데면하던 북해에서 갑자기 전쟁을 일으키고, 황실 내부에선 각 성도에서 왕들이 반란을 획책하고 있다는 소문들로 몸살을 앓았다.
결국 관의 도움은 바라지도 못한 채, 정파 무림은 마교와의 대립을 계속해야 했다.
설사 피를 흘릴 일이 있다 해도 목숨은 거두지 않는 사파와의 쟁전과 달리 마교와의 싸움은 목숨과 목숨을 건 혈투.
가장 앞에서 강호의 동도들을 지켜오던 소림의 피해가 큰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끝이 없을 것처럼 이어지던 싸움은 전임 천마가 신승의 스승을 포함한 여러 정파 고수들과의 동귀어진으로 끝났지만, 전쟁이 끝났다 해서 죽은 사람이 돌아올 방도는 없었다.
그 뒤로 대자 배는 그 어떤 항렬의 서로를 아끼고, 또 아꼈다.
“지하에서 들리는 소리가 멈추면, 사형은 정상에 선방(禪房)을 짓고 거기에 모실 생각이네. 물론 만약을 대비하여 내공은 봉해야겠지만 말이야.”
···그것이 설사 본인의 뜻을 반하더라도 말이다.
“그동안 장경각을 관리할 아이는 자네가 뽑아주게. 일, 이년 정도로는 생각을 바꾸시지 않을 테니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사형.”
방장이 자신과 같은 생각임을 안 대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방장의 명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하나의 고민을 해결한 두 사형제가 다시 차를 즐기려던 그때.
똑똑.
“방장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무슨 일인가?”
“맹에서 특급 서찰이 하나 왔습니다.”
“맹에서?”
밖에서 들려온 제자의 목소리에 방장은 다시 찻잔을 내려놨다.
최근 무림맹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특급 서찰이라니.
‘그 정도라면 맹의 근간이 흔들릴 만큼 큰 사건이 아니라면 쉬이 보내지 않을 터인데···.’
어딘가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낀 방장은 바로 목소리를 높였다.
“알겠네. 문은 열려 있으니 그냥 들어오게.”
“네, 실례하겠습니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온 젊은 승려는 안에 있던 방장과 대선에게 고개를 숙인 뒤, 자신이 들고 왔던 서찰을 방장에게 내밀었다.
붉게 칠해진 서찰의 봉투에는 황금으로 적힌 특(特) 자가 번쩍이고 있었다.
“가져오느라 고생했네.”
“아닙니다,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곧 방장실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오건 자신이 들을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방장의 표정에서 그 사실을 짐작한 젊은 승려는 서찰을 건네자마자 바로 다시 인사를 보내고 밖으로 나갔다.
승려가 떠나자, 그제야 방장은 서찰을 뜯고 그 안의 내용을 살폈다.
그리고.
“·········.”
유현과 대각의 목숨에 관해 이야기하던 그때보다 더욱 반장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하지만 그 표정의 이면에 안도가 보이는 건 착각일까.
“···대선 사제.”
“네, 사형.”
“사제들을 모두 모아주게. 급히 할 이야기가 있네.”
“네, 알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방장의 명령.
물론 그의 행동에 궁금한 점이 한가득했지만, 대선은 더 묻지도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순식간에 자리를 비운 대각.
방장실에 홀로 남은 방장은 눈앞의 서찰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치 그 서찰에 적힌 내용이 모든 일을 풀어줄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