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라지망(5)
스겅.
털썩.
짧은 소도가 놈의 목을 스치자, 놈은 입과 목에서 피를 뿜어내며 땅으로 쓰러졌다.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절명이었다.
“이제.”
스윽.
“너만 남았구나.”
얼굴까지 튀어 오른 핏방울을 훔치며 나는 나와 함께 유이하게 서 있는 단 한 사람. 극을 든 여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싸움이 시작된 지 약 두 식경(食頃; 약 15분).
나는 그녀의 뒤를 쫓아왔던 아홉의 고수를 모두 쓰러뜨렸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열 배에 달하는 수적 열세. 전력을 다할 수 없다는 약점. 거기에 한 번만 잘못해도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압박감까지.
지금껏 한 번도 없던 싸움에 나는 고통스러워했지만, 그것은 또한 나를 성장시켜줄 수 있는 또 다른 수단이기도 했다.
그래, 이번 싸움에서 나는 한층 더 성장했다.
이것은 그저 나 혼자만의 망상이 아니었다.
[이런 수련법도 괜찮네. ···다음 심상 수련부터는 이런 싸움을 추가하는 것도 좋겠어.]
당장 옆에서 싸움을 관망하고 있던 화순까지 이리 말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본디 권능은 극한의 상황으로 몰리면 몰릴수록 더욱 큰 힘을 발휘한다.
지금까지와는 경우가 좀 다르지만, 이번 경우도 그런 극한의 상황 중 하나라 할 수 있었다.
지금 내 전신에는 권능의 회복력으로도 충당할 수 없는 심한 상처가 무수히 많이 새겨졌지만, 육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육신에는 활력이 넘쳤다.
“자, 와라. 이제 결판을 내야지.”
그에 반해 그녀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지만, 지금 정신은 나와 정 반대.
지금껏 변화 한 점 없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더니, 종래에는 마치 흉신악귀(凶神惡鬼)처럼 엉망진창으로 변했다.
파앗!
그녀가 움직인 건 그 직후였다.
엄청난 도약력으로 몸을 띄운 그녀는,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나를 향해 날아왔다.
휭!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녀가 쥐고 있는 극 역시 변화를 일으켰다.
훙! 훙훙훙!
푸른 기운을 머금은 극에 깃들어 있던 미약한 떨림은 곧 엄청난 크기의 흐름으로 변하더니, 공중에서 물살을 치며 극과 함께 나를 쇄도했다.
쿠구구구궁!!!
대지의 끝에서나 볼 수 있는 거대한 바다. 거기서 끊임없이 휘몰아친다는 파도가 이와 같을까.
휩쓸리면 내 목숨은 물에 떨어진 모래처럼 순식간에 사라질 것 같았지만.
쿵!
기이하게도, 걱정은 없었다.
그저 창을, 그걸 쥐고 있는 내 팔을, 그리고 거기 붙어있는 내 몸을 날릴 뿐.
스윽.
그녀의 전신에서 휘몰아치던 강렬한 흐름을 흘려보내는 건 나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나 간단했다.
이미 독정을 한 번 상대해봤기 때문일까. 기이하리만치 친숙한 기운을 꿰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 앞에 만난 것은 그녀의 극. 매서우리만치 날을 세운 극과 내가 든 창이 만나자.
쩌정-
가슴까지 울리는 청명한 소리와 함께.
팡!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극이 손잡이까지 부서졌다.
그것은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창을 뻗은 나도, 그걸 막아선 그녀도 모두 경악에 가득 찬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으니까.
하지만 그건 아주 잠시.
여전히 힘을 잃지 않은 창은 그대로 그녀의 육신을 꿰뚫었고, 퉁,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육신이 뒤로 넘어갔다.
“쿨럭!”
처음으로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그녀가 피를 토하는 기침 소리였다.
“우웨에엑!”
그녀의 입에서 붉은 피가 끝없이 흘러나왔다. 와류를 일으키지 않았기에 즉사만 면했을 뿐, 여전히 강대한 힘이 실려 있던 창은 그녀의 내부를 완전히 진탕으로 만들었다.
“네놈···.”
그녀의 눈빛이 매섭게 번쩍였다.
“잊혀진···힘의···사용자더냐···!”
잊혀진 힘?
전혀 알 수 없는 단어에 나는 화순을 바라봤다.
내 힘의 근간은 곧 권능. 그녀가 말하는 것이 곧 권능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화순은 자신은 모른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저건 진심이다.
거짓 한 점 없는 그 황당한 표정을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그녀에게로 고개를 향했다.
“뭔가 착각하고 있나? 난 잊혀진 힘이고 뭐고 모른다. 그런 걸 써본 적도 없어.”
“하···네놈들은···그래···그것을···쿨럭, 쿨럭, 쿨럭!”
그녀는 채 말을 끝내지 못하고, 끊임없이 젖은기침만을 내뱉었다.
···더 이 여자의 망발을 들을 시간은 없다. 이미 그녀의 육신에는 권능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심후한 상처가 육신의 정중앙에 새겨져 있었다.
곧 죽음을 맞이하리라는 건 당연한 사실.
지금 내게 급한 건 이 여자의 죽음을 지켜보는 게 아니라, 신승의 안위를 파악하는 것이다.
“네놈들이 벌였으리라고 생각되는 일에 비하면, 이런 죽음은 자비로운 일이지만···남은 시간 동안은 내가 지은 죄에 대해 후회하며 죽어가라.”
그 말과 함께 나는 그녀를 내버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일어서는 그 순간까지 여전히 피가 섞인 기침을 내뱉는 그녀를 잠깐 응시하다, 바로 몸을 돌렸다.
내가 아까 떠나왔던 그 방향. 신승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
“쿨럭, 쿨럭···헉, 헉, 헉···.”
유현이 떠난 뒤에도 한참 기침을 뱉어내던 그녀는 흐릿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물론 버려진 그녀의 옆에는 당연히 누구도 없었지만, 그녀는 마치 누군가 있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가주님···그 잊혀진 힘의 주인을···스스로가 권능이라는 오만한 이름으로 부르는 그 힘의 주인을···드디어 찾았습니다···.”
가주. 그리고 ‘그분’이 그토록 찾던 권능의 사용자.
왜 진작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왜 그토록 늦게 알아차린 걸까.
왜 지금껏 수십 년 넘게 쌓아 올린 힘이 한순간도 막지 못하고 산산이 무너져내리는 걸 직접 보고 나서야 깨달은 것일까.
이제는 모두에게 잊혀진, 아니, 잊혀져여만 했던 힘.
그 힘의 주인이 바로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늦게 깨달았다.
그 대가는 죽음.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아···위대한 존재이시여······.”
자신들의 신앙. 자신들의 꿈.
최후의 최후에 찾아온다는 위대한 존재를 만날 준비를 이미 그녀는 끝마쳤기 때문이다.
다만 그녀가 예상치 못했던 건.
“아, 아니야···.”
조금 전만 해도 평안하던 그녀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건 아니야, 이건, 이건 내가 생각하던 것이···! 아, 아아아···!”
그리고 점점 바뀐 표정은, 공포.
“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악!!!!”
그녀의 최후의 불꽃은 그렇게 끔찍한 공포와 함께 천천히 꺼져갔다.
그렇게 새파랗게 질린 그녀의 표정과, 이미 한참 전에 죽음을 맞이한 부하들의 표정은 똑같았다.
그녀는 무엇을 본 것일까. 무엇을 마주한 것일까.
···누구도 대답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
신승의 복부를 꿰뚫은 ‘그것’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신승에게 큰 상처를 입은 사내는 그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한참 고개를 박고 있더니, 쓰러진 신승을 힐끔 바라보고 사라졌다.
그것이 자신의 상처 회복을 더 우선한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이미 손을 댄 것에 손을 댈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인지 몰라도 신승에게는 잘 된 일이었다.
“쿨럭!”
물론 그것이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전력으로 발휘하고 있던 금강부동신공을 간단히 뚫고 들어온 그의 손은 신승의 오장육부를 말 그대로 흩트려놓았다.
마치 몸에서 장기를 억지로 꺼내 비비는 듯한 통증!
지금껏 강호를 유랑하며 보통 사람이라면 이미 절명했을 상처까지 입어봤던 신승조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고통이었다.
수백 발의 화살이 전신에 꽂힐 때보다도, 내장이 흘러나올 정도로 심한 상흔을 입었을 때보다도, 뇌전공(雷電功)의 고수에게 벼락 찜질을 당했을 때보다도 더욱더 고통스럽다.
하지만 신승을 진정으로 고통스럽게 하는 건 다름 아닌 금강부동신공이 뚫렸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그가 강호 무림에서 살아온 세월만 어언 수십 년.
보통의 양민이라면 자연사할 시간보다 더 긴 세월을 강호 무림에서 살아왔다.
평균적으로 십 년을 버티기 힘든 강호 무림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물론 그의 사문인 소림의 이름이 큰 몫을 차지했다.
허나 그것이 통하는 건 어디까지나 정파와 일부 사파뿐.
그의 태산보다 높은 공명심과, 그보다 더 큰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선 그 정도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법이란 존재치 않는 중원의 뒷세계.
관리조차 감히 들어설 수 없는 사파의 중심지.
정파의 인간은 감히 발조차 들일 수 없다는 마교의 영역까지.
그곳에서까지 신승의 이름이, 소림의 이름이 통하리라 바라는 건 불가능.
아니, 오히려 밝혀지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곳에서 여러 번 자신의 이름이 밝혀졌음에도 신승은 지금까지 당당히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 우연도, 행운도 아니었다.
금강부동신법.
소림 제일의 신법(身法). 아니, 제일의 신공(神功)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무공.
스승에게서 처음 금강부동신법을 사사하고, 스스로 생각하기에 완벽히 익혔다 생각한 순간부터, 그것은 자신을 수호하는 최고의 방패였다.
하지만 그 방패가 지금, 처음으로 깨졌다.
“쿨럭, 쿨럭, 쿨럭.”
내장 찌끄러기가 섞인 토혈을 뱉어내며 신승은 스승이 금강부동신법을 자신에게 전수하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제는 그 이름도 완전히 잊히고,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지만, 당대에는 소림 제일의 고수이자, 무림 제일을 다투는 삼걸(三傑) 중 한 사람이었던 스승.
그리고 항상 자신을 바라보며 한숨만 푹푹 내쉬면서도, 결국에는 미소를 지어주던 그의 전언.
[금강부동신법은 소림 제일의 신공이다. 제대로만 익혀낸다면 세상 그 어떤 공격이라도 막을 수 있지.]
그의 말에 두 눈을 빛내는 신승을 향해, 그는 경고 또한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금강부동신법을 깨진다면···그때는 너 자신의 최후라 생각하거라.]
그 말을 전하고 몇 년 후. 스승은 자신과 같은 삼걸이자, 당대 마교의 교주였던 자와 동귀어진했다.
정말로 그때 스승의 금강부동신공이 깨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가 그리 말했으니, 그때의 싸움에서 금강부동신공이 파훼 당했거나, 혹은 깨졌으리라는 걸 짐작하기만 할 뿐.
하지만 지금 신승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의 금강부동신공은 분명히 깨졌을 것이며, 그때 그는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으리라는 걸.
그렇기에 그때 스승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
당시 중원 정복을 울부짖던 마교의 교주와 동귀어진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본인도···당신의 제자인 나도 그런 최후를 맞이해야 하지 않겠는가···!
오직 그런 일심(一心)으로 신승은 버텼다.
지금 당장이라도 놓고 싶은 삶의 끈을 억지로 부여잡은 채 그를 기다렸다.
지금 그를 붙잡고 있는 건 지금껏 가지고 있던 공명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연.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할 수 있는 그런 일정 동안 함께한 일행.
오직 그 하나만을 위해 그는 곧 꺼질 삶의 불꽃을 어떻게든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평생 쌓아온 내공도, 구십 평생 함께했던 영혼도 모두 불사를 수 있다.
그렇기에 기다렸다.
부디 그가 조금이라도 더 일찍 찾아오기를 바라며.
*****
내가 열 명의 목숨을 거둔 곳에서 멀어지자 흐릿해지던 피 냄새가 다시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제대로 돌아왔다는 증거이자, 신승이 이미 내가 오는 사이 모두를 쓰러뜨렸다는 말이겠지.
물론 신승이 당했을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지만···그보다는 차라리 내가 이미 지고 돌아오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다지만 그는 여전히 무림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이며, 수십년 동안 화경의 경지에 있던 사람이다.
그가 겨우 그런 이들에게 패배했을 일은···일은······.
“···어르신!”
안심한 상태로 뛰어오고 있던 나는 눈앞의 끔찍한 광경에 주변 경계조차 잊고 그에게로 달려갔다.
주변에 즐비한 시체와 무기 파편. 그리고 그 중심에 그가 누워 있었다.
“어르신, 어르신! 대체 왜 이런···!”
“크흘흘···목소리 좀 낮추게. 상처가 울리는구먼.”
내가 달려가자 그제야 그는 감긴 눈을 뜨고 나를 바라봤다.
이 상처···이 흔적···.
나는 이것을 알고 있다.
아주 예전, 하지만 눈을 감으면 바로 떠오를 수 있는 그때.
그 사내가 입었던 상처도, 이것과 똑같았다.
“설마···.”
“···강하더군. 아, 물론 그 검객은 아니야. 그놈은 이겼네.”
그건 이미 알고 있었다. 분명 그의 기세는 강했지만, 지금 신승을 이런 꼴로 만들만한 사내는 아니었다.
지금 신승을 쓰러뜨린 건 전혀 다른 인물.
···바로 독고삭을 쓰러뜨린 그 자와 같은 인물이었다.
“놈은···누구였습니까?”
“···모르겠네.”
신승은 내 질문에 그리 답했다.
“겉모습은 분명 사내였지만, 겉모습은 아무런 상관없네. 그것의 영혼은···사내인가, 여인인가, 노인인가, 아이인가···아니, 어쩌면 그 무엇도 아닐지도 모르지.”
“그런, 그런 자가 이 세상에 있다니···.”
꽉!
내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그가 내 팔을 꽉 잡았다.
“그자에 관한 생각은 후에 하면 그만이야···지금은 더 중요한 것이 있어···.”
“중요한 것이라니···앗!”
그는 그만한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도 육신을 일으켜 나와 마주했다.
권능을 가지고 있던 독고삭조차 한나절 버티는 게 전부였던 상처를 앓고도 이렇게 몸을 일으키다니, 대체 어떤 정신력으로 이렇게 하는 것일까.
“등을···.”
“아, 네!”
“···이제 내가 자네에게 전해줄 건 내 최후의 심득. 내가 사부님에게, 사부님이 사부님의 사부님에게···그렇게 끝없이 이어지던 깨달음.”
번뜩!
그의 눈이 찬란한 광채를 발했다.
그것은 회광반조(回光返照).
“···그것을 자네에게 전해주겠네.”
그는 진심으로 내게 자신의 최후를 맡기려 하고 있었다.
신승의 최후
“어르신! 지금은 먼저 치료를···!”
내 몸도 엉망진창인 건 마찬가지였지만, 신승에 비하면 한낱 생채기에 불과할 정도였다.
단전과 명치 사이에 뚫린 커다란 구멍에서는 끝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만한 상처를 치료하는 건 쉽지 않겠지만, 그는 경지에 이른 고수.
어느 정도 버티기만 한다면, 어떻게 방법이···.
“아니.”
하지만 그런 내 제안을 신승은 한 마디로 싹둑 잘라냈다.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어차피 치료도 소용없어.”
그는 가쁜 호흡을 몰아쉬며,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은 그저 내가 하라는 대로 해주게나.”
“그래도, 만에 하나라도 치료할 가능성이 있다면···.”
툭.
신승은 내 말에도 아무런 대답 없이 내 등에 손을 올렸다.
이제는 익숙한 비쩍 마른 팔의 느낌. 하지만 나는 그런 그의 팔을 느끼며 이를 물었다.
내가 봐왔던 그의 팔은 겨울날의 나뭇가지에 비견될 만큼 앙상했지만, 대신 거기에는 천근의 거력이 담겨 있었다.
그 무엇으로도 부수지 못하고, 망가뜨리지 못할 신승의 굳건한 신념이 형상화한듯한 그런 힘이 말이다.
하지만 지금 내 등에서 느껴지는 그의 팔에는 그런 힘도, 느낌도 없었다.
그저 내 등에 팔을 올린 게 지금 그의 전력이라는 말이었다.
“내가 지금부터 자네에게 건네줄 것은 금강부동신법이라는 것일세.”
흡!
거의 신음에 가까운 신승의 목소리에서 특히 귀에 꽂히는 한 단어에 나는 숨을 강하게 들이켰다.
금강부동신법!
소림 제일의 신공이자, 신승을 신승으로 만들어준 그의 최고의 성명절기의 이름에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나는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저, 저에게 말입니까?!”
“본디 소림의 제자에게 전수해줘야 할 것이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놈이 너뿐이니 어쩔 수 있겠느냐.”
장난기 섞인 말투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결심이 느껴졌다.
그는 지금 진심으로 내게 제일의 무학을 전수하려는 생각이었다.
“허나···.”
그의 결심 어린 목소리에도 나는 한 마디를 덧붙일 수밖에 없었다.
“제가 그것을 소림에 돌려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저도 모릅니다.”
아니, 사실 못 돌려준다고 하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내 무공의 근간은 바로 천마의 권능.
어떠한 성질로도 변화 가능한 천변만화한 권능의 내공은 물론 불가의 무공을 익히더라도 상관없겠지만, 문제는 권능이 가진 성질 그 자체였다.
천마의 권능은 오직 천마의 무공만을 허락한다.
그 외의 모든 무공은 천마의 무공을 강하게 만들기 위한 수단이자 거름일 뿐.
지금 금강부동신법을 내게 전수해줘 봐야 그 흔적은 결국 왼팔의 여섯 글자 정도밖에 남지 않으리라.
설사 그가 내게 무공을 전수하더라도 소림에 그 깨달음을 전해줄 방법은 요원하다는 소리였다.
“걱정하지 말게. 나도 양심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야. 내 마음대로 자네에게 건네준 걸 다시 내놓으라 하겠나.”
그는 말은 그리했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편치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신승의 최후를 지킨 존재이자, 그 무공을 전수한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예우는 보여야 할 터인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 말이다.
“만약 그게 그토록 신경 쓰인다면, 이거라도 가져다주게.”
딸그락.
내 표정이 하도 심상치 않았던 탓일까. 신승은 자신의 품을 뒤적여 밥그릇보다 조금 더 큰 그릇을 내게 내밀었다.
군데군데 이가 빠지고, 금이 간 곳도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세월의 흐름은 막을 수 없었기에 생겨난 흔적일 뿐, 될 수 있는 한 최대한 아끼고 관리하며 사용했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이건?”
“내가 스승에게 물려받은 발우네. 대단한 물건은 아니지만, 소림사에서 퍽 귀하게 여기는 놈이 많아서 말이야. 가져다주면 최소한 문전박대는 하지 않을 걸세.”
마치 내게 심부름을 시키는 듯한 말투였지만, 그의 진심을 읽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혹시나 강호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내가 소림에 들어갈 때 쫓겨나지 않을까 싶어 들어갈 수 있는 증표를 건네주려 하는 것이다.
“어르신, 전···.”
“쉿. 이제 입을 다물게. 지금부터는 절대 입을 열지 말게나.”
우웅.
그의 팔에서부터 미약한, 그러면서도 따뜻한 봄바람 같은 기운이 점점 내 몸으로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본디 외부의 기운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 권능조차 아무런 의심도, 문제도 없이 받아들일 정도로 적대심 한 점 없는 기운.
“금강부동신법은 이해의 무공이네.”
자신의 기를 전해주는 와중에도 신승은 언제나 와 똑같이 평안한 목소리로 입을 말했다.
“금강부동신법의 구결은 단 하나뿐. 움직이지 않고도 모든 것을 피하라는 것밖에 없네.”
움직이지 않고 모든 것을 피한다? 그게 가능한가?
아냐, 그 어떤 무공보다도 깨달음을 중시하는 불가의 무공.
그런 무공 중에서도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소림의 무공이다.
마치 선문답 같은 구결도 무언가 깊은 의미를 지닌 게 분명하다.
“그래서 내 스승은 육신을 극한까지 단련하여 금강불괴(金剛不壞)를 얻었지. 피하지 않고도 적의 공격을 막으려면 그 무엇보다 육신이 튼튼해야 한다면서 말이야.”
···그거 애초에 신법은 맞는 겁니까!?
도대체 어떠한 깨달음을 통해 나왔는지 모를 스승의 해답.
그로 인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던 질문을 겨우 억눌렀다.
“하지만 쇠가 아무리 튼튼하더라도 강한 불에는 녹아내리는 법. 스승의 금강불괴. 아니, 금강부동신법은 결국 당대 천마와의 대결에서 깨지고 말았네.”
[아···이렇게 말하니까 생각난다. 그 인간이 신승 이 할아버지의 스승이었구만.]
화순 너, 설마 그 분을 알고 있는 거냐?
입을 열 순 없었지만 생각은 할 수 있다.
그 말인즉슨 내 생각을 읽고 말할 수 있는 화순과는 대화할 수 있다는 뜻.
내 질문에 화순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무지막지한 인간이었지. 수백의 마인들이 전심전력으로 공격을 해도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하는 인간은 진짜 처음 봤다니까? 당대 천마가 너처럼 불파를 익히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아무도 못 이겼을걸?]
그 말은···오직 단련 하나만으로 거의 불파에 버금가는 단단함을 익혔다, 이 말이야?
처음 들었을 땐 재밌는 농담 수준밖에 되지 않았지만, 화순의 이야기를 듣고는 생각이 싹 달라졌다.
불파의 단단함은 물론 무엇에도 비할 바가 없지만, 팔 일부에만 적용된다는 단점은 분명 큰 문제였다.
하지만 지금 신승의 스승이 익힌 금강불괴는 그런 걱정도 없다. 강도는 불파보다야 약하더라도 전신에 걸쳐 단단해진다는 건 분명 어마어마한 장점이었으니까.
더욱 놀라운 건 그것을 권능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직 인간의 육신만으로 이뤄냈다는 사실이었다.
[뭐, 그렇지. 지금껏 긴 세월을 살면서 자기가 금강불괴라 하는 사람은 잔뜩 봤지만, 진짜 그런 인간은 그때 처음 봤지. 더 기막힌 건 금강불괴가 깨져서 심후한 내상을 얻었음에도 그냥 마구 달려들더라고. 전쟁은 좋아해도 싸움은 모르던 당대 천마는 그때 목숨을 잃었지.]
그렇다면 지금 신승의 말도···.
[아마 사실일 소지가 다분하겠지.]
꿀꺽.
화순의 말에 나는 침을 삼키며 다시 신승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스승의 패배 소식을 듣고 나는 그것이 완벽한 금강부동신법이 아니라 생각했지. 그렇기에 다른 방법을 구상하고, 또 구상하다···결국 답을 찾아냈네.”
우웅.
신승이 내 몸으로 몰아넣던 기가 주변으로 퍼져나가더니, 얇은 막을 하나 만들었다.
기막(氣膜)···아니, 평범한 기막과는 그 성질이 다르다.
흔히 다른 무인들이 사용하는 기막이 방패라면, 이 기막은 아이들이 공놀이 할 때 사용하는 돼지 보와 같았다.
아무리 강하게 발로 차도 모두 튕겨버리는···그런 보.
“이것이 바로 나의 해답. 반사(反射)일세.”
반사···?
“나를 향해 날아오는 공격은 모두 상대에게 되돌려주는 것이지. 움직이지 않고도 모든 공격을 피하는 건 물론,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기까지. 나는 이것이야말로 금강부동신법의 완성형이다. 그리 자신했네.”
쿨럭.
조금 전에 들었던 젖은기침보다도 더욱 더 많은 액체가 함유된 듯, 묵직한 기침 소리가 주변을 잠식했다.
“···그리고 조금 전, 그런 자신감은 금강부동신법과 함께 산산조각이 나버렸지.”
그의 자신감은 정당한 것이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얇디얇은 기막에 담긴 힘을 나는 분명 알 수 있었다.
과연 내 오의로 뚫을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조차 자연스레 호승심과 도전심이 끌어 오를 정도로 세심하고 촘촘한 기의 막.
어떤 방식으로 공격까지 반사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이것을 만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대체 이 기막을 간단히 뚫고 그에게 저만한 상처를 남긴 자의 정체는.
오싹.
그것을 떠올리는 순간 전신에 소름이 올라왔다.
지금 신승을 이 꼴로 만든 적의 강함을 지금 이거 하나로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부터 쌓아 올릴 자네의 금강부동신법.”
눈앞의 기막이 사라지고, 신승의 목소리만이 아련하게 울려 퍼지는 숲 안.
“그 결과물을 지켜볼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 아쉽고 또 슬픈 일이겠지.”
빙글.
그의 손길에 내 몸이 반 바퀴 돌았다.
다시 마주하게 된 그는 언제나 똑같은, 하지만 이 순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띤 채 내게 말했다.
“허나 나는 알 수 있네. 자네가 완성할 그 금강부동신법은 지금껏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런 무공이라는 걸.”
그 처연하면서 밝은 미소를 바라보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부디 무림의 큰 별이 되어주게나.”
그것이 그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정파의 큰 기둥. 무림 최고의 고수. 강호인 모두의 스승.
세상 사람들 모두의 존경을 받던 그의 죽음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초라한 최후이자, 충분치도 않은 배웅이었다.
그는 분명 이보다 훨씬 편안하고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자격이 충분했거늘.
절대 이렇게 누구도 그 이름을 모르는 숲에서 옆에서 단 한 사람만이 떠나보낼 사람이 아니었거늘.
하지만 최후의 순간까지도 그는 쭉 미소를 지은 채, 내게 모든 것을 맡긴다고 말하며 눈을 감았다.
점점 싸늘하게 식어가는 그의 팔을 잡고 있던 그의 손에서 완전히 온기가 사라지고 나서야 몸을 움직였다.
쿵! 쿵! 쿵!
공터 주변의 나무를 베어 그것을 쌓았다. 마음 같아서는 하늘까지 닿을 정도로 높게 쌓고 싶었지만, 지금 적의 정확한 위치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럴 순 없었다.
신승만 처리할 생각이었는지 나의 죽음도 파악하지 않고 사라진 놈들을 자극할 순 없었으니까.
놈들이 다시 찾아와서 나와 싸울지도 모르는 두려움이 아니라, 신승의 시신을 제대로 수습할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여섯 단을 쌓아 올린 목탑 위에 하얀 천을 펼쳐 그 위에 신승의 시체를 올린 뒤, 아래로 내려와 목재에 불을 붙였다.
타닥, 타닥.
나무도 지금 자신이 태우고 있는 이가 누군지 아는 걸까.
큰 소리 내지 않고 부드럽게 자신의 몸을 불사르던 나무는 제일 위에 있는 이까지 천천히 태웠다.
불길이 모두 꺼진 뒤 재를 뒤져 그의 뼈를 찾아, 하나하나 세심하게 빠개서 가루로 만들었다.
다비식(불교식 화장법)은 할 수 없는 탓에 사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사리가 나오건 말건 별 신경도 쓰지 않았으리라.
다 빻은 가루는 그가 건네준 발우에 넣어 천을 씌웠다. 어떻게 걷고 뛰어도 한 톨의 가루도 잃지 않을 정도로, 아주 꽉.
[바로 출발할 거냐?]
“응. 더 여기 있을 이유는 없으니까. 그리고 최대한 빨리 가야지.”
옆에서 화장이 끝날 때까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던 화순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의 유해를 담은 발우를 품 안에 넣고 길을 서둘렀다.
예전에 신승이 내게 한 약조와 조금 전 내가 신승과 한 약속.
이 두 가지 모두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만 했으니까.
“···소림으로.”
무림의 태산북두이자, 모든 무공의 발원지라 불리는 그곳에서 말이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유현이 오기 얼마 전.
“쿨럭, 쿨럭, 쿨럭!”
엎드린 채 내장 조각이 섞인 피를 토해내는 신승을 지그시 바라보는 사내.
마치 자신이 벌인 일의 결과물을 감상하기라도 하듯 아무런 행동 없이 신승을 지켜보던 그가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흑의 사내를 불렀다.
“삼 가주.”
“네, 일 가주님!”
전신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와중에도 그의 부름에 바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박는 삼 가주.
두려움에 가득 차 몸을 떠는 그를 지그시 바라보던 일 가주가 입을 열었다.
“분명 나는 예외개체에 대해서는 내 명령이 내려오기 전까지는 건드리지 마라···그렇게 말했을 텐데.”
움찔.
인간의 말이라고는 믿기 힘든 그 감정 없는 목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오자, 삼 가주는 몸을 크게 떨 수밖에 없었다.
“···왜 마음대로 움직였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듯한 음색도 음색이지만, 그 내용 또한 지금 그를 두렵게 만들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그의 마음에 들지 않거나 잘못된 대답을 꺼내면 지금 신승이나 예전의 독고삭과 같은.
아니, 더욱 끔찍한 결과가 나오리라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
꿀꺽.
입안에 가득 찬 것은 긴장 때문에 나온 마른 침인가, 아니면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인가.
자신이 하던 말을 멈추게 만든 그것을 소리 나게 삼킨 삼 가주는 하려던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일 가주님이 직접 나서서 처리하셨던 일을 방해하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어 이런 행동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독단으로 나선 부분에 관해선···.”
“상관없다.”
“네?”
어떤 벌을 받을지 몰라 벌벌 떨던 삼 가주는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가, 바로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한 번 고개를 숙인 이상 그의 명령이 다시 있기 전까진 절대 고개를 들어선 안 된다.
이 당연한 일을 잊고 있었던 것은, 겨우 몇 년 그에게서 멀어져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상처에서 흐르는 피보다 온몸에서 흐르는 식은땀이 더 많아진 삼 가주는 더욱 깊이 고개를 숙이며 큰소리로 외쳤다.
“요, 용서를! 부디 저의 우행(愚行)을 용서해주십시오!”
자신이 곧 죽을 상황에서조차 용서를 비는 삼가주. 하지만 그런 그의 말에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이미 일 가주는 삼 가주에 대한 모든 흥미를 잃은 상태였다.
그가 지금 시선을 향하고 있는 건 눈앞에서 자신에게 용서를 빌고 있는 삼 가주도, 끊임없이 토혈하는 신승도 아닌.
“·········.”
높게 솟아오른 거목으로 인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숲속.
일 가주는 마치 그곳에 무엇이라도 있는 양, 오직 그곳만을 향해 온 집중을 다 하고 있었다.
만약 삼 가주나 신승이 그의 모습을 보고 있다면 의문을 표했으리라.
그 부분은 부가주가 도망치고, 유현이 쫓아간 방향.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유현밖에 없을 바로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필요 없나.”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무어라 중얼거린 일 가주는 다시 삼 가주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어라.”
“네, 네!”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한순간에 고개를 들어 올리는 삼 가주. 땀과 피로 전신을 흠뻑 젖은 상황에서도 그의 얼굴에는 환희가 가득했다.
자신이 지은 수많은 죄 앞에서도 일 가주의 목소리는 한 점의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
즉, 자신은 용서받았다는 말이다!
조금 전까지 일 가주에게 죄를 지었던 수많은 이들. 특히, 가장 앞서서 그를 비판했던 칠 가주의 처벌을 떠올리고 있던 삼 가주에게 이것은 천운. 아니,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안도도 아주 잠깐일 뿐. 뒤이어 들려오는 일 가주의 말에 그는 다시 몸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아직 정파에 남은 끈이 있나?”
하지만 그것이 자신을 탓하려는 게 아니라, 다른 것을 물으려는 걸 깨닫고 다시 한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 최근에는 그 기세가 조금 약해지긴 했지만, 아직 뜻대로 부릴 수 있는 자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군. 그럼 그들에게 일러라. 곧 명령이 갈 터이니, 그것을 확실히 완수하라고.”
“네···그런데 일 가주님.”
“뭐지?”
“겨우 정파의 무인들 따위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저희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일 터인데, 어째서···.”
삼 가주라면 평상시라면 절대 꺼내지 않을 질문을 일부러 일 가주에게 물었다.
분명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것을 묻는 것이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 그걸 잠깐 무시할 정도로 지금 그는 급했다.
이미 죄를 저지른 이상, 그것을 한시라도 빨리 공으로 덮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 제대로 된 수족으로도 쓰지 못할 정파의 인간들 따위에 일 가주가 친히 내린 명령을 양보할 순 없다.
그런 심정으로 입을 연 삼 가주는 자신을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여전히 무엇을 생각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 가주의 공허한 눈길을 마주친 삼 가주가 침을 꿀꺽 삼키는 그 순간,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지금 필요한 건 무력이 아니라 그들의 이름값이니.”
스윽.
“흡!”
그의 입가가 움직였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광경에 삼 가주는 자신이 질문을 던졌다는 사실도 잊고 그 모습을 정신없이 지켜보았다.
‘그것’이 지은 미소는 너무나 아름답고, 또 너무나 추악했다.
마치 자신보다 한참 위에 존재하는 무언가가, 자신은 보아선 안 될 미소를 짓는 것처럼.
“이 시련을 이겨낼 수 있을지, 한 번 지켜봐야지.”
“아, 네, 네···.”
삼 가주는 거기서 다시 입을 열지 못했다.
시련을 주려는 상대가 누군지, 무엇을 지켜보려 하는 것인지.
도대체 일 가주의 본심이 무엇인지.
오히려 더욱 많은 질문만 생기는 그 대답에도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삼 가주와 일 가주는 조용히 그곳에서 사라졌다.
유현과 신승이 쓰러뜨린 삼백여 명의 무인과, 일 가주가 직접 목숨을 거둔 삼천여 명의 무인.
그들의 피를 머금은 숲은 처음 그들이 찾아왔을 때처럼 똑같이 깊은 침묵에 잠겼다.
*****
일만의 사람도 거뜬히 자리할 수 있는 거대한 대전.
그리고 거기에 모인 열 한 명의 사람들.
제일 상석에 있는 먹색의 좌에 앉은 한 사람을 제외하곤 모두가 좌우에 기립한 채 있던 그곳에서 누군가가 목소리를 높였다.
“대가리에 구멍이 여섯 개만 있는 게 아니면 말을 좀 해보란 말이오!”
그것은 상석의 좌에 제일 가까운 두 사내 중 하나.
마주한 노인에 비해 배는 큰 몸집과 울룩불룩한 근육을 가진 적색 비단옷의 사내는 자신의 앞에 있는 커다란 탁자를 내려치며 소리쳤다.
“전투 부대 열 개! 섬멸 부대 다섯 개! 이놈들을 대체 어디로 다 움직였냔 말이오! 진심으로 정파와 전쟁이라도 일으킬 속셈이란 말이오?!”
“거기에 특작 부대 다섯 개와 외부 유출이 금지된 고독 삼백 쌍도 없어졌지요.”
조금 전 소리친 사내와 같은 줄에서 제일 아래쪽에 있던 호리호리한 백의의 여인 또한 그의 뒤를 이어 입을 열었다.
“그것도 지금 이 일과 관련된 일입니까?”
번뜩!
눈을 뜬 지, 아니면 감았는지 모를 실눈을 가지고 있던 그녀가 눈을 뜨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대전을 휘몰아쳤다.
물론 그만한 기운으로 몸을 떨 인물은 이 열 한 명 중에 없었지만, 그녀가 분노하고 있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일류 이상의 고수가 이천인가? 이거야 원, 아무리 우리 마교가 사람 막 굴리기론 유명한 곳이지만 좀 심하지 않수?”
대전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 허름한 장삼을 입은 사내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역시 다른 이들이 질문을 던진 이에게 말했다.
“대체 어따가 다 쓴거유? 그거나 좀 들어봅시다.”
한 사람의 압박은 아무것도 아닐지 몰라도, 열 사람 모두의 압박은 아니었다.
전 강호를 뒤져도 감당할 수 있을 사람이 몇 안 될 그 기운에 좌에 앉아 있던 사내의 얼굴도 크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기운에 해할 속셈까지는 없었던 덕분일까. 사내를 압박한 기운이 곧 사라지자, 심호흡을 몇 번 한 뒤 입을 열었다.
“마교의 모든 것은 곧 교주의 것.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썼다는 데 너희에게 그 출처를 대답해야 할 이유가···.”
“그건 어디까지나 그대가 교주의 자리에 있을 때의 이야기지.”
제일 처음 입을 연 우락부락한 사내와 마주하고 있던 노인이 입을 연 것도 그때였다.
마치 한 자루의 잘 벼려진 검과도 같은 기세를 은연중에 뿜어내고 있던 노인은 그만큼 날카로운 눈빛을 사내에게 향하며 말했다.
“되지도 않는 교주 대리라는 이름으로 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오.”
그의 말이 곧 다른 모두의 진의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대전에 모인 열 명의 남녀는 다름 아닌 지금 마교의 여섯 장로와 네 명의 천장(天將).
마교의 신이자 교주인 천마의 옆에서 그를 보좌하여 마교를 이끄는, 이른바 마교의 최중요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분노를 한몸에 받는 사람은 전(前) 소교주이자, 현(現) 교주 대리.
본래의 역사대로라면 지금쯤 벌써 천마의 자리를 이어받아야 했을 그 사내. 옥천이었다.
“독고삭 교주님의 행방이 현재 불명이라 부득이하게 소규주인 당신을 지금 그 자리에 올려놨을 뿐, 본디 당신은 그 옥좌에 앉을 이유도, 권리도 없다는 걸 절대 잊지 마시오.”
“흥! 애초에 저길 앉히질 말았어야 한다니까. 교주님이 오셔서 저 광경을 보면 우리 열 한 사람의 대가리를 모두 날려버릴 거라니까? 뭐, 물론 제일 먼저 날아갈 놈이 누군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쿵!
“벌써 몇 번이나 말해야 알겠나! 그는 이미 죽었어! 이젠 내가 천마다! 내가 이 마교의 주인이란 말이다!”
“그러는 저희야 말로 벌써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요?”
옥천의 말에 제일 뒷자리에서 요사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던 화려한 옷의 여인. 마교의 색천장(色天將) 요화란은 옷만큼이나 화려한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그에게 대답했다.
“진심으로 본인이 교주님의 사망을 진실이라 말하고 싶다면 천마의 무공을 직접 선보이면 될 일이라고 말이에요.”
말투에는 웃음기가 가득했지만, 얼굴에서 유일하게 보이는 눈빛은 다르다.
마치 모든 것을 세세히 밝히려는 듯 옥천의 위아래를 샅샅이 훑어내는 그 눈빛.
마교에 들어오는 정보 모두를 관리하는 색천장다운 눈이었다.
그녀의 그런 눈빛에 옥천은 이를 꽉 물었다.
권능에 대해 아는 건 오직 천마와 그 제자. 두 사람뿐.
그 외의 인간들은, 심지어 천마의 가장 옆에서 그를 보좌하는 여섯 장로와 네 명의 천장들도 권능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대신 그런 그들에게는 어떻게 천마가 그토록 빠르고 강하게 성장하는지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 전혀 다른 정보를 알려줬다.
바로 전대 천마가 죽으면, 그 안에 담긴 내공이 같은 무공을 익힌 후대 천마에게 전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전해진 내공을 수련을 통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서 더욱 강해지는 한편, 몸 안에 잠들어 있는 내공 덕분에 큰 상처를 입어도 순식간에 회복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전해놓은 것이다.
물론 권능의 진실에 극히 일부밖에 안 되는 이야기지만, 어느 정도 진실을 섞은 덕분에 이 이야기를 믿는 이들은 많았다.
그렇기에 지금 이들은 독고삭이 죽었다고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정말로 죽었다면, 이미 옥천은 그 내공을 통해서만 사용할 수 있는 천마의 무공을 마음껏 쓸 수 있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옥천은 천마의 무공을 사용하긴 커녕 익히지도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게는 권능이 없었으니까.
그 사실을 무엇보다 철저히 실감하고 있는 옥천은 이를 악물면서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됐건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순 없소.”
이번에 입을 연 건 두 번째 자리에 있는 노인이었다. 백의의 장삼과 기다란 흰색 수염 덕에 마치 신선처럼 보이는 그 노인은 부드러운, 허나 감히 반발할 수 없는 힘이 담긴 목소리로 옥천에게 말했다.
“천마를 보좌하는 여섯 장로와 사 천장의 이름으로 옥천 소교주의 감금을 요청하는 바이오.”
열 사람 중 제일 옥천을 아끼던 삼 장로의 발언에 놀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 아홉의 장로와 천장들.
하지만 그들 역시 생각은 다르지 않았다. 그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옥천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놈들이 어찌···!”
“천마가 없으면 우리 열 사람이 대신한다. 이미 대대로 내려오던 마교의 법이잖아? 뭐, 지금껏 천마의 자리가 비어 있던 일은 없어서 단 한 번도 일어난 적은 없던 일이지만···지금은 좀 유용하네.”
옥천과 비슷한 연배일까. 열 사람 중에서도 제일 어린 천장이 툭 내뱉자, 옥천은 입을 다물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달려가 놈을 쳐 죽이고 싶었지만, 지금 그의 경지로는 감히 닿는 것도 불가능하다.
천장의 경지가 고절한 탓도 있지만, 지금 옥천의 무공이 너무나 수준 이하였던 탓도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을 뒤집을 방법은 없다. 그리 생각한 옥천은 결국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소. 그대들의 뜻으로 하지.”
그 말에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열 사람의 장로와 천장들.
고개를 푹 숙인 옥천의 모습을 씁쓸한 듯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자업자득이라는 눈치가 더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언젠가 네놈들을 모두 쳐 죽여주겠다.’
고개를 푹 숙인 옥천의 눈에서 일렁이는 푸른 기운을.
마교는 물론이거니와 세상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그 귀기가 옥천의 단전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번 칩거가 끝나고 나온 옥천이 얼마만큼의 경지로 이루고 나타날지, 그 누구도, 심지어 옥천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
그리고 옥천의 감금이 확정된 그 시각, 대전의 입구.
“·········.”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한 명의 여인.
마교 제일의 고수 열 명도 눈치채지 못하게 그 이야기를 모두 들은 그녀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곳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