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라지망(1)
“유 대인의 은혜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고향의 일만 마무리되면 꼭 찾아뵙겠습니다.”
현옥의 작별 인사를 뒤로한 채 우리는 묘강을 벗어났다.
“이제 슬슬 이 여행도 막바지로구먼.”
현옥이 발품을 팔아 구해준 묘강 제일의 명마를 타고 가던 신승이 입을 열었다.
“자네도 고생 많았으이. 이 늙은이 부탁 들어주겠다고 그 먼 거리까지 함께 와주고 말이여.”
“뭘요. 저도 가서 많은 걸 배웠습니다.”
뭐, 사실 내가 얻은 걸 생각해보면 그저 ‘많은 걸 배웠다’ 정도로 웃어넘길 수준은 아니지만.
만약 남만으로 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화경의 경지에 오르고, 극의를 얻을 수 있었을까.
사실 이번 여정에서 제일 많은 건 얻은 사람은 현옥이 아니라 나일지도 몰랐다.
“흘흘흘, 그리 말해주니 고맙구먼.”
“그래도 약조해주신 걸 받지 않고 넘어가겠다는 건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걸 받았다 하더라도 원래 약속했던 것까지 잊은 건 아니었다.
회귀 전. 나와 사형제들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던 바로 그들.
정파 깊숙이 자리 잡은 어둠의 세력에 관한 정보를 대가로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걸 잊지 말라는 뜻이 담긴 발언이었다.
내 말에 신승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말게. 아무도 찾지 못할 곳에 아주 꼭꼭 숨겨뒀으니까.”
“허어, 어디 본인만 아는 멋들어진 자택이라도 하나 사두신 겁니까?”
“이놈아, 세상을 다 줘도 바꾸지 않을 소림(小林)과 숭산(崇山)이 있는데 내가 뭐하러 다른 건물을 사겠느냐?”
“잘 숨겨뒀다 하시니 그리 물어본 거지요.”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 할 농지거리도 이제는 일상이었다.
내 농담에 껄껄 큰 소리로 웃던 신승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뭐, 네 말이 그리 틀린 것도 아니구나. 내 소림에 그것들을 모두 잘 숨겨뒀으니 말이다.”
“소림···확실히 누구도 정보에 손댈 수 없는 곳일 것 같긴 하네요.”
소림사가 어디인가.
정파의 태산북두이자, 정파 무림인 모두의 정신적 지주와 같은 곳.
정파 무림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마교도, 무림의 힘을 두려워해 그것을 억류하려 하던 관조차 그들을 뚫지 못했다.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어떨 때는 제일 앞에서 그들을 이끌었고, 어떨 때는 후위에서 그들을 지켜주었던 소림.
그곳이라면 설사 어떠한 적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정보가 약탈당하거나 유실될 걱정은 없었다.
“자네가···아니, 우리가 상대할 적이 보통이 아니니 말이야.”
“···그만큼 심했습니까?”
“자네의 말을 듣고 사태를 파악하기 전까지는 나도 그들의 세력이 얼마나 큰지 알지 못했네.”
신승이 타고 있는 말이 내 말보다 조금 더 앞에서 걷고 있었기에 그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 목소리만으로도 이미 그가 지금 이 사태를 얼마나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최소 이할. 어쩌면 사할까지. ···이 정도면 이미 일부라는 변명조차 통하지 않지.”
“사할···.”
확실히 그들의 규모나 정보량을 생각하면, 확실히 일부분으로는 턱도 없다.
최소한 일급 이상의 정보와 함께 화산의 일대 제자까지 부릴 수 있는 권력까지 가지고 있을 정도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설마 정파 무림의 사 할이 그들의 소속일 줄이야.
“물론 당 파의 소속 인원 전부가 그들과 똑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아니네. ···하지만 장문인이나 대장로같이 문파의 대소사를 정할 수 있는 인원 중 사 할이 그런 이들이라는 건 분명하네.”
“후우···건드리기가 쉽지 않겠군요.”
물론 나도 이것저것 세력을 구축해놓고, 무림에 관계된 인맥도 여럿 만들어뒀지만, 그래도 정파 무림의 사 할의 힘을 상대할 수는 없는 법.
하물며 그 안에는 분명 소림에 비견될만한 거대 문파도 있을 터.
그들 하나를 막는 것만 해도 내 힘 모두를 사용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진 말게.”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나에게 다시 한번 말을 거는 신승.
···그래도 같은 화경인데 왜 난 저런 걸 못하지?
역시 불교인가? 불교라서 그런 거야?
“내 이미 반쯤 은거인이나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 부탁을 들어주는 이는 많네. 확실히 깨끗한 부대를 대상으로 도움을 요청하면 그래도 어느 정도까지는 들어줄걸세.”
신승의 부탁에 남만까지 기나긴 여정을 떠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물론 그들의 목을 확실히 죌 수 있는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도 내게는 매력적인 제안이었지만, 그보다는 신승 본인이 이 사태를 깊게 파악할 수 있도록.
그로 인해 나를 도와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나나 신승이나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그들을 이겨내긴 힘들 터.
그들을 확실히 일망타진하기 위해선 우리 두 사람의 힘을 합쳐야 했다.
“부디 한 손 빌리겠습니다.”
“그리 말하지 말게. 오히려 내가 역으로 자네 손을 빌리는 건데 무슨 말인가.”
뭐···그는 자신이 평생 속해있던 정파의 근간을 바로잡겠다···같은 생각으로 힘을 쓰는 거지만, 나는 다르다.
복수.
이제는 피해자도 모두 없어지고, 범인들조차 스스로 지었는지 모를 범죄를 벌하려 하는 거니까.
···사실상 자기만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자기만족이면 어떤가.
내 심장은 여전히 그때 파고들었던 칼날의 차가움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데.
그들의 뿌리까지 모두 뽑아내지 않는 한, 이 뇌리를 파고드는 서늘함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으리라.
다그닥, 다그닥, 다그···.
···음?
한창 머릿속으로 그놈들에게 어떻게 복수해야 할지 짜놓고 있던 도중, 갑자기 잘 들리던 발굽 소리가 멈춘 걸 깨닫고 상념에서 벗어났다.
나보다 앞서서 가고 있던 신승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기 때문이었다.
“신승 어르신···?”
“쉿.”
갑자기 발을 멈춘 이유라도 묻기 위해 내가 그를 부르기가 무섭게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뭔가 있네.”
“네?”
“거리는 멀지만, 우리 주변을 완전히 감쌌어. 앞과 좌우는 물론이거니와 뒤까지···이거 귀찮게 됐군.”
신승의 말에 나도 바로 기감을 펼쳐 주변을 살폈다.
내공의 양이 늘어나 화공의 경지에 오르면서 기감 역시 감지할 수 있는 범위도 훨씬 늘어난 건 물론, 그 감도 역시 훨씬 민감해졌다.
이제는 앉은 자리에서 먼 거리에 떨어진 무인의 경지까지 파악할 수 있을 정도!
“으음···.”
하지만 그토록 민감해진 기감조차 지금 신승이 말한 이들을 잡는 건 쉽지 않았다.
단전에 있는 모든 내공을 퍼뜨리고 나서야 겨우 그 끝자락을 파악할 수 있었을 정도니까.
하지만 그렇게 파악해낸 적들은 숫자와 수준은···.
“절정 이상의 고수가 수백···혹은 그 이상.”
“거기에 초절정 고수까지 여럿 섞여 있네. 이만한 무인은 마교라고 해도 쉽게 부릴 수 없을 터.”
“그렇다면 역시···.”
“···그래, 자네 생각이 맞는 듯해.”
후우, 신승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강호에 암약하고 있는 세력이 있다는 생각 말일세.”
사실 의심 가는 부분은 많았다.
황제의 독살을 획책한 두 황자와 지지기반도 없이 성하 공주에 대한 정보를 얻어낸 자야 등.
어떠한 외부 세력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을 해낸 사람이 몇몇 있었으니까.
하지만 제일 먼저, 그리고 제일 강하게 의심이 가던 부분은 바로 내가 회귀 전 속해있던 마교였다.
본디 더러운 정파의 협공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고 알려진 전대 천마 독고삭.
하지만 그는 다름 아닌 자신의 제자, 옥천에게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나는 그 부분을 항상 의심스럽게 생각했다.
옥천은 역대 천마 중에서도 뒤에서 세는 것이 빠르다고 마교 내에서도 공공연히 나돌 정도로 약골인 천마.
그런 인간이 권능을 가진 독고삭을 쓰러뜨릴 수 있을까?
아니, 설사 독고삭이 자신을 죽이라고 맨몸을 내놔도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마교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라는 가능성 역시 없다.
정말로 반란이 있었다면 정보부인 내게 어떤 방식으로든 정보가 들어올 수밖에 없거니와, 강자존 약자멸의 마교에서 역대 천마 중에서도 수위에 드는 독고삭에게 반란을 일으킨다?
차라리 정파의 인간들이 장경각에 있는 걸 훔치려고 소림을 향해 쳐들어갔다는 게 더 믿음직하다.
결국 옥천 그가 독고삭을 죽이기 위해 시도할 방법은 딱 하나.
외부의 세력을 끌어다가 그를 죽이는 것뿐.
···하지만 이 방법도 쉬운 일은 아니다.
이미 독고삭의 강함은 정사마 할 것 없이 널리 알려져 있었고, 당시 마교는 정파와 평화적 기류를 유지하고 있을지언정 그렇게 뭉친 그들의 힘은 역대 제일.
정말로 강호 무림 전체와 한 번 맞붙어도 해볼 만하다는 말이 농담이 아닐 지경이었다.
그런 마교와 척을 지고 싶어 하지 않는 건 당연한 일.
설사 세상 누구보다도 독고삭을 죽이고 싶어 하는 정파라 하여도 함부로 그의 암살 계획을 짜지 못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기껏 크나큰 희생을 들여 그를 죽여도, 그들을 기다리는 건 분노한 마인들의 침공일 테니까.
결국 그를 죽이는 데 도움을 줄 만한 외부 세력은 극소수.
자신들이 독고삭을 죽였다는 사실을 감출 수 있는 확신이 있거나···그의 죽음으로 인해 분노를 폭발시킬 마인들을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거나.
그리고 지금 파악한 힘을 봤을 땐···전자와 후자 모두인가.
[야, 이거···.]
“신승 어르신, 이건···.”
높이 떠올라 위에서 지상의 상황을 지켜보고 내려온 화순과 딱 그 순간에 맞춰 다시 기감을 거두어들인 나.
그런 우리 두 사람의 대답은 똑같았다.
[천라지망(天羅地網)이다. 저놈들, 천라지망을 펼쳤어.]
“우리를 잡기 위해 천라지망을 펼친 것 같습니다.”
천라지망.
강호 무림에 널리 알려진 추적술 중 가장 단순무식하면서도 가장 뛰어난 효율을 보이는 추적술의 이름이었다.
최대한 은밀하게 뒤를 쫓는 타 추적술과 달리, 천라지망은 완전히 반대의 방식을 사용한다.
자신이 쫓아야 할 사람이 있는 곳에 그냥 사람을 들입다 퍼붓는 것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인파의 그물.
그물에 걸린 물고기가 도망치려 애쓰다가 서로에게 부딪혀 힘을 소진하듯, 천라지망 안에 갇힌 사람도 싸우고, 또 싸우다 결국에는 잡힌다.
···마교에서조차 사용했던 역사가 몇 번 없는 천라지망을, 그것도 절정 이상의 고수로만 만들어내는 자들이라.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은 자명해 보였다.
“·········.”
그리고 신승이 내놓은 답도 그것과 틀리지 않은 듯했다.
지금껏 본 적 없던 얼굴로 주변을 파악하던 신승이 무언가 정한 듯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그 말. 빠른가?”
“···네, 웬만한 고수보다는 빠를 겁니다.”
신승이 입을 연 그때부터 이미 그의 계획을 파악하고 원하는 대답을 꺼냈다.
그러자 그의 굳은 얼굴이 조금은 풀리더니, 슬며시 미소까지 떠올랐다.
“잘됐군.”
자신이 타던 말에서 내린 신승은 조심스레 말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히히힝!
그러자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관도 옆의 숲을 향해 뛰어가는 묘강의 명마.
말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걸 확인한 신승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선 말했다.
“최대한 빨리 움직일 것이니 열심히 따라오게.”
“걱정하지 마십쇼. 어르신을 추월할 기세로 달려볼 테니까요.”
“그거 믿음직하구먼.”
씩, 나를 향해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인 신승이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향했다.
“자, 그럼.”
그리고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디며 입을 열었다.
“일점 돌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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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제 일진부터 제 삼진까지 모두 돌파했습니다. 현재 지점까지 돌파된 시간으로 파악해 봤을 때, 약 두 시진 후면 천라지망을 빠져나갈 것으로 예상됩니다.”
“흐음···그래?”
여인의 보고를 받은 검은 옷의 사내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부하들이 당했다는 소식에도 사내의 표정은 큰 변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마치 그렇게 될 것을 알았던 것마냥 입을 열었다.
“팔진 까지는 마교에서 데리고 온 떨거지들과 덜 떨어진 절정들밖에 없었으니 상관없다. 진짜는 구진 이후의 무인들이니. 놈들은 목숨을 걸어서라도 시간만 끌면 그만.”
철컹.
옆에 놔뒀던 검을 허리춤에 건 사내가 조금 전까지 자신에게 보고하던 여인에게 명령했다.
“출전 준비를 해라. 목표는 딱 하나.”
전신을 가리고 있던 사내에게서 보이는 유일한 부분. 두 눈이 강렬한 푸른 광채를 뿜어냈다.
“예외 개체 을(乙). 신승의 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