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경(2)
어느 깊은 밤.
어둠으로 가득한 방 안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퍼졌다.
“작전 병(丙)이 실패했습니다.”
퍼억!
여인의 보고에 누워있던 사내의 손에 올려져 있던 과일이 순식간에 터져나갔다.
달콤한 과즙이 뿜어져 나오고, 최고급 과일에서나 느낄 수 있는 달큼한 향기가 방안을 가득 채웠지만, 그것에 신경을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방금···.”
스윽.
사내가 무시무시한 살기를 풍겨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 살기에 주변에 있던 그녀를 보필하고 있던 시녀들이 벌벌 떨고, 몇몇 시녀는 기절하기도 했지만, 사내는 마치 그것이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일인 양 무시한 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여인에게 다가갔다.
“···뭐라고 했지?”
하지만 여인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심상치 않은 사내의 분위기를 느끼지도 못하는 것처럼 아까와 한 점 다를 바 없는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이 들고 있던 서류를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작전 병이 실패하였습니다. 현재 내부에서 파악한 바에 따르면, 해당 영역에 존재하던 독기의 제거를 확인하였다고···.”
쨍그랑!
“꺄아악!”
하지만 그런 담담한 태도조차 사내의 분노를 막아내진 못했다.
자신의 옆에서 있던 시녀의 손에서 유리 쟁반을 빼앗아 바로 그녀에게 던졌다.
그릇 깨지는 소리와 거기에 지지 않는 시녀들의 비명.
좁고 어두운 방 안이 온갖 소음으로 가득 찼지만, 두 사람 다 거기에 괘념치 않고 서로만 바라봤다.
사내는 죽일 듯 매섭게.
여인은 아무런 감정 없이 담담하게.
으득. 사내가 어금니를 갈며 입을 열었다.
“···작전 갑은 협력자의 음모가 밝혀짐에 따라 사형을 당함으로써 실패, 작전 을은 협력자의 배신으로 인해 작전 전체가 실패.”
스산한 사내의 목소리. 그리고 거기에 담긴 강렬한 기파.
거기에 버티지 못한 시녀들의 칠공(七空)에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 두 가지의 실패는 그래도 인정해줄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천재지변과 다를 바 없고, 거기서 얻은 이득도 확실히 작지 않았으니까.”
주변 광경과 괴리가 느껴질 정도로 담담하고, 평이한 사내의 목소리.
“허나.”
그것이 깨지는 건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작전 병은 ‘그분’께서 직접 나선 일. 그것이 실패한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너는 그것의 실패를 입 위에 올렸다.”
쿵, 쿵, 쿵.
사내의 살기와 기운을 버티지 못한 시녀들이 마치 실 끊어진 인형마냥 쓰러지기 시작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원래부터 방안을 채우고 있던 과일의 향과 섞여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기괴한 향기를 풍기기 시작했지만, 그것에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그에 대한 변명이 있나?”
사내는 그녀에게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손가락 세 개를 매의 발톱처럼 뾰족하게 세워 그녀의 목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이미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여인이 할 수 있는 변명은 없었으며, 실패에 대한 처벌로 사내는 목숨을 거둔다.
그녀에게 질문할 때부터. 아니, 실패를 전해 들었을 때부터 정해진 대답.
“예외 개체 을(乙)이 해당 지역 내로 진입한 것이 파악되었습니다.”
“···뭐라?”
하지만 그녀의 입이 열리는 순간 그 대답이 바뀌었다.
혹은, 잠깐 밀려났거나.
손을 거둔 사내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풍기던 살기와 기운을 다시 거두었다.
물론 여전히 인상을 쓴 건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예외 개체의 행방에 대한 보고는 없었던 거로 아는데?”
“예외 개체 을은 그 성질상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기도 어렵고, 해당 개체라 확답할 근거도 부족한 탓에 정확히 확인되고 나서 보고하라 명령하셨습니다. 하여 해당 개체의 존재를 정확히 파악하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
그녀의 대답에 사내는 인상만 쓴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본인이 명령한 일까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사내는 멍청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순간을 자세히 설명하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거기에 있었던 사람의 신상명세는 물론 주변의 광경까지 자세히 읊어낼 수 있었다.
바로 그 때문에 사내의 손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예외 개체에 의한 거라면···어쩔 수 없지.”
이미 사내는 공언했다. 자신들의 계획이 뒤틀리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예외 개체와 관련된 일이라면 처벌하지 않는다고.
그것은 사내 자신보다도 더 높은 곳에서 올라온 명령.
아무리 여인의 보고에 사내가 분노했다고 해도 정말로 예외 개체와 관련된 일이라면 처벌할 수 없었다.
이번 일의 실패도, 그녀의 보고도 모두 정당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현재 작전을 시행하고 있지 않은 자들이 얼마나 있지?”
“지금 인원이라면···.”
“아니, 아니야.”
그녀가 채 대답을 꺼내기도 전에 사내는 손을 흔들어 그녀의 말을 끊고 자신이 누워있던 침상에 걸려 있던 옷을 손에 들었다.
“절정 이상의 인원을 모두 모아라. 나도 직접 나서겠다.”
“직접···말씀입니까?”
사내의 발언에 지금껏 어떠한 일에도 무표정을 고수하던 여인의 얼굴에 미미한 떨림이 생겨났다.
“예외 개체에 대한 사건은 허투루 나설 수 없다. 더군다나 해당 개체는 그분께서 직접 말씀하신 두 사람 중 하나.”
그리 말하는 사내의 눈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를 존경하는 것처럼도 보였고, 사모하는 것처럼도 보였으며, 신앙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어느 쪽이건, 지금 그가 입에 올린 상대에 관해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분의 앞길을 막는 자는 누구라도 용납할 수 없다.”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여인은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렇게 살아있는 사람이라곤 오직 사내 한 사람만 남은 방 안.
스윽.
마치 사내 호로 남을 때까지 기다렸다는 양 방 안 가득 들어오는 달빛.
그로 인해 보인 사내의 얼굴은 몇 번이고 겹쳐진 상흔과 함께.
번뜩!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열기를 뿜어내는 그 눈동자.
“·········.”
그 침묵에 담긴 뜻은 무엇인가.
여러 구의 시체가 있는 방 안에서 사내는 침상에 앉아 기이한 미소를 띠며 그녀가 다시 찾아오기만을 가만히 기다렸다.
*****
칠 주야 간 이어진 연회가 끝나고, 드디어 우리의 고향. 중원으로 돌아가는 길은 올 때와는 전혀 달랐다.
“자네들 모두가 그리울걸세.”
당장 배웅하는 사람 하나 없던 것과 달리, 지금은 황제가 직접 나서서 배웅한다는 것부터가 천지 차이였으니까.
“원한다면 언제든 다시 우리의 땅으로 찾아오게나. 그대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가 있는 한, 언제나 최고의 대우를 약속하겠네.”
“감사합니다, 폐하.”
“다시 찾아오실 때 꼭 저의 성에도 들려주실 거죠?”
“물론이죠, 아이 옌 님.”
물론 황제 혼자 배웅을 한 건 아니다.
아이 옌과 카이탕은 물론, 우리가 남만에 체류하면서 잠깐이라도 얼굴을 마주쳤던 사람이라면 모두 모여 우리를 배웅해줬으니 말이다.
“그대의 가르침을 전부 이해할 순 없었으나, 그 안에 담긴 연꽃의 향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소. 언젠가 때가 되면, 다시 한번 그대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겠소?”
“허허, 원하면 언제든지.”
제일 놀라운 건 황제와 신승이었다.
···대체 어느새 저런 유사 스승과 제자 관계가 된 건가, 싶을 정도로 황제는 신승을 극진히 대하며 그의 가르침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였다.
신승도 타국의 황제가 불가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는 게 썩 기뻤던 모양인지, 연회가 열리는 칠 주야 동안 황제의 옆에 딱 붙어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많이 해줬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대여.”
“네, 폐하.”
“언젠가 우리가 가운데 땅과의 교류가 이어지면···그대의 고향으로 찾아가도 되겠나?”
“물론이죠. 언제든 찾아오세요.”
삼십 년. 아니, 민간 차원의 교류가 아니라 국가와 국가 간의 제대로 된 교류를 따지자면 근 수백 년간 제대로 된 교류가 없던 남만과 중원.
서로 증오할 일도 없고, 미워할 일이 없음에도 그토록 길게 교류가 이어지지 못했던 이유는 딱 하나.
우리는 서로 다르다. 그래서 융화될 수 없다.
각국의 지배층은 물론 피지배층의 생각 저변에 깊게 깔린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황제는 생각을 달리 한 모양이다.
“곧 사람을 보내 두 국가 간의 진지한 교류를 이어보고 싶네. 만약 자네가 불편하지만 않다면, 자네가 옆에서 보좌해준다면 기쁠 것 같군.”
“저도 제 일이 있는지라 많은 걸 해드릴 순 없지만, 그래도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해드리겠습니다.”
“고맙네.”
남만을 떠나기 바로 전날 둘 사이에 있었던 대화.
···어쩌다 이렇게 외교까지 하게 되어버렸는지 이해할 순 없지만, 그래도 내게도 이득이 전혀 없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그리고 저번 북해에서처럼 남만을 찾아와야 한다고 하면 내 일이 있으니 좀 힘들겠지만, 직접 찾아와준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그렇게 성대한 환대와 함께 수도를 떠나고 우림으로 향하는 길.
“오오오! 황제 폐하의 마차다!”
“은인이 저 안에 타고 있으실 거야!”
“은인이시여!”
이미 내가 독기를 몰아냈다는 사실이 남만 전역에 퍼졌던 모양인지, 도시를 지나갈 때마다 한 치 앞으로 가는 것도 힘들 만큼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뭐, 덕분에 도시 내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대우를 받을 수 있던 건 좋으니까.
특히 현옥은 더 할 수 없을 만큼 밝은 미소를 띠며 모여든 사람들 하나하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제 앞으로 남만과 중원을 열심히 오가며 거래를 할 테니, 자신의 얼굴을 알려놓는 게 무엇보다 중요할 터.
덕분에 조금 더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이 사람도 고생하긴 고생했으니까.
“하하하하! 이거 중원으로 돌아가면 몇 년은 바쁘겠군요! 벌써 신용 하나만으로 거래를 뚫은 곳이 얼마인지···.”
“찾기 힘든 물건이나 다른 성에서 구해야 할 물건이라면 저한테 부탁하시죠. 저희 표국에서 구해드리겠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표국을 하신다고 하셨지요. 남만으로 오고 나선 무공 고수나 치료사의 면모만 보여주셔서 까먹고 있었습니다. 하하하!”
“뭐, 제 탓이지요.”
그렇게 마지막 도시까지 들리고, 우리는 이제 남만과 중원을 가르는 최후의 관문. 대우림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후우···결국 이때가 찾아오는군요.”
우림을 오가는 데 딱히 힘들일 필요 없는 신승이야 그렇다 쳐도 현옥의 표정은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두 분 덕분에 안전한 길은 찾았지만, 그래도 오가는 게 편하진 않으니까요. ···돈 벌 때는 기분이 좋아도, 막상 매번 이 길을 오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하군요.”
우림의 입구에서 인상을 쓰고 있는 현옥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건넸다.
“후후,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시죠.”
“네? 혹시···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이제는 나를 해결사 취급하는(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만) 현옥은 내 말에 조금 전 우울한 표정을 싹 지우고 두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방금 그거 연기는 아니겠지? ···만약 진짜 연기라면 꽤 재능이 있는 것 같은데.
일단 궁금증은 나중에 풀고, 지금은 내가 할 일에 집중하자.
“옆으로 잠깐만 비켜보시지요.”
“아, 네.”
내 말에 바로 후다닥 옆으로 피하는 현옥.
무공은 익히지 않았지만, 지금 내가 끌어올리고 있는 기세가 심상치 않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흐읍, 후우.”
한 번 크게 심호흡하며, 천천히 단전에서 내공을 끌어올린다.
이번에 내가 끌어올리는 내공은 지금껏 내가 사용하던 내공과는 전혀 다르다.
천마의 권능 특유의 특색 없는 내공도 아니고, 마기를 잔뜩 머금은 내공도 아니며, 북해에서 얻었던 빙정의 기운도 아니다.
“이, 이건!”
“독인가? ···아무래도 독정과 싸우던 그때 얻은 모양이구먼.”
내 몸에서 넘실거리는 검은색 기운에 그 정체를 깨달은 두 사람이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그런 두 사람의 반응에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하압!”
양손에 모인 기운을 앞을 향해 분사했다!
콰아아아!
그러자 마치 끈적한 늪에 굵고 기다란 나무막대기를 박아넣은 것마냥 하나의 길이 만들어졌다.
그 끝을 도저히 알 수 없는 기다란 길의 입구에서 현옥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이거 설마···?”
“중원까지 일직선으로 뚫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대충 오 할은 뚫었습니다. 나머지는 앞으로 가서 마저 뚫지요.”
내 말에 안 그래도 한껏 벌린 입을 더 쩍 벌리는 현옥.
이 사람아, 그러다 입에 독충 들어가겠수.
···뭐, 이렇게 말하는 나도 내 힘에 만만치 않게 놀라고 있었다.
독기라면 치를 떼는 남만 사람들 때문에 지금껏 기껏 독정을 얻고도 독정의 진짜 힘을 한 번도 써보지 못하고 있는 판국이었으니까.
즉 이번이 내가 독정의 힘을 처음으로 쓰는 순간이라는 말이다.
심지어 화경의 경지에 올라선 것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사실 나도 대충 이 할이나 뚫으면 많이 뚫었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지평선 너머까지 뚫을 줄이야···.
“그리고 이 통로는 한 번만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몇십 년은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땅에 남아있는 독기 때문에 짐승들은 다가오지 못할 겁니다. 아, 물론 사람한테는 해가 없는 독으로 사용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그런 것도···가능하십니까?”
“아뇨, 뭐···.”
하다 보니 되던데요? 라고 말하면 믿을까?
···저 눈빛을 보면 믿을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일단은 만약을 대비해서 좀 더 안심할 수 있도록 말해놓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짐승들만 맡을 수 있는 냄새를 풍기는 독만 만들면 알아서 피하니까요. 혹시나 특이 체질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너무 심한 독은 아니니 남만의 도시로 가면 금방 해독할 수 있을 겁니다.”
“오오오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남만과 중원을 오가는 직통 통로라니! 이거라면 저희 상단은 물론, 도시 자체를 다시 부흥시키는 것도 꿈이 아닐 겁니다! 하하하!”
그럴 마음으로 뚫은 길이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원래 내 성격과는 거리가 좀 멀긴 하지만, 그래도···해준 건 갚아야 하지 않겠어?
“자, 그럼 바로 출발하죠. 이 정도면 현 공자도 쉽게 가실 수 있겠죠?”
“아, 말하나 마나죠!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하하하!”
내가 길을 뚫어준 것이 퍽 기쁜지, 룰루랄라 콧노래까지 부르며 앞으로 향하는 현옥.
나와 신승은 피식, 웃으며 그런 그의 뒤를 따랐다.
드디어, 남만에서의 일이 끝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