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경(1)
“모두 각자의 잔을 높게 들어라!”
와아아아아!
황제의 선창에 연회장에 있던 사람 모두가 각자의 잔을 들어 올렸다.
“오늘은 우리가 다시 태어난 날이다! 오늘은 마시다 죽어도 좋다! 아니, 마시다 죽어라! 그리고 다시 태어나라! 오늘은 술에 관한 건 무슨 일이라도 용서해줄 테니 마음껏 마셔라! 하하하하하!!!”
와하하하하!
마치 장군의 선창에 목소리를 높이는 병사처럼 황제의 웃음소리에 연회장의 다른 사람들도 목소리를 높이며 웃었다.
···전무후무한 연회라고 들었는데, 저번 연회랑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은 건 내 착각인가.
아니, 아니지. 다른 점이라면 하나 있었다.
“그대도 많이 마시게. 자네는 이 연회의 주인이자, 우리 모두의 은인이니. 자네가 제일 많이 먹고, 마시며, 즐겨야 하지 않겠나.”
“아···네···.”
···본디 황제가 앉아 있어야 할 최고 상석에 내가 앉아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살다 살다 연회에서 황제를 제쳐놓고 제일 상석에도 앉아보는구나.
명나라에서는 제안만 꺼내도 즉시 사형에 처해도 할 말 없는 과도한 대우에 나는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못한 채 앞에 있는 잔을 들었다.
“우리의 은인이 잔을 들었다! 한 입이다! 모두 한입에 자기 술을 다 들이켜야 한다! 아, 물론 자네는 천천히 마셔도 되네. 독정과 싸우느라 힘들었을 테니 말이야.”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런 것까지 배려를 해줄 거면 조금 더 마음 편하게도 해주시면 안 되나?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다른 일행들은 연회를 꽤나 즐기고 있다는 점이다.
“예. 중원···아니, 가운데 땅에서 지금 바로 장사를 시작할 생각이지요. 아이고, 아무렴요. 원하시는 물건이라면 뭐든 찾아드리죠. 그 대신···하하하! 말씀이 잘 통하시는 분이군요!”
현옥은 이번 연회장에 모인 사람 중에서도 특히 화려한 옷과 장신구로 자신을 치장한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연회가 끝나면 가운데 땅에서 잘 팔릴만한 물건들을 정리한 서류를 보내드리죠. 대금은 충분히 준비하고 있으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하하!”
남만 내에서도 손꼽히는 상단의 주인들이었다.
원래 남만 내의 상단들과의 거래를 통해 상단의 재부흥을 꿈꾸던 그에게 그들과 만남은 그야말로 최고의 행운.
특히 나와 일행이란 이유로 특급 거래 대상이라는 인상이 박힌 지금 그는 평생에 다시 없을 기회를 얻고 있었다.
절대 이건 내 덕분에 현옥이 살아났다는 걸 말하는 건 아니다.
아니, 현옥 저 사람이 저렇게 말했다니까? 정말 내 얼굴에 내가 금칠하는 거 아니라니까?
그리고 그쯤 말하면 뭐 어때. 나 열심히 하긴 했잖아? 잘하긴 했잖아?
회귀 전엔 머리털 삼 할이 날아갈 정도로 고생해도 칭찬 한마디 없었는데, 지금 내 얼굴 금칠하면 안 되냐?
[적당히 해라, 적당히, 이놈아. 이 좋은 날에 왜 이렇게 우울한 이야기나 하는 거냐?]
···그래, 알겠다.
[하아, 제일 높은 자리에 있는 건 맨날 있던 일이라 별 재미도 없는데. 예전에 네가 군에서 연회 때마다 제일 아래쪽에 있던 때가 그립다~]
이런 연회가 재미없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원래부터 천마의 옆에만 붙어 있느라 연회가 열리면 맨 위에서만 구경하던 화순으로선 지금 이 광경도 평상시 보던 것과 하나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 그냥 딴 거나 보자. 그래서, 이번에 얻은 건 좀 짭짤하냐?]
화순의 질문에 나는 씩 웃으며 화순의 눈에 보이도록 왼팔을 들어 올렸다.
당연히 끝내주게 짭짤하지.
[사용 가능 무공 :
천마창법 10성
-오의 : 와류(渦流) 개방
-극의 : 폭우(暴雨) 개방
천마금나수 6성
-오의 : 불파(不破) 개방
-극의 : 미개방
천마보법 5성
-오의 : 군림(君臨) 개방
-극의 : 미개방
강화 가능 무공 : 옥음독기공 5성.]
“캬!”
기분이 우울하다가도 이것만 보면 탄성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천마창법 십 성! 그리고 극의의 개방까지!!
언제 극의를 개방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극의까지 얻다니.
[감개무량하네. 나는 사실 네가 극의를 얻기 전에 십중 팔구할은 죽을 줄 알았거든.]
···진짜냐?
[아, 그래도 착각은 하지 마. 네가 죽길 바랐다기보단, 원래 대부분의 천마들도 그랬거든. 괜히 독고삭이 내가 기억하는 천마 중 다섯 손가락 내에 들어가는 강자 취급을 받는 게 아니야. 뭐, 물론 다른 천마들은 천마의 무공을 적게는 열 개부터 많게는 수십 개까지 익히고 있었던 것도 있지만.]
아···하긴.
천마의 권능을 익히는 순간, 계승자가 익히고 있는 무공이 천마의 무공으로 변화한다.
그것을 모르고 있던 나야 아무것도 모르고 바로 익혔지만, 본디 천마의 권능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천마와 그 제자는 가능한 많은 무공을 익힐 터.
그러면 무공의 개수는 자연스레 많아질 수밖에 없고, 웬만하면 그 무공들을 전부 오의까지 익히려 하지, 하나만 따로 극의까지 개방시키려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실 극의까지 개방시키려면 단순 계산만으로도 이미 오의를 개방시킨 천마의 무공에 쓴다고 쳐도 오 성의 무공이 서른 개가 넘게 필요하니, 극의 하나를 올릴 바에는 지금 익히고 있는 무공 오의를 전부 개방시키는 쪽으로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그들이 어리석은 건 아니다.
오의에 관해서야 당장 자신의 스승에게서도 들을 수 있고, 그게 없더라도 마교의 역사서에서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는데, 극의에 관해선?
알아볼 방법이 없다.
독고삭 이전에 극의를 익혔던 천마는 이미 수백 년 전 사람이라 정보도 부족하다.
그런데 거기에 서른 개의 오의를 포기하고 하나의 극의만 파고든다? 아무리 강철같은 자제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쉽지 않은 선택이리라.
거기에다가 이미 극의를 개방할 필요도 없이 오의만으로도 웬만한 무공은 압살할 수 있었으니, 그들의 선택이 완전히 잘못됐다고는 할 수 없었다.
다만 극의가 이만한 힘을 가지고 있을지 몰랐을 뿐이지.
[내가 옆에서 이야기만 해줄 수 있었다면 대부분 극의를 익히고 있었겠지만 말이야.]
으음···순간 천마들이 널 듣지도, 보지도 못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버렸어.
농담이 아니다.
만약 천마들 전부가 지금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면, 지금 강호에는 정파도, 사파도 없이 모두 마교의 손아귀에 있었으리라.
아니, 강호뿐만 아니다. 중원을 넘어 북해나 남만 같은 세외 세력에까지 손을 뻗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극의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사실 네가 운도 좋긴 했어.]
응? 그건 무슨 소리냐?
[오른쪽 팔을 봐. 그럼 무슨 뜻인지 알 테니까.]
오른쪽···? 그러고 보니 무공에 대해 알아볼 때도 내공에 관해선 딱히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독정과 싸우기 직전에 뭔가 내공이 강해진 느낌이 들었는데···.
그때는 극의에만 정신을 집중하느라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화순의 말에 오른쪽 팔을 쳐다보자, 예상하지 못했던 내용이 그곳에 적혀 있었다.
[임무 조건 : 총 6명의 초절정의 고수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일 것임무 보상 : 한 명당 10년 내공. 임무 달성 시 총 60년 내공 획득.
현재 40년 내공 획득.]
이거야 이미 잘 알고 있던 부분이고, 놀라운 건 그 아랫부분.
[임무 조건 : 총 2명의 화경의 경지에 이른 고수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일 것임무 보상 : 한 명당 40년 내공. 임무 달성 시 총 80년 내공 획득.
현재 40년 내공 획득.]
그리고 또 하나.
[임무 조건 : 극의 획득.
임무 보상 : 1갑자의 내공.
현재 획득 완료.]
내가 총 100년의 내공을 얻었다는 말이 거기에 적혀 있었다.
“이런 미···.”
“음? 무슨 문제 있나?”
“아, 아니요,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입에서 저절로 튀어나오려던 욕설을 겨우 씹어 삼켰다.
내 옆에 황제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지 않았다면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왔을 것이고, 정말로 황제의 귀에 그 말이 들렸다면 사형까지는 아니더라도 분위기가 싸해지는 건 막을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그것을 상기시키지 못했다면 황제의 앞이라도 튀어 나왔을 정도로 지금 나는 경악에 빠져 있었다.
[오의야 어느 정도 내공이 부족해도 사용할 수 있지만, 극의는 달라. 최소 오갑자. 이른바 화경의 경지에 오르지 않으면 사용할 수도 없지. 그래서 초대 천마님께서도 그걸 생각하고 혹시나 해서 일갑자의 내공을 더해주셨을 정도니까.]
하지만 나는 일갑자의 내공을 얻고도 극의를 쓰기엔 여전히 부족했다.
심지어 조금 부족한 것도 아니다.
무려 사십 년의 내공.
웬만한 임무 하나를 완전히 해결해야 얻을 수 있는 내공이었다.
[···엄청난 우연이었지. 아니, 행운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그런 사십 년의 내공을 얻을 수 있는, 화순의 말 그대로 엄청난 행운이 내게 찾아왔다.
모든 일이 끝나고, 황제에게 내가 싸웠던 그 사내. 전대 황제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가 알기론 분명 그는 초절정의 고수. 아이 옌의 아버지가 격체진기를 사용해서 내공을 몰아줘도 초절정의 끝자락에 겨우 닿을만한 고수라 했다.
절대 화경의 경지에 이른 무인은 아니었다.
[본디 초절정의 고수가 독정의 힘으로 화경의 경지에 오른 것인가, 아니면 한걸음밖에 남지 않았던 경지에 독정과 대결을 치름으로써 죽음 직전에 그런 경지에 올라서게 된 것인가···어느 쪽이 정답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분명 화경의 경지에 올라 있었어.]
만약 독정이 조종하는 게 아니라 그가 직접 싸웠다면, 내가 패배할 수도 있었다는 거야?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
···확실히 불가능한 건 아니다.
분명 그의 힘과 내력은 무시무시했으니까.
거기에 제대로 무공만 사용할 수 있을 줄 알았다면, 반드시 패배한다는 건 아닐지라도 분명 힘에 벅찼을 터.
그리고 설사 그를 이겼다고 해도, 제대로 된 회복 없이 독정을 마주했다면···.
으음, 진짜로 큰일 날 뻔했구나.
[하지만.]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내게 화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사 우연이나 행운일지라도 네 원래 힘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지.]
···뭐, 그렇긴 하지.
아무리 약해졌다곤 하지만, 권능이 인정하는 화경의 고수다.
용봉대전의 일로 무림맹으로 갔던 그 날.
신승의 기운 앞에 단 한 번의 반격 말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때와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말이다.
이제는 진짜 화경의 고수.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절대 고수의 자리에 올라섰다.
심지어 딱 선에 걸친 오 갑자도 아니다.
[임무 조건 : 자연의 힘으로 이루어진 세 개의 정수를 획득하라.
빙정(氷精) : 획득.
독정(毒精) : 획득.
?정(?精) : 미획득.]
[임무 보상 : 개당 40년의 내공. 임무 전원 달성 시 120년의 내공 획득 가능.
현재 80년 내공 획득.]
독정에게서 선물로 받은 기운은 전부 남만을 옛 모습으로 되돌리는 데 사용했지만, 임무로 얻은 사십 년의 내공은 그대로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모두 음주와 가무에 미쳐 내 쪽을 전혀 보지 않고 있을 때, 나는 조용히 손바닥에 힘을 집중했다.
그러자 나타나는 아주 자그마한 검은색 돌멩이 하나.
내 손가락 한 마디도 안되는 조각 주변에는 빛조차 집어삼키는 검은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독정의 조각.
지금 내 단전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빙정의 조각과 똑같은 독정의 두 번째 선물이었다.
그 힘은 물론 원본 독정과 비교하면 한참 미약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독정은 독정.
내가 원하면 남만의 절망을 다시 불러일으킬 수 있을 만한 힘이 있었다.
물론 내가 미치지 않는 한 그런 짓을 할 리는 없었지만.
그러고 보니까.
[응?]
황제 폐하의 은혜는 누가 강으로 실어 보낸 걸까? 초절정의 고수가 막고 있는데 그걸 뚫고 가져가서 강에 실어갈 고수는 대체···.
[아이고, 다른 곳은 눈치가 빠르면서 그건 왜 그렇게 모르냐?]
응?
나를 한심하다는 듯한 말투로 타박하는 화순. 그런 그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가 손가락으로 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말했지? 권능은 심기체. 이 세 가지 모두 고루 단련해야 그만한 고수라고 인정해준다고.]
응, 그랬지?
[그럼 화경에 이른 고수라면 얼마나 정신을 단련했겠냐?]
어···잠깐만. 그렇다면 혹시···.
그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었다.
이미 독정에게 완전히 지배된 줄로만 알았는데···설마 그런 일을 해낼 정신력이 남아 있었을 줄이야.
[뭐, 나는 잘 모르겠지만, 그게 한 국가의 원수이자···.]
내 중얼거림에 화순은 팔짱을 낀 채 무언가를 고민하더니,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아버지라는 사람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