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의(3)
“끝난···걸까요?”
가만히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이 옌의 말에 신승과 황제. 둘 중 누구도 대답을 꺼내지 못했다.
분명 전대 황제···아니,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게 조종받던 그도 쓰러졌고, 그 뒤로 일어난 독의 폭풍도 이제는 잠잠해졌다.
하지만 둘 중 누구도 확신의 말을 꺼내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저것.
독도, 황제도 사라진 그 땅에 홀로 고고히 서 있는 한 남자.
유현.
방금 그 끔찍한 재해를 쓰러뜨린 사내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허허한 분위기를 몸에 두른 그를 황제는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원래 저런 사람이었나?
“···모르겠군.”
황제의 한 마디에는 여러 뜻이 담겨있었다.
아이 옌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처럼도 들렸고, 그의 현 상태에 대해서 중얼거리는 것처럼도 들렸고, 지금 이 상황 자체에 대한 한탄처럼도 들렸다.
“엇!”
황제가 유현의 다음 행동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그때, 드디어 유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유현이 고개를 숙이더니 무언가를 잡아 들어 올린 것이다.
그들 사이의 거리가 짧은 건 아니었지만, 세 사람 전부 최소 절정 이상의 고수. 그 정도 거리는 아무런 장해도 되지 못했다.
“돌···?”
하지만 그건 더욱 큰 의문만 생기게 할 뿐이었다.
“검은색 돌···인 것 같군. 강한 힘이 깃들어있어.”
강한 힘? 신승의 말에 두 사람은 어떻게든 그 돌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감각을 높였지만, 이 정도 거리를 뚫고 그것의 힘을 파악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에게는 신승이 알지 못하는 지식이 있었다.
검은 돌과 강한 힘. 그리고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독.
이 세 가지 증거를 통해 그것의 정체를 예상할 수 있었다.
“설마···독정?”
“독정이요? 그건 그냥 전설 아닌가요?”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지만···만약 저것이 정말 독정이라면, 지금까지 있었던 일이 모두 설명이 돼. 방금 그 힘도, 우리의 땅 전역에 독이 퍼진 것도. 그리고···방금 아버지의 행동도.”
황제는 아이 옌에게 대답하는 동시에 꿀꺽 마른 침을 삼키며 유현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남만의 여러 가지 전설과 설화에서도 꼭 한 번씩은 나오는 게 독정이다.
어떨 때는 영웅들에게 힘을 주는 존재로, 어떨 때는 사악한 악을 벌하는 존재로, 또 어떤 때는 이겨내야만 하는 시련으로.
여러 모습으로 나오는 독정은 남만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신이자, 완벽한 전설의 영역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였다.
전설 속에 나오는 이야기의 절반. 아니, 일 할만 믿더라도 독정의 힘은 남만 전체를 좌지우지할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지난 삼십 년간 남만 전역에 퍼져있던 독이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은 자를 되살려 조종하던 그 모습. 그리고 방금 어마어마한 독기를 조종하던 모습을 보면 그것은 사실일 확률이 높다.
···만약 유현이 저것의 조종을 받는다면?
아니, 오히려 독정의 힘을 지배한다면?
그렇게 되면 지금껏 있었던 일은 한낱 전초(前哨).
남만을 넘어, 이 세상 자체에 거대한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음에도, 황제는 쉬이 움직이지 못했다.
지금 독정을 제압한 건 오직 유현 홀로의 공.
설사 저 독정을 원한다 해도, 그것을 막을 권리가 내게 있는가?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무슨 행동을 해야 할지.
도저히 그 답을 꺼낼 수 없던 그때, 유현이 움직였다.
“앗.”
누구의 입에서 튀어나온 걸까.
어쩌면 두 사람이 동시에 했을지도 모른다.
유현이 독정으로 의심되는 그 돌을 들고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신승만이 조용히 그 광경만을 지켜보고 있을 뿐.
처음 말을 꺼낸 이후로 누구도 유현의 행동에 움직이지 못했다.
독정을 들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 황제 폐하의 은혜에 다가가던 유현은 그 가운데에 뚫려있는 큰 구멍, 원래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은 뭔가에 손을 집어넣더니 빈손으로 빠져나왔다.
“독정을···저기 넣은 건가요? 괜찮은 걸까요?”
“···아니, 오히려 좋은 선택이야.”
유현의 행동에 의문을 꺼내는 아이 옌과 달리, 황제는 오히려 좋은 선택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폐하의 은혜는 독기와 상극. 독정을 봉인하기 위해선 우리의 땅에서 저기보다 좋은 곳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야. 그걸 직감으로 알아차린 건지, 아니면 뭔가 다른 걸 보고 저리 한 것인지 모르지만, 저건 최고의 선택이야.”
“그렇다면···유 대인께선 독정에 잠식된 건 아니라는 건가요?”
“아마도···.”
아이 옌의 희망찬 목소리. 그런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부정적인 대답은 꺼내지 못했지만, 그리 희망적이지도 않았다.
지금 유현의 눈동자에 어린 검은 기운.
···아바마마만큼은 아닐지라도 분명 어둡다.
만약 유현이 이미 독정에 잠식된 상태라면, 어쩌면···.
“괜찮을···.”
황제의 대답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푸와아악!!!
엄청난 힘이 담긴 검은색 기운이 유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조금 전 독정에서 뿜어져 나오던 검은 독기에 절대 뒤지지 않는 검은 기운.
“흡!”
“헉!”
거기에다가 훨씬, 그녀들이 감히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에 기함하며 피하려던 찰나.
꽉.
그녀들의 팔을 꽉 잡는 사람이 있었으니.
“당신···?!”
바로 신승.
제일 앞에서 유현의 상태를 담담히 지켜보고만 있던 그가 두 사람의 손목을 낚아채 도망칠 수 없도록 막은 것이다.
손을 털면 금방이라도 풀릴 정도로 비쩍 마른 손이었지만, 그녀들이 빠져나갈 방법은 요원했다.
“왜···!”
왜 우리가 도망치는 걸 막는 거지?
크게 표현하진 않았지만, 신승을 존경하고 있던 황제의 배신감은 특히 강했다.
하지만 분노에 가득 찬 황제의 얼굴에도 신승은 표정의 변화 없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걱정하지 말게.”
“뭐···?”
“저것은 자네들이 생각하는 그것과 다르니.”
바로 지척까지 다가온 검은 기운에도 신승의 담담한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아니, 아주 조금.
아주 조금, 미소까지 띄고 있었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아!!!
강렬한 검은색 기의 폭풍이 세 사람을 집어삼켰다.
‘아?’
그곳에서 세 사람이 가장 느낀 건, 기이하게도 포근함이었다.
사랑하는 이의 품 안처럼, 침상 위의 이불 속 안처럼, 고요한 야산 위에서처럼.
그 어느 누구라도 상상할 수 있는 포근한 어둠. 방금 자신들을 헤칠 듯 달려들던 독기에서는 느낄 수 없던 그 안락함 속에서 세 사람은 자신도 모르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포근함이 가신 직후.
“아!”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아이 옌이었다.
“몸에 있던 미세한 독기가···모두 지워졌습니다!”
가장 무공의 경지가 낮았기 때문일까.
이곳으로 오면서 가장 독기의 침범을 심하게 받았던 그녀였기에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게 무슨···설마!”
아이 옌의 말에 황제도 급히 기를 소주천(小周天)하고 나서야 그녀의 말이 진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 기운이 퍼진 건 이곳에만 국한된 건 아닐지야.”
“···네?”
두 사람이 놀라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신승이 입을 연 것도 바로 그때였다.
“아마 남만 전역···아니, 자네들의 말로는 우리의 땅이던가?”
“설마···그 말씀은 그가 우리를···.”
“독정의 기운은 누구나 욕심을 낼 수밖에 없는 힘. 그는 그것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하는 대신, 자네들을 구원하는 방향으로 사용한 걸세.”
신승의 말에 황제와 아이 옌 두 사람은 멍한 눈으로 황제 폐하의 은혜 옆에서 홀로 서 있는 유현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는 여전히 홀로 고고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조금 전 남만 전체를 구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마냥 그저 서서 가만히 주변을 둘러볼 뿐.
그것은 분명.
“구원자···.”
먼 옛날.
끝없이 변화하는 기후, 인간에게 적대적인 맹수, 먹을 수 없는 독초로 가득하던 우리의 땅에 최초로 도시를 세운 바로 그 사내.
이제는 오직 전설 속의 이야기로밖에 전해지지 않는 바로 그 남자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해냈구나.”
신승은 유현의 모습을 보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를 데리고 온 것이 잘한 일이었나? 혹시 자신이 미래에 강호를 이끌 인재 하나를 몰락시키는 게 아닐까?
후회, 의심, 절망.
불가의 제자로서 가져선 안 될 감정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유현이 독정과 맞붙을 때 그 감정은 최고조에 달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하늘에서 내리쬐는 수천, 수만 개의 창날.
그것은 마치 겨울 동안 쌓여있던 눈을 지워주는 봄비처럼 신승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부의 감정을 싹 씻어줬다.
“해냈어···.”
또르르.
주름 가득한 신승의 얼굴 사이로, 한 방울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
아, 좀 아깝네.
내가 날려 보낸 검은 기운에 남만에 가득 퍼져있는 독기가 완전히 지워졌다는 걸 깨달은 나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독정을 포기하자마자 몸에 가득 쌓이는 기운.
그것은 독정의 선물이었다.
그 기운은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오갑자의 내공. 그 이상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만약 모두 흡수하면 화경을 넘어, 전설 속에나 나오는 현경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지도 모를만한 힘.
욕심이 났다.
진짜, 정말로 욕심이 났다.
아, 진짜 내가 권능만 없었으면 다 먹어치웠는데 진짜.
문제는 내가 오직 임무로만 내공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많은 기운이 쏟아져 들어와 봐야 딱 그뿐.
내가 임무로 얻을 수 있는 기운 외에는 전부 지금 당장 그 자리에서 사용해야만 했다.
어차피 버려야 할 힘, 좋게나 사용하자고 쓴 게 방금 그거였고.
예전 빙정 때야 뭐, 나도 아직 한참 약했고, 빙정도 지금 독정보다 훨씬 강해서 잔류로 건넨 힘조차 감히 감당할 수 없어서 그냥 순순히 포기했지만, 지금은···.
···어우, 아깝다, 아까워.
[지금까지 권능 덕분에 얻은 힘은 신경도 안 쓰냐?]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강해지려 하는 건 천마로써 모범적인 자세지만, 본인이 가질 수 있는 힘 이상의 것을 바랬다간 너만 다친다. 알겠냐?]
아, 알았어, 알았어. 네가 말 안 해도 다 안다고.
[그리고···.]
응?
[네가 뭘 안 해도 충분한 보상을 받을 것 같은데?]
뭐? 그게 무슨···.
“유 대인!”
“아, 엇?!”
화순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말에 대답을 꺼내던 도중, 갑자기 내 이름을 외치여 달려오는 아이 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뭔가 과하게 눈이 반짝이는데?
아니, 내가 방금 한 일을 생각하면 물론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독정 자체를 봉인시키는 건 물론, 남만 전역. 아니, 그걸 넘어서 우림에 퍼진 독까지 모두 해독시킨 건 물론, 사람의 육신에 있던 독도 모두 해독시켰으니까.
“유 대인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땅이 어떻게 됐을지, 정말 감사합니다, 유 대인!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금 아이 옌이 아는 건 내가 이걸 봉인시켰다는 것만 알 텐데, 그런 것치곤 눈빛이 너무···음···.
“고생했네.”
“아, 황제 폐하.”
그래, 이게 좀 정상적인 반응이지. 저렇게 과하게 반응하면 오히려 좀 이상한 기분이···.
“자네 덕분에 우리의 땅이 구원받았네. 자네는 이제 우리의 큰 손님. 아니, 구원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야. 만약 자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라도 있다면, 나는 물론이거니와 이 땅 전부가 오직 자네만을 움직이도록 하겠네.”
···이 사람이 더하네.
지금 이 자리에선 말로만 하는 아이 옌과 달리, 황제의 두 눈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진짜 내가 남만의 도시를 하나 달라고 해도 ‘그래, 줄게’하면서 줄 것만 같았다.
···뭔가 자야나 성하 공주와는 다른 성질의 공포.
뭔가 여기서 엮이면 안 된다.
“아, 네, 뭐, 딱히 대단한 건···.”
“아니요. 본인께서 하신 일을 어찌 그리 폄하하십니까.”
이야, 이젠 존댓말까지 하시네.
점점 감당 안 되는 두 여인의 눈길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절로 옆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렇게 고개를 돌린 옆에는.
[·········.]
“·········.”
헤죽헤죽 웃으며 나를 바라보는 신승과 화순.
···젠장.
그렇게 모든 일이 끝난 뒤,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지금껏 내쉰 한숨 중 제일 길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독기가 싹 가신 하늘은 복잡한 내 마음이랑은 반대로 참으로 높고도 청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