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와 황제(2)
도대체 저 인형의 정체는 뭐지? 순간 뇌리에 그런 의문이 스쳤지만, 그것에 대한 답을 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펄럭!
정지 상태에서 갑작스러운 움직임으로 인해 온몸에 뒤집어썼던 천이 벗겨졌다.
‘우욱!’
그 순간 느껴지는 엄청난 압박!
지금껏 독기를 막아줬던 천이 사라지자, 대기에 깔린 걸 넘어 대기 그 자체가 되어버린 독기가 내 전신을 내리눌렀다.
보통 물의 몇 배. 아니, 몇십 배가 넘는 중압감. 한 발자국 움직이는 것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어마어마한 내공이 필요했다.
하지만.
움직인다, 뛴다, 뛰어오른다!
쿵!
한 번의 발자국으로 주위에 몰려있던 독기들이 한순간 사그라들었다.
군림.
다른 것은 허용치 않는 압도적인 폭력의 기운이 대기에 잠식해있던 독기까지 모두 몰아낸 것이다.
허나 그것도 잠시. 자신의 색으로 물들지 않은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검은색 독기는 점점 그 공간도 잠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겐 그거면 충분했다.
대기의 독기가 사라지면서 생겨난 찰나의 자유.
일순(一瞬) 후에 사라질 해방감을 느낄 새도 없이.
쿠웅!
빠르게 땅을 박찬다!
독으로 만들어진 벽처럼 내 앞을 막고 있던 독기는 가속도를 받은 육체를 막아내지 못하고 주변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독기의 벽도 만만치는 않았다.
처음 땅을 박찰 때보다 더욱 느린 속도. 군림까지 써서 가속을 받았다고는 믿기 힘든 속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쾅!
황제를 향해 날아오던 인형을 막기에는 충분했지만 말이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인형의 움직임도 크게 변했다. 아래를 보던 시선이 정면으로, 즉 내게로 향했다.
독으로 인해 대부분이 삭은 보랏빛 천으로 온몸을 둘러싼 인형의 품 안에서 한 줄기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한 자루의 검.
주변을 잠식한 어두컴컴한 독기조차 죽여내지 못한 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명검이었다.
놈은 확실히 고수였다.
갑작스러운 습격에도 검에 실린 미증유의 힘. 검에 불이 붙었다는 착각이 일 정도로 이글거리는 힘이 내 눈에 똑똑히 보였다.
캉!
하지만 그뿐.
불파로 감싼 팔에 상처를 남기기엔 이 정도 공격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검과 손이 부딪히자, 둘 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다른 방향으로 튕겨 나간다.
바로 이때를 노렸다.
분명 맨손과 부딪혔음에도 자신의 검이 날아갔다는 사실에 분명 놈은 놀랄 것이다.
자신이 알던 상식이 부서지는 순간, 누구라도 움찔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무공에 통달한 절대 고수도, 무공에 대해 한 줄도 모르는 양민이나 다를 바 없다.
이제 놈이 채 반응을 내보이기 전에 쓰러뜨리면···.
···그래, 분명 방심하고 있었다.
지금껏 여러 번 이어지는 전투 사이, 불파를 보고 놀라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자신의 전력을 다한 일격이 맨손에 튕겨 나가는 모습을 본 무인들의 일그러진 얼굴이 여럿 스쳐 지나갔다.
그래. 지금 내 표정도 그들과 다를 바 없겠지.
그는 놀라지 않았다.
아니,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나보다도 더욱 빨리 다음 공격을 발하고 있었다.
내 공격을 미리 알아챘다? 아니, 그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끔찍하고, 어두운 사실이 내 눈 안에 들어왔다.
놈이 나를 향해 검을 찔러 넣으려는 그 순간, 머리를 감싸고 있던 천이 크게 펄럭였다.
그 순간 나는 보았다.
머리카락과 이마의 경계선도 알 수 없을 정도로 검게 물든 얼굴과 동공만 억지로 늘려 놓은 듯 검은색으로 물든 눈을.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독’이었다.
콰앙!
두 번째 공격은 조금 전 막아냈던 공격과는 전혀 달랐다.
분명 양팔을 올려 막았음에도 느껴지는 강렬한 충격!
마치 내 몸보다도 더 커다란 망치로 내려 찍힌 듯한 끔찍한 고통이 전신을 뒤덮었다.
만약 손을 들어서 막지 않았다면, 팔에 불파를 감싸지 않았다면 조금 전 한 번의 일격으로 온몸이 찢어졌으리라.
“커헉!”
하지만 어디까지나 더 싸우지도 못할 만큼 큰 상처를 입는 걸 막아냈을 뿐, 아무런 피해도 없었다는 건 아니었다.
불파를 제외한 온몸이 벼락을 맞기라도 한 것처럼 저릿저릿했다.
불파로 막아낸 일격이 어깨를 넘어 전신까지 충격을 주다니. 이런 건 한 번도···.
···아니.
있다.
이런 경험을 해본 적 있었다.
불파로 막아봐도, 전력을 다해 피해 봐도, 하다못해 어떻게든 도망치려 해도 반드시 맞을 수밖에 없는 공격.
그리고 지금 느껴지는 이 고통까지, 너무나 익숙했다.
그것을 너무나 늦게 알아차린 이유는 딱 하나.
현실에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놈.]
내 마음을 읽어낸 화순이 침음성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화경의 경지에 이른 고수다.]
*****
‘유현!’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갑작스레 나타난 적의 공격에 경악한 표정을 짓던 황제가 내게 전음을 날리며 다가오려 하자, 나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적은 가장 먼저 황제를 공격했다.
지금 우리 중에 그녀가 제일 중요한 존재라는 걸 아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저곳에 다가가려는 걸 막으려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찌 됐든 일행 중 제일 위험한 사람이 황제라는 건 자명한 사실.
그리고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지금 놈이 황제를 공격하려고 달려든다면···확실히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신승 어르신.”
“알겠네.”
내가 신승 부르자, 그는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황제와 함께 살짝 뒤로 물러났다.
내가 정체불명의 적에게 날아가는 동시에 신승은 황제의 옆으로 도약했다.
적을 막는 건 내게 맡기고 자신은 황제를 지키겠다는 생각.
서로 말을 맞추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런 반응이 나왔다.
그리고 이번 대화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그를 낮은 목소리로 불렀을 뿐이지만, 그는 바로 내 생각을 알고 황제를 지키기 위해 가까이 붙었다.
신승도 이미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거겠지.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상대가 보통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무력적으로나···생명체로나 말이다.
땅에 떨어진 놈은 무기를 아래로 축 늘어뜨린 채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천으로 감싸고 있는 탓에 얼굴도, 몸도 볼 수 없는 상황.
하지만 느껴진다.
지금 당장이라도 온몸을 둘러싸고 있는 천을 찢어버리고 튀어나오려고 하는 저 폭력적인 기운이.
그저 스치는 것만으로도 영혼까지 찢겨나갈 압도적인 힘이 그 안에 숨어있었다.
그리고 그 기운은 곧.
파앙!
독기의 근원 전체를 뒤흔드는 강렬한 충격과 함께 나를 덮쳤다.
일직선.
붓의 명인이 한일자를 그리듯 오직 나를 향해 날아드는 그 공격은 너무나 단순무식.
화경의 경지에 이른 절대 고수라고는 상상도 못 할 만큼 심심한 공격이었다.
콰아아앙!!!
하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정반대!
하늘에서 꽂히는 벼락! 폭발하는 화산!
그런 자연의 분노와도 비견될만한 폭력이 내 몸을 덮쳤다.
너무나 단순하여 시시하다고까지 생각되는 조금 전 일격.
그것은 오만이며, 자신감이었다.
이런 간단한 일격만으로도 네놈 정도는 간단히 무릎 꿇릴 수 있다는 그런 생각.
···그런 생각이.
반격의 기회를 만들었다.
챙!
분명 그 공격은 무시무시했다.
전의 공격은 이미 권능 덕에 대부분 회복되긴 했지만, 그래도 다음 공격도 버텨낼 수 있다는 확신은 없었다.
운이 좋아도 막는 게 겨우. 운이 없다면 정말로 평상시 화순이 농담하던 것처럼 팔 두 쪽만 남기고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반대는 어떨까.
막아도 위험하고, 심지어 막을 가능성도 낮은 공격.
그렇다면 차라리 막지 않는다.
오히려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나는 놈이 일격을 발하는 그 순간, 오히려 놈에게 달라붙었다.
물론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살아남을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는 방어에 비해,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은 가히 자살행위.
만약 놈이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분명 목숨을 잃었겠지.
하지만 난 확신했다.
절대 지금 놈은 ‘무공’을 사용할 수 없다고.
그저 몸 안에 담긴 힘을 검을 통해 내뿜는, 말하자면 크고 육중한 대포에 불과하다고.
그리고 그 예상은.
촤악!
완벽하게 적중했다!
내가 앞으로 파고들건 예상하지 못한 듯, 아니, 생각이라는 것 자체를 하지 못하는 상태의 놈은 그저 무의미하게 일격을 날렸고, 거기서 만들어진 틈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아까는 미처 꺼내지 못했던 창을 꺼내, 그대로 놈의 육신을 향해 찌른다.
푸욱.
천을 찢고, 살을 찔렀음에도 놈은 침음성 하나 흘리지 않았다.
창에 깃든 와류가 내장 전부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는데도 반응하나 보이지 않는 놈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확신했다.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것이 어찌 그렇게 움직이느냐.”
몸 뒤쪽까지 빠져나온 창을 바라보던 놈의 눈이 나를 향했다.
어떠한 감정도, 어떠한 생기도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눈.
애초에 그것을 눈이라 부를 수 있긴 한 것일까?
그저 ‘생전의 버릇’대로 움직이는 것 뿐 아닐까?
“대체 널 움직이는 건 뭐냐?”
“·········.”
대답은 없었다. 허나 상관없다. 애초에 나도 대답을 바라고 물은 건 아니었으니까.
지금 내게 중요한 건 딱 하나.
촤악!
한시라도 빨리 놈을 쓰러뜨리는 것뿐.
내가 창을 뽑자, 놈의 육신을 가리고 있던 천이 벗겨졌다.
“윽···!”
···그 안은 참혹하다는 말조차 부족할 정도였다.
도대체 눈앞의 이 남자는 독기의 근원에서 얼마나 살아왔던 것일까.
몸에 붙은 멍울을 넘어 완전히 검은색으로 물든 육신.
명치 부근의 구멍을 필두로 전신에 아로새겨진 끔찍한 상흔들.
그리고 시체를 억지로 세워놓은 듯 힘 한점 없는 비쩍 마른 육신까지.
공포의 대상에서 이제는 어린아이들의 잠자리 이야기가 된 강시가 내 눈앞에 나타난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미지의 공포를 눈앞에 뒀다는 현실보다 더욱 끔찍한 사실이,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왜, 왜 당신이 그런 모습으로 있는 겁니까···.”
자신의 머리를 가리고 있던 천을 벗은 황제가 떨리는 손으로 놈을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단 한 점의 힘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항상 힘차고, 굳건하며, 약한 모습은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던 그녀, 황제.
그런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도저히 믿기 힘들 정도로 미약하고 힘없는 목소리가 아련히 울려 퍼졌다.
“아버지···.”
···독기의 근원은 뒤틀린 생명을 탄생시키는 걸 넘어, 죽은 자까지 되살려 버린 것이다.
“아버···!”
“안 됩니다.”
스윽.
황제가 앞으로 뛰쳐나가려는 그 순간, 나는 바로 그녀의 앞에 나타나 그녀를 막아섰다.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에게 달려가려던 그녀는 내게 길을 막히자, 분노한 듯 붉어진 얼굴로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폐하가 기억하시던 그분이 아닙니다.”
나의 말에 그녀의 입이 멈췄다.
“명치에 창이 꽂히고도 고통의 비명을 내지르지도 않고, 한점의 호흡도 들이쉬지 못하며, 육체에는 생기도 없습니다. 그런 자를 산자라 부를 수 있습니까?”
“허나!”
“폐하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키기기깅.
놈이 땅에 자신의 검을 질질 끌면서 앞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인형.
자신이 망가지건 말건, 위에 달린 실이 이끄는 대로 이리 움직이고, 저리 움직이는 인형과 다를 바 없었다.
“저것을 전대 폐하라고 부르는 것이야 말로 정말로 전대 폐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라 생각지 않습니까?”
“·········.”
내 말에 황제는 흔들리는 눈으로 나와 아직 느릿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전 황제. 아니, 독으로 이루어진 인간. 독인(毒人)을 번갈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포기하듯, 혹은 다짐하듯 하늘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의 아버지는 자신을 바쳐서 우리의 땅을 구원하셨다. 그런 분을 편히 쉬실 수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아버지의 딸이자, 그에게 은혜를 입은 땅의 황제로서 내가 할 일.”
스윽.
다시 나를 바라본 그녀의 눈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부탁하네. 내 아버지를 이제 그만 쉬게 해주게.”
“알겠습니다.”
나는 황제의 말에 대답하며 그녀를 옆에서 지키고 있는 신승에게 눈짓했다.
황제와 아이 옌. 두 사람을 꼭 지켜달라고.
“폐하의 뜻대로.”
남만에 지금껏 없었고, 또다시 없을 전장이 될 이곳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