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와 황제(1)
“좋은 연설이었습니다.”
“그런가? 밤을 새워서 생각한 보람이 있었나?”
웃으며 내 칭찬에 기뻐하는 황제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최소한 그걸 듣고 신하들이 날뛰지 않았으니 좋은 연설이죠.”
“···그거 칭찬 맞나?”
“물론이죠.”
씨익.
“예정된 시간에 맞춰 여기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쳇. 그래, 그것밖에 잘한 게 없다, 이 말이지?”
칭찬의 방향이 자신이 원하던 것과는 달랐다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황제는 투덜거리며 조금 더 앞서나갔다.
농담이 조금 섞여 있긴 했지만, 그래도 방금 그 말에 거짓은 없었다.
지금 신하들에게 발목을 잡히면 또 언제 출발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게 된다.
신하들은 한 번 막은 거 두 번도 막을 수 있을 거라며 들고 일어날 테고, 황제 본인도 본인의 목숨을 거는 일인 만큼 주저할 수도 있었다.
그것이 여러 번 반복되었다간 정말 남만이 멸망하기 전까지도 출발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황제의 연설은 최소한 할 일은 다 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 내용은 차지하고서라도 말이지.
그리고 이렇게 그녀의 연설을 혹평한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천기는 어떻습니까?”
일행 제일 뒤에서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 주변을 둘러보며 설렁설렁 걷고 있는 신승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신승이 중원에서도 손꼽히는 절대 고수라는 사실은 이미 황제에게 말했지만, 그가 천기를 볼 수 있으며 지금 남만의 천기가 크게 뒤틀려 있다는 사실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모든 걸 알려주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밝히지 않았고, 지금은 안 그래도 남만에 대한 걱정과 시름이 깊은 그녀에게 더 큰 걱정을 끼치고는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부러 황제를 멀리 보낸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리 좋지만은 않네.”
편안한 얼굴과 느긋한 발걸음과 달리, 그 목소리는 진중함과 걱정이 잔뜩 담겨 있었다.
“한 번 크게 뒤틀렸던 천기의 흐름이 조금은 고쳐진 흔적이 있긴 하지만, 그것도 완벽하진 않았어.”
“그 고쳐진 흔적은 아마 전대 황제 폐하와 아이 옌님의 아버지께서 만들어내신 거겠죠?”
“아마 그렇겠지. ···하지만 그것도 이젠 한계. 저 천이 찢어지면 그 아래로 끔찍한 것들이 쏟아져 내리겠지. 그렇게 되면···.”
신승은 거기서 말을 멈췄다. 하지만 더 말하지 않아도 나는 그가 삼킨 말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남만은 물론이거니와 이 땅 위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숨도 장담할 수 없다···그런 말이겠지.
“그러고 보니.”
나는 억지로 이야기의 주제를 다른 쪽으로 돌리기 위해 그의 입이 열리기 전에 먼저 말을 꺼냈다.
“천기가 보인다, 천기를 읽는다···그렇게 말씀하셨는데, 대체 천기는 어떤 모양입니까?”
“음?”
“저도 언젠가 천기가 보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혹시 어르신이랑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싶어 여쭤보는 겁니다.”
“허! 자네가 천기를 본다고?”
퍽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신승의 주름진 얼굴이 미소로 변했다. 거기에 아까 그 어두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나.
“저도 아직 이립(而立)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초절정의 완숙에 이르렀으니, 어쩌면 신승 어르신의 경지를 넘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헐헐헐! 그것도 퍽 재밌겠지! 좋아, 내 가르쳐주지.”
큰 목소리로 웃던 신승은 하늘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무언가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이 땅따먹기하는 모양새로도 보였고, 솜씨 좋은 화백이 누군가를 그려내는 것처럼도 보였으며, 취객이 땅 위로 갈지자로 걸으며 땅에 자국을 새기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 이유도, 형태도 종잡을 수 없던 그림을 허공에 그려가던 신승이 갑자기 그 손을 멈추더니, 나를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래, 내가 천기를 읽는 것이 보이더냐?”
“그게 천기를 읽는 법입니까?”
“이렇게 별 한점 보이지 않는 낮에는 그렇지. 본디 별이 잘 보이는 밤하늘에 읽는 것이 제일이나, 낮에 천기를 읽으려면 하늘에 뜬 별을 내가 직접 찾아야 하니 말이야.”
“낮에도 하늘에 별이 뜹니까?”
“별은 뜨고 지지 않네. 낮이건 밤이건 하늘에 그저 떠 있을 뿐이지. 그리고 그것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각자의 흐름에 따라 움직일 뿐이야.”
“그럼 그것으로 어떻게 남만의 흥망성쇠를 읽어냅니까? 그저 가만히 하늘에 있는 것들로 어찌···.”
“본디 땅은 하늘의 거울이라, 천기의 흐름이 곧 대지의 흐름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눈으로 지평선 너머도 볼 수 없는 대지와 달리, 하늘은 끝없이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내가 태산의 소림에 앉아 남만의 상황에 대해 알 수 있던 것도 그 덕이지.”
“허어···그렇군요.”
하늘이 땅의 거울이라···하긴, 그렇다면 이 멀리까지 볼 수 있는 것도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그럼 그 천기의 흐름은 어떤 모양으로 보입니까?”
“어떤 모양이라···그것이야말로 확실치 않구나. 어떨 때는 늘어질 대로 늘어져 곧 찢어질 천처럼 보이며, 언제는 또 설길 대로 설켜진 그물처럼도 보이며, 언제는 또 피를 흘리며 치료를 바라는 사람처럼도 보이니. 이것이 그것이다. 저것이 요것이다. 이리 딱 잘라 말하기가 힘들구나.”
흐음···그렇구만.
신승의 말을 전부 알아들은 건 아니지만, 대충 어떤 모양새로 보이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역대 천마 중에서 천기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했지.
그런 점에서 보면, 신승은 역대 천마들도 닿지 못한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경지에 이르렀다···그렇게 볼 수도 있나?
[···뭐, 그리 말 못 할 건 아니야.]
호오, 네가 그걸 인정한다고?
[어쩔 수 없지. ···천기를 읽는 건 그냥 무공이 고강하면 되는 게 아니니까. 만약 초대 천마께서 권능에 그런 능력을 넣으셨다면 모를까, 그게 아닌 이상 권능으로 천기를 읽는 능력은 얻을 수 없어. 물론 네가 개인적으로 노력해서 그런 성취에 이른다면 가능하겠지만.]
그렇다면 내가 권능을 통해 그런 능력은 얻는 건 요원한 일이다, 라는 건가.
아쉽지 않으냐, 라고 묻는다면 물론 아쉽다.
천기를 읽는 능력이라는 건 곧 미래를 읽는 능력.
그런 걸 갖고 싶어 하지 않는 이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만인지상의 자리라 일컬어지는 황제조차 미래를 읽기 위해 무속인과 점쟁이를 가까이 두는 경우가 허다한데, 나 같은 일반 양민에야 물을 필요도 없지.
하지만 과연 내가 천기를 읽는 능력을 얻을 수 있을까? ···그렇게 묻는다면 긍정보다는 부정에 가까운 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
천기를 읽는 능력은 무공보다는 깨달음에 관련된 능력.
애초에 이런 욕망을 가진 채로 천기의 흐름을 읽을 수 있을까?
···애초에 그렇다면 이미 한 시대에 한 명 정도는 정말로 천기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나오겠지.
“저는 그냥 화경의 경지나 보렵니다.”
“허, 거 아쉽구먼. 자네가 내 뒤를 이어서 천기의 흐름을 봐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저는 천기의 흐름보다 제 사람들이나 지키렵니다.”
그리고 그보다도···.
스윽.
우리는 동시에 말을 멈추고 주변을 주시했다.
남만 주변은 물론이거니와, 입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독기.
아까만 해도 떨어져서 걷고 있던 황제와 아이 옌도 어느새 발걸음을 늦추고 있었다.
···여기서 살아 돌아가는 게 급선무겠지.
*****
“여기서부터는 최대한 안전을 중시하도록 하지.”
황제의 말에 우리는 여기까지 입고 왔던 도포를 전신에 뒤집어썼다.
독공의 고수들이 독물들을 채집할 때 사용하는 특수한 천으로 이루어진 도포.
그것을 뒤집어쓰자, 조금 전만 해도 갑갑하던 호흡이 편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여기부터는 아까 얘기했던 대로 네 명이 뭉쳐서 독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기파를 뿜어내면서 가지.’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전음을 받았던 것일까. 내가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이미 두 사람은 황제의 옆에 딱 붙어 있었다.
우리 중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미세한 독기조차 막아내는 천이 사람의 말소리를 막아내지 못할까.
우리 네 사람이 가까워진 걸 확인한 황제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가락을 들어 앞으로 손짓했다.
독기로 가득 찬. 아니, 독기 그 자체로 이루어진 숲.
대기는 물론이거니와 땅과 나무. 그리고 거기서 뚝뚝 떨어지는 물까지 모두 독으로 화한 숲은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것도 힘겹기 그지없었다.
만약 남만에서 공수해 온 철을 덧댄 신발이 아니었다면, 밑창부터 살살 내려 녹았으리라.
키이익~!
까악! 까악! 까악!
기이한 일이지만, 독기의 근원에서도 생명이 살아가고 있었다.
황제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독기에 정원의 생물들이 모두 도망쳤던 걸 생각하면 분명 특이한 일이지만,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은 아니었다.
이곳은 그들의 삶의 터전. 아무리 독기가 뿜어져 나온다고 해도 그저 도망칠 수만은 없었으리라.
그런 그들은 도망치는 대신 적응하기 시작했다.
독기에서 호흡할 수 있도록 자신의 기관을 바꾸고, 하늘에서 내리는 독기에 몸이 녹아내리지 않도록 갑각을 단단히 만들었다.
그렇게 그들은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하지만 그 대신···.
히익.
우리 둘보다 앞서 걸어 나가던 아이 옌과 황제 쪽에서 높은 음색이 들려왔다.
천으로 감싼 상태에서도 목소리가 들릴 정도니, 얼마나 높은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을까.
하지만 눈앞의 ‘그것’을 본다면 설사 천하의 대장군이라도 비명을 내지를 수밖에 없으리라.
치르르르르-!
마치 커다란 개. 혹은 새끼 호랑이가 연상되는 크기와 사내의 주먹만 한 두 눈알.
그리고 웬만한 사람의 허벅지보다 더 굵은 뒷다리까지.
···메뚜기?
하나하나 떼어보면 그것은 분명 메뚜기였지만, 나는 그 생물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전신이 먹색으로 이루어진 그것이 내가 아는 생물이라는 걸 머리가 전력을 다해 부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치르르르르-!
하지만 놀라는 건 저쪽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생전 처음 자신들의 땅을 침범한 ‘인간’을 발견한 메뚜기···아니, ‘그것’은 마치 앞으로 달려들려는 토끼처럼 뒷발을 몇 번 땅에 찧더니, 상대되지 않으리라 생각한 것인지 조용히 옆으로 사라졌다.
꿀꺽.
천으로 감싸진 내부에서 침 삼키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본디 손가락만 한 벌레조차 내 상반신 크기만큼 커져 있었다니.
하지만 내가 침을 삼킨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내 진짜 걱정은 딱 하나.
만약 그보다 훨씬 큰 늑대나 범 같은 맹수가 있다면?
한 치 앞조차 파악하기 힘든 흑색의 숲.
그 앞에 내가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로 커다란 먹색의 맹수가 독기가 가득한 침을 뚝뚝 흘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걸까. 앞으로 갈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서 있는 일행들에게, 이번에는 내가 아까 황제가 했던 것처럼 손가락을 들어 흔들었다.
그런 것에 겁먹고 뒤로 돌아갈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출발하지도 않았다.
설사 그보다 더한 짐승이 있다 해도 앞으로 나아가리라.
내가 앞서 걷자, 뒤에서 철퍽 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우리 일행은 다시 움직였다.
독기의 근원. 그 중심지를 향해서.
*****
그렇게 몇 번이나 독기의 근원에 살아가는 생명체를 마주했을까.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마주친 생물들은 모두가 본디 벌레나 곤충인 것들이었다.
다만 그 크기와 흉포성이 원종보다 더욱 거대하였을 뿐.
우리를 보고 도망친 건 처음 마주했던 메뚜기뿐이었다.
날면서 독을 뿌리는 잠자리와 내 주먹보다도 커다란 벌떼. 그리고 피를 빠는 대신 침으로 직접 독을 주입하려 드는 모기들은 적극적으로 우리를 사냥하러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커지고, 빨라지며, 위험해졌다고 해도 벌레는 벌레.
초절정 고수 둘과 화경의 고수 하나가 가는 길을 막기엔 그들로는 부족했다.
그리고.
‘여기입니다.’
아이 옌의 전음이 들려온 것은 우리를 향해 덤비던 모기를 죽이고 잠시 뒤.
한 포기의 수풀도 자라지 않고 있던 자그마한 공터가 나타난 시점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단 한 그루의 나무만 서 있다고 해야 맞는 말이겠지.
마치 태양에 닿을 것처럼 거대한 나무에는 눈으로는 셀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가지가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 크기와 넓이도 놀라웠지만, 정말로 놀라운 건 그 색깔이었다.
그것은 흔히 볼 수 있는 갈색의 나무도 아니고, 근처에 있는 다른 나무들처럼 흑색도 아니었다.
백색.
갓 내린 눈보다 하얗고, 구름 한 점 없는 보름달보다도 빛나는 백색의 나무가 흑색의 대지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독기의 근원과···황제 폐하의 은혜입니다.’
이곳이 바로 진짜 독기의 근원.
남만 전체를 뒤엎은 독기가 나타난 곳이었다.
스윽.
가장 먼저 앞으로 향한 건 황제였다. 나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두 사람도 먼저 나서는 일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제일 먼저 황제 폐하의 은혜를 만질 수 있는 건 그녀 뿐.
우리가 움직이는 건 그 일이 끝난 뒤였다.
···이걸로 내가 할 일은 끝난 건가.
이제 저 황제 폐하의 은혜를 챙긴 뒤, 저 독기를 멈추거나, 그게 안 되면 늦출 방법이라도 찾는다.
그럼 이 천기의 뒤틀림도, 세 사람이 죽을 일도···.
···잠시만.
만약 이번 일이 여기서 끝나면, 이 세 사람은 왜 죽었던 거지?
지금 여기까지 오는 게 산책처럼 편안하진 않지만, 그래도 초절정 고수 하나와 화경의 고수 하나가 죽을 정도의 일은 아니다.
그들이 여기서 목숨을 잃었다면 그 이유는 딱 두 가지.
돌아가는 길에 목숨을 잃었거나.
그게 아니면···.
휙!
내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하늘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태양 저 너머에서 추락하는 하나의 인형(人形).
아니, 그것은 추락하는 게 아니다.
스스로 날아오고 있었다.
자신의 아래에 있는 누군가를 향해, 맹렬한 적대감을 풍기며.
“안 돼!”
그것은 분명히, 황제를 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