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기의 근원(4)
황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허나 역설적이게도, 그보다 확실한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이를 악문 채 대답을 바라는 나와 그런 나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 옌을 번갈아 보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추론이 맞다.”
거기에는 허탈함과 함께 후련함도 함께 담겨 있었다.
“나는 아이와 함께 그곳으로 갈 계획이었네. 이틀이나 사흘 뒤 출발할 생각이었지.”
“···다른 이들에게는 말씀하지 않으신 겁니까?”
“말해봐야 십 중 십 할 가지 말라고 잡을 텐데 누구한테 말하겠는가? 그저 쪽지 한 장 남기고 떠나려 했지. 눈에 띄진 않지만, 찾으면 금방 찾을 수 있을 만한 곳에 놔뒀네. 내가 없어진 걸 알면 바로 찾을 수 있도록 말이야.”
“쪽지에는 뭐가 적혀 있었습니까?”
“내가 없어지면 다음 대 황제가 될 사람부터, 내가 황제 폐하의 은혜를 실어 보낼 곳까지. 내가 사라진 뒤에 해야 할 일은 다 적어놨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남만에 찾아올 혼란을 막을 수는 없다.
갑자기 황제가 행방불명되고, 거기서 종이 몇 장 나왔다고 ‘와! 황제 폐하께서 우리에게 이걸 맡겨놓고 가셨어!’하고 전부 따를까?
내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이미 황제는 내가 뒤에 할 말을 알고 있다는 듯, 손을 들어 말을 끊고 다시 말했다.
“나도 그것이 모든 혼란을 지울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아. 하지만···.”
후우, 황제는 짧지만 많은 뜻이 담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만 놓고 있으면, 그저 멸망할 뿐이니까.”
황제의 말에 나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확실히, 곧 남만은 멸망할 것이고, 그것을 막아낼 방법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앉아서 멸망을 맞이할 바에는 잠깐의 혼란을 감수하고서라도 멸망을 막아서겠다.
그런 황제의 선택이 옳다, 그르다를 내가 말할 수 있을까?
“이해해준 것 같군.”
내가 대답이 늦어지자, 황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남긴 쪽지에는 자네들에게도 괜찮은 제안이 여럿 적혀 있네. 가운데 땅과의 교류에 관해서도 상세히 적혀 있지.”
“교류라니···삼십 년 만의 교류를 다시 시작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것일 뿐이야. 기껏 가운데 땅의 말을 다 익혀놓고 그 광경을 직접 보지 못한다는 건 아쉽지만 말이야.”
설마 그녀가 중원과의 교류를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을 줄이야.
만약 현옥이 들었다면 정말 기뻐서 날뛴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가장 기뻐할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삼십 년 전에 있던 교류와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기껏 해봐야 상단과 상단끼리 있던 소규모의 교류와 달리, 국가의 황제가 추진하는 일이다.
아마 그 규모 역시 몇 개의 상단이 오가던 것과는 차원이 다를 터.
그리고 거기서 직접 앞장서서 남만과의 교류를 위해 움직인 현옥이 얼마만큼의 양국 사이에서 얼마만큼의 대우를 받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독대는 아닐지언정, 황제를 바로 코앞에서 만나고, 거기다 그(를 포함한 우리 일행)를 위해 황제가 직접 연회까지 열어줬다.
거기에다가 중원 사람 최초로 황제에게 화도 내봤지. 심지어 그러고도 죽지도 않았고.
···뭐, 그게 좋은 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중원의 상단이 제대로 남만에서 활동하기 위해선 그에게 눈도장 정도는 찍혀야 가능할 것이다.
이걸로 현옥이 원하던 것은 달성한 거나 마찬가지.
목숨을 걸고 남만 우림을 건넌 대가를 드디어 받게 된 것이다.
“물론 가운데 땅과의 교류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에 반대할 사람은 없겠지.”
그 예상은 지극히 낙관적이면서도 합리적이었다.
전대 황제는 지금 남만에 퍼진 독기를 없애보겠다고 나서서 그 독기의 농도를 훨씬 낮추는 동시에 해독제로 사용할 중요한 재료까지 구해냈고, 그 후대의 황제는 남만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바쳐 전 백성이 사용할 해독제를 가지고 왔다.
과연 그런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전언을 하지 않겠다고 공언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누구 하나가 그렇게 말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먼저 나서서 ‘감히 황제 폐하의 유언을 무시할 생각이냐!’하며 싸움이나 벌이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리고 그 제일 앞에서 황제와 아이 옌에게 그토록 지극정성이던 남만 제일의 고수. 카이탕이 앞에 있을 걸 생각하면···.
···아마 그녀도 그걸 다 계산하고 그런 쪽지를 남겨놨던 거겠지.
하지만 그 모든 건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을 전제로 한 계획.
“···두렵진 않으십니까?”
“전혀.”
팔짱을 낀 채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황제.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감히 범접하기 힘든 위엄과 용기가 서려 있었다.
“···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일 뿐.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입가에 그린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두렵지, 무서워. 사지에 스스로 걸어가는 게 얼마나 두려울까. 심지어 나 혼자만이 아니라 내 친우. 내 자매까지 함께 가야만 한다는 건 고통스럽기까지 하지.”
입으로는 온갖 부정적인 말을 내뱉었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두려움은 없었다.
담담함. 아니, 그것을 넘어서 입가에 옅은 미소까지 그리고 있는 그녀.
“하지만 이미 아이나 나나 둘 다 각오를 다졌네. 우리의 땅을 구할 방법이 우리의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일이라면, 그 목숨을 바치겠노라고.”
···세상도 참.
명나라는 성하 공주가 직접 북해로 가서 볼모가 되고, 북해는 빙정에다가 사람을 가져다 바쳐야 하고, 남만은 이제 황제랑 고위 귀족 하나가 목숨을 바쳐야 하고.
어느 나라건 왜 꼭 사람 한 명 바쳐야 살려주냐?
잠깐만. 내가 세 가지 경우에 모두 엮여 있는 것 같은 건 착각이겠지? 응? 착각 맞지?
···젠장.
멋없는 농담 같은 걸 떠올려 봤지만, 여전히 생각은 우울한 쪽으로만 흘러갔다.
“차라리 카이탕을 보내는 건···.”
나는 아까 저녁 연회때 나와 겨뤘던 카이탕의 이름을 꺼냈다.
세상 누구보다도 두 사람을 아끼는 그라면 황제의 명령도 웃으며 독기의 근원으로 향할 터.
하지만 내 제안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제는 바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는 우리의 땅에서 유일한 초절정의 고수다. 만약 우리의 땅에 혼란이 불어닥치면,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란 말이지. ···실패할지도, 성공할지도 모르는 일을 명령할 수는 없어. 설사 그가 내 명령을 반드시 따르리라는 확신이 있더라도 말이야.”
황제는 이미 굳게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설사 다른 의견을 꺼낸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모든 제안을 거절할 터.
뒤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만 집중하던 아이 옌도 같은 생각인 듯, 황제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있었다.
절대 흔들리지 않을 두 사람의 결심.
결국 그녀는 스스로 죽으러 그곳으로 걸어 들어가야만 하는가?
뭐라 말해야 할지도 모른 채 그저 입을 열려던 찰나.
톡.
비쩍 마른 나뭇가지가 내 머리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아니, 비쩍 마른 나뭇가지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손과 같은 온기를 가지고 있었다.
“에잉, 이놈아.”
뒤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신승이 내 머리 위로 수도(手刀)를 떨어뜨린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힘도, 내공도 담겨 있지 않았지만, 나의 정신을 다시 현실로 되돌리기에는 충분했다.
“어르신···?”
“왜 그렇게 복잡하고 어렵게만 생각하는 것이냐? 왜 그렇게 그녀를 막으려고만 들어?”
“아니, 저···남만 말로 하는데 용케 알아들으셨네요?”
할 말이 궁색해진 나는 주제를 틀어보려 했지만, 신승은 그걸 귀신같이 알아채고 다시 한번 내 머리 위로 수도를 떨어뜨렸다.
조금 전 보다 강한 일격. 하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는 건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말을 못 알아들으면 다 못 알아듣느냐? 이미 저 두 사람의 눈에는 목숨을 걸겠다는 의지가 확고하고, 너는 그것을 어떻게든 말려보려 하는 게 뻔히 보이건만. 저잣거리의 무언극이 따로 없더구나.”
“그렇게 티가 많이 났습니까?”
“티가 나다마다. 에잉, 쯧쯧. 내 답답해서 가슴을 두드리려다가 네 잘못인데 내가 왜 아프냐, 싶어서 그만둘 정도였다.”
거, 참. 말을 하셔도 좀 좋게 해주시지.
“···사람 둘 살리겠다고 그리 한 건데 너무하십니다.”
“그 마음은 갸륵하지만, 내 이유나 좀 물어보자. 여기까지 오는 동안 자기 이득은 하나 놓치지 않던 네놈이 왜 이 두 사람은 그리도 가지 말라고 애쓰느냐? 어차피 두 사람이 가든 말든 네게 이득 될 건 없는데.”
“사람이 바로 앞에서 죽으러 가겠다는데 그거 안 말리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 아닙니까?”
“아, 그거야 나나 저 화산이나 무당산에서 도 닦는 도사들이나 그렇게 열정적으로 나서지, 어디 자기 목숨 보전하는 게 먼저인 양민이 그리 나서느냐? 심지어 네놈은 자기 이득 아니면 안 움직이는 놈이잖냐? 그러니 궁금해서 묻는 것이지.”
신승의 질문에 입을 열려다 다물고, 잠깐 고민하다, 다시 입을 열려다, 다시 다물었다.
···사실 나도 정확히 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서 나라의 평안을 원하는 모습이 내가 아는 누군가와 닮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나라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려야 하는 모습이 빙정에게 다가가던 내 모습이 생각나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자신의 국가의 안녕을 위하여 미친 짓까지 하려 하는 모습이 내가 목숨을 거둔 그녀 생각이 나서 그런 지도 모르겠다.
사실 어느 쪽이라 나도 딱 확답을 내릴 수는 없었다.
이 두 사람은 그런 셋의 모습과 어느 정도 닮아있으면서도, 분명히 다르기도 하였으니까.
그냥 막아야 한다, 그런 쪽으로 자연스럽게 생각과 대화가 흘러갔을 뿐이다.
“···그냥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열성적으로 나섰다?”
“열성적은 아니고···그냥 다른 대안이나 몇 개 내드린 거죠.”
“그럼 제일 좋은 대안은 왜 안 꺼내?”
“·········.”
신승의 말에 다시 입을 다문다.
이런저런 말을 꺼내긴 했지만, 사실 가장 좋은 대안이 무엇인지는 이미 나도 알고 있었다.
“내가 같이 가면 두 사람도 목숨을 잃지 않고, 독기의 근원도 없앨 수 있고, 그 허연 나무? 그게 뭐 중요한 거냐? 뭐, 어쨌든 그것도 좀 더 많이 가져올 텐데, 뭐가 그리 무섭다고 그 말은 안 꺼내?”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그러는데.
어르신 때문이잖아요, 어르신 때문에. 이 인간아.
그가 말을 꺼내기 전부터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냥 ‘이분이 화경의 고수니 이분과 같이 가면 됩니다.’라고 말하면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리라는 걸.
하지만 그렇게 되면 문제가 있다.
···내가 있던 미래.
거기서는 남만도 멸망하고, 신승도 목숨을 잃었다.
과거 신승이 이때쯤 해서 행방이 묘연했다는 걸 생각해보면, 아마 회귀 전의 그도 지금 남만에 체류하고 있었을 터.
그럼 그런 그가 지금 목숨을 잃을만한 사건이 뭐가 있을까?
···물으나 마나 당연히 지금 우리가 하는 이 이야기.
독기의 근원 때문이겠지.
회귀 전이라 하여서 황제의 생각이나 행동이 다르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공주와 북해의 일이야 나라는 새로운 변수가 출현함으로써 많이 뒤틀리긴 했지만, 남만에서는 그런 변수가 없었으니까.
여기까지 원래의 역사대로 움직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터.
그리고 신승인지, 아니면 신승과의 동행인지는 몰라도 황제와 겨뤘을 것이고, 승리하건 패배하건 지금 이 이야기를 황제의 입으로 들었을 터.
그리고 신승은 지금 했던 말처럼 두 사람과 함께 독기의 근원으로 들어갔고···.
···결국 여기서 목숨을 잃고, 남만 역시 멸망했다.
제일 좋은 선택일 줄 알았던 것이, 최악의 선택이 되었다.
그것을 어떻게든 뒤틀어보려고 황제의 선택을 되돌리려 했지만, 그녀는 이미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나눈 대화를 어렴풋이 알아챈 신승 또한 원래의 역사대로 움직이려 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남만과 신승은 다시 원래의 역사대로 둘 다 끝을 맞이해야 하는가?
···아니, 방법이 하나 있다.
본디 최악으로 치달았어야 할 명나라의 정권 상황이 훨씬 좋아지고, 빙정의 폭주로 무너졌어야 할 북해도 평화를 되찾았으며, 그리고 두 국가 간에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된 이유.
아주 작은 뒤틀림을 만들어낸 누군가가 바로 여기 있었으니까.
대장군과 공주가 말했지.
내가 기적을 이뤄내는 사람이라고.
그렇다면 좋다.
“···좋습니다.”
신승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세 사람에게 확실히 들릴 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독기의 근원, 저희 네 명이서 함께 가보도록 하죠.”
어디 한 번 그 빌어먹을 기적, 다시 한번 일으켜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