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기의 근원(3)
“일단 앉지. 이야기가 좀 길어질 테니까 말이야.”
황제는 그리 말하며 검게 삭아버린 풀 위로 털썩, 하고 주저 앉았다.
하긴, 직전까지 피 튀기는 싸움을 하고 있었는데 힘이 남아 있을 리가 있나.
나와 신승은 물론 조금 전까지 굳어 있던 아이 옌까지 모두 그녀의 근처에 자리하자, 그제야 황제는 흠흠,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
“보자···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하려나.”
잠깐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던 황제는 곧 마음을 정한 듯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든 일은 이십 년 전. 나의 아버지인 전대 황제 폐하께서 우리의 땅을 다스리던 때에 시작되었지.”
황제는 그리 말하며 아련한 눈빛으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응시했다.
···아니, 아니다. 그녀는 허공을 응시한 게 아니라, 거기에 없는 무언가를 응시한 것이다.
“내가 기억하기론 그날은 다른 날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날이었다. 가족과 함께 식사하고, 무공을 수련하며, 공부한다. 매일 반복되던 일상. 누구도 이런 일상이 망가지리라 생각하지 않았던 그때.”
그것은 이제는 다시 찾아오지 않을 평안한 일상.
검은 분노에 잠식되기 전의 남만.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가던 그때를 그녀는 바라보고 있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그것은 갑자기 나타났다.”
황제의 눈에 서려있던 아련함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은 격렬한 증오와 분노.
지금 이 대기 중에도 둥둥 떠다니고 있을 검은색의 독기. 검은 분노에 대한 증오였다.
“···여기 황궁에서부터 삼백 리 가량 떨어진 곳에는 신성한 우림이 있다. 최초의 터전. 우리의 근원. 역대 황제들의 최후를 기억하는 곳. 수많은 남만인들이 신의 땅이라 부르는 곳.”
아니.
황제가 그 단어를 내뱉는 순간, 숲이 떨렸다.
그것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말투.
“부르던 곳. 이라고 해야 맞겠지. 그곳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검은색 독기.
처음에는 그 독기를 그리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겼다.
“긴 세월 만들어진 우림에 독의 땅이나 연못이 만들어지는 건 딱히 대단한 일이 아니지. 독을 지닌 생물의 삶에 끝이 찾아오면, 우림은 그들이 죽은 후 몸에 깃든 독을 어느 한 장소로 모은다. 그곳이 곧 독의 땅이요, 독의 연못이 되는 것이지.”
우기에 내리는 비나 강의 흐름에 따라 시체와 독이 모이게 되는 장소···아마 그녀가 말하는 장소는 그런 곳이겠지.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 땅이 가둘 수 있는 것보다 독이 강해지면, 거기에 쌓인 독은 천천히 퍼져나가지. 그때의 독도 그런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으득. 그녀가 이를 가는 소리가 풀벌레 소리 하나 나지 않는 숲에서 울려 퍼졌다.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건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
보통 하루면 끝나야 할 독기의 폭주는 이틀이 지나고, 칠주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제야 사람들은 그것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열기공을 익힌 황실의 술사들이 독기를 최대한 지워나갔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매일 십이시진 내내 뿜어져 나오는 독기를 막을 수는 없었고, 자신의 한계 이상으로 열을 뿜어낸 술사들은 독에 중독되어 버렸지. 결국 선대는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하셨다.”
“최후의 수단이라면···?”
“너도 방금 봤던 그것 말이다.”
방금 봤던 그것···이라면, 설마?
“격체진기 말씀입니까?”
“절정의 경지밖에 되지 않는 나와 아이와는 달리, 아버지와 삼촌. 그러니까 아이의 아버지는 두 사람 다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였다. 두 사람이 격체진기를 사용하면 화경에 이른 고수와도 맞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지.”
꿀꺽.
황제의 설명에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화경의 경지에 이른 고수를 상대하기 위해선 초절정 고수가 최소 여덟. 많게는 스물까지도 필요하다.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무림의 상식이었다.
말이 좋아 여덟이니, 스물이니 말하지만, 초절정의 경지는 사실상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같은 대문파의 장문인이나 가주나 오를 수 있는 경지.
즉 한 명의 절대 고수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정파의 대문파가 모두 나서야 한다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겨우 두 사람만으로도 그런 절대 고수와 맞상대 할 수 있다고 당당히 공언하고 있었다.
거짓말이라 말하고 싶었지만, 조금 전 그녀와 싸움을 벌였던 나로썬 딱 잘라 말할 수 도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진짜 절대 고수의 생각은 어떨까?
힐끔, 뒤로 눈을 흘겨 신승의 표정을 살펴봤지만, 그는 여전히 평온 그 자체.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없이 황제의 이야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별생각 없는 것 같은데.]
···하긴, 이미 만사에 신경을 쓰지 않는 분인데 이걸로 마음이 흐트러질까.
슬쩍슬쩍 바라보기만 하는 나와 달리 바로 앞에서 신승의 표정을 감상하고 있던 화순이 어깨를 으쓱거리자, 나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은 그곳까지 함께 길을 뚫고 갈 열기공의 고수 셋과 신성한 우림 안으로 들어갔지. 만약 한 달의 시간이 지나도 독기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내가 황제의 자리를 이어라, 그리 말씀하시고 말이야. 그리고 그 결과는 뭐···눈앞에 있는 대로지.”
황제는 그리 말하며 자신이 곧 그 증거라는 듯 말했다.
자신의 가족이 목숨을 잃은 일이다.
분명 슬프고 괴로운 일이었음에도 이렇게 농을 하는 모습이 오히려 역으로 슬퍼 보였다.
“하지만 두 분의 도전이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니었어. 두 가지 긍정적인 변화가 찾아왔거든.”
“그게 뭡니까?”
“첫 번째는 이 독기. 지금도 대지 전체에 퍼져있긴 하지만, 처음 독기가 퍼질 때에 비하면 훨씬 나아진 거야. 처음 독기가 퍼졌을 땐 마치 먹구름처럼 하늘을 뒤덮었지만, 지금은 대기에 옅게 뿌려져 있을 뿐, 독기가 겉으로 보이지는 않으니까.”
이만한 독기가 먹구름처럼 보였다···그 광경을 상상한 나는 몸을 잘게 떨었다.
중독된 병자들을 치료하면서 이 독이 얼마나 지독하고 끔찍한 독인지 절절히 체감한 나다.
찻잔 바닥에 깔린 정도로도 몸서리쳐질 정도로 끔찍한 독이 먹구름처럼 퍼져있었다니.
만약 독의 기세가 그때 그대로였다면, 남만은 이십 년은커녕 일 년도 버티지 못하고 멸망했을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거지.”
스윽.
그녀는 그리 말하며 자신의 품 안에서 자그마한 나뭇가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마치 다 탄 숯마냥 새하얗게 물든 하얀 나뭇가지.
하지만 그런 겉모양과는 달리, 그 나뭇가지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어마어마했다.
여인인 황제의 손바닥보다도 자그마한 크기에서 장정 열이 둘러싸도 모자랄 거목의 생명력이 느껴지다니!
더군다나 그녀는 방금 그것을 품 안에서 꺼내 들었다.
조금 전까지 나와 싸우느라 독기를 마구 끌어올리던 그녀의 바로 옆에 있었다는 소리다.
그런데 그 독기를 모두 이겨내는 것은 물론 그러고도 저만한 기운을 품고 있다고?
가히 영초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물건이었다.
내 경악한 모습을 보고 황제는 만족한 듯 그 나뭇가지를 다시 품 안에 넣더니, 이야기를 재개했다.
“방금 그대들이 본 건 신성한 나무. 혹은 황제 폐하의 은혜라 불리는 나무의 조각이네.”
“황제 폐하의 은혜···그럼 설마, 선대 황제께서 그 땅에 들어가신 뒤로 그것이 나타난 겁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그곳과 연결된 강에서 흘러내려 오는 것이지. 하지만 맞아. 이것이 바로 그 두 번째 긍정적인 변화네.”
그녀는 이번에는 자그마한 함을 꺼내 그것을 열었다.
그 안에는 청량한 향기를 뿜어내는 손가락만 한 환단이 하나 들어 있었다.
그것은 나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검은 분노의 해독제로군요?”
“맞아. 그리고 이 해독제를 만드는 데 반드시 필요한 약재 중 하나가 바로 이 황제 폐하의 은혜지. 두 분의 희생 덕분에 우리는 심각해진 병자를 치료할 수 있는 수단도 얻은 거야.”
“그래서 이런 독기 속에서도 남만이 무너지지 않고 버텨낸 거군요.”
“그렇지···무척 아슬아슬한 줄타기 같은 평화긴 하지만 말이야.”
그리 말하는 황제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무리 독기를 옅게 만들고, 해독약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재료를 구해냈다 하더라도 결국 남만 전체에 독기를 퍼뜨리는 건 멈추지 못했으니까.
말하자면 죽음과 멸망으로 향하는 모래시계를 조금 늦춘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도···.
“···하지만 그런 불완전한 평화가 깨지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어.”
“아무리 약해진 독기라도 사람들의 몸에는 쌓이기 마련. 결국 사람의 몸에 쌓인 이십 년의 독기가 곧 차례차례 터져나가기 시작할 것이다···이런 말씀이지요?”
“역시 병자들을 치료해봐서 그런가? 우리의 땅에 체류한 지는 겨우 두 달밖에 안 됐다고 들었는데, 금방 알아차리네?”
내 말에 황제는 맞아, 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그 속이 어떨지는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맞아. 사람들의 몸에는 이제 더 견딜 수 없을 만큼 독이 쌓였고, 아무리 조금씩 황제 폐하의 은혜가 내려오고는 있지만 우리의 땅 전체에 뿌리기는 너무나도 부족하지. 막고, 또 막아왔던 멸망이 드디어 바로 눈앞에 나타난 거야.”
자신의 국가가 곧 멸망한다.
그런 끔찍한 말을 황제는 더없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입가는 미소를 그리고, 손은 정갈하지 못하게 마구 흔들거리고 있었으며, 심장은 마구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래서.”
그녀는 이미 마음을 먹었다.
“두 분이 그 안으로 들어가기로 생각한 겁니까?”
모래시계의 뚜껑을 열어 다시 모래를 채워 넣기로.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백성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연명시키기로.
멸망이 얼마 남지 않은 국가를 조금이라도 더 버티게 하기로.
내 대답에 황제의 얼굴에 만난 이후 처음으로 보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경악.
“···뭐? 아니, 잠깐. 네가 그걸 어떻게?!”
“처음 그걸 예상한 건 아이 옌 님과 첫 만남에서였습니다.”
아이 옌은 처음 만났던 적부터 뭔가 속셈을 품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은 속셈이.
나는 처음 그것이 나를 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삼십 년 만에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외인을 순순히 자신의 성으로 들여보내 극진한 대우를 해준다?
북해에서 필요 이상으로 우리에게 친절했던 그녀. 자야가 생각나는 그 행동거지에 나는 그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속셈은 나를 향한 게 아니었다. 아니, 다른 어떤 사람을 향한 것도 아니었다.
바로 자기 자신.
“두 분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독기를 없애거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남만의 사람들을 모두 치료할 수 있을 만큼의 황제 폐하의 은혜를 실어 보내겠다···그런 속셈 아닙니까?”
보통이라면 불가능했을 황제와의 만남이 그토록 일사천리로 진행된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나는 예상하였다.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물론 대단하지만, 그래 봐야 하루에 서른 명 남짓.
이미 남만인 대부분이 중독된 지금에 와서는 불붙은 집에 찻잔의 물을 뿌리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을 가장 잘 알고 있을 황제가 만남을 허락했다?
독이 퍼진 초창기라면 몰라도 이십 년이 지난 지금?
황제는 내 말에 이를 악물었다.
“그걸···어떻게 알았지?”
“처음에는 저도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증거도 없고, 목적을 알아낼 만한 단서도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방금 그 싸움이 큰 단서가 되었습니다.”
“방금의 싸움이···왜?”
“만약 폐하께서 처음부터 저를 독기의 근원에 다다를 수 있는지 시험해보려 하셨다면 그런 싸움은 필요 없을 테니까요. 어차피 무기도 있겠다, 제 몸에 상처를 내고 이 독기에서 얼마나 잘 버티는지만 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 정도면 충분하다.
만약 내가 독기의 근원을 찾아 그것을 없애기 위해 간다고 처음부터 공언이라도 했다면 모를까, 내가 원한 건 독기가 퍼진 이유와 그 근원의 위치뿐.
최소한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것을 알아보는 걸 순순히 알려주는 건 물론, 거기에 나를 시험해보겠다며 싸우기까지 했다.
그저 시험이라고 하기엔 차고 넘치는 무지막지한 싸움을.
거기서 추론되는 답은 딱 하나.
이 두 사람이 원하는 건 따로 있었다.
“두 분은 저를 시험한 게 아니라, 두 분 스스로를 시험한 겁니다. 정말로 자신들이 초절정의 고수와 겨룰 수 있는지. 초절정의 고수나 진입할 수 있는 독기의 근원에 들어갈 수 있는지. 정말로 이 멸망을 멈출 자격이 자신들에게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쿵.
내가 손바닥으로 땅을 내려치자, 다 삭아서 검게 변한 잡초들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나는 그 사이로 황제를 향해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