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기의 근원(1)
“흐음, 그렇단 말이지.”
···응?
“좋아, 그 정도야 뭐. 오늘 연회가 다 끝나면 말해주지.”
어라···?
뭔가 예상했던 반응이랑 다른데?
분노하거나, 경악하거나, 하다못해 인상이라도 쓰리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황제는 너무나 담담하게 내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 훌륭한 대결을 보여준 두 사람을 위하여 모두 잔을 들어라! 한 방울의 술이라도 남기는 이는 내가 용서치 않을 테니!”
“와아아아아!”
“알겠습니다, 폐하!”
거기에다가 요청을 받아들이자마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연회를 진행하기까지.
혹시나 내가 남만어를 헷갈렸나? 이런 생각까지 할 정도로 평탄한 황제의 모습에 나는 긴가민가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제대로 말은 건넸나?”
내가 앉자마자 우리를 가만히 지켜보던 신승까지 이렇게 되물을 지경이었으니, 그 모습이 나만 어색하게 느낀 건 아니리라.
“예, 일단 말은 건넸는데···.”
“남만어 제대로 익힌 거 맞지?”
“저랑 똑같은 생각을 하시네요. ···일단 오해가 길어질까 싶어서 대답해드리는데, 절대 아닙니다. 저는 똑바로 말했습니다.”
내 대답에도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신승.
아니, 이 노인네···아니아니, 혹시 생각도 읽을지 몰라. 어르신이 진짜···. 내가 이거 익힌다고 한 달 동안 어느 지옥을 겪었는데.
“···그래, 일단은 믿어주마.”
“‘일단은’이 아니라 확실하게 믿어주면 안 됩니까?”
“그건 오늘 밤에 함께 황제와 이야기를 들어보고 정하마.”
“하긴···그건 맞죠.”
사실 울컥한 마음에 그리 말하긴 했지만, 나도 여전히 확신은 할 수 없었으니까.
일단 오늘 밤, 그때 모든 것이 확실해지리라.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황제를 응시한 채 내 앞에 있는 잔에 손을 뻗.
“헐헐, 여기 앉아도 되겠나?”
···으려는 순간, 갑자기 내 옆으로 자리를 잡는 카이탕의 모습에 손을 멈췄다.
분명히 물어봤으면서 왜 대답도 듣지 않고 앉는 걸까.
그런 생각과는 달리 최대한 웃는 얼굴로 그를 반겼다.
“아이고, 물론이죠. 빈자리에 앉으시겠다는데 허락하고말고가 어디 있겠습니까? 얼른 앉으시지요.”
솔직히 카이탕이 내 옆에 앉는 게 마음이 편치는 않다.
조금 전까지 싸운 상대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애초에 내가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도 아니고, 남만의 문화도 강자를 숭상하며, 싸움 뒤에는 친구로 대우한다.
내가 지금 그를 불편해하는 이유는 딱 하나.
“아까 내가 자네를 적대적으로 바라본 건 사과하겠네. 나는 자네가 아무런 능력도 없이 아이 옌 아가씨를 노리는 게 아닌가 싶었으이.”
“아, 아니요···그 정도는 누구나 착각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하하하···.”
···나를 아이 옌과 엮으려고 단단히 마음먹은 듯한 이 어르신의 태도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만한 강함을 가지고 있다면 얼마든지 환영이지. 자네라면 믿고 아가씨를 맡길 수 있겠어.”
“아니요, 저는···.”
“내 팔불출 끼가 조금 있긴 허나,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참한 신붓감이야. 저토록 훌륭하게 성장하셨으니, 사자들의 땅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으실 주이 옌 님도 이렇게 성장하신 아이 옌 아가씨를 보곤 눈물을 흘리시겠지.”
“네, 그런 그런데···저는···.”
“가운데 땅의 가족들 때문에 걱정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일세. 황제 폐하께서도 자네가 온다고 하면 대환영하실 게야. 옌 가문이라면 황실의 친척. 가운데 땅에서도 비견할 곳이 없는 귀족 중의 귀족이지. 고향 생각은 하나도 나지 않도록 잘 대우해주리라고 내 약조하지.”
“저는, 그, 어···.”
내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자신이 할 말만 내뱉는 카이탕.
마음 같아선 빽 소리라도 질러서 말을 멈추고 싶긴 했지만, 아까 착각한 게 찔려서라도 강하게 말을 못 하겠다.
···내가 미쳤지. 이런 어르신을 아이 옌에게 빠져서 나한테 질투를 하니, 늙어서 저런 어린 낭자한테 욕정을 하니 뭐니 생각하다니.
[중원에서는 흔한 일이잖아? 환관 놈들도 궁녀들 데리고 가서 영차영차 하는 일도 있다는 데, 뭐, 그런 착각도 할 수 있는 법이지.]
···나를 위로해주는 거냐, 아니면 욕하는 거냐?
이죽이죽 웃으며 내게 말을 거는 화순에게 한마디 하는 사이에도 카이탕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까 자네도 아가씨랑 결혼하면 아주 대박···.”
하지만 그런 영원히 멈출 것 같지 않던 카이탕의 입도.
“카이탕 아저씨.”
움찔.
“그만하시죠? 유 대인께서 곤란해하시지 않습니까?”
“아, 알겠습니다, 아가씨.”
철혼이 내뿜던 와류보다도 더욱 차가운 아이 옌의 한 마디 앞에서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건드리면 베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매서운 미소를 띠며 카이탕을 부르는 호칭까지 과거의 그것까지 바뀐 아이 옌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다시 평시의 그녀로 되돌아왔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 옛날 정보 요원 시절 선배가 말하던 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죄송합니다, 유 대인. 카이탕님이 평상시에는 아주 진지한 분이신데, 저와 연관되면 조금···성격이 바뀌시는 부분이 있어서요.”
“아뇨, 괜찮습니다. 아이 옌님 정도 되는 분이라면 이렇게 과하게 반응할 법도 하죠.”
“후후후···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고맙네요. 하지만 저도 착각할지 모르니 조심해주세요?”
아까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싱긋, 미소를 짓는 그녀.
“그리고 혼인에 관해선···혹시 유 대인께서 저에 대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는 소녀도 잘 모르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혼인은 인륜대사. 각자의 마음이 가장 중요한 법이지요. 너무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인의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저 역시 혼인에 관한 생각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아이 옌은 하던 말을 잠깐 멈추고 자신의 잔을 응시했다.
손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지만, 기이하게도 잔에 담긴 술에는 미약하게나마 파문이 일어나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자신의 내공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는 증거였다.
기의 흔들림은 곧 마음의 흔들림.
이미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부터 무슨 대답을 할지 알 수 있었다.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해요.”
그저 결혼하고 싶지 않아서 되는대로 내뱉은 변명 같은 건 아니었다.
그리 대답하는 그녀의 눈에는 기이한 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오직 하나의 업에만 전신전력을 다하는 인간만이 보일 수 있는 열기.
···최소한 그게 해결되기 전까지는 결혼할 생각은 없겠구만.
“알겠습니다. 이해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카이탕 아저씨의 말씀은 그냥 흘려보내시면 돼요. 원래 취미가 제 결혼 상대 찾는 거라서요. 종종 일어나는 발병 같은 거죠.”
“하하하,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스윽.
그녀는 그리 말하며 잔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승리, 축하드려요.”
한점의 다른 속셈 없이 순수하게 나의 승리를 축하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씩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네, 감사합니다.”
짠.
서로의 잔이 부딪치고, 서로 웃음을 마주한다.
그렇게 황궁에서의 연회가 다시 시작되었다.
*****
연회가 끝난 후의 야심한 밤.
신승과 나는 황궁 내에 있는 정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황제가 이곳에서 만나자고 했다고?”
“네. 황궁 안보단 이곳이 더 이야기를 나누기 편할 거라고 하시더군요.”
나와의 약속도 잊은 채 연회에만 집중하던 것처럼 보이던 황제는 연회가 파하고, 각자의 숙소로 향하기 직전 내게 은밀히 전음을 남겼다.
[황궁 내 정원. 가히 밀림에 가까울 만큼 숲이 우거진 곳이 있다. 그곳으로 오라. 오직 나만이 출입을 허락할 수 있는 곳이니, 다른 이가 들을 건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그녀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만일이라는 것도 있는 법.
여기 오면서 우리를 감시하는 이가 없는지 기감을 펼치며 왔지만, 그녀의 말대로 누구 하나 우리를 뒤쫓는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까지 나오자 오히려 놀라운 건 이쪽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을 지키는 호위병 하나둘 정도는 배치할 줄 알았건만, 정말로 약속대로 사람 한 명 세워놓지 않을 줄이야.
“···그녀들의 속셈은 뭘까요.”
어차피 아무도 듣지도 않겠다.
나는 신승에게 내가 남만에 오자마자 처음으로 고민하고 있던 부분을 꺼냈다.
“국가의 치부이자 자신의 치부라 할 수 있는 독기의 근원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도 연회를 우선시하는 황제나, 뭔가 속셈이 있는 건 분명하지만 수도로 올 때까지 한 마디도 꺼내지 않는 아이 옌이나···두 사람 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헐헐, 그러하더냐?”
뒷짐을 지고 천천히 산책하듯 걸어가던 신승은 내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너라면 그런 거로 그렇게 고민할 법도 하구나.”
“···무슨 말씀입니까?”
“내 수련이 부족하여 타심통(他心通; 부처의 육신통(六神通) 중 하나로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신통력.)을 익히진 못했으나, 그녀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겠네.”
그의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는 푸근한 미소가 가득했다.
“자네의 문제는 모든 걸 너무 복잡하게 생각한다는 것이야. 그녀들은 자신의 사람과 자신의 땅을 사랑할 뿐이야. 그것을 지키기 위해선 무엇이라도 하려고 할 뿐이고. ···무슨 뜻인지 알겠나?”
“·········.”
신승의 물음에 나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내가 정말로 모든 일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걸까?
전생의 그 정보 요원 시절의 잔재가 남아 있는 걸까?
나 스스로도 거기에 답을 꺼내지 못하던 그때, 신승이 마치 쐐기를 박듯 한 마디를 더 꺼냈다.
“자네의 그런 생각이 나쁜 건 아니야. 다만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을 땐, 조금 더 간단히 생각해보라는 것이지.”
“간단하게···잘 모르겠군요.”
“헐헐, 괜찮네, 괜찮아. 평생을 그리 살아왔을 텐데 그것이 그리 쉽게 바뀌겠나. 지금의 조언도 마음에 새기라는 말은 아니야. 그냥 늙은이가 말 한마디 꺼내네, 이 정도로 흘려듣다가, 문뜩 내 말이 생각나면 ‘한 번 그래 볼까.’ 이렇게 해보라는 걸세.”
헐헐헐, 신승은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조금 더 빠른 발걸음으로 정원을 향했다.
간단하게···라.
신승의 말을 모두 동의할 수는 없었다.
그가 내 전생과 현생 모두 합친 것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는 건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 해서 그의 생각 모두가 옳다는 확신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고개를 숙인 채 신승의 말을 곱씹어보던 나는 심상치 않은 느낌에 고개를 들고 신승의 등을 바라봤다.
“···잠깐만요! 어르신! 가시는 길도 모르시잖아요!”
점점 다른 방향으로 벗어나는 신승에게 헐레벌떡 뛰어가 따라붙었다.
···이거야 원. 잠깐도 눈을 못 떼겠네.
*****
황궁 내에 만들어진 우림과도 같은 정원은 우리가 지나쳐 왔던 남만 우림과 완전히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끝 모른 줄 모르고 솟아오른 거대한 나무와 허벅지를 가릴 정도로 커다란 이름 모를 잡초들. 그리고 도저히 꽃으로 취급도 못 할 만큼 기괴한 냄새를 풍기는 꽃까지.
하지만 절대 그것과 동등해질 수 없는 차이점이 있었으니.
“···정말로 제대로 ‘만들었구먼’.”
“그러게 말입니다.”
딱딱한 얼굴로 주변을 휙휙 둘러보던 신승이 입을 열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거기에 동의를 표했다.
“거기서 살아가는 동물은커녕 벌레 한 마리도 살지 않는 숲이라니.”
“그러게 말이다. 평생 보기 힘든 광경이로구먼.”
···평생 보기 힘든 광경이라.
그럼 이런 광경을 세 번이나 봤던 나는 대체 무슨 삶을 살고 있는 건가.
심지어 그 세 번의 경우도 모두 달랐다.
날벌레의 목숨조차 소중히 여기는 신승이 모든 벌레들을 다 쫓아낸 덕분에 한 번.
가만히 있어도 마기를 뿜어내는 마인 때문에 근처에 있는 모든 생명이 도망쳤기 때문에 또 한 번.
그리고 지금은···.
“···남만에 있는 독기와는 다른가?”
“농도는 조금 더 강해도, 그 성질은 다릅니다. 적극적으로 몸으로 침범하려 하던 검은 분노와는 달리, 지금 주변에 깔린 독기는 그저 퍼져만 있을 뿐, 공격하려 하진 않는 것 같군요.”
하지만 공격하려는 의사는 없다 하더라도 독기는 독기.
우림에 살아가는 날벌레나 동물들에게는 견디기 힘들었으리라.
“독기의 주인은···그녀인가?”
“아마도···그렇겠지요.”
신승과 나의 궁금증이 풀리는 건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리 넓지도 않은 정원에서 중앙 구역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고.
“왔군.”
거기서 맹렬한 독기를 내뿜고 있는 황제와.
“·········.”
그 뒤에서 가만히 선 채 뭔가를, 혹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 옌을 발견하는 건 그보다도 쉬웠으니까.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네. 전혀 늦지 않았으니까.”
아까 연회에서 보였던 그 활발함을 싹 비워내기라도 한 듯, 황제는 딱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괜찮다면 질문을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지금 우림을 뒤덮고 있는 독기에 관한 질문을 빼고는 뭐든지 말해주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것에 관한 질문은 아니니까요.”
스윽.
그녀의 딱딱한 대답만큼이나 빳빳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진 후,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저와 싸우실 속셈이냐라고 질문할 생각이었거든요.”
“그거 참으로 우문(愚問)이군.”
푸왁!
그녀가 대답하기 무섭게, 우림 전체에 퍼져 있던 독기가 마치 폭발하듯 그 기세를 더더욱 넓혔다.
그리고 그런 독기의 중심에 있는 황제는 지금까지 선보였던 호탕한 미소와는 완전한 대척점에 있는, 싸늘한 미소를 얼굴 위에 띄우며 손을 들었다.
“수백 발의 대포를 맞고도 싸울 생각이냐고 묻는 왕이 어디있더냐?”
그리고 그 말과 함께.
고오오오-!
내 전신이 보랏빛 독기에 뒤덮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