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만의 황제(4)
그렇게 전무후무한 성대한 환영 인파(숫자가 아니라 계급적 의미로)를 맞이한 그 날 저녁.
쿵!
남만의 황제는 거의 자신의 몸통만 한 잔을 머리 위로 번쩍 든 채 탁자 위로 발을 올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오늘은 수십 년 만에 가운데 땅에서 손님이 찾아온 날이다! 이런 기쁜 날 어찌 취하지 않을 수 있으랴! 오늘 취하지 않는 자는 내가 친히 나서서 벌을 줄 터이니, 모두 배가 터지도록 마셔라!”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황제가 자신의 잔에 입을 대자, 그보다는 작을지언정 만만치 않게 큰 잔을 들고 있던 사람들도 똑같이 술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쿵! 쿵! 쿵!
그리고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마찬가지로 황제를 시작으로 모두 자신의 잔을 내려놓았다.
···진짜 어마어마하구만.
도대체 저걸 어떻게 다 마시는 거지? 몸만 잘 구기면 본인이 들어가는 것도 가능할 것 같은 잔에 담긴 술을 모두 들이켰음에도, 황제는 여전히 부족한 듯 옆에 있던 시종에게 자신의 잔을 다시 채우라 닦달하고 있었다.
나도 평상시 마시던 것에 비하면 두 배에 가까운 크기의 잔으로 마시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옆에 있는 사람에 비하면 영 부족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렇다.
나는 지금 다름 아닌 황제의 옆에서 술잔을 들고 있었다.
이렇게 높은 자리에 있어 본 적이 언제던가.
국경부대에서 처음으로 높은 사람과 함께 했을 때는 계급이 계급인지라 최후위에 있었고, 그 뒤 북해에서 연회가 열렸을 땐 손님이라 조금은 올라갔지만, 어디까지나 호위라서 바로 옆에 있진 못했지.
하얀 별의 이름을 받은 뒤에도 비무 신청 때문에 연회는커녕 밖에 돌아다니지도 못했고.
지금같이 주인의 바로 옆, 최고 상석에 앉아보는 건 생전 처음이었다.
거기다가 연회의 규모는 어떠한가.
성 내에 있는 사람이란 사람은 다 끌어모았는지, 맨 윗자리에서 저 아래쪽에 있는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파악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무리 반가운 손님이라지만 설마 이렇게나 성대한 연회를 벌일 줄이야.
겉모습뿐만 아니라 속까지도 호탕함 그 자체로 이루어진 듯한 여인이었다.
···그 진짜 속내를 파악할 수만 있어도 더할 나위 없겠건만.
황궁에 들어오자마자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황제의 얼굴에는 그 속셈을 읽을만한 단서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진심으로 연회를 즐기듯, 자리에서 일어나(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깨작깨작 술을 마시고 있는 소인배들의 잔에 술을 잔뜩 채워주고 있었다.
“폐하께서 이토록 활발하신 모습은 오랜만에 보네요.”
한참을 걸쳐 잔에 있던 술을 다 마시고 내려놓자, 옆에 있던 아이 옌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황제의 잔보다야 작지만, 내 잔에 비하면 몇 배는 큰 잔에 가득하던 술을 다 마신 그녀는 살짝 취한 듯 볼을 발갛게 물들인 상태였다.
···이 낭자도 보통 사람이 아니네.
내가 마셔본 술 중 제일 독한 북해의 술도 한 수 접어줄 만큼 독한 술이다.
단전에 쌓인 내공이 아니라면 한 잔만 마시고 푹 쓰러져버렸을지도 모를 정도로 독한 술을 내 몇 배를 마시고도 볼만 살짝 붉어진 거로 끝이라니.
남만 사람들은 술에 강한 뭔가를 타고 나기라도 한 건가?
“···유 대인?”
“아, 죄송합니다. 뭔가 좀 생각하고 있던지라···.”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고찰을 하던 도중 들려오는 아이 옌의 목소리에 정신을 되찾았다.
“오자마자 연회라서 조금 놀라셨나 보네요. 이해해주세요. 폐하께선 무슨 일만 있어도 연회를 여시길 좋아하시거든요.”
“아, 그렇군요. 왠지 연회를 여는 게 참 자연스럽다 했더니, 그런 연유가 있었군요.”
“가운데 땅은 어떤지 모르지만, 우리의 땅에선 음주와 가무를 잘 즐길 줄 알아야 좋은 지배자라는 말을 듣거든요. 그런 점에서 당대 폐하만큼 황제에 어울리는 분은 우리의 땅에서도 찾기 힘들죠.”
“동감입니다.”
남만 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를 다 뒤져봐도 그녀만큼 즐겁게 노는 사람은 찾기가 힘들 것 같았다.
가신들의 충성심도···겨우 여기서 보는 거로 모든 걸 확신할 순 없었지만, 딱히 황제의 행동에 반감을 키우는 이도 없어 보였다.
이런저런 우환이 있을지언정, 황제를 믿고 따른다는 거겠지.
“그런데 아이 옌님.”
“네?”
현재 남만의 정치 상황에 대해서 대충 마음속으로 정리한 나는 그제야 정말로 궁금했던 부분을 그녀에게 물었다.
“아까 그 카이탕이라는 분은 누구십니까?”
나에게 맹렬한 적대감을 뿜어내던 사내, 카이탕.
자신을 ‘황제의 오른팔’이라 지칭했던 사내는 지금 내 머릿속에서 남만 내 제일의 요주 인물로 꼽혔다.
풍기는 기운은 가히 초절정 고수에 비견될 만했고, 그 직책은 황제의 바로 앞에서 자신을 ‘황제의 오른팔’이라 지칭할 사내.
사실 이 정도라면 아무 상관 없다. 무공이 높은 자가 높은 직책에 있는 건 중원에서도 흔한 일이었으니까.
···문제는 그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나를 적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그냥 적대감을 뿜어낸다면 차라리 낫다.
그가 외부인에 대해 맹렬한 적대감을 품고 있다거나, 내가 황제에게 무슨 무례한 행동을 한 것처럼 말이다.
전자야 선물 공세 등의 방법으로 풀 수라도 있고, 후자야 황제에게 진심으로 사죄하면 그녀는 무슨 일이라도 모두 용서해 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 이유를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적대감의 이유를 알 수 없다면 그것을 풀 방법도 요원한 법.
그렇기에 나는 그 적대감의 실체에 대한 조금의 단서라도 구하기 위해 그나마 그와 가까워 보이는 아이 옌에게 도움을 구한 것이다.
“카이탕에 대해 설명하려면 먼저 황제의 오른손에 대해 먼저 설명해 드려야 할 것 같네요.”
정보를 캐내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릴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그녀는 오히려 시원스럽게 카이탕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황제의 오른손은 여러 직책의 합이에요. 황제의 무공 스승이자, 황제의 가장 강력한 검이며, 황제의 명령을 가장 가까이서 듣는 자죠. 전시에는 황제의 옆에서 폐하를 지키고, 전시에는 제일 앞에서 황실의 적을 향해 분노를 내뿜죠.”
“으음···그렇군요.”
···젠장, 아주 가깝다 못해 피곤하기까지 한 존재구만.
그녀를 탓하는 건 물론 아니지만, 그녀의 입에 나오는 정보는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정보로만 가득했다.
“카이탕님은 그런 역대 황제의 오른팔 중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에요. 저와 폐하가 아주 어릴 적부터 저희 두 사람에게 무공을 가르쳐 준 스승님이기도 하고요.”
“황제 폐하와···아이 옌님도요?”
그녀도 황궁에 있었다고!?
내 질문에 그녀는 마치 그리운 과거를 회상하듯, 천장을 응시한 채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네. 저도 옛날에는 황궁에서 거주했어요. 저희 가문은 황실의 먼 친척인지라 교류가 좀 잦았거든요. 마침 또래 친구가 없던 폐하께 친구도 되어드릴 겸 말이죠.”
그래서 황제와 신하의 관계임에도 그리 친밀했던 건가.
황제의 성격 때문에 그런 줄 알았건만, 정말로 의외였다.
“그때부터 카이탕님은 저를 무척 아끼셨죠. 제가 다시 저희 도시로 돌아간다고 했을 때는 체면도 잊고 엉엉 우실 정도였다니까요.”
그걸 말려드리느라 정말 힘들었어요. 깔깔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웃는 얼굴은 한순간 정보를 캐내야 한다는 사실도 잊어버릴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아니, 잠깐만. 그렇다면 설마?
그녀의 말에서 무언가 단서를 얻은 나는 조심스러운 얼굴로 그녀에게 슬쩍 물었다.
“혹시 그분···결혼은 하셨나요?”
“아뇨, 아직 결혼은커녕, 연인도 한 번 사귄 적 없으시다고 해요. 소문으로는 마음속에 담고 있는 분이 있다고 하시던데···잘은 모르겠네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를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그제야 나는 왜 그토록 그가 나를 향해서 적대감을 뿜어냈는지 깨달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마음속에 담고 있다는 사람, 아이 옌인 것 같은데?]
지금 화순이 내뱉은 말이 곧 내 심정이었다.
그렇게 되면 왜 그가 유독 나를 향해서만 살의를 내보였는지 설명이 되었다.
당시 우리 일행 중 아이 옌과 가장 가까이 있던 건 나와 신승뿐.
거기에 신승은 나이도 나이일뿐더러, 불가의 스님이기까지 하였으니 아이 옌과 엮일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의 옆에 있는 유일하게 젊은 사내인 내게 그토록 살의를 내뿜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충 상황이 이해는 간다. 가긴 하는데···.
에이, 설마, 아무리 그래도 그럴 리가 있나.
무슨 저잣거리에서 닷 푼에 파는 여섯 장짜리 싸구려 연애 이야기도 아니고 한 여인을 두고 사내끼리 다투는 그런 멍청한 이야기가···.
“당신.”
오싹.
그 순간 갑자기 내 머릿속에 꽂히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몸을 떨었다.
“아이 님과 너무 가까운 것이 아닙니까? 조금 떨어지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말이죠.”
도저히 연령대를 파악할 수 없는 사내의 목소리는 아까 들었던 그것과 똑같이 나를 향한 강한 적대감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아, 카이탕님도 오셨군요.”
“죄송합니다, 아이님. 조금 늦었습니다.”
“아뇨, 괜찮아요. 황궁에서 제일 바쁘실 분이 늦었다 해서 탓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요?”
어디 있긴, 여기 있지.
젠장, 차라리 안 왔으면 얼마나 좋아.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손님.”
아이 옌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인 카이탕은 바로 나에게 시선을 돌리고 입을 열었다.
“남녀가 유별난 법인데, 아직 결혼도 하지 못한 여인과 이토록 가까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런 행동은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의 명예에 씻지 못할 상처를 줄 수 있으니 조심하도록 하십시오.”
“그···말씀, 아주 마음 깊이 새겨놓겠습니다.”
말은 길었지만, 결국 그가 원하는 건 딱 하나.
저리 좀 떨어져라, 이 뜻이었다.
그의 말대로 사람 하나가 앉을 수 있을 정도로 거리를 벌리자, 마치 한 권의 책이 빈 책장에 책을 꽂아 넣듯 그 사이로 쏙 들어가는 카이탕.
아니, 이 사람이···.
아이 옌에 대해서 연애적 감정 따윈 하나도 없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선을 넘은 것 아닌가?
그렇게 좋아하면 그냥 좋아한다, 고백하던가!
사내새끼라는 놈이 무슨 이렇게 남을 견제만 하는 거야?
더는 참지 못하고 카이탕에게 뭐라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찰나.
“으하하하! 연회는 잘 즐기고 있나?!”
갑자기 내게 어깨동무하며 질문을 던지는 황제의 행동에 열려던 입을 다물었다.
참으로 절묘한 순간이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그녀가 늦게 나타났다면, 답답한 마음에라도 ‘그냥 고백하라고!’하면서 한소리 하려 했으니 말이다.
“흠, 정말로 즐기고 있는 것 맞나? 그런 것치곤 표정이 영 좋지 않은데 말이지.”
···사람의 표정을 읽는 실력은 수준급인가.
그녀가 오자마자 바로 카이탕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모두 씻어냈건만, 그녀는 남아있던 조그마한 감정을 읽어내고 내게 그런 말을 꺼냈다.
“이런 성대한 연회는 처음이라서 말입니다. 조금 긴장한 모양이군요.”
“허어, 그럼 안되지. 손님께서 즐기라고 이만한 연회를 열었는데, 그럼 쓰나.”
안 되지, 안 되고말고. 한참 동안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좌우로 흔들던 그녀는 마치 좋은 생각이 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듣기론 자네가 무척 뛰어난 술사라 하던데 사실인가?”
···지금 바로 이 순간에 그런 걸 묻는 다라.
대충 그녀의 속셈을 알아챈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한 남한테 맞고 다니지 않을 정도는 됩니다.”
“하하! 그렇다, 이 말이지?”
내 말에 기쁜 듯 웃던 황제는 몸을 뒤로 돌리더니, 큰 목소리로 외쳤다.
“모구!”
“예, 폐하!”
그러자 조금 전만 해도 한창 연회를 즐기던 사내 하나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마어마한 잔에 몇 번이고 연거푸 술을 마시고 있었음이 분명함에도 그 사내는 황제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마치 한 자루의 잘 벼려진 칼처럼 맹렬한 기세를 내뿜으며 뒤이어 나올 황제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연회에 흥이 부족하다! 신성한 땅의 전사로써 가운데 땅에서 온 손님들에게 그대의 무를 보여줘라!”
“명을 받듭니다!”
쿵! 그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박자, 조금 전만 해도 웃고 떠들던 소리가 가득하던 연회장이 침묵에 잠겼다.
혹시나 자신이 그 상대가 될지도 모른다, 라는 두려움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
그들은 기대하고 있었다.
황제의 앞에서 자신의 무를 당당히 선보일 기회를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그들을 보지 않고, 자신의 바로 앞에 있던 나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저 정도라면 어떤가? 자네의 실력을 선보일 수 있겠나?”
황제의 말에 나는 살짝 몸을 기울여 서 있는 사내를 바라봤다.
그저 가만히 서 있는 지금도 느껴지는 사내의 기운.
만약 지금 중원에 나가도 한 성에서 손꼽힐만한 고수로 불릴 만한 사내였다.
하지만.
“글쎄요.”
스윽.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까지나 제 생각일 뿐입니다만.”
살짝 들어 올린 발을 그대로 내렸다.
거기에는 아무런 소리도, 충격도 없었다.
“살짝 부족하지 않나 싶군요.”
···쿵!
하지만 모구라는 사내에게는 아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치인 듯 뒤로 몇 장이나 날아가는 모구.
“!”
하지만 다시 몸을 일으킨 그는 너무나 멀쩡했다.
아무런 상처도, 고통의 기색도 보이지 않는 사내는 눈으로는 누가 자신을 날려 보냈는지 파악하면서도, 방금 날아간 자신의 몸은 괜찮은지 손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군림(君臨)조차 아닌 간단한 진각(震脚).
거기서 만들어진 충격만으로 사내를 날려 보낸 것이다.
절정의 경지에 이른 고수와 내게는 지금 그만한 차이가 존재했다.
“·········!”
“·········!”
이 연회장에서 그것을 알아챈 사람은 단 세 명.
나보다도 더 고절한 경지에 올라선 신승과 내 바로 앞에 있던 황제.
그리고 남만 제일의 고수라 불리는 카이탕 뿐이었다.
“크큭.”
황제는 나의 대답에 입가를 비틀더니.
“크하하하하하!!!”
지금껏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성량으로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웃음의 끝은.
“카이탕!”
“예, 폐하!”
“내가 손님에 대한 예가 부족했던 모양이다.”
바로 내가 원하던 대답이었다.
“네가 직접 나서 연회의 흥을 돋도록 해라.”
“···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