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만의 황제(3)
너무나 충격적인 말을 들으면 몸이 굳는다고 하던가.
지금 현옥의 상태가 딱 그 꼴이었다.
“화, 화화화화···.”
황제라 지칭한 그녀를 가리키는 손가락을 내릴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제대로 단어로 성립조차 되지 않는 말을 그저 끝없이 되새김질하는 현옥의 모습에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이 옌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앞으로 향했다.
“그간 격조하였습니다, 폐하. 건강하신 것 같아서 기쁘군요.”
“음, 아이 옌! 생각보다 빨리 왔군. 그래서, 이 세 사람이 그 손님인가?”
여전히 미소를 띤 얼굴로 아이 옌의 인사를 받는 황제.
앞에 나서 준 아이 옌 덕분에 정신을 되찾은 현옥은 굳은 몸이 풀리자마자 바로 우리 뒤쪽으로 뛰어왔다.
인간이 만든 천애의 절벽이 바로 뒤쪽에 있음에도 이렇게 달려오다니.
아무리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그라 해도 황제 앞에 뻗대고 있는 것보단 이쪽이 좀 더 안전하다 느낀 모양이다.
“···장난이 너무 지나치셨습니다.”
“으하하하! 미안, 미안. 오랜만에 자네랑···.”
황제의 시선이 아이 옌 뒤. 우리 세 사람에게로 향했다.
“···가운데 땅에서 온 사람이 있다는 말이 몸이 들썩여서 참지를 못하겠더라고.”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일 뿐. 우리의 면면을 확인한 그녀는 바로 다시 자신의 앞에 있는 아이 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그쪽의 상인은 현옥이라 하였던가?”
···?
그녀의 입에서 현옥의 이름이 올라오자, 거기서 느껴지는 강렬한 위화감.
아니, 왜 이렇게 그녀의 말투가 어색하게 들리지···?
그에 대한 대답은 바로 옆에서 튀어나왔다.
“···한어에 익숙한 분이로군.”
아! 그랬던 건가!
신승의 말에 그제야 나는 내가 조금 전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지금 그녀는 조금의 어색함도 느껴지지 않는 유창한 한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랜 기간 남만어를 쓰고 있던 나에게는 오히려 위화감을 느끼게 했고, 남만어를 쓰지 못해 우리끼리 한어로만 대화하던 신승만이 우리 중 유일하게 그 어색함을 느끼고 입을 연 것이다.
“우리의 땅에 가운데 땅의 손님들이 오셨다길래 한 번 익혀봤지. 어떤가. 자네들이 듣기엔?”
그녀가 황제라는 것만 몰랐다면 완벽한 한인이라 생각했을 유창한 한어에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놀라울 정도로···유창하시군요. 훌륭합니다.”
“하하하! 그거 다행이군. 어학 선생은 이미 훌륭한 수준이니 걱정하지 말라 했지만, 역시 현지인에게서 보증을 받고 싶었거든.”
내 대답에 기쁜 듯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저 말이 과연 사실일까?
우리가 여기에 온 건 겨우 두 달 남짓.
그동안 하나의 언어를 이토록 유창하게 익힌다는 게 정말로 가능한 일인가?
나야 한 달 만에 익히긴 했지만, 그건 한 점의 휴식 없이도 최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천마의 권능과 열두 시진 내내 내 옆에서 떠들 수 있는 화순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보통 사람은 일 년 이상 필요한 일을 한 달 만에 해냈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녀의 말은 둘 중 하나.
정말로 단 두 달 만에 한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천재거나, 아니면 그냥 거짓말을 하거나.
전자라면 차라리 낫다.
그녀가 천하에 다시 없을 천재라 하더라도, 우리에게 문제가 될 부분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만약 후자라면?
왜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을 국가의 언어를 익혔을까?
누군가 오리라고 생각했거나···아니면 본인이 가려고 했다는 소리겠지.
어느 쪽이건 지금 우리는 그녀가 가장 원하는 상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우리를 여기에 초대한 것이 누군가의 치료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황제의 속셈은 어느 쪽인가.
아이 옌과 대화를 나누며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뱉는 황제를 직시한다.
저 웃음의 이면에 있는 속셈을 꿰뚫어 볼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자, 그럼 슬슬 움직여 보지. 여기서 다리 아프게 서 있을 필요도 없지 않은가? 자, 자. 그쪽의 상인도 그렇게 뒤에만 숨어 있지 말고.”
아이 옌과의 이야기가 다 끝났는지, 황제는 우리 쪽을 향해 손짓했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한창 뒤에서 벌벌 떨고 있던 현옥은 앞으로 나오더니.
“죄송합니다!”
바로 고개를 박고 사죄했다.
“화, 황제 폐하인 줄 미처 모르고 크나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부, 부디 선처를···.”
“응? 실례···아아, 아까의 그것을 말하는 건가?”
마치 아까의 그 일은 잊고 있었다는 듯, 현옥의 말에 고민하던 황제는 이마를 찰싹 내려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그거라면 이미 옛날 옛적에 잊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애초에 내 그런 반응을 원하고 장난을 친 것도 있으니.”
호탕함은 겉모습뿐만이 아니라는 걸까.
명나라에서는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가문까지 멸문당할 수 있는 실례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남만의 황제는 현옥의 사과를 담담히 받아들였다.
“뭐, 선을 넘었다면 나도 어찌했을지 모르지만 말이야.”
한 마디를 덧붙이긴 했지만.
“선···이라면?”
“폐하께서 이런 장난을 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현옥의 물음에 답을 꺼낸 건 옆에 있던 아이 옌이었다.
“전에 이런 장난을 쳤을 때, 사내 하나가 격분해서 달려들었거든요. 그냥 달려들었다면 폐하도 그러려니 했지만 문제는···자신의 하의를 벗고 달려들었던 겁니다.”
하의라니, 설마···?
아이 옌의 말에 정말인가 싶어 황제를 바라보자, 그녀는 여전히 호탕함이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대단한 일은 아니다. 종족 번식 본능이란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죽음 직전에 이르면 어떻게든 새끼를 남기고 싶은 건 전 생물 공통 아니겠나? 거기에다가.”
황제는 자신의 몸을 강조하듯, 앞으로 몸을 내밀며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좀 매력적인가? 그놈이 달려드는 것도 당연하지. 뭐, 하의를 벗고 달려드는 건 나도 예상외였지만.”
“그럼 그 남자는?”
설마 저것까지 용서해 줬나? 아니, 그래도 설마···.
“다시는 남자 구실을 못 하게 만들었다···이 정도만 말해도 알겠지?”
···아, 예.
이 사람···생각보다 더 무서운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
그렇게 우리는 황제가 직접 안내해서 황궁으로 간다는, 명나라에서는 감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참형에 처할 만한 괴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여기 식당의 밥이 꽤 괜찮아. 나중에 때가 되면 한 번 와서 함께 먹도록 하지.”
“아, 음, 네.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뒤엔 여기서 한잔하면 좋지. 우리의 땅에서 제일 독한 독주를 만들 줄 아는 가게거든. 술은 좀 하나?”
“저, 적당히는 먹습니다. 적당히는. 하하하···.”
현옥은 무엇이 그리도 그녀의 마음에 들었는지는 몰라도, 황제의 명령으로 바로 옆에 서서 길거리 안내를 받고 있었다.
꽤나 소시민적인 황제의 설명을 뒤로 한 채, 주변의 거리를 관찰하는 것에 집중했다.
역시 수도는 수도라는 건가.
검은 멍울이 있는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정도면 다른 도시에 비하면 천지 차이.
독에 찌들었다는 말이 어울리는 다른 도시들과 달리 수도에는 독이 널리 퍼진 것 같진 않았다.
당장 호흡 중에도 크게 갑갑하지 않은 거로도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맛보는 맑은 공기에도 내 표정은 좋아지지 않았다.
황제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하고, 수도에서도 누군가 심각한 중독 상태에 빠진 것 같진 않다.
사실상 우리의 유일한 존재 이유라 할 수 있는 치료조차 불필요한 그녀.
그렇다면 대체 왜 그녀는 우리를 부르고, 거기에 한어까지 익힌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나오기 전까지는 도저히 웃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황제 폐하께서 돌아오셨다!”
“모두 문을 열어라!”
저 앞에서부터 들려오는 우렁찬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앞으로 향했다.
북해의 그것만큼 크지는 않지만, 화려한 만큼은 위에 두어야 할 것만 같은 아름다운 성이 거기에 있었다.
이미 우리가 채 가까워지기 한참 전부터 목소리를 높이는 문지기.
목소리에 담긴 내공의 수위는 일류. 아니, 절정인가?
절정의 고수를 문지기로 두다니.
남만 특유의 문화인가, 아니면 우리를 압도하려는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남만의 고수가 그토록 많다는 증거일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압박감을 느끼며 거대한 성. 황궁의 안으로 진입했다.
“황제 폐하와 아이 옌 시장님을 향하여 경례!”
“충!”
거대한 성안에는 우리가 앞으로 걸어갈 길을 제외한 곳은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수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그들 모두 최소 이류의 경지에 오른 고수들.
북해 빙궁처럼 이곳에 있는 자들은 일정 이상의 무공을 지녀야 생활할 수 있는 건가?
하긴···높은 지리적 위치도 위치지만, 이만한 더위를 버티고 움직이려면 어느 정도 무공은 필요하겠지.
“어서 오십시오, 아이 옌 아가씨.”
좌우에 서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며 길을 가던 그때, 갑자기 길 위에 나타난 한 명의 사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덮은 검은 천으로 자신의 온 전신을 꽁꽁 감싼 그 자는,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사내라는 걸 알아차리지도 못할 정도였다.
“못 보는 사이에 더욱 아름다워지셨군요.”
“고마워요, 카이탕.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폐하의 은혜 덕분에 편안히 지내고 있습니다.”
아이 옌은 그 흑의의 사내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인 듯, 반가운 기색으로 그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힐끔.
그러는 와중에도 우리를 향한 경계를 놓지 않던 카이탕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저분들은···.”
“아, 폐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나요? 가운데 땅에서 넘어온 손님이십니다. 저분은 불가의 큰 어르신인 신승이시고, 저분은 검은 분노를 치료할 수 있는 분이지요.”
“아···최근 남만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분이 바로 저분이군요.”
자신의 몸을 감싼 기다란 검은 천이 아슬아슬하게 땅에 끌리지 않은 채로 내게 다가온 사내는 아주 살짝 고개를 숙인 채 목례를 취하며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반갑습니다, 손님. 카이탕이라고 합니다. 황제의 오른팔이라는 과분한 직책을 맡고 있지요.”
“그렇군요, 반갑습니다. 카이탕.”
고수다.
그것도 내가 남만에 와서 처음으로 만난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고수.
열기공을 익힌 것일까. 몸 주변에서 끓어오르듯 피어오르는 열기는 마치 태양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뜨거웠다.
하지만 그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쪽이 더욱 눈에 띈다고 해야겠지.
···입으로는 반가운 기색을 어떻게든 꾸며내고 있었지만, 눈은 숨길 수 없었다.
전신을 검은 천으로 감싸고 있는 그에게서 유일하게 나와 있는 두 눈에는 마치 일생의 숙적을 바라보는 듯한 거대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분명 처음 보는 사이일 텐데도 이만한 살기라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외부인에 대한 배타성으로 인한 분노라 치부하기엔 내 옆에 있는 신승은 물론, 가장 경계해야 할 황제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현옥에게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다.
오직 나만을 향한 분노.
그 목적도, 이유도 알 수 없는 분노가 더없이 찝찝하긴 했지만···.
“손님이 왔으니 축제를 벌여야지. 카이탕!”
“예! 폐하!”
“제 일 번 연회실에 연회를 준비하게. 손님이 경악할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답게. 알겠나?”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미 황제의 명을 받들고 떠나가는 그에게 뭔가를 물어보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적을 가진 아이 옌과 알 수 없는 이유로 한어를 익힌 황제. 그리고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분노를 내게 뿜어내는 카이탕.
마치 공주와 북해로 향했던 때가 생각나는 지금의 상황에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차라리 북해 때가 낫지.
그때는 당사자가 아니라 외인.
어디까지나 공주의 일을 도와주는 조력자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두 달간 남만의 말을 조금 익히긴 했지만 거의 까막눈이나 다를 바 없는 신승과 천기를 바로 잡는 일에는 거의 힘을 쓸 수 없는 현옥.
사실상 내가 모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차라리.
나는 북해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여기에도 하얀별 같은 전설이 있어서 내가 그 하얀별이 될 수 있다면 편할 텐데.
절대 가능할 리 없는 희망을 품으며, 나는 여전히 웃으며 떠들고 있는 황제의 뒤를 따라 황궁 안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