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만의 황제(2)
황제를 만나러 가기 위한 여정은 예상보다도 더 순탄했다.
도시 내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마차와 명마. 그리고 실력 좋은 마부까지.
아이 옌의 권력으로 도시 내에서 구할 수 없는 건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대단한 건 아이 옌의 존재 그 자체였다.
어떤 삼엄한 경비로 둘러싸인 도시라도, 그녀의 깃발만 올리면 검사도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도시의 주인이란 명나라로 치면 성주와 같은 직위.
그녀가 원한다면 남만 내에서 가지 못할 곳은 없었다.
“저희가 아무런 인맥도 없이 저곳을 통과하려 했다면 뇌물 한두 푼으로는 어림도 없었을 겁니다.”
현옥의 농담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남만의 도시는 어마어마하게 배타적이었다.
만약 우리끼리만 남만을 가로질러 수도로 가려 했으면···.
···무공을 전혀 못 쓰는 현옥을 업고 다니면서 성벽이나 넘어 다녔겠지.
어우, 상상하니 괜히 소름 끼친다.
그런 점에서 아이 옌과 연을 맺은 건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다만···.
맞은 편에 앉아있는 아이 옌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의 목적은 대체 뭘까.
처음 성에 들어올 때만 해도 그녀의 목적을 금방 파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외부에서 온 강력한 고수라고 하지만, 도시의 주인이나 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이 없을까?
만약 정말로 우리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성에 도착한 직후 부탁을 꺼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성에 묶은 지 한 달이 지나고, 지금 이렇게 수도로 여행을 떠나는 와중에도 그녀는 우리 일행을 부른 정확한 이유를 말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중독된 사람들을 치료하는 건 꾸준히 하고 있었지만···만약 그것만 바랬다면 그저 민가를 돌아다니며 치료에만 전념하라 할 터.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반대로 중독자들보다 내 상황이나 상태를 우선시했다.
내가 조금 더 치료할 수 있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돌려보내거나, 휴식 시간도 철저히 보장해줬다.
심지어 여행하는 동안에는 상대 쪽 도시의 주인이 누군가의 치료를 간곡히 부탁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절하기까지.
남들의 시선 같은 건 신경 쓸 필요 없는 귀족이라 하지만, 오히려 그러므로 같은 귀족의 평판이나 인맥은 중요할 터인데.
그런 걸 포기하면서 우리의 편의를 먼저 생각하다니.
···젠장.
이거 완전···.
[자야가 생각나서?]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던 그녀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화순.
···그래, 그녀도 그랬지.
자야 또한 주변의 시선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멸망한 부족의 마지막 생존자이기에 권력과는 멀다는 사람들의 시선과 그녀의 어머니를 제물로 북해의 평화를 얻었다는 빙궁주의 죄악감.
이 두 가지를 철저히 이용한 그녀는 두 국가를 영원한 전쟁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을 계획을 짜냈다.
만약 내가 천마의 권능으로 빙정의 힘을 얻지 못했다면, 정말로 성공했을지도 모르는 계획을.
···아냐, 아무리 그래도 자야 만큼 미친···아니, 정신 나간 사람일까.
그런 인간이 세상에 둘 이상 있었으면 이미 이번 세상은 망한 거야.
되든 안 되든 그냥 다시 회귀하는 게 낫지.
[뭐···네가 그렇게 생각하면 상관없지만. 하지만 조심하라고.]
내가 자야와 아이 옌의 관계성을 부정하자 바로 재미없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민 화순이 마지막으로 씩 웃었다.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녀도 충분히 미친 사람일 순 있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화순은 마차의 천장 위로 올라갔다. 갑갑한 마차 내부에 있을 바엔 천장에서 주변 광경이나 보겠다는 속셈이었다.
···젠장.
오늘만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욕지기를 내뱉으며 나는 마차 안의 동행인을 바라봤다.
“···? 무슨 문제 있나요?”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향해 묻는 아이 옌에게 바로 고개를 젓는다.
“이제 수도까지 얼마나 남았을까···이런 걸 생각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아,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곧···.”
달칵.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차 안에 달린 자그마한 창이 열렸다.
그곳으로 얼굴을 내민 마부가 마치 통보하듯 우리에게 말했다.
“곧 수도에 당도합니다. 슬슬 나갈 채비를 해주십시오.”
무뚝뚝하게 말을 꺼낸 마부는 할 말만 하고 바로 다시 문을 닫았다.
“···무뚝뚝하지만 실력은 좋다더니, 정말 말 그대로군요.”
“하하···.”
내 말에 대답 대신 어색한 웃음만 흘리는 아이 옌.
성격은 그리 좋지 않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지금까지의 여정 동안 달리는 마차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방 안의 내 침상 위에 있는 것처럼 편안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덕분에 수도에 당도했다는 건 알아냈군요.”
“네, 그러게요. ···여정은 어떠셨습니까?”
아이 옌의 정중한 질문에 나는 다시 끔 자야의 얼굴을 떠올렸다···가 바로 지우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할 나위 없이 좋았습니다. 덕분에 전혀 힘들이지 않고 편안히 여기까지 왔습니다.”
“후후후,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폐하의 손님을 모실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여정이 시작된 이후로 그녀는 우리를 황제의 손님으로 취급하며 공손히 모셨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녀의 대우를 참으로···피곤하게 여겼다.
아니, 도시에 있을 때도 성자라면서 대우해줬는데, 이제는 황제의 손님이라니.
몇 번이고 그러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지만, 성자 때와는 달리 이번 부탁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진지한 얼굴로 나를 설득할 정도였다.
“폐하의 수족이 어찌 폐하의 손님에게 실례를 범하겠나이까. 자신의 손으로 귀한 손님을 받들어 모시는 건 당연한 일이니, 부디 유 대인도 이런 대우를 편안히 받아주십시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어떻게 ‘난 싫은데? 그냥 평범하게 대하지?’라고 뻔뻔하게 나설 수 있겠는가.
결국 이번 여정 동안에는 마치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듯, 그녀의 극진한 대우를 모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제는 그런 귀찮은 대우도 이제는 끝.
곧 황제를 만나게 되면 모든 것이 끝나리라.
그렇게 나는 두 가지 전혀 다른 의미로 도착을 기대하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
“허어···.”
“흐응···.”
“와···.”
황궁으로 향하는 길.
어쩌면 한인 최초로 남만의 황궁으로 초대받은 영광을 누리게 된 우리는 그 길을 보고 각양각색의 감탄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황궁 그 자체가 아니라, ‘황궁으로 향하는 길’을 보고 놀랐다는 말이다.
“이건 대체···뭡니까?”
목이 아플 정도로 위를 올려보던 나는 옆에서 그런 우리를 보며 미소를 짓는 아이 옌을 향해 물었다.
이미 몇 번이나 와봤기 때문일까. 이 경악스러운 광경 속에서도 놀라기는커녕 놀라는 우리를 관람하고 있던 아이 옌은 내 질문에 황궁으로 향하는 길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폐하의 가문이 남만을 통일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지요.”
통일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라···하긴.
이런 곳을 침범할 미친놈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아니다. 있긴 하겠네.
···이런 걸 만들려고 한 미친놈이 말이야.
남만에서 가장 크고 높은 산 정상에 궁을 지은 뒤, 주변의 모든 땅을 깎아내다니.
중원으로 치면 태산 위에 궁을 짓고 그 주변 땅을 모두 평평하게 만든 것과 다를바 없지 않은가.
그것은 마치 지상 위에 만들어진 섬. 치솟아 오른 천애(天涯)의 절벽 앞에서 우리는 그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천하를 위시한다는 절대 고수라면 이런 광경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아니···아니다.
이건 한 사람만의 힘으로는 절대 만들 수 없다.
수천, 수만, 어쩌면 수십만.
그만한 수가 모여 그 숫자와 똑같은 시간이 흘러야만 가능할 위업의 앞에서 우리는 한낱 한 명의 인간으로서 그 기적을 식견했다.
“자,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구경이 끝난 후.
아이 옌은 황궁으로 올라가기 위해 입구로 우리를 이끌었다.
계단을 통해 걸어 올라갈 것이라는 당초의 예상과 달리, 그녀가 우리를 이끈 곳에는 전혀 의외의 것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기다란 줄에 묶인 커다란 나무 상자.
그 줄의 끝이 황궁 근처에 연결된 걸 본 현옥이 창백한 얼굴로 아이 옌을 향해 물었다.
“설마···이걸 타고 올라가는 겁니까?”
“네. 보통은 계단을 타고 올라가지만, 귀한 손님이나 높은 직위에 있는 자들은 특별히 이것을 타는 걸 허락받지요.”
“그, 그렇군요. 그렇다는 말이지요···.”
아이 옌의 설명에도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나무 상자와 거기에 연결된 동아줄을 바라보는 현옥.
“···아! 그래도 이번 초대는 유 대인과 신승 어르신만 받은 거지요? 그렇다면 저는···.”
“아뇨, 폐하께서는 현 공자에게도 무척 많은 관심을 기울이셨습니다. 선친께서 중원과 남만을 오가며 상행을 하셨다는 말에 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시다고 하셨거든요.”
“저, 정말입니까?! 그런 귀한···기회가······.”
황제의 관심이라는, 상인에게 있어서 더할 나위 없는 기회에 반색하다가도 이걸 타고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에 바로 얼굴이 창백해진다.
최후의 희망조차 꺾여버린 그의 얼굴은 진흙과도 다를 바가 없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현 공자.”
“유, 유 대인···.”
“줄이 끊어져도 현 공자만큼은 어떻게든 지켜드릴 테니까요.”
“···줄이 안 끊어지도록 하는 건 안됩니까?”
내가 온갖 건 다 할 줄 알아도 줄 만드는 건 몰라서. 미안해요.
결국 시간을 끌어봐야 공포심만 커질 뿐이라는 걸 안 걸까.
마치 사형장으로 걸어들어가는 사형수처럼 현옥은 나무 상자 안에 몸을 실었다.
쿵, 쿠쿵, 쿠쿠쿵!
나무 상자가 끌려 올라가는 소리···라기보다는 부서지는 소리에 좀 더 가까운 소리와 함께 우리가 올라탄 나무 상자가 조금씩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허허, 이거 참. 내 평생 소림에 살면서 숭상의 전경이 어디보다 못하다 생각해 본 적은 없건만, 이건 그 궤가 다르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도 이런 광경을 본 건 처음입니다.”
어차피 줄이 끊어져도 살 자신이 있는 나와 신승은 허허 웃으며 전경을 구경하고 있었고.
“저쪽은 우리가 지나온 도시고, 저기는 남만에서 제일 넓은 호수에요. 저녁에 올라오면 석양이 지는 것도 볼 수 있는데, 그때는 정말 말도 못할 정도로 아름답죠.”
이미 여러 번 황궁을 오가며 타봤을 아이 옌은 우리에게 어떤 곳이 더 예쁜지 설명을 해주고 있었으며.
“힉, 힉, 힉!”
···현옥은 나무 상자 한구석에서 고개를 푹 박은 채 기괴한 음색만 내고 있었다.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종종 있다던데, 혹시 현옥이 그런 분류의 사람인 건가?
하지만 그가 무서워하든, 우리가 재밌어하든 상관없이 나무 상자는 점점 황실에 가까워졌다.
쿵!
우리를 태우고 있던 나무 상자가 도착지에 다다르자, 가장 먼저 상자에서 벗어난 건 역시나 현옥이었다.
“으아! 살았다! 살았다고! 아, 대지야! 네가 너무나 그리웠다!”
쪽, 쪽, 쪽.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과한 것 같은데.
땅에 발을 대자마자 바로 얼굴을 땅에 문대며 입을 맞추는 광경은 참으로···참으로······.
아니,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하냐.
“으하하하하!!!”
내가 현옥의 그 자태를 뭐라 표현해야 할지 심히 고민하던 찰나, 갑자기 앞에서 들리는 호탕한 웃음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참으로 재밌는 인간이로구나! 내 이리 오는 사람을 여럿 보았으나, 너 같은 반응을 보이는 이는 처음이다!”
거기에는 한 명의 여인이 현옥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육 척(尺; 일 척은 약 30cm)에 가까운 큰 키에 건강한 갈색 피부. 그리고 태양처럼 붉은 적색의 머리칼을 허리까지 길게 기른 미인.
“다, 당신은 누구길래 사람을 보고 비웃으시오!”
“응?”
그녀의 웃음에 울컥한 현옥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그녀를 향해 삿대질했다.
웃음이 사라진 여인의 눈매는 마치 날카롭게 갈린 칼처럼 뾰족했다.
예상보다 사나운 그녀의 얼굴에 움찔, 떨며 뒤로 물러난 현옥과 달리, 여인은 오히려 재밌다는 듯 웃음을 더욱 짙게 만들며 입을 열었다.
“흠, 내가 누구라. 글쎄. 이름을 말해주기에는 너무 길어서 귀찮고, 직책을 말해주기에는 나도 다 못 외운 것이 있어서 헷갈리고···아, 그래.”
씨익.
다시 웃음을 짓는 그녀.
하지만 그 웃음은 눈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입가만을 비틀고 있었다.
마치 사냥감을 노려보는 맹수처럼 우리 셋을 훑어본 그녀의 입이 열리더니.
“황제···라 하면 알아듣겠더냐?”
···전혀 예상치 못한 대형 폭탄을 떨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