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만의 황제(1)
아이 옌의 성에 체류한 지도 어언 한 달이 흘렀다.
그동안 우리 일행은 남만에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을 진행했다.
우리 중 가장 발에 땀 나도록 뛰어다닌 사람은 역시 현옥이었다.
내가 이번에 착수금으로 내준 금자로 상단을 창단하기로 마음먹은 현옥은 중원에서 팔릴만한 남만 물건들을 탐색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 노력이 보답을 받았는지, 그는 한 달 사이에 현지 상인들과 그럭저럭 괜찮은 관계를 맺는 데 성공했다.
인연을 맺었다 해서 당장 큰 이익이 만들어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상인에게 인맥이란 중요한 법.
지금 만들어낸 인연은 분명 나중에 요긴하게 쓰일 일이 있을 것이다.
열심히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현옥과는 반대로, 신승은 자신의 방을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애초에 말도 안 통하는 땅 위에서 어딜 원하는 대로 돌아다닐 수 있겠냐마는, 신승은 다른 이들이 보면 면벽 수행을 하는 게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로 방에만 있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나는···.
“성자시여. 이제 슬슬 시작하실 시간입니다.”
“그래, 지금 바로 출발하지.”
나를 데리러 온 시종에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딸랑딸랑.
···젠장, 또 소리 나네.
옷에 자그마한 종이나 금으로 만든 고리. 그 외에 금속이나 보석으로 만든 온갖 장식이 붙어 있는 남만 전통 복장은 내가 움직일 때마다 ‘이 인간 지금 움직여요!’라고 알려주기라도 하듯 온갖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옷보다는 악기라고 말하는 게 덜 어색할 옷을 입고 다니는 게 편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있나.
“오늘따라 더 훤칠하시군요. 역시 옷이 잘 어울리십니다.”
“그런가? 고맙네.”
···이 사람들의 마음에 들려면 이런 옷이 아니라 진짜 북을 건네줘도 입고 다녀야지 뭐.
내 옷을 바라보며 거짓 한 점 없이 칭찬의 말을 꺼내는 시종에게 미소를 보이며 천천히 그의 뒤를 따랐다.
“안녕하십니까, 성자님.”
“성자님, 좋은 아침입니다.”
널따란 성의 복도를 지나가는 와중 다른 시종과 마주칠 때마다 그들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것도 이제는 꽤 익숙해졌다.
“오오오! 성자시여!”
아, 저건 안 익숙해졌는데.
나와 마주치자마자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비비는 사내의 모습에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앞에 멈춰 섰다.
“자네는 누군가?”
“위대한 성자님 덕분에 새로운 삶을 얻을 수 있었던 미천한 존재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여주기 위해 대 우림 너머에서 오신 성자시여! 부디 저의 공물을 받아주시옵소서!”
그렇게 말하며 들어 올린 손 위에는···나무 꼬치로 꿰인 도마뱀 두 마리가 덩그러니 올라와 있었다.
···그것도 배 부분이 보라색인 도마뱀 말이다.
딱 봐도 독 있는 거잖아 이 자식아···.
“고, 고맙게 받겠네.”
“아! 감사합니다, 성자시여!”
내가 받아주겠다고 말하자마자 고개를 들어 올리는 시종.
말끔한 얼굴을 한 사내는 환희로 가득 찬 표정으로 몇 번이고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더니 잠시 뒤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알아서 처리해주게.”
“네, 알겠습니다.”
이제는 익숙한 듯 옆에 있던 시종은 내가 건넨 독도마뱀 구이를 받아 자신이 들고 있던 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었다.
···갑자기 왜 남만 사람들이 나를 성자라고 부르냐고?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처음에는 손님이라는 이유로 성에 들어왔지만, 성안에서 치료를 시작할 때부터 귀인(貴人)이라 불리더니, 조금 더 지나자 은인(恩人)으로. 그리고 종래에는 성자라고 불리게 되었다.
나는 그런 게 아니라고 몇 번이고 말했지만, 시종은 물론이거니와 그런 사람들을 관리해야 할 귀족들은 물론 시장인 아이 옌까지 그렇게 부르니 더는 말릴 수도 없었다.
아이 옌은 부를 때마다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걸 봐선 그냥 장난으로 그리 부르는 것 같지만 말이다.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은 그저 감사에 대한 의미나, 혹은 시장이 직접 초대한 손님이라는 것에 대한 의미였지만, 종종 이렇게 선을 넘는 인간도 나왔다.
무슨 나를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이나 천인으로 생각하면서 공물을 바치는 사람들 말이다.
특히 저번의 미아처럼 검은 분노에 빠진 상황에서 치료를 받은 사람들이 이렇게 나를 신봉하는 경우가 많았다.
[슬슬 너도 천마의 품격이 나오는 거 아니겠냐? 크하하하!]
처음 나를 신봉하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는 이렇게 껄껄 웃어 재끼던 화순도···.
[야···저건 좀 심한데? 고대 마교에서도 천마한테 저 정도로 하는 인간들은 없었는데···.]
···최근 들어서는 질린 표정으로 그런 광신도들을 바라보곤 했다.
“성자님. 다 왔습니다.”
생각도 한 적 없던 신도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앞서가던 시종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한창 생각에 빠진 사이 목적지에 당도한 것이다.
“그럼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그래, 고맙네.”
수고했다는 의미로 시종에게 손을 흔들어 준 뒤, 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내가 지금 입고 있는 화려한 옷과는 대비되는 말끔한 옷을 입고 있는 여인이 다리가 짧은 탁자 앞에 앉아 뭔가를 읽고 있었다.
마치 말총처럼 붉은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 뒤로 넘긴 그 여인은 옆으로 손을 뻗어 붓을 잡으려던 도중, 인기척에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봤다.
“아, 어서 오세요, 성자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시장님.”
이 성의 주인이자 도시의 주인인 아이 옌이었다.
“···성자로 부르시는 건 그만해주시면 안 됩니까?”
“후후, 죄송해요. 그렇게 부를 때마다 유 대인의 표정이 바뀌는 게 참 재밌어서···또 그렇게 불렀네요.”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화장기 없는 얼굴로 웃음을 짓는 그녀.
“다음부터는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말해도 또 까먹고···혹은 그냥 장난으로 또 부르겠지.
이 대화가 두 자릿수를 넘어간 시점부터 이미 그녀가 똑바로 불러주리라는 희망은 이미 접었다.
이제는 거의 인사말과 다름 없어진 대화를 나눈 후, 나는 그녀와 똑같은 앉은뱅이 탁자 앞에 털썩 앉았다.
“하실 이야기가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네, 이걸 한 번 보시지요.”
내가 말을 꺼내자마자 아이 옌은 기다렸다는 듯 탁자 위에 있던 종이 뭉치를 집어 바로 내게 건넸다.
주변의 다른 종이와 비교해봐도 질감부터가 달리 보이는 종이 뭉치에는 화려한 서체로 남만의 말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온갖 미사여구와 얼굴에 금 바르기. 이제는 익숙해진 남만 귀족 특유의 기다란 이름과 성씨. 그리고 쓸데없는 칭찬의 호수를 넘어 쓸만한 내용만 건져보면···.
“성자라 불리는 자와 함께 수도로 와서 황제를 맞이하라···군요.”
열 장가량의 종이를 겨우 이것 보내려고 쓰다니.
참으로 아까운 짓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다른 나라의 문화를, 그것도 귀족 바로 앞에서 까 내릴 정도로 독하진 못했다.
“그렇습니다.”
다행히 내 말투에서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던 것인지, 그녀는 내 말에 불쾌한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 대인의 명성이 이 도시를 넘어 제국의 중심에까지 닿았던 모양입니다. 어제 황제의 대리인께서 내려오셔서 제게 이 서찰을 넘겨주시더군요.”
“어제 시종들이 분주하다 했더니 그런 이유 때문이었군요.”
“네. 워낙 바쁜 탓에 금방 올라가시긴 했지만, 성안에 치료받은 사람들을 보고 감탄하는 기색이시더군요.”
하긴, 그럴 만도 하다.
검은 분노···그러니까 남만 전역에 퍼진 이 독의 해독제는 분명히 존재했다.
다만 남만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수에 비하면 턱없이 적을 뿐이지.
더군다나 만약 해독제를 한 번 섭취한다 해도 다른 독처럼 내성이 생기는 것도 아니라, 독을 지워내고 싶다면 꾸준히 해독제를 복용해야 했다.
무공을 익힌 사람이야 어느 정도 독의 침범을 막을 순 있었지만, 그만한 경지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그들이 만들 수 있는 해독제의 수보다도 더 적었다.
그런 이유로 남만에서 독에 자유로운 사람은 극소수뿐.
심지어 나라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수도의 백성들조차 해독제를 받지 못한 채 검은 멍울을 진 채 살아가야만 했다.
그런데 이 도시는 성 내의 사람은 물론, 거리의 사람들도 검은 멍울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많으니 놀랄 만도 했다.
“대리인께서 소문의 진상을 파악하고 가셨으니, 이제 황제 폐하께서도 소문이 사실이라는 걸 아시겠지요.”
“전서구를 보내도 될 일을 대리인을 직접 내려보내신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이겠지요.”
“네, 그렇겠지요. 그래서···.”
힐끔.
내가 건넨 서찰을 정리하고 있던 그녀가 눈을 치켜떴다.
“대인께서는···어찌하실 생각입니까?”
그녀의 질문에 나는 턱을 매만지며 고민에 빠진 모양새를 취했다.
어찌할까, 어찌할까.
최대한 대답에 시간을 끈다.
이미 어찌할지 답은 정했지만, 그것을 숨긴 채 입만 오물거렸다.
“·········.”
그녀의 눈에 가득했던 확신이 불안으로 치환되고, 곧 그 불안이 가득 차서 터진 그때.
“저···!”
“···알겠습니다.”
그녀가 말을 내뱉기 직전 나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만으로 온 이상 황제 폐하를 한 번 직접 뵙고 싶기도 했거니와.”
싱긋.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복잡하던 감정을 가라앉히고 있는 아이 옌을 향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제가 가지 않는다고 하면 아이 옌님이 황제 폐하에게 한 소리 들을 것같은 예감이 들어서 말입니다.”
“하···하하···대인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정말로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예감을 담아 식은땀을 흘리던 그녀는 내 말에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럼 그리 알고 답장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야기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서자, 문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내게 말을 걸었다.
“이야기는 다 끝나셨습니까?”
“음, 이제 돌아가지.”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방으로···.”
“아, 잠깐. 그 전에 어디 들러야 할 곳이 있네.”
“네? 아, 그럼 알겠습니다. 어디로 모실까요?”
“일행들의 숙소로 데려다주게.”
“알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성이 넓은 덕분에 우리는 한 사람당 개인실을 하나씩 배정받았다.
처음에는 셋 다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지만,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나는 점점 큰 방으로 자리를 옮겼고, 지금은 거의 성의 반대편 정도로 멀어졌다.
그래서 우리 모일 때 그나마 중간에 있는 신승의 방에 모였다.
이번에 시종이 나를 데려간 곳도 물론 신승의 방이었다.
“대기하고 있을까요?”
“아니, 여기서 일행과 함께 식사할 테니 먼저 가 있게.”
“알겠습니다. 그럼 방에서 대기하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복도 너머로 시종이 사라지는 걸 끝까지 지켜본 후에야 나는 신승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음, 자네 왔나.”
“오셨습니까, 유 대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방에는 신승은 물론, 현옥도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우연히 모였다? 아니, 이미 계획된 일이었다.
“원하던 소식은 들었나?”
가타부타 없이 날카로운 안광을 뿜으며 내게 묻는 신승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드디어 들었습니다.”
씨익.
이제는 숨길 필요조차 없는 승리의 미소를 나는 신승의 앞에서 당당히 지어 보였다.
“황제가 우리를 초대했습니다.”
“좋아.”
내 대답에 신승 역시 얼굴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우리 계획의 첫 발걸음을 뗄 수 있게 됐군.”
“네, 일부러 여기까지 와서 사람을 치료한 보람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이 옌의 초대를 받아들인 이유도 바로 이걸 노린 것이었다.
지금 우리 일행의 제일 목적은 천기를 뒤트는 존재. 혹은 사건의 파악.
그것을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역시 지금 남만 전역에서 일어나는 일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리고 당연히 남만에서 일어난 일을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이 땅의 주인.
황제밖에 없었다.
“현 공자도 고생하셨습니다. 덕분에 황제의 귀에 소문이 들어가는 것도 훨씬 빨랐습니다.”
“하하하! 아니요, 제가 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냥 상인으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그간 현옥이 열심히 밖을 돌아다니며 상인과 만난 것도 계획 중 하나였다.
타 도시로 넘어가는 상인들에게 나에 대한 소문을 최대한 과장해서 전해준다.
그러면 다른 도시로 넘어간 상인이 그 소문을 또 다른 상인에게 퍼트리고, 그 상인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이렇게 점점 나에 대한 소문이 전국에 퍼지도록 만들었다.
겨우 한 달 만에 남만의 제일 구석에서 수도까지 나에 대한 소문이 닿을 수 있었던 건 그의 공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자네는 지금 성자라 불린다고 하였던가?”
“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이 옌의 진짜 목적을 모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초대를 순순히 받아들인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제 자네의 명성도 낮지 않으니, 황제도 자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겠지.”
“네. 직접 초대한 일이니, 독대는 몰라도 이야기를 나눌 자리 정도는 있겠지요. 그럼 그때 묻는 겁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
“이 독의 근원이 무엇이냐고 말이죠.”
남만 전역에 널리 퍼진 정체불명의 독.
우리는 그 독의 정체를 그토록 찾고 있던 천기의 뒤틀림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천기의 뒤틀림은 남만의 수도 쪽에 있네. 아마 그 근처에 독의 근원이 있겠지.”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꺼내는 신승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곳에 가면 이 천기의 뒤틀림을 고칠 방법도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는 모르지만, 나는 이미 그의 미래를 알고 있었다.
그는 남만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지금 남만에서 그를 죽일 수 있을 만한 건 딱 하나.
천기의 뒤틀림이자 독의 근원. 오직 그것뿐이었다.
지금 그가 한 말대로라면 지금 우리가 찾아갈 곳에 그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과연 이것을 말하더라도 그의 결심은 바뀌지 않을 것인가.
“음? 왜 그러는가?”
“···아뇨, 아닙니다.”
그를 바라보는 게 너무 길었던 탓일까.
나를 미묘한 눈으로 바라보는 신승에게서 억지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두 분 다 수도로 떠날 채비를 해주십시오. 곧 아이 옌님에게서 이야기가 나올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말게. 난 어차피 빈손이니까. 불가의 제자로서 무소유를 추구해야 하지 않겠나.”
계획이 잘 진행된다는 소식에 마음이 좀 풀렸는지 껄껄 웃으며 농을 던지는 신승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뒤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잔으로 손을 뻗었다.
남만에 온 지 한달.
드디어 황제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