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권능으로 무림최강-72화 (72/185)

남만 입성(3)

“치료라니···당신들이 그녀를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이오?”

구획장은 믿기 힘들다는 눈치로 나와 그녀의 옆에서 맥을 짚고 있는 신승을 번갈아 바라봤다.

“정확히 말하자면 할 수 있는지 없는지 한 번 살펴보겠다는 말입니다. 다른 질병이라면 모르지만, 독이 쌓여서 병이 된 것이라면 저희가 치료할 수도 있으니까요.”

“설마···그런 것이···가능할 리가···.”

“당신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어차피 지금 그녀를 데리고 가면 태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요. 그렇다면 차라리 저희에게 한 번 맡겨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만약의 이야기라는 것도 있는 법이니까요.”

“·········.”

내 설득에 구획장은 미묘한 얼굴로 내 안색을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잠시일 뿐. 곧 깊은 한숨을 내쉰 그는 크게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경지에 오른 술사들은 여러 신통방통한 능력이 있다 하셨으니···한 번 믿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허락 반, 포기 반 섞인 처연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구획장.

나는 그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잘 생각했습니다. 저희도 최대한 그녀가 원래대로 되돌아오도록 힘써보겠습니다.”

그로서는 우리의 치료라는 건 어디까지나 우물에 빠져 죽기 직전의 다 썩어빠진 동아줄과 다를 바 없다.

어차피 죽기 직전의 상황이니, 믿음직스럽지는 않지만 한번 맡겨 보자는 심산일 것이다.

진정한 구획장은 나와 함께 문에서 멀어져 침대에 누워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눈을 감은 채 그녀의 맥을 잡고 있던 신승은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자 눈을 뜨고 나를 바라봤다.

“그의 설득은 끝났나?”

남만의 말을 알지 못했던 신승은 우리의 대화가 어떻게 끝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는 신승에게 긍정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인 후 그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의 용태는 어떻습니까?”

“별로 좋진 않아.”

신승은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내게 대답했다.

혹시나 그의 말투나 표정을 보고 구획장이 근심을 할까 걱정되어 그러는 듯했다.

“중요 혈도 대부분이 독에 잠식되어있는 데다가, 이 독이 또 어마어마하게 질기네. 내공으로 조금 끌어들여 보려 했는데 쉽게 움직이질 않아.”

“그렇다면···치료는 무립니까?”

“아니···가능하긴 하겠지만, 시간이 터무니없이 오래 걸릴걸세. 내공의 소비도 어마어마할 거고.”

“그 정도입니까?”

무림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내공의 보유자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웬만한 무인은 감히 건드릴 수도 없을 정도다.

어떤 해독제도 통하지 않고, 어떤 치료법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괜한 말이 아니었다.

“···혹시 이것이 그 천기의 뒤틀림 때문일까요?”

“글쎄···정확한 사정을 파악한 건 아니라 확답할 수 없지만 만약 그의 말대로 이것이 남만 전역에 퍼진 거라면···.”

그 순간 나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인간의 손으로 막을 수 없는 재앙이 벌어지고 있다는 건 분명하네.”

입에서 나오는 말에 비해 그의 표정은 부처상처럼 담담하기 그지없었지만, 나와 마주친 눈만은 달랐다.

본디 얼굴에 표현해야 할 감정의 변화를 눈에 모조리 몰아넣은 듯, 무수히 많은 변화를 보이는 두 눈.

십수 가지의 감정이 섞인 그 눈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바로 결의였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일을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굳은 결심이 거기에 서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그가 말했지.

어쩌면 이번 일에는 자신의 목숨까지 걸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이미 결말을 알고 있던 나는 그의 말에 어떠한 대답도 꺼내지 못했지만, 지금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이번 일을 받아들이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이번 일에 목숨을 걸고 있었다.

그녀의 맥을 잡고 한참 동안 독을 몰아내던 신승이 긴 날숨을 내뱉었다.

“이 정도로 질기다니···거의 전설 속의 구음절맥과도 비견될 만한 하구먼.”

응? 뭐라고?

반짝이는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훔치며 탄식하는 신승.

그런 그의 입에서 나온, 어떠한 사건 때문에 친숙하기 그지없는 단어에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절맥증 말입니까?”

“그래. 물론 나도 절맥증에 걸린 사람의 몸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장경각에서 그에 관련된 서적을 읽어본 적은 있네. 그녀의 증상이 딱 거기서 묘사된 것과 닮았구먼.”

절맥증? 절맥증과 닮았다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다를 것도 없는데?

본디 절맥증이란 혈도 중 몇 개가 너무 강한 기운에 막혀 몸 안에 탁기가 쌓이는 질병이다.

그럼 검은 분노는?

꾸준히 혈도에 쌓인 독이 결국에는 백회혈까지 올라 뇌에까지 이르게 됨으로써 사람을 미치도록 만드는 질병이다.

결국 탁기냐 독기냐 이 차이일 뿐. 몸에 본디 쌓여선 안 될 것이 쌓여 죽음에 이르른다는 건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혹시···?

“···제가 한 번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자네가?”

내 제안에 신승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추이를 지켜보던 구획장의 얼굴에 긴장이 흘렀다. 지금껏 언성 하나 높이지 않던 신승이 내 말에 큰 표정의 변화를 보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안절부절못하는 구획장에게 진정하라는 손짓을 취한 뒤, 다시 신승에게 말했다.

“네. 어르신 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어느 정도 맥을 볼 줄 압니다.”

“흐음···알겠네. 자네도 한 번 살펴보게나.”

신승이 그녀의 맥을 놓고 옆으로 비켜서자, 나는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아 맥을 잡고 살펴보기 시작했다.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방도는 다 써놨네. 지금 상태에서 호전은 되지 않지만, 최소한 여기서 더 안 좋아지진 않을 거야.”

신승의 말대로 지금 그녀의 상태는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나쁘진 않았다.

조금 전까지 혈도 내부에서 날뛰며 백회혈까지 치고 올라갔을 독기가 많이 안정된 상태였다.

만약 이 상태에서 내가 점혈을 풀어 그녀를 깨운다 해도, 조금 전처럼 검은 분노에 빠져 미쳐 날뛰진 않겠지.

하지만 딱 거기까지뿐이다.

많이 진정됐다곤 하지만, 그녀의 몸 안에 남은 독기는 여전히 많았다.

도화선을 조금 더 길게 늘여놓긴 했지만, 여전히 언제든 폭발할 여지는 남겨져 있다는 소리.

지금 이 몸을 낫게 하기 위해선 그 도약선. 즉 몸 안에 남아있는 독기를 모두 없애야만 했다.

[확실히 절맥증이랑 비슷하네.]

내가 그녀의 맥을 타고 보낸 내공 덕분에 그녀의 내부를 관조할 수 있게 된 화순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성질은 훨씬 더러워. 절맥증은 뚫린 혈도를 다시 막으려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 이 독기는···.

스멀스멀 맥을 통해 나에게로 넘어오려는 독기를 내공으로 태우며 화순의 말에 대답했다.

···스스로 움직여서 나까지 잠식하려고 해. 탐스러운 먹이를 본 굶주린 쥐새끼와 다를 바 없어.

[치료 방법은?]

성하 공주 때와 비슷한 방법을 사용하면 가능할 것 같긴 하지만···.

화순의 질문에 나는 확답을 내릴 수 없었다.

내가 그때 사용한 치료법은 간단하다. 압도적인 힘으로 혈도를 모두 뚫어버린다는 무식한···아니, 간단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건 공주였기를 통한 방법이었다.

그때는 혈도의 안전에 대해선 크게 신경 쓸 필요 없었다.

본디 탁기로 쇠약해져 있어야 했을 혈도는 황실에서 들입다 먹여놓은 약재 덕분에 웬만한 무인에도 비견될 만큼 튼튼한 혈도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나도 그녀의 혈도 안에 초소형 와류를 일으킨다는 무식한···아, 젠장. 이건 변명을 못 하겠네.

그래, 진짜 더럽게 무식한 방법까지 써서 치료할 수 있었던 거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혈도는?

그런 약재를 먹을 수 있을 리 없었던 그녀의 혈도는 이십 년에 걸친 독기 때문에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상태다.

만약 여기서 와류를 일으켰다간?

그녀는 인세에 다시 없을 고통을 느끼며 죽어가겠지.

아니, 와류는커녕 조금만 강한 기운을 밀어 넣어도 혈도에 치료할 수 없는 깊은 상처가 새겨질 판이다.

괜히 역근세수경이라는 절세의 신공까지 익힌 신승이 이 정도밖에 못 한 게 아니란 소리다.

지금 내가 할 수 있을 만한 일은···잠깐.

···야, 화순.

[응? 왜?]

그녀의 혈도를 관조하고 있던 화순이 내 부름에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

구음절맥의 치료 방법. 다시 한번 말해줘.

[뭐? 너도 이미 한 번 해봤잖아. 그건 왜?]

그때 그 되지도 않는 방식 말고. 정식 치료 방법 말이야. 그걸 좀 다시 알려달라고.

[어차피 그 방법 알려줘 봐야 쓰지도 못할 텐데? 그 방법은 빙정이 있어야···아니, 잠깐. 설마?]

그래, 그 설마다.

인상을 쓰며 이유를 묻던 화순의 눈이 커진 바로 그 순간, 나는 그녀의 혈도로 내공을 불어넣었다.

조금 전 관조하기 위해 보냈던 내공과는 그 성질부터가 전혀 다른 내공.

내 단전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빙정의 기운을 그녀의 혈도에 보낸 것이다.

그러자 그녀의 혈도는 물론, 혈도에 기생하듯 붙어있던 독들도 함께 얼어붙었다.

본디 빙공을 억지로 불어 넣으면 혈도가 크게 손상되겠지만, 지금 내 단전에 있는 빙정의 기운은 그런 수준 낮은 빙공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내 의사에 따라 모든 것을 얼어 붙게 할 수도, 어떠한 것에게도 피해를 끼치지 않을 수도 있는 빙정의 기운.

설사 혈도 전체를 얼려버렸다 해도, 그녀에게는 후유증 하나 남지 않게 할 수도 있었다.

“헉!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어째서 그녀의 몸에서 서리가···!”

···아.

그녀의 치료에만 신경 쓰고 있느라 겉으로 어떻게 보일지 전혀 생각을 안 해뒀다.

“걱정하지 마시오. 치료의 일환일 뿐이니.”

“그 말이 사실이오?”

“내 이 독을 살펴보니 불의 성질을 가지고 있더구려. 오행에는 수극화(水剋火)라 하였으니, 수에 가까운 빙(氷)으로 독을 제압한 뒤 그것을 없애면 이 독도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이오.”

“저, 정말입니까? 정말로 그녀를 치료할 수 있는 겁니까?!”

내가 어찌 알아. 나도 그냥 지르고 본 건데.

사실 방금 한 말도 그냥 입에서 나온 대로 지껄인 거지,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진짜 이놈의 더러운 독이 불의 성질인지 아닌지도 모른다는 소리다.

하지만 지금 빙정의 기운에 독이 멈춘 건 사실이고, 아까보다 훨씬 제압하기 쉬워진 것도 분명한 사실.

지금 이대로라면···.

파삭.

역시!

빙정의 기운으로 인해 단단히 얼어붙은 독에 내공을 실어 넣자, 아까의 그 끈질김이 거짓인 것처럼 산산이 조각났다.

거기에다가 떨어져 나온 독의 파편은 완전히 무력화된 상태.

치료의 실마리를 잡아낸 나는 바로 그녀의 혈도로 내공을 실어 보냈다.

그것은 말 그대로 파죽지세. 마치 사기를 잃고 도망치는 병사들을 쓰러뜨리듯, 몸 안에 남아있던 독을 모두 없애버린 뒤 남은 잔해들을 모두 한쪽 손에 모았다.

“잔!”

“아, 네!”

내가 큰 목소리로 외치자, 옆에서 그녀의 전신에 퍼져있던 검은 멍울이 사라져가는 걸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구획장이 깜짝 놀라며 자신이 조금 전 사용했던 잔을 내게 내밀었다.

톡, 주르륵.

그녀의 손가락 끝에 살짝 상처를 내자, 먹물보다도 더 검고 끈적한 액체가 잔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잔이 반쯤 찼을까.

상처에서 나오는 액체의 색깔이 붉게 변하자, 나는 바로 상처를 지혈하고 잔의 입구를 막은 뒤 내공을 끌어올렸다.

치이익.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이후로 더욱 강해진 삼매진화의 열기는 잔에 있던 독을 끓이는 걸 넘어 순식간에 증발시켰다.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파멸시키려 했던 지옥 같은 독기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후우···.”

좋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됐네.

“자, 여기 잔은 돌려드리겠소. 독은 말끔히 태워버렸으니 다시 쓸 수 있···긴 하지만, 역시 다시 쓰긴 찝찝하겠죠?”

“아···그···제가 알아서 버리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잔을 내밀자 바로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보고 그에게 뻗었던 손을 다시 거두었다.

아무리 나한테는 독이 안 통한다지만, 너무 무신경했다.

“그것보다···.”

내가 잔을 침대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놓은 그때,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이제 그녀는 괜찮은 겁니까?”

“제가 대답하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있지요.”

그의 말에 대답 대신 손을 뻗어 그녀에게 걸어놨던 점혈을 풀었다.

그리고 잠시 뒤.

“으으음···.”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나듯, 목을 울리며 눈을 뜨는 그녀.

그녀의 눈에는 아까와 달리 티끌 한 점 없는 하얀 색이 자리 잡고 있었다.

“미우! 내 얼굴 알아보겠어?”

그녀가 깨어나는 걸 기다리고 있던 구획장이 그녀의 앞에 다가가 자신을 가리켰다.

“아, 시옌? 여기는···?”

“나, 나 알아볼 수 있는 거지? 응? 알아보는 것 맞지?”

“어, 응. 당연히 알아보지···그것보다 나는 왜 여기···.”

꽈악!

검은 분노에 빠졌던 그녀. 미우가 뭐라 말을 할 새도 없이 그녀를 안는 구획장. 시옌.

“잘됐다···정말 잘됐어···.”

뚝, 뚝, 뚝.

갑자기 자신을 안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시옌을 당황한 눈으로 바라보던 미우는 좌우를 한참 둘러보더니, 우리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하, 한인이 왜 여기에 있는 거죠? 그리고 저는 대체 왜···그리고 시옌은 왜···.”

“잠깐 설명이 필요할 것 같네요.”

일단 이 사람부터 좀 진정시켜야겠지만 말이야.

*****

설명은 그리 길게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 설명 자체는 말이지.

대신 미우를 안은 채 통곡하는 시옌을 말리는 데 설명에 사용한 것의 두 배에 가까운 시간을 소비했다.

거, 참. 누가 보면 이 사람이 죽은 줄 알겠어.

곧 죽을 줄 알았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판국에 눈물이 대수겠냐마는, 그래도 일단 이야기는 좀 진행할 수 있게 해줘야 할 것 아냐.

그렇게 긴 시간 끝에 시옌도 진정하고, 미우도 일의 전후 사정을 전부 파악한 뒤.

“은인에게 감사드립니다.”

두 사람은 우리에게 깊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은인분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저는 산채로 불에 타고 있었겠지요.”

“아뇨, 뭐···힘들 땐 서로 돕고 살아야지요.”

사실 그녀를 치료하겠다! 라는 생각보단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꼴인지 좀 알아보자, 라는 의도로 시작한 일이지만, 뭐, 그래도 좋게좋게 끝났으니까.

“세 분 다 숙소를 구하시지 않으셨다면 오늘은 우리 집에서 쉬시지요. 융숭한 대접은 몰라도, 그 어디보다도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아이고, 그러면 저희야 감사하죠.”

시옌의 제안에 우리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구획장의 집이라면 웬만한 숙소보다도 나을뿐더러, 남만을 여행하면서 필요한 정보도 얻을 수 있겠지.

다른 두 사람도 그의 제안에 반가운 기색을 표하고 있었으니, 거절할 이유 따윈 없었다.

우리가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시옌은 웃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지금 밖에서 준비하고 있을 사람들에게 사정도 이야기하고, 세 분의 식사 거리도 사와야 하니까요.”

“아, 네, 알겠습니다. 살펴 다녀오시지요.”

그러고 보니 밖의 사람들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아마 언제 데리고 오나, 하고 기다리고 있겠지.

분명히 그 사람들도 미우 이 아가씨가 다 나은 걸 보면 깜짝 놀라겠···.

쿵!

···응?

시옌이 나가기 직전, 손도 대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열리는 대문.

그리고 그 건너편에서 나타난 몇몇 사람들.

그중에서도 가장 앞에 선 여인을 보고 시옌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뭐야, 대체 누군데?

“시, 시장님?”

시장? 그건 또 뭔 직책이야?

머리 위로 의문 부호를 잔뜩 떠올리고 있는 내 귓가로 뒤에 기립해 있던 현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장님은 이 도시의 주인을 뜻하는 남만어입니다.”

아, 그런 뜻이구나. 난 또 뭐라고. 저 사람이 바로 이 도시의 주인···.

···아니, 잠깐만.

“그렇다면 저 사람이 바로···.”

“네, 그렇습니다.”

온몸에서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던 현옥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앞에 선 여인이 바로 주이 옌 님의 뒤를 이어 이 도시의 주인이 되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도시의 시장. 아이 옌

후루룩.

좁디좁은 시옌의 집 안에서는 누군가 뭔가를 마시는 소리 만이 처량히 울려 퍼졌다.

···왜 마을에서 가장 커야 할 구획장의 집이 좁냐고?

그야 당연히.

탁.

이분 덕분이지.

이 도시의 주인이자, 부하 다섯 명을 이끌고 집 안으로 들어오면서 우리가 앉을 자리조차 부족하게 만든 시장님.

전대 도시의 주인 주이 옌의 독녀 아이 옌은 조금 전까지 자신이 마시고 있던 잔을 탁자 위로 내려놓으며 우리를 바라봤다.

“세 분은 가운데 땅에서 오신 것이 맞습니까?”

우리 일행의 좌장은 신승이지만, 당장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건 나나 현옥뿐.

그래서 그녀와 대화하는 역할은 그나마 의사 결정권이 있는 내가 맡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가운데 땅이라니. 설마 중원을 말하는 건가?

아까 시옌 저 사람은 중원이라고 잘 발음하더니 이 사람은 왜 이러냐.

하긴···명나라에서도 관리와 백성이 쓰는 단어가 다른 경우가 종종 있긴 하니, 아마 지금 이것도 그런 경우겠지.

“그렇습니다. 우리는 대우림 너머 가운데 땅에서 찾아왔습니다.”

내 대답에 아이 옌은 자신을 호위하는 부하 둘을 제외한 다른 세 명의 부하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어떻게 들어보려고 귀를 기울이긴 했지만, 목소리도 너무 작았거니와 아까 그 ‘가운데 땅’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도 많아 결국 포기했다.

심각한 얼굴로 부하들과 대화를 나누던 아이 옌은 뭔가 결론이 나온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여인을 치료···아니, 해독한 것도 당신이 맞습니까?”

흠칫.

시옌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선 채 벽에 붙어있던 미우는 아이 옌이 자신을 부르자 몸을 떨었다.

이렇게 보니 옆에 있는 시옌과 확실히 대조된다.

검은 멍울이 전신을 뒤덮은 시옌과, 한인보다야 조금 어둡지만 검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 피부를 가진 미우.

···어라? 그러고 보니.

미우와 시옌을 바라보던 시선을 다시 내 앞의 아이 옌에게로 돌렸다.

이 사람은 왜 피부 색깔이 정상적이지?

아니, 그녀뿐만이 아니다.

뒤에서 있는 문관들은 전신을 천으로 뒤덮고 있어서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좌우에서 호위하는 호위대의 피부도 역시 말끔했다.

···귀족들만 사용하는 치료법이나 그런 게 있는 건가?

쿵!

“대답하라! 가운데 땅에서 온 자여!”

남만인 다섯 사람의 피부 관찰에 너무 열중한 탓에 대답이 늦자, 아이 옌의 좌측에 있던 호위가 들고 있던 창을 바닥에 찍으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음···이거 완전히···.

내가 호위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무슨 반응을 하기도 전에 아이 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슈아. 진정하세요.”

“하지만···!”

“이들은 이 도시의 주민도, 신성한 땅의 사람들도 아닙니다. 제 말에 복종해야 할 이유가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중원은 가운데 땅이더니, 자기들은 신성한 땅이야? 그냥 무더운 땅이라고 부르지 왜.

내가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아이 옌의 자신의 호위. 슈아를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키지 마세요, 슈아. 아시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아이 옌의 단호한 목소리에 슈아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뒤로 물러섰다.

장내가 정리된 후, 아이 옌은 싱긋,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잠깐 소란이 있어서 죄송합니다. 놀라시지 않으셨길 바랍니다.”

“아, 아뇨, 괜찮습니다. 제 쪽에서 먼저 실례를 범한 것도 있으니까요.”

놀라긴 내가 왜 놀라.

이런 싸구려 연극에 놀랄 것 같냐.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한 험악한 분위기 조성에, 그런 분위기를 말 한마디로 풀어내는 상급자. 그리고 상대를 안심시키는 한 마디까지.

정치판에서 으레 볼 수 있는 짜고 치기라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내가 정보 공작 관련 일을 몇 년을 했는데 겨우 이런 것에 그녀에게 감화될까.

하지만 겉으로는 그녀의 말에 안심한 듯,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녀를 치료한 건 바로 접니다. 검은 분노에 빠져 있던 그녀를 수혈을 집어 재웠고, 그 뒤에 그녀의 혈도에 남아있던 독을 모두 빼냈습니다.”

구구절절, 묻지도 않은 것까지 모두 대답하는 내 모습에 그녀는 만족한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마 지금 내가 방금 그 연극에 감화되어 자신을 떠받들고 있다, 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난 그럴 생각 전혀 없거든.

이런 시시한 연극을 보여준 대가를 아주 톡톡히 치르게 해주마.

시옌에게서 얻지 못한 중요 정보, 모조리 내뱉어 줘야겠어.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먼저 아이 옌의 신뢰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쓸데없을 정도로 자세히 전후 사정을 설명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가운데 땅에 있는 술사들은 우리의 땅에 있는 술사와 달리 특이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하던데, 손님도 그런 경우입니까?”

슬슬 내게서 우리에 관한 정보를 뽑아내려 하는 아이 옌.

“특이한 재주라니요. 그저 빙공(氷功)을 조금 익히고 있을 뿐입니다.”

뭐, 중요치 않은 정보는 얼마든지 내주마.

대신 그 값은 톡톡히 치르라고.

내 대답에 아이 옌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얼음의 기운을 다스리는 법이라니···대단하군요. 우리의 땅에선 가히 상상도 못 할 능력입니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남만에서 익히는 무공은 대부분 그 성질이 둘 중 하나로 귀결됐다.

하나는 당연히 독.

남만에는 중원에서는 구하기는커녕 보는 것도 힘든 독충과 독초를 일상처럼 볼 수 있었고, 그것으로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독에 대해 정통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중원에서는 몇몇 문파를 제외하곤 도외시되는 독공이 남만에서는 주류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의외일 수도 있지만 불. 즉, 열기공(熱氣功)이었다.

남만인의 삶의 터전이라 할 수 있는 우림.

만약 거기에 불이 붙으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습기가 높고, 비도 자주 오는 남만 우림이라지만, 인간이 억지로 불을 피우려 한다면 막을 방법이 없다.

남만인들이 열기공을 익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불을 제압하며, 조종하고, 다스린다.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가장 위험한 적을 가까이 두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래서 남만인들은 무공을 익힌 자들을 무인이 아니라 술사(術士)라 칭했다.

“이 여인의 몸에 있던 독은 불과 얼음에 약합니다. 하지만 이런 쇠약한 육신에 불을 사용했다간 독을 태우기 전에 몸이 타버리지요.”

내가 해독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자, 앞에 있던 아이 옌은 물론이거니와 좌우에 있던 호위들도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저는 발상의 전환을 했습니다. 열이 아니라면 차라리 냉으로 독을 제압하면 어떨까, 하고요.”

“그래서···통했습니까?”

마치 말해선 안 될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낮은 목소리로 질문을 던진 아이 옌에게 느긋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시다시피요. 본디 열보다는 냉이 육신을 덜 해하는 법. 사람을 해할 정도는 아닌 약한 냉기로도 독은 힘을 잃더군요. 힘을 잃은 독을 팔 하나에 몰아넣고, 그 뒤 독을 빼내는 건 딱히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내 대답을 눈을 반짝이며 경청하는 그녀에게 싱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마 어느 정도 빙공을 익힌 무인···아니, 술사라면 저만큼은 아니더라도 비슷한 일을 할 수 있겠지요.”

물론 거짓말이다.

열기보다 냉기가 사람을 덜 해하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래 봐야 오십보백보.

무공도 익히지 못하고, 십 수년간 독에 잠식되어 쇠락한 육신에는 똑같이 위험하다.

미아를 치료할 수 있었던 건 내가 보통의 빙공이 아니라 빙정의 기운을 사용한 덕분이었다.

오직 내가 적으로 인식한 대상에게만 피해를 주는 빙정의 기운은 오직 독에만 자신의 힘을 선보였고, 덕분에 그녀에게 조금의 피해도 없이 치료할 수 있었다.

즉, 내가 아니면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치료법이란 소리다.

다른 사람이야 뭐···치료받는 사람이 죽든 말든 화기를 잔뜩 끌어 올려 독과 함께 사람까지 불태우던가, 아니면 신승처럼 화경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긴 시간 최대한 조심스럽게 독을 빼내는 방법밖에 없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 법이라고, 혹시나 아이 옌이 빙공을 익힌 고수를 데리고 와서 사람을 치료하다 죽으면 어쩌냐고?

아니···대체 어디서 데려올 건데?

우리도 전 중원에서 유일하게 남만으로 통하는 길을 안다는 사람을 발품을 팔아 겨우 구했고, 여기로 오는 길도 절대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빙공을 익힌 무인을 아무 데서나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수천, 수만 가지의 무공이 있는 강호에서도 극히 일부 문파만이 겨우 맥을 이어가고 있었고, 그나마 빙공을 익히고 있는 북해는 남만과는 완전히 정 반대.

데려오기는커녕, 갈 수나 있으면 천만다행인 거리였다.

즉, 내 거짓말이 들키려면 하루 이틀로는 어림도 없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지금 저희에게 그런 빙공의 고수를 데리고 오는 건 요원한 일.”

봐봐. 내 말 맞잖아.

내 대답에 슬픔이 가득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던 아이 옌은 고개를 들고 날 바라보더니, 양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아챘다.

“이 도시의 주민들을 위하여, 부디 당신의 힘을 빌려주시겠습니까?”

야 손을 꽉 잡은 채 간절한 눈빛으로 나나를 직시하는 그녀.

남만 특유의 화장법일까. 한인과 비교했을 때 살짝 어두운색의 피부에 옅은 분을 바르고, 입과 볼을 붉은 인주로 물들인 그녀는 확실히 미녀라 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한 도시의 주인. 명나라에 비유하자면 한 주를 다스리는 도독이나, 성을 다스리는 성주에 비견될 만했다.

이만한 미모에 더 높을 수 없는 지위까지. 평범한 사내라면 껌뻑 죽을 요소밖에 없었지만, 지금 그런 그녀에게 손을 잡힌 내 생각은 딱 하나.

‘이 사람도 무공을 익혔네. 속도가 제법이야.’

이것밖에 없었다.

···내 명예를 위하여 말하는 거지만, 내가 무슨 성욕도 없는 이상한 놈인 건 절대 아니다.

나도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순수히 기뻐할 줄 아는 중원의 평범한 남자다.

내가 이런 생각밖에 할 수 없는 이유는 딱 하나.

···지금 그녀의 눈에서 번들거리고 있는 욕망 때문이었다.

어쩌면 정말로 자신의 주민들을 치료할 수 있다는 순수한 욕망일 수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진짜로 만에 하나일 정도.

분명 그녀는 어떠한 속셈을 숨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딱 하나.

“저 홀로 얼마나 많은 주민을 도울 수 있겠냐마는···.”

굳은 결심을 한 듯 내 손을 잡은 그녀를 나 역시 강하게 마주 잡았다.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녀의 제안에 동의하는 것뿐.

물론 아무런 계획도 없이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건 정보.

이 정체불명의 독의 근원이나, 다른 치료법을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장 빠른 수단이, 바로 눈앞에 있는 그녀였다.

“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아이 옌이 나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자, 그녀의 뒤에 기립해 있던 두 명의 호위와 세 명의 문관이 동시에 큰 목소리로 외치며 고개를 숙였다.

“혹시 오늘 숙소는 구하셨습니까?”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린 아이 옌이 우리 일행을 쭉 둘러보더니 물었다.

“아니요, 그래서 오늘은 여기 묵으려고···.”

“우리 도시의 은인을 아무 데서나 모실 순 없지요. 지금 바로 성으로 가시지요.”

은인이라니···이제 겨우 한 명 치료했을 뿐인데, 이렇게 금칠을 하다니.

하지만 그녀는 생각을 바꿀 생각이 없는 듯,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뒤에 서 있던 다섯 사람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마치 조금 전 호위를 받던 아이 옌처럼 우리를 둘러싸는 호위와 문관들.

···뭔가 우리를 호위한다기보단, 어디로 도망치지 못하게 가둬놓는 것 같은데.

“자, 그럼.”

싱긋.

마치 원하는 걸 얻어낸 어린 소녀처럼, 아이 옌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게 말했다.

“가실까요? 우리의 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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