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만 입성(2)
지독한 독이라고?
그의 말에 그제야 남만에 진입할 때부터 저변에 깔려있던 기운의 정체를 깨달았다.
마기나 사기로 착각할 만큼 지독하지만, 그러면서도 확실히 정체를 파악하기는 힘들 만큼 옅게 깔린 독기.
그것이 바로 신승과 내가 느꼈던 불쾌한 기운의 정체였다.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내 요청에 사내는 잠깐 주저하듯 눈치를 살피더니, 자신의 품 안에 안겨 있는 여인을 보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구해준 은혜를 무시할 순 없지. 날 따라오시오.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으니.”
사내는 품 안의 여인을 들어 올리고선, 아직도 혼란에 빠진 시장 거리를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그녀는 괜찮소! 모두 각자의 생활로 다시 돌아가시오!”
“그녀는 이미 검은 분노에 빠졌어! 지금 당장 불태워야 한다고!”
시장 거리에 있던 남자 중 하나가 그를 향해 반박했다.
시장의 상인으로 보이는 남자는 넘어진 가판대를 다시 세우며 이글거리는 두 눈으로 사내의 품 안에 잠들어 있는 여인을 매서운 눈으로 노려봤다.
그의 의견에 동조하듯, 주변의 다른 상인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무어라 한 마디씩 덧붙였다.
그녀는 이미 끝났다, 당장 없애라, 당신이 할 수 없다면 내가 하겠다.
점점 말의 수위가 높아지던 그때, 사내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다시 한번 소리쳤다.
“그만! 지금 우리를 구해준 손님 앞에서 이 무슨 추태요!”
이번 사내의 말에는 아무도 반박하는 사람이 없었다.
침묵이 낮게 깔린 시장 거리에서 사내는 그녀를 안은 채로 몸을 일으키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에 대한 처벌은 그녀가 깨어나고 얘기하겠소. 일어나고도 똑같이 분노에 잠식된 상태라면 불에 태우고, 아니라면 일단 추이를 지켜보도록 하겠소.”
사내의 말에 화가 사그라든 건지, 아니면 그 정도라면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지는 몰라도 남자들은 별다른 반박의 말 없이 각자의 가판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제 가시지요.”
“저 사람들은···.”
도대체 왜 그녀를 불태우라 하는 것입니까?
내가 입을 열어 질문을 꺼내기 직전, 사내는 앞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지는 압니다. 허나 너무 좋지 않은 눈으로 보지는 말아 주십시오. 저들도 이미···작지 않은 고통을 받은 사람들이니까요.”
사내의 말에 우리는 그들을 힐끔, 쳐다보며 그의 뒤를 따랐다.
사내의 집은 주변의 다른 이들과 비교해도 꽤 으리으리했다.
크기도 크기거니와, 마당의 정원과 주변에 장식된 장식물 등.
밋밋한 주변의 건물에 비해서 훨씬 화려한 모습이, 마치 ‘이 집 안에 사는 사람은 중요한 사람입니다.’ 하고 지나가는 모두에게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역시 이분은 구획장(區劃長)인 것 같군요.”
“구획장이요?”
일련의 사건 속에서도 조용히 있던 현옥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네. 도시의 주인인 귀족의 대리인 같은 거죠. 보통 남만의 도시는 여러 개의 구획으로 나뉘는데, 그곳을 직접 관리하는 게 바로 구획장입니다. 우리로 치자면 성주가 임명할 수 있는 현령 같은 거지요.”
“그럼 이 사람도 귀족이라는 겁니까?”
“아뇨, 귀족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마을 내에서 어느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까 그토록 미쳐 날뛰던 사람들을 말 한마디로 진정시키는 걸 보고 보통 사람은 아니라 생각했지만, 설마 그만한 자리에 있는 사람일 줄이야.
도시에 첫 진입 하자마자 만난 인연치고는 엄청난 행운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정보를 가장 폭넓게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화려한 외부와 달리 집 안은 정갈했다.
외부의 그 화려한 장식은 어디까지나 구획장임을 알리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실제로 사내의 취향은 이쪽인 모양이었다.
손님방으로 보이는 침실에 아직도 잠들어 있는 여인을 눕힌 구획장은 앉은뱅이 탁자에 우리를 안내한 뒤, 잠깐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다시 나타난 그의 손 위에는 네 개의 잔이 함께 있었다.
“시원한 물입니다. 한 모금씩 하시죠.”
“아, 감사합니다.”
남만은 손님에게 차 대신 냉수를 대접하는 건가.
하긴, 이렇게 습하고 더운 지역에서 뜨거운 차를 마시면 떠서 죽지, 떠서 죽어.
복삼이 녀석처럼 얼어 죽어도 얼음물을 고집하진 않지만, 나도 남만에서 만큼은 차가운 물을 원했다.
목을 축이기 위해 한 모금씩만 마신 신승과 나위 달리, 현옥은 컵을 받자마자 바로 생명수라도 받은 듯 바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한서불침(寒暑不侵)의 경지에 올라 더위 따위는 모르는 우리 둘과 달리, 현옥은 남만의 더위를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연거푸 두세 번 추가로 냉수를 받아먹고 나서야 현옥은 편안한 긴 숨을 내뱉었다.
“그래서.”
드디어 만들어진 대화의 장.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내 쪽이었다.
“그 검은 분노라는 건 뭡니까?”
아까 구획장의 말과 그녀의 상태를 보고 대충이나마 남만 전역에 퍼진 독과 검은 분노가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눈치로 알 수 있는 건 딱 거기까지 뿐.
검은 분노라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또 왜 그토록 사람이 그녀를 산채로 불태우라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미 내 질문을 짐작하고 있었는지, 구획장은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남만 전역에는 지독한 독이 퍼져 있습니다. 얕게 퍼져 있어서 당장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지만, 보통의 해독약으로는 치료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독이지요.”
구획장의 말에 깜짝 놀라는 현옥과 달리, 이미 남만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기 전부터 그 기운을 느끼고 있던 나와 신승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몸에 쌓인 독이 당장 어떤 피해를 주는 건 아닙니다. 아까 시장을 보시면 아시다시피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것도 가능하죠. 얼굴에 검은 멍울이 생기긴 하지만,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닙니다. 다만···.”
힐끔, 그는 침대에 뉘어있는 여인을 잠깐 쳐다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검은 분노가···발현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조금 전 시장에서 날뛰던 걸 말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온몸에 검은 멍울이 새겨지고, 독이 뇌리에까지 오르면 그때 검은 분노가 발현되지요. 온몸을 검게 물들인 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분노를 뿜어대는···괴물이 되는 겁니다.”
괴물, 괴물이라.
구획장의 말에 나는 아까 그녀의 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자신의 육신조차 도외시한 채 그저 날뛰는 것에만 집중하던 그녀는, 분명 인간이라고도, 짐승이라고도 할 수 없는 괴물 그 자체였다.
인간을 괴물로 만드는 질병.
그것이 바로 검은 분노였다.
“독···이라니, 저는 괜찮은 겁니까?”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렇게 검은 멍울이 생긴 것도 독이 퍼진지 몇 년은 지나고 나서의 일이니까요. 얼마나 체류하실지는 모르겠지만, 한두 달 정도로는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겁니다.”
구획장의 말에도 현옥은 안심하지 못한 듯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어차피 그래 봐야 보이지도 않을 텐데, 참 애쓴다.
“그리고 두 분은 높은 경지에 이른 무인인지라 독이 감히 범접지 못할 것이고요.”
“네, 이미 체감하고 있습니다.”
남만에 진입하기 전부터 정체불명의 기운이 남만에 퍼져 있음을 알고 있던 우리는 이미 외부의 기운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 공자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현 공자의 주변에도 기막을 펼쳐 독기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아내고 있었으니까요.”
“아, 저, 정말입니까?”
내 말에 그제야 현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원래의 신색으로 되돌아왔다.
뭐, 사실을 말하자면 완전히 막고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좀 심할 때만 막아주고 있었다.
매번 그러기엔 거리의 제약도 있고, 구획장의 말대로 어마어마하게 쌓이지 않는 한 겉으로 티가 나는 일도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불로 태운다···라는 건 무슨 말입니까?”
“검은 분노에 빠졌다는 건 이미 온몸이 독에 잠식되어 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그녀를 제압하다 잘못해서 피라도 흐르면···.”
“···이미 독에 잠식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시발점으로 차례로 검은 분노에 잠식될 가능성도 있다···이런 말씀이시겠죠?”
그녀만큼 검게 물들어 있진 않지만, 다른 이들도 검은 멍울이 온몸을 차지하고 있었다.
거기서 이미 독과 다를 바 없는 발병자의 피를 맞았다간···.
내 말에 그는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이미 그로 인해 몇 개의 도시가 멸망했죠. 결국 검은 분노에 잠식된 자는 최대한 원거리에서 제압한 후···불로 태우라는 명령이 내려왔고요.”
그것은 분명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이었다.
이미 검은 분노가 한 번 발병되었다면 죽여야 하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그것을 죽이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 불에 태우는 일이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태우는 건···산 채로 태운다는 말씀입니까?”
“·········.”
문제는 피가 한 방울도 튀지 않으려면, 산 채로 태우는 것 말곤 방법이 없었다.
나야 무공을 익혔던지라 수혈을 짚음으로써 그녀를 제압할 수 있었지만, 아무런 무공을 익히지 못한 이가 그녀를 기절시키거나 재우려면 무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무조건 피를 보게 된다.
날붙이는 물론이거니와, 몽둥이나 줄을 사용하더라도 그녀를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선 반드시 피를 볼 수밖에 없다.
결국 방법은 딱 하나.
힘으로 제압한 그녀를 줄로만 묶은 채, 산 채로 불태우는 방법뿐.
내 질문에 그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저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침묵에 잠겼다.
···내 예상이 맞았던 건가.
그 침묵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신에 대한 분노인가, 아니면 나는 알 수 없는 다른 의미의 침묵인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으득. 그가 이를 가는 소리가 귀에 꽂혔다.
“이미 우리는 많은 가족을, 이웃을, 친우를 잃었습니다. 한 사람의 희생이라도 줄이기 위해선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설사 그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사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서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인간이 할 짓이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슬픔.
그는 지금 누구보다도 지금의 이 현실을 슬퍼하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린 그의 얼굴은 슬픔을 참아낸 탓인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물론 내가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은 검은 멍울을 제외한 곳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직 잠에 빠진 그녀에게 다가갔다.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그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제 오랜 친구입니다. 언제부터 친구였는지조차 잊어버렸을 정도로 아주 오래전부터 친구였죠.”
다시 몸을 돌린 그는 얼굴의 붉은 기색을 전부 지운 채, 싱긋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항상 말했습니다. 부디 검은 분노에 빠지기 전에 잠자듯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면 좋겠다고요.”
허나 그의 슬픔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슬픔 자체가 그의 얼굴이 된 듯, 모든 표정 하나하나에 슬픔이 깊게 서려 있었다.
“그녀의 최후의 소원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그는 잠들어 있던 그녀를 들어 올렸다.
수혈이 찍힌 그녀는 그토록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음에도 아직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콱.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검은 분노에 한 번 빠지면 다시 돌아올 길은 없습니다. 아까 그들이 진정한 이유도, 제가 한 말이 그저 변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미 그들은 준비를 모두 마쳐놨을 겁니다.”
“그녀를 불태울 준비를 말입니까?”
“·········. 이 손을 놓아주십시오. 저는 할 일이 있습니다.”
“아니, 당신은 그럴 수 없습니다.”
“이 손 놓으십시오!”
그는 될 수 있는 한 최대한 손을 흔들어서 어떻게든 내 손을 빼내려 했지만, 무공을 익힌 자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의 차이는 컸다.
하물며 누군가를 업고 있는 상황에서 내 손을 뿌리칠 수 있을 리가 있나.
이대로 쭉 흔들었다가는 그녀가 깰지도 모른다 생각한 것인지, 그는 손을 뿌리치는 걸 포기하고 나를 노려봤다.
“방금 그 이야기를 듣고도 정의의 사도 역할을 할 생각입니까? 나도 그녀를 잃는 게 고통스러워! 하지만 우리가 할 일을···!”
“그 할 일, 안 하게 해주겠다는 말이오.”
“···뭐?”
“신승 어르신.”
내가 뒤에서 앉아있던 신승을 부르자, 그는 그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에 당도했다.
“언제 부르나 기다리고 있었네.”
“그녀를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한 번 살펴보지.”
어, 어? 자신이 알아차리지도 못한 새에 자신의 품 안에 있던 그녀가 침대에 다시 돌아간 걸 본 그는, 어느새 비어 있는 자신의 팔과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러건 말건, 신승은 그녀를 침대에 뉜 후 맥을 잡고 그녀의 상태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일련의 행동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가 깜짝 놀라며 신승을 막기 위해 손을 뻗었다.
“아니, 지금 무슨 짓을···!”
“우리에게 좋은 정보를 줬으니 우리도 할 수 있는 걸 해드릴 생각이오.”
집중하기 시작한 신승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그를 막아선 채 그와 눈을 마주친 채 말했다.
“그녀의 검은 분노를 잠재워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