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권능으로 무림최강-70화 (70/185)

남만 입성(1)

그렇게 얼마쯤 달렸을까.

크르렁!

가장 선두에서 달리고 있던 적표 대장이 멈춰서자, 뒤따라오고 있던 세 마리도 차례로 발을 멈췄다.

“다, 다 온 겁니까?”

“글쎄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눈을 감은 채 적표의 털만 꽉 붙잡고 있는 현옥이 게슴츠레 눈을 뜨고 대답하자, 나는 확신하지 못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만에 많이 가까워진 것 같긴 하지만, 아직 남만 사람들이 오가는 길은 안 보이는군요. 혹시 지도로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겠습니까?”

“자, 잠시만요.”

후들거리는 다리로 용케도 적표에서 내린 현옥은 품 안에서 지도를 꺼내 주변의 경관과 대조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오가는 길은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밝힌 풀이나 부서진 나뭇가지처럼 사람의 흔적은 어느 정도 있었다.

대중적으로 다니는 길은 아니더라도 사냥꾼 정도는 오가는 길이라는 소리.

흐음, 이놈들도 사람이랑은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더 안 간 건가?

역시 사람을 잡아먹으려 하지는 않는 놈들인가 보구···윽?!

우뚝.

적표가 멈춘 곳에서 몇 걸음 들어가던 도중, 갑작스레 몸을 덮치는 사이한 기운에 발을 멈췄다.

대체 뭐야, 이건···?

지금껏 온갖 끔찍한 것들과 마주해왔던 나도 생전 처음 경험해보는 기운.

“···신승 어르신.”

“응? 왜 그러느냐?”

“잠깐 이리 와주십시오. 뭔가 이상합니다.”

“무엇이 이상하다···웁!”

주변에 있던 적표의 머리를 쓰다듬던 신승을 내 근처로 부르자, 그는 나보다도 몇 걸음 전에 나와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발을 멈췄다.

소림의 불가기공(佛家氣空)을 익힌 그는 나보다 더욱 사기에 민감했기에 조금 더 빨리 알아차린 것이다.

“적표들이 발을 멈춘 것도 이것 때문 아닐까요?”

“···몸서리쳐질 정도로 사이한 기운이군. 마기···? 사기···?”

하지만 그도 나보다 기운에 조금 더 민감할 뿐, 이 기운의 정체를 알진 못했던 모양이다.

“마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마기는 모든 것을 파괴하려 드는 패도(悖道) 적인 기운. 이렇게 음습하게 발아래에서부터 몸을 타고 오려는 기운은 아니니까요.”

만약 마기였다면 내가 진작에 알아차렸겠지.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서 마기 근처에서 살았던 것만 해도 얼마인가.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내가 전생에서 느꼈던 마인들의 마기와도, 내 몸 안에 있는 마기와도, 천마의 무공을 익힌 광인의 그것과도 전혀 다른 성질의 기운이었다.

그 시작점부터 전혀 다른 정체불명의 기운.

“어쩌면 이것이 천기가 뒤틀린 이유가 아닐까요?”

“·········.”

그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없었지만, 나는 그가 내 말에 동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짧지 않은 동행 동안 그가 머릿속에 생각이 많아지면 이렇게 침묵하고 고민에 빠진다는 걸 배웠기 때문이다.

“아, 알았습니다! 알았어요!”

우리가 기운의 정체를 파악하는 사이, 뒤쪽에서 현옥이 환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가 어딘지 알아낸 겁니까?”

“네! 원래 저희 상단에서 쓰던 길보다 조금 떨어져 있어서 금방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몇 가지 대조해보니 알았습니다. 자, 한 번 보시···저, 신승 어르신은 왜 저러십니까?”

“어르신은 무언가 고민 중이시니, 그냥 저한테 알려주시지요.”

“아···네, 알겠습니다.”

신승의 저런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던 현옥은 이상한 눈길로 그를 바라봤지만, 어차피 자신이 만족할만한 답이 나오지 않는 한 저기서 빠져나오지도 않을뿐더러, 지도도 읽을 수 없으니 그냥 내게 설명하는 편이 빨랐다.

“알아보니 이쪽 길은 백여 년 전 남만인들이 사용하는 길이었습니다. 커다란 대지 융기로 인해 길의 앞부분이 절벽으로 만들어지기 전만 해도 남만 우림에서 제일 안전하던 길이었지요.”

“그렇다면 여기는 그 앞부분인 겁니까?”

“네. 아까 적표들이 펄쩍펄쩍 뛰던 것이 뭣 때문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여기로 오려던 것 같군요. 하하! 눈을 감고 있어서 하나도 몰랐습니다.”

눈만 감고 있었나. 있는 대로 비명도 지르고 있었으면서.

하지만 혹시나 남아 있을 그의 명예를 생각해서, 이 부분은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그럼 남만으로 가는 건 얼마 정도 걸리겠습니까?”

“길어야 반 시진···아니, 두 분의 속도를 생각하면 그 반절 정도밖에 안 걸릴 겁니다. 더군다나 출구 쪽에 옛날부터 있던 마을도 있으니, 원하시면 휴식을 취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거 잘 됐군요. 신승 어르신! 들으셨습니까!”

“그래, 들었네.”

“우왓!”

“어찌 하시겠습니까?”

저 멀리서 고민에 빠져있던 신승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자 놀라 자빠진 현옥과 달리, 이미 그가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걸 알고 있던 나는 담담히 그를 반겼다.

“이 기운이 남만 우림 근처에서만 느껴지는 것인지, 아니면 남만 내에서도 같은 기운이 퍼져 있는지 알아봐야지.”

“그럼 바로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신승의 동의가 떨어졌으니, 더 주저할 이유는 없었다.

어흥.

가장 앞에 있던 적표 무리의 대장이 낮게 울며 내게 다가왔다.

우리가 슬슬 떠나려 하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이곳까지 녀석을 테고 왔던 나는 녀석의 머리와 턱을 함께 쓰다듬으며 말했다.

“여기까지 데려다줘서 고맙다. 네가 아니었다면 한참 더 걸렸겠지.”

그르르르···.

내 쓰다듬을 받은 녀석이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치고받던 상대를 이렇게 대해주다니.

어쩌면 짐승들 사이에서도 싸움이 끝나면 친구가 된다, 그런 복잡한 감정이 있는 걸까?

“다음에 다시 만날 때까지 부디 아프지 말고 잘 지내라.”

어흥.

마치 내 말귀를 알아들은 듯 짤막하게 울음소리를 낸 적표는 자신의 부하 두 마리와 함께 느릿느릿 이 자리를 벗어났다.

“자, 그럼.”

그들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참을 바라보던 일행이 내가 입을 열자 시선을 집중했다.

“다시 움직여 볼까요?”

수십 년간 외부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았던 남만도 이제는 코앞.

한 여정의 끝이자,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 될 그곳도 이제는 얼마 남지 않았다.

*****

현옥의 말대로 우리가 우림을 벗어나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우리가 내린 곳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곳에서 길이 나타났고, 그곳을 따라 걷자 금방 우림 밖으로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휴유, 이제야 좀 갑갑하던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군요. 저 안에서 보이는 건 초록색뿐이라 저 파란 하늘이 얼마나 그리웠는지···어라? 두 분 다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

우림 밖으로 나온 기쁨에 몇 번이고 심호흡을 내뱉는 현옥과 달리, 나와 신승은 인상을 쓴 채 호흡을 최대한 자제했다.

숲에서 느꼈던 그 사이한 기운이 여기서도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니, ‘겨우’ 그 정도가 아니다.

아까 우림에서 느꼈던 그 기운이 삼류의 무인 정도였다면, 지금은 거의 일류의 무인이 내뿜는 기세와도 같았다.

나나 신승이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충분히 신경이 거슬릴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현옥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모양인지,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제가 말했던 마을이 바로 저곳입니다. 중원에서 넘어오는 사람은 반드시 들리는 마을이죠. 이십 년 만에 왔는데도 예전과 전혀 달라진 점이 없군요.”

그가 가리킨 곳에는 중원의 성도와도 비견될만한 커다란 도시가 있었다.

“저곳의 지배자는 주이 가문으로 남만의 제국에서도 그 역사로 치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대가문입니다.”

많은 이들은 남만이 소규모 부족 중심으로 굴러가리라 생각하곤 했지만, 실상은 전혀 반대.

강력한 제국을 중심으로 황제에게 작위를 받은 제후들이 마을이나 도시를 관리하는 제국 중심적 정치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실상 명나라와 크게 다른 점이 없다는 소리였다.

“전 가주인 주이 옌 님은 중원 사람들에게 호의적이셨는데, 현 가주는 과연 어떠실지···.”

우리의 앞에서 길을 걷던 현옥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걱정이 이해 안 되는 건 아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십 년. 무려 이십 년이다.

그 사이에 저 도시가 어떻게 변했는지 누가 어떻게 알겠는가.

어쩌면 중원인이란 중원인은 모두 불태우라는 운동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르지.

···이건 너무 선을 넘었나?

“괜찮겠지요. 이상한 짓을 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잠깐 쉴 겸 정보만 얻고 가려는 것뿐인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생각은 생각이고, 지금은 그를 안심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앞으로의 여정에도 그의 도움은 많이 필요할 터인데, 그런 사람이 이렇게 떨고 있으면 될 일도 안 된다.

“하긴 그렇지요? 제가 너무 과민반응한 모양입니다.”

내 말에 그는 자신의 걱정이 썩 우스운 듯, 쓴웃음 지으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자, 이쪽입니다. 여기가 바로 마을의 입구···.”

“저기 있다! 저걸 불태워!”

“얼른 잡아!”

“···응?”

뭐야.

···정말로 중원인을 불태우기로 한 거야?

마을 입구에서부터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나는 다시 발을 멈춘 현옥을 향해 물었다.

“혹시···남만에는 살아있는 사람을 불태우는 문화가···.”

“아니,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내 질문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떠는 현옥.

하긴, 그런 문화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냐. 진짜 미친놈이나 뭐 하나 배우지 못한 이상한 놈들이나 그러겠지.

···그러면 지금 저 소리는 뭐지?

“일단 얼른 가보세. 어떤 상황인지 모르겠으나, 목소리가 다급한 걸 보아하니 보통 일은 아닌 것 같구먼.”

일행 중 유일하게 남만어를 할 수 없던 신승도 이미 말투에서 풍겨오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곤 우리를 재촉했다.

마을 안은···이걸 뭐라 표현해야 하나.

“검은 분노! 검은 분노가 날뛰고 있어!”

“더 퍼뜨리기 전에 저걸 잡아!”

“아앙! 엄마! 아아앙! 아빠아!”

난장판.

그래, 완전 난장판이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커다란 길목에는 수십 명이 넘는 사람이 모여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부서진 가판대와 구르고 부서진 과일과 채소들을 보아 전에는 시장으로 쓰였던 것 같은 거리에는 전에 있었을 활기는 완전히 사라진 채, 누군가를 찾으려는 듯한 사람들의 고함과 그 안에서 부모를 찾는 아이의 울음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건의 중심에는.

“캬아아악!!!”

온몸에 검은 반점이 가득한 인간.

···아니, 저것을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가?

동공까지 완전히 검게 물든 눈을 번들거리며 사지를 써서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사람을 공격하는 저것은 정말로 인간인가?

“신승 어르신.”

“음.”

저것이 인간인가, 아니면 인간과 한없이 닮은 짐승인가를 연구하는 건 나중에도 할 수 있는 일.

지금은 거리를 어지럽히는 저자를 잡는 것이 먼저였다.

확실히 종잡을 수 없는 몸놀림이지만, 우리 두 사람이 잡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린 우리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오는 쪽이 잡고, 나머지가 돕는다.

말하지 않고도 서로 계획을 짠 우리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기다렸고.

“끼야아아악!!!”

놈은 내가 있는 쪽으로 몸을 날렸다.

“키약! 키약! 키약!”

내가 팔을 잡아채자마자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하는 그. 아니, 그녀.

나이는 약 사십 대쯤 됐을까.

멀리서 볼 때는 검은 얼룩 때문에 알지 못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자 대충 그녀의 신색을 알 수 있었다.

입과 턱은 될 수 있는 대로 쩍 벌린 채 알아들을 수 없는 괴음(怪音)을 지르고 있었고, 눈알은 하얀 부분 하나 없이 모조리 검게 물들어 있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건 지금 내게서 벗어나려는 이 몸짓.

자신의 몸이 상하건 말건 내게서 빠져나가기 위해 온몸을 비트는 그녀.

이미 뼈와 근육 모두가 한계라며 비명을 내지르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어떻게든 내 손에서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쯧!”

이대로 뒀다간 그녀의 몸이 먼저 부서진다.

그렇게 판단한 나는 바로 수혈을 집었고, 다행히도 점혈이 먹힌 듯 그녀는 날뛰는 걸 멈추고 조용히 잠에 빠져들었다.

“괜찮나?”

“네, 저는 괜찮습니다. 다만···.”

조금 전 날뛰던 것이 거짓말처럼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신승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이건 질병인가? 아니면···.”

“아이고, 그녀를 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우리는 고개를 들고 그 주인을 바라봤다.

내 품에 있는 그녀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검은 멍울이 피부 곳곳에 남아 있는 사내가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날뛰기 시작해서 얼마나 놀랐던지, 두 술사분이 없었다면 더 큰 피해를···헉!”

한창 감사 인사를 하던 사내는 고개를 들어 올린 우리를 보고 깜짝 놀라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하, 한인? 서, 설마 두 분은···?”

“그렇소. 당신의 예상대로 우리는 중원인. 저 남만 우림을 넘어온 사람들이오.”

“허어···설마 대우림을 넘어오는 사람이 또 나올 줄이야···.”

마치 관찰하듯 우리의 얼굴을 좌우로 살펴보는 사내는 정신을 차리고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아, 미안하오. 중원인을 본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라.”

“그보다 지금 이 여인은 왜 이토록 날뛴 것이오?”

사죄도 사죄지만, 일단은 궁금증을 푸는 게 먼저였다.

잠깐 사이 혈도를 확인해봤지만, 그녀는 전지전명한 일반인. 내공이나 무공을 익힌 흔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주화입마가 아니라 무슨 병에 걸렸다는 소리인데, 내 평생 이런 병이 있다는 소문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내 질문에 사내는 어두운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중원에서는 아직 남만의 사정을 모르나 보구려.”

“남만에 무슨 일이 있었소?”

“···독이오.”

사내는 슬픔에 가득한 눈으로 내 품안의 그녀를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지금 남만 전역에는 아주 지독한 독이 퍼져 있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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