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락한 묘강(3)
현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다음날.
“호오.”
“허어.”
우리는 어제와는 싹 바뀐 현옥을 보고 감탄했다.
깎은 지 몇 년은 된 수염은 물론, 술과 토악질 냄새에 찌들어 있던 옷도, 새가 집을 지었다고 해도 믿을 만큼 엉망이던 머리까지.
그 모두를 말끔히 정리한 지금의 그에게서 어제의 주정뱅이 같은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렇게 차려입는 것도 오랜만이군요.”
우리의 감탄에 현옥은 쑥스러운 듯 입가에 웃음을 그렸다.
“현철이 그 친구가 떠오르는구먼. 상인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부터 달라야 한다고 어디를 나가던 꼭 좋은 옷을 입었지.”
확실히 맞는 말이다.
나도 평상시엔 편한 옷을 입지만, 중요한 거래 상대가 왔다 하면 제대로 차려입고 나오니까.
“네. 그러셨죠. 이 옷도 그중 하나였고요.”
그리움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현옥. 아무래도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아버지의 유품인 듯했다.
하지만 객잔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저 옷이 지금 그가 가지고 있는 옷 중 유일하게 정상적인 옷일 가능성도···.
“아, 그래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씀인데, 제가 이 옷 한 벌밖에 없어서 이걸 입고 두 분 앞에 섰다고 생각하진 말아 주십시오.”
···눈치가 빠른데?
“이젠 망해버린 가문이지만, 자존심과 자긍심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우리 두 사람에게 선언하듯, 두 눈에 진지함을 가득 담아 말했다.
“이 지도와 그 해독법은 우리 가문의 근간. 남만과 중원을 오가는 유일한 상단이라는 찬사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팔락.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밝은 미소를 짓는 현옥.
“그런 걸 가르치는 자리에서 아무거나 입고 나올 순 없죠.”
그런 그의 미소에는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다.
자신은 망가졌을지언정, 자신의 가문과 그 가업인 상단에 관해선 양보하지 않으려는 그의 굳은 결심이 서린 미소였다.
이 정도라면 혹시 정말로···.
신승이 잘 부탁한다며 우리 두 사람의 어깨를 두들고 사라지다, 그제야 현옥은 조금 마음이 편해진 듯 웃으며 내게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지도 해독 교육을 시작해 볼까요?”
현옥은 품 안에서 어제의 그 지도와는 다른 조그마한 지도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이건 교육용으로 만든 지도로, 어제의 그 지도보다 크기는 작지만 기호는 더 많지요. 두 분은 한시가 급하신 듯하니, 남만우림의 지도에 있는 기호와 지도를 읽는 법만 간략히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교육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상단 신입 교육을 도맡았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가르침은 이해하기도 쉽고, 딱히 어려운 부분도 없었다.
“대단하군요.”
현옥이 나를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배우는 속도가 몇 배는 빠르군요. 혹시 전에도 지도에 관해 배우신 적 있나요?”
“아뇨, 뭐···군에서 배웠던 게 답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이번 생에서는 진짜 군에서 배운 게 다니까.
마교 정보부에 있을 때 외워야 했던 수십 종류의 지도 해독법.
거기에 있던 고난도의 지도들에 비하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지도는 간단하기 그지없었다.
“군에서 쓰는 체계와는 완전히 다를 텐데도 이 정도 속도라니···대단하시군요.”
하지만 그런 경위를 알 리 없는 현옥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교육을 이어나갔다.
결국 그 자리는 예정되어 있던 것의 두 배 분량을 배우고 나서야 파했다.
내 예상보다도 잘 가르친 그와, 그의 예상보다도 잘 따라온 내가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이 정도라면 정말로 이틀 뒤에는 남만으로 출발하실 수 있을 것 같군요.”
“한시가 급한 일이니 열심히 익혀야지요.”
“신승 어르신께서 아끼는 분이라길래 무림인인 줄로만 알았는데, 군인이신가 봅니다?”
아까 군부에 관해 이야기를 꺼냈더니, 내가 아직 군인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나는 그의 질문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미 전역한 지 오래입니다.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 있죠.”
“아, 그렇군요. 그럼 지금 하시는 일은···?”
“작게나마 표국을 하나 운영하고 있습니다. 혹시 아실지는 모르시겠지만, 섬서성의 현정표국이라고···.”
“현정표국!”
내 대답에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정말로 현정표국의 표국주, 유현 대인입니까?”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있다마다요! 지금 운남성 내 주류 상단에서 현정표국의 이름이 얼마나 오르내리고 있는데,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호오, 그렇단 말이지?
사실 운남성에 현정표국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건 그리 놀랍지 않았다.
아니, 운남성뿐만 아니라 전 중원에서도 우리의 이름은 유명했다.
일황자의 제일 심복인 대장군.
지금껏 황실과 조정의 일에만 온 신경을 다하던 그가 처음으로 대외 활동에 나선 게 바로 우리 표국이었기 때문이다.
“전마 군납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자금력과 대장군이라는 엄청난 인맥을 통해 현재 전 중원에서도 손꼽히는 거대 표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현정표국의 주인이 설마 저와 비슷한 나이대의 청년이라니.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아닙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죠.”
“그 운을 끌어당긴 건 어디까지나 실력 아니겠습니까?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마치 신승을 대할 때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공손히 받드는 그의 모습에 나는 그저 미소만 지어 보이고 바로 옆의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문 너머, 점점 쇠락하고 있는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곳 묘강까진 저희 표행이 잘 오지 않는 거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까?”
“네? 아, 네···그렇습니다······.”
내 말에 정곡을 찔린 듯, 잔뜩 움츠러든 현옥의 목소리.
하지만 나는 그의 목소리에 시선도 주지 않고 여전히 창문 너머만을 응시했다.
굶주린 아이들이 휘청휘청 거리를 걸어가고, 먹지 못해 배는 홀쭉하면서 술에는 취한 벌건 얼굴의 사내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제대로 보수조차 하지 못해 낡고 부서진 건물들 사이로 누군가의 울음과 불평이 마치 벌려진 상처 사이에서 나오는 핏물처럼 조금씩 스며 나오고 있었다.
도시를 이루는 근간인 주민부터 도시 그 자체까지.
묘강은 모두 다 함께 죽어가고 있었다.
“매력적인 상품도 없고, 그렇다고 여기에 물건을 팔러 올 상인도 없고···당연한 일이지요.”
“이곳은 옛날부터 이러했습니까?”
“그건···아닙니다.”
잠깐 말을 끌던 그는 나와 똑같이 창문 너머를 응시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 위에 서린 광경은 내가 보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 흐릿한 눈동자 위에는 나는 알지 못하는 과거의 묘강이 여실히 그려져 있었다.
“옛날에는 정말 활기찬 도시였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구할 수 없는 남만의 물건들을 사려는 상단이 매일 열 곳은 넘게 몰려왔고, 그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이들은 넘쳐났죠. 누구 하나 부족함 없이 모두가 풍족한 도시. 모두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그의 눈에 그려진 묘강이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현철.
신승의 친우이자, 현옥의 아버지.
그의 이름이 나오자 그의 주변에 흐르는 분위기가 일변했다.
“남만으로 향하는 가장 안전한 길을 알고 있던 아버지가 사망하자, 남만과 중원 사이를 오가던 상단도 하나둘 사라졌습니다. 누군가는 두려움에 도망쳤고, 누군가는 무모한 상행을 하다가 남만우림에서 목숨을 잃었죠. 어느 쪽이건 모두가 묘강을 떠나는 건 똑같았습니다.”
남만의 물건이 없어지자 묘강을 찾아오는 상단들도 전부 사라졌다.
다른 물건을 주력 상품으로 밀어보려는 시도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묘강은 사실 지리적으로는 최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길은 험하고, 거리도 멀고···중원의 여러 상단이 그 먼 거리를 감수하고서라도 온 이유는 딱 하나. 남만의 물건들뿐이었는데, 그것이 사라졌으니···.”
그렇게 묘강은 지금껏 키워왔던 살을 잘라 먹듯 천천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활기 넘치던 도시는 생명력을 잃었고, 화려하던 건물들은 그 빛을 잃었으며, 도시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은 미소를 잃었다.
“종래에는 이런 꼴이 되어버리더군요. 모든 것이 부서지고, 망가진 죽음의 도시···.”
“·········.”
그의 눈에 서려 있던 묘강의 전경이 그제야 창문의 너머의 그것과 완전히 동화되었다.
과거의 묘강부터 현재의 묘강까지.
긴 시간 여행을 다녀온 그는 진이 빠진 얼굴로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그 누구도 고칠 수 없을 정도로 쇠락했죠.”
“떠나실 생각은 해보신 적 없습니까?”
“떠나다니, 다른 도시로 말인가요?”
“네. 이곳에서 객잔을 해봐야 물 탄 술만 평생 팔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다른 도시로 떠나는 게 현 공자의 미래를 생각하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내 말이 어지간히도 충격적이었나 보다.
동그래진 눈으로 내 말을 몇 번이나 꼽십던 그는, 결국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마치 머릿속에 남아있던 잡생각을 지우듯 말이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아뇨, 역시 떠나고 싶진 않습니다. 이미 죽어버린 도시지만.”
다시 창문으로 시선을 돌리는 현옥.
그의 눈에 있는 묘강의 모습은 시간이 흐를수록 변했지만, 그렇게 변해가는 시선 속에서도 딱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사랑.
그는 이 땅을, 도시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었다.
“이곳은 제 고향이고···가족의, 동료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니까요.”
“그렇다면···알겠습니다.”
나는 그의 대답에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가능성이 있다는 건 이제 확인했다.
이제 남은 걸 딱 하나.
“현 공자님.”
“네, 유 대협.”
더 할 말이 있으십니까? 그런 뜻을 담아 나를 바라보는 그에게 나는 넌지시 말했다.
“저희와 남만행을 함께 하는 건 어떻습니까?”
그것은 각오.
“이미 이 땅은 쇠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평범한 방법으로는 옛 모습을 되찾기란 요원할 뿐이죠.”
자신이 원하는 걸 이뤄내겠다는 각오.
“이 땅을 옛날의 그 찬란한 모습으로 되돌릴 방법은 단 하나.”
그러기 위해선 자신의 목숨조차 버릴 수 있다는 각오.
“다시 한번 남만으로 진출해 원하는 걸 가져오는 것뿐입니다.”
지금 나는 그에게서 그런 각오를 원했다.
“아니, 그건···.”
내 말에 그는 처음에는 난색을 보였다.
당연한 반응이다.
그에게 남만우림은 공포의 대상.
자신의 아버지. 자신의 동료. 자신의 모든 것을 집어삼킨 괴물이었다.
그것을 향해 억지로 등을 들이미는 데 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겠는가.
그래서 나는 그에게 미끼를 던졌다.
쿵!
품 안에서 넣어놨던 주머니 하나를 탁자 위로 던졌다.
사람 주먹 두 개 크기만 한 비단 주머니.
그 자체로도 장인의 손길이 들어간 고급품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것에 비하면 그것도 한낱 무명천과 다를 바 없었다.
살짝 벌려진 입구 사이로 그 안에 담긴 것의 정체를 깨달은 현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 이건···.”
“본래는 남만행에 필요한 물건을 사려고 가져온 것이지만, 이 지도만 있으면 이건 딱히 필요 없을 것 같더군요.”
그 안에 담긴 건 다름 아닌 금원보(金元?).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라, 주머니 안을 가득 채울 만큼 많은 양의 금자였다.
“아, 오해하진 마시오. 표국을 팔고 여기로 도망쳐 온 건 아니니까.”
“아, 음, 네.”
이런, 회심의 농담이었는데. 재미가 없었나.
[그럼 너는 이 농담이 재밌냐?]
어허. 남만 들어가기 전까지 말 안 하기로 했지?
화순의 타박을 한 마디로 잠재우고 다시 현옥에게 말했다.
“이건 의뢰 비용 겸 투자요.”
“투, 투자요?”
“이왕 돈을 가져왔으니 남만의 물건을 사가고 싶긴 한데, 내가 남만의 물건 중 뭐가 비싼지 어찌 알겠습니까. 남만에서는 싼 것이 여기서는 비싸게 팔릴 수도 있지만, 남만에서 비싼 것이 여기서는 싸게 팔릴 수도 있지요.”
“아, 네, 그렇지요. 그런 물건이 몇 개 있습니다.”
“그러니 그것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한 사람 데리고 가고 싶은데, 마침 그쪽이 제격일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저 말입니까?”
“기껏 남만까지 길을 뚫었는데 한 번만 오가는 건 아깝지 않습니까? 여기서 자리를 잡은 채 오가며 물건을 팔 사람이 필요한데.”
씨익.
나는 장사꾼의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다른 곳에 가지 않는다면, 상황이 돌변해도 변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죠. 그래서 당신에게 제안하는 겁니다. 새로운 기회를 잡을 건지. 아니면 이 도시와 함께 이곳에서 죽을 건지.”
내 설명에 그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한 채 금원보가 담긴 주머니만을 멍하니 바라봤다.
눈앞에 상단도 하나 설립할 수 있을 만한 돈이 있는데 정신을 차리는 게 더 이상하겠지.
뭐, 겉으로는 저렇게 보일지 몰라도 머리는 아주 그냥 팽팽 돌고 있을 거다. 무엇이 자신에게 이득이고, 또 무엇이 자신에게 손해인지.
만약 그가 진짜 장사꾼이라면 말이다.
“떠나기 전···내일도 오늘처럼 교육이 잘 진행되면 아마 이틀 뒤겠지. 그때까지 한 번 고민해 보시죠.”
나는 탁자 위에 있던 주머니를 다시 품 안에 넣고 그에게 말했다.
눈앞에 있던 금원보가 사라지자,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내 말에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일도 오늘과 똑같은 시간에 만나죠.”
나는 부디 그가 옳은 선택을 하길 바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내가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그는 나를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쭉, 아주 오랫동안 말이다.
*****
“준비는 다 끝났나?”
“네, 그렇습니다.”
그로부터 이틀 후.
신승과 나는 남만우림의 입구에 선 채 짐을 챙기고 있었다.
“그래도 이놈이 있으니 짐을 많이 챙겨갈 필요가 없는 건 좋네그려.”
“이런 데 쓰려고 가져온 거니까요.”
상단은 남만우림을 건너갈 때도 말을 타고 갔지만,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덥고 습한 날씨도 이미 한서불침(寒暑不侵)의 경지에 오른 우리에겐 불필요했고, 삼일 밤낮 동안 쉬지 않고 움직여야 한다는 고행도 초절정과 화경의 경지에 오른 우리에게는 산책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결국 가면서 먹을 식량과 갈아입을 옷 정도만 챙겨가는 게 전부였다.
“옷도 식량도 옆 도시에서 구해왔다. 이곳은 뭐 제대로 된 것이 없어서 말이다.”
“고생하셨습니다.”
내가 교육을 받는 사이 신승은 옆 도시까지 다녀온 모양이었다.
식량과 옷을 구해올 겸 남만우림에 대해 아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수확은 좀 있었습니까?”
“전혀. 이미 남만 쪽 사람이 넘어온 것도 이십 년 전 이야기라 하더라. 지금 우리 품 안에 있는 지도가 최신, 최고의 정보란 소리지.”
역시 그런가.
남만 바로 옆에 붙은 묘강이 이토록 쇠락했을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그 녀석에게 말은 해봤냐?”
“일단은 해놨습니다. 많이 고민하는 것 같더라고요.”
“흠···그런가···하긴, 자신 목숨이 뭣보다 소중한 법이지.”
이미 그에게 건넸던 제안에 대해서 신승에게도 모두 설명해 둔 상태였다.
내 대답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하면서도,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우리가 떠나온 방향. 정확히는 남풍 객잔을 바라봤다.
하지만 거기서 누군가 오는 기색은 없었다.
“······이젠 더 지체할 수도 없겠구나. 가자.”
“네, 알겠습니···.”
“두 분 모두. 왜 이렇게 늦으셨습니까?”
씁쓸한 표정으로 다시 남만우림을 향해 고개를 돌린 우리 두 사람의 눈앞에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다.
“저는 기다리다 지쳐 한 숨 자고 있었단 말입니다.”
“현 공자···!”
“자네!”
우리가 기다리고 있던 현옥이 남만우림에서 걸어 나온 것이다.
완전히 반대쪽으로만 집중하고 있어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유 대협의 말씀을 듣고 아주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과연 내가 여기 남아있다고 해서 무엇이 바뀌고, 내가 떠난다 해서 무엇이 바뀔지 말입니다.”
자신이 가져온 짐을 능숙한 솜씨로 녀석의 등 위에 올린 현옥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십 년간 가만히 있어서 무엇 하나 바뀌지 않았으니, 이제는 움직여서 무엇이 바뀔지 한 번 봐야겠지요.”
“잘 생각했네, 잘 생각했어! 자네 아버지도 기뻐할 거야.”
“기뻐하실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제 돈 버는 방법은 좀 안다고 하시겠죠.”
신승의 말에 농담 가득한 대답을 건네는 그는, 내가 알던 현옥과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이번 결정이 그의 심상에 많은 변화를 줬다는 증거였다.
“그럼 출발하시죠. 지옥의 구렁텅이이자, 많은 것을 바꿀 땅으로 말이죠.”
“그래, 그리하지.”
내 말에 신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서 나갔고, 그 뒤를 이어 나와 현옥. 그리고 녀석이 함께했다.
남만으로 향하는 첫 발걸음을 떼는 순간이었다.
남만 우림
남만 우림 진입 여섯 시진 째.
온몸을 땀으로 흠뻑 적신 현옥은 끝없이 샘솟아 오르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지도를 바라봤다.
“일단 이쪽 길로 쭉 가면 될 것 같습니다. 아직 지도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은 없군요.”
높은 경지에 오른 나나 신승과 달리, 무공 하나 익히지 못한 현옥은 남만 우림 진입 반 시진만의 녀석의 등 위에 올라탔다.
하긴, 몸 튼튼한 장정도 더워 죽는다는 남만 우림의 후텁지근한 날씨와 우리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술독에 빠져 살았던 걸 생각하면 반 시진이나 버틴 것도 용하지.
처음에는 말이 아니라 노새처럼 보이는 녀석의 등 위에 타라는 말에 난감해하던 현옥도 이제는 마치 원래 타고 다니던 말인 것 마냥 잘 타고 다녔다.
그에 반해 여섯 시진 째 걷고 있는 나와 신승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었다.
진창 같은 바닥과 한여름의 거리보다도 후끈한 열기가 사방에서 덮치고 있긴 했지만, 그 정도로 체력 부족을 호소하기엔 단전에 있는 내공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저희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빠르군요. 잘만하면 사흘 거리를 이틀 만에 돌파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어느 지점까지 온 겁니까?”
내가 질문을 던지자, 현옥은 우리가 현재까지 걸어온 거리와 남은 거리를 대조하기 시작했다.
“삼분지 일쯤 왔습니다, 유 대인.”
“여섯 시진 만에 그 정도 왔다면, 지금 속도대로 움직인다면 내일 도착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단순히 거리로 따지면 그렇지요. 하지만 이곳을 벗어나면 좀 더 천천히, 그리고 안전하게 가야 합니다. 그때부터는 진짜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늪인지 알 수 없으니까요.”
“그렇군요. 길 안내는 웬만하면 현 공자에게 맡기겠습니다.”
나도 지도 읽는 방법을 배워놓긴 했지만, 길 안내는 현옥이 도맡아 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쪽은 현옥이 더 뛰어날뿐더러, 아무래도 걷는 와중에 그걸 다 확인하고 길을 가기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쿠르릉!
하늘에서 들려오는 심상치 않은 소리에 우리 세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우림에 진입한 지 겨우 여섯 시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우리는 어느 정도 우림의 생태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리는 근처에 있던 가장 큰 나무 아래로 딱 붙어섰다.
그리고 잠시 뒤.
쿠과과과광!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소나기가 자주 내린다···라고 듣긴 했지만, 이건 상상을 초월하는구먼.”
“우기에는 일상같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일상이라···하긴, 여섯 시진 만에 다섯 번이나 쏟아지는 소나기를 일상이 아니라면 뭐라 부를까.
괜히 진입할 때 우리가 아는 상식과 다를 거라고 신신당부하는 게 아니었다.
비를 피하면서도 여전히 지도를 확인하고 있던 현옥이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능한 한 원래 길로 쭉 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불가피하게 방향을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원래 저희가 가려는 곳은 늪이 많은 곳에서 그나마 마른 땅을 밟고 가는 길이라, 이렇게 소나기가 자주 내리는 상황에서는 위험할 수 있습니다. 결국 왼쪽이나 옆으로 방향을 틀어야 하는데···.”
“다른 곳이라고 그리 편하진 않군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현옥.
“한쪽은 나무나 식물이 많이 자라고 있어 아무리 많은 비가 내려고 땅이 진창이 되지는 않지만, 대신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못 할 정도로 속도가 느려질 겁니다. 그나마 길 다운 길이 있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길을 만들어도 금방 식물에 뒤덮여 길을 낼 생각도 하지 못한 곳이거든요.”
지금까지와는 달리, 라.
앞에서 열심히 헤치고 나왔던 그 ‘길 다운 길’을 떠올리곤 나는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곳으로 가는 건 힘들 것 같군요. 다른 길은 어떻습니까?”
“다른 쪽은 그나마 땅 사정은 괜찮습니다. 옛날에 남만인들이 중원과 오가던 길이라 그런지 나무도 많이 없고, 길도 웬만한 비로는 늪이 되지 않지요. 하지만···자, 한 번 보시죠.”
여러 설명보다는 한 번 보여주는 게 낫다. 그리 생각한 것인지 현옥은 내게 지도를 내밀었다.
늪을 뜻하는 기호가 많은 앞쪽과 나무와 식물을 뜻하는 기호가 빼곡히 그려져 있는 오른쪽과 달리, 왼쪽은 확실히 그런 기호들이 많이 적었다.
다만, 지금껏 왔던 길에는 없던 기호가 그려져 있을 뿐.
“남만의 짐승들···입니까?”
“네. 그것도 남만에서 제일 위험한 적표입니다.”
현옥의 상단에서 지도를 만들 때, 다른 것은 자신들만 알아볼 수 있는 기호를 사용했지만, 짐승만큼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해골 표시를 사용했다.
만에 하나 기호를 다 잊어먹거나 하더라도, 해골 표시만은 반드시 피하라는 걸 알려주기 위함이자, 그만큼 남만의 짐승이 위험하다는 걸 알리기 위한 그들만의 수단이었다.
“옛 남만인들이 이 길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죠.”
“으음···그렇군요.”
그가 말해준 남만의 짐승들은 하나같이 무시무시한 것밖에 없었다.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커다란 뱀부터, 스치는 것만으로도 위험한 맹독을 지닌 벌레. 그리고 지나가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수백만 마리의 개미들까지.
하지만 그놈들은 그나마 인간을 위협으로 생각해서 도망치거나, 아니면 무시하는 쪽이 대부분이었다.
자신의 영역에 들어서더라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순순히 지나가게 해줄 정도였으니까.
허나 이놈들은 다르다.
“남만 우림에서 유일하게 인간을 먹이로 생각하고 활발하게 사용하는 건 오직 이놈들밖에 없습니다.”
크기는 중원에서 볼 수 있는 호랑이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힘과 속도는 절대 거기에 뒤지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꾸준히 군이나 민간에서 사냥을 나오는 호랑이와 달리, 적표들은 딱히 천적이라 할 만한 게 없었다.
그래서 이 우림에서 꾸준히 개체 수를 늘려나갈 수 있었고, 지금은 한 집단에 수십. 어쩌면 수백 마리까지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놈들을 무시무시한 사냥꾼으로 만드는 건 따로 있었으니.
“이 우림은 놈들의 터전. 이 땅이 곧 놈들의 사냥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에게는 크나큰 장해인 우림조차 놈들에게는 자신의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말마따나 자기 집에서는 거지도 반은 먹고 들어가는데, 거기에 쳐들어오는 놈들을 사냥하는 게 얼마나 쉬울까.
우리보다 우림에 훨씬 친숙할 남만인들도 이 편한 길을 포기한 건 다 이유가 있다는 소리다.
하지만 살아있는 짐승이라···확실히 문제가 있는데.
“신승 어르신.”
“음.”
옆에서 가만히 현옥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던 신승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 끝을 알 수 없는 지옥 같은 숲과 수십. 어쩌면 백을 넘을지도 모르는 짐승이라.”
나 혼자였다면 이미 진작에 답을 꺼냈겠지만, 이 무리의 좌장은 어디까지나 신승.
그의 대답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낮은 목소리로 염불을 되뇌던 신승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살고 싶어 꽃을 피우는 식물보단, 사람을 잡아먹는 마물을 어찌 하는 편이 낫겠지.”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왼쪽으로 길을 틀도록 하겠습니다.”
신승의 말을 들은 현옥이 바로 지도 위에 그려져 있던 길을 수정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최대한 안전한 길로 다닐 테니까요.”
우리의 표정이 영 좋지 않다는 걸 감지한 현옥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히 상단 일을 배웠는지 사람 눈치는 읽을 줄 아는 구만.
하지만 역시 정식으로 상단을 이끌어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한 수 모자라다.
“괜찮습니다. 원래 예정된 길로 가시지요.”
“하지만···.”
“우리가 걱정하는 건 그쪽이 아닙니다.”
“네?”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현옥을 향해 씩 미소지으며 말했다.
“보시면 압니다.”
*****
한바탕 폭우가 쏟아진 후.
비를 잠시 피해 나무 밑에 숨어있던 짐승들이 하나둘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적색의 바탕에 흑색의 점박이가 군데군데 박힌 호랑이와 닮은 짐승.
조금 전까지 유현 일행이 그토록 떠들던 적표였다.
나뭇잎에 가려져 언뜻언뜻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던 적표들은 다시 햇빛이 내리비치는 걸 확인하자마자 다시 밖으로 나왔다.
어흐흥!
그중에서도 다른 적표와 비교해도 그 크기가 배는 되는, 가히 호랑이와 비견될만한 몸집을 가진 적표가 하늘을 향해 포효하자, 주변에 숨어있던 암컷과 새끼들이 나무 아래에서 튀어나왔다.
아무리 남만인의 두려움을 한몸에 사고 있는 적표라해도 우림의 환경은 두려운 모양이었다.
제일 강인한 무리의 대장이 먼저 나서서 확인하고 나서야 제일 약한 짐승들이 튀어나왔으니 말이다.
이번 폭우에 혹시 무리의 일원이 사라지지는 않았을까.
주변과 비교했을 때 기이할 정도로 풀 한점 자라지 않은 땅을 밟아가며 자신들의 무리를 확인하는 적표의 대장.
겉모습은 비록 짐승일지언정, 분위기 만큼은 자신의 백성을 걱정하는 왕과 다를 바 없었다.
백 하고도 서른다섯 마리의 무리가 모두 안전하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대장은 안도하며 자신의 거처로 돌아···.
“그래.”
가려는 그 순간.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질적인 짐승의 소리에 털을 곤두세웠다.
어디지? 어디야?
옆에 있던 부하들은 자신이 들었던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 갑작스러운 자신의 행동에 놀라 자신을 바라보기만 했다.
방금 그만한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정신 똑바로 차려! 그런 의미를 담아 자신의 양옆에 있는 부하들에게 뭐라 소리치려던 찰나.
“네가 대장이구나?”
쿵!
자신의 반. 아니, 반의반도 안 될 것 같은 짐승이 하늘에서 떨어지더니.
콰앙!!!
대지가 흔들렸다.
크허헝!
으헝!
갑작스러운 진동에 폭우를 피하다 이제야 겨우 고개를 내밀던 적표들이 공포 섞인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지진을 경험하지 못한 적표들에게 방금 그 진동은 그들 내면에 깊숙이 숨어있던 공포심을 자연스레 끌어올렸다.
어흥!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갑자기 눈앞에 떨어진 짐승과 마주하던 무리의 대장이 목청을 높이자, 곧 무리의 공포도 잦아들기 시작했다.
“눈이 흔들리는 걸 보아하니 너도 생전 처음 겪은 일인 것 같은데···그걸 참고 무리부터 진정시킨다.”
이 울음소리.
기억났다.
“확실히 무리의 장으로 삼을만한 놈이로구나.”
자신의 기억대로라면 분명 ‘인간’이란 이름을 가진 짐승이 이와 비슷한 소리를 냈다.
자신의 몸에 붙은 발톱과 이빨로만 덤비는 다른 짐승과 달리, 자신의 몸에서 떨어진 물건으로 우리를 공격하는 짐승.
그 작은 육체에 믿을 수 없을 만큼 강인한 힘을 내는 짐승.
함께 사냥을 나섰던 아버지가 무척 위험한 짐승이라 했던 바로 그 짐승.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짐승. ‘인간’의 등장에 무리의 대장은 털을 부풀렸다.
크르릉.
으르렁.
대장이 털을 부풀리자, 눈앞의 짐승을 적이라 생각한 옆의 두 적표도 털을 부풀렸다.
인간은 이렇게 몸집을 키우면 공포에 빠진다.
아버지에게 배웠던 인간 사냥의 기본을 다시 떠올리며 대장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몸집을 부풀렸다.
하지만 자신의 앞에 있는 인간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지금껏 수백, 수천 번의 사냥에 성공했던 대장도 이런 짐승은 본 적이 없었다.
무릇 눈앞의 적이 반응을 하면, 자신도 반응하는 것이 당연한 거를.
이런 짐승은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가.
대장이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부하 둘이 동시에 인간을 덮쳤다.
그들이 세 명이 함께 나가면 으레 하는 사냥법 중 하나였다.
옆의 둘이 위협한 후, 대장인 자신이 목숨을 끊는다.
그 크기가 작은 짐승에게 주로 사용하는 사냥법. 만약 눈앞의 이 짐승이 자신들이 알던 원숭이 같은 짐승이었다면 분명 옳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이 짐승은 다르다.
어딘지 모르지만, 무시무시한 기운을 풍기고 있다.
목청을 높여 부하들의 움직임을 멈추려는 대장.
하지만 그보다도.
쿵!!!
눈앞의 짐승이 더 빨랐다.
파팡!
짐승이 발을 내딛는 순간 다시 한번 대지가 크게 떨리더니, 놈을 향해 달려들던 부하들의 몸이 크게 떠올랐다.
무리 중 가장 높이 뛰어오를 수 있는 자신보다도 훨씬 높이 떠오르는 두 부하.
절대 본인들의 힘으로 뛰어오른 건 아니다.
그렇다면 설마···.
“하지만 아무리 자신의 무리를 지키려 했다 하더라도 한낱 짐승이 인간을 해하려 한 건 용서할 수 없구나.”
···눈앞의 짐승이 이 광경을 만들어낸 것인가?
울음을 멈추기가 무섭게 마치 기다란 털처럼 살기와 적대심을 넘실넘실 피어 올리는 눈앞의 짐승에 대장은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공포심을 느꼈다.
아버지가 죽고 무리의 대장이 되고 난 후로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
만약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벗어나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으르르르···.
몸을 있는 대로 부풀린 채 이빨을 악물고 몸을 바짝 긴장시킨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이미 정해졌다.
설사 자신의 목숨을 버리더라도 눈앞의 짐승을 막아낸다.
그것은 이 무리의 대장을 맡을 때부터 정해진 천명.
절대로 어겨선 안 될 그들만의 법이었다.
크허헝!
남아있던 공포심을 모두 지워내듯, 무리의 대장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울음을 내뱉었다.
으허헝!
으허허헝!
그 안에 담긴 결심을 읽어낸 것일까.
무리의 전부가 그에 호응하듯 함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눈앞의 작은 짐승. 유현은 씩 미소를 지었다.
“그래, 한 번 붙어보자꾸나. 마침 나도···.”
스윽.
그는 자신의 발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새로 익힌 걸 살아있는 것한테 시험해보고 싶은 참이었거든.”
적표의 무리
이야, 그놈 눈빛 한 번 참 매섭네.
자신의 동료? 부하? 들이 땅에 구르고 있는 상황에서도 눈앞의 적표는 적대심을 감추지 않고 나를 향해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확실히 무리의 대장이라는 걸까.
주변의 다른 적표와 비교해도 두 배는 큰 체구도, 역전의 용사임을 알려주듯 온몸에 남은 흉터도 대단했지만, 지금 내 눈앞에 당당히 버티고 서있는 이 모습을 높이 평가하고 싶었다.
자신보다 강한 자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당당히 맞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맹수랑 맞상대하는 것도 오랜만이네.]
확실히 전역하고 난 이후로 직접 사냥을 나선 적은 없지.
물류가 풍부한 국경지대지만, 본디 군대라는 곳이 그렇지 않은가.
안 그래도 하루 다섯 끼는 먹는 놈들이 밖으로 나가서 싸움 한탕 뛰고 오면 그 두 배는 더 처먹으니, 아무리 가득 찬 곳간이라도 싸움이 조금만 활발해지면 보급 전에 비워지기 마련이다.
자기들이 먹은 건 다 까먹고 배고프다고 아우성치는 부하 놈들을 먹이려면 결국 내가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풀 한 점 자라지 않는 허허벌판이 대다수인 북해지만, 그런 극한의 상황에서도 살아가는 짐승은 어디에나 있다.
군마 저리 가라 할 만큼 커다란 몸집을 가진 북랑(北狼)부터 새하얀 털을 가진 눈 속의 사냥꾼 설호(雪虎). 그리고 지금은 내 자가용이 된 마왕이 이끄는 북해의 말 무리까지.
한때는 그들을 사냥해 오는 게 내 주 업무였을 정도니,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사냥하러 다녔는지 대충 짐작이 되리라.
하지만 그것이 이젠 다 옛말. 북해와의 평화 기류가 감돌고 나서부턴 싸움이 줄어들어 놈들이 먹는 것도 줄었고, 자연스레 내가 사냥을 나서는 일도 없어졌다.
전역하고 난 뒤야···내가 뭐하러 밖에 나가냐. 다 사서 먹지.
애초에 성도 내에서 사냥하러 다닌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하지만 짐승을 사냥한다는 흥분을 잊은 건 아니었다.
수많은 인간이 서로를 죽이기 위해 싸우는 전쟁터에서도 느낄 수 없는 열망.
비슷한 경지에 이른 두 사람이 누가 조금이라도 더 높은 경지에 올라 있는지 가리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상황에서도 느낄 수 없는 호승심.
인간과 비인간. 비짐승과 짐승.
그런 이종(異種) 간의 싸움은 말로는 설명 못 할 흥분감이 있었다.
서로의 목적은 단 하나.
누가 먼저 상대를 죽이느냐 뿐.
크헝!
먼저 움직인 건 적표였다.
체구가 작은 다른 적표들과는 달리, 중원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대호(大虎)와 비슷한 크기의 적표는 그 체구에 걸맞지 않게 엄청난 속도로 나를 덮쳤다.
마치 공중에 붉은색 용액을 묻힌 커다란 붓을 데고 주욱- 그은 것처럼 새겨지는 붉은색 선.
가히 절정의 고수와도 비견될만한 속도와 그 이면에 숨은 엄청난 폭력성.
하지만 그러면서도 축축한 대지 위에 발자국 하나 남지 않는 은밀함까지.
왜 남만인들이 이 길을 포기해야만 했는가. 왜 현옥이 이 길을 향한다 했을 때 두려워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것은 짐승이 흔히 보이는 마구잡이 성 공격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왕의 일격.
적표의 왕이 자신의 적을 향해 낼 수 있는 최선의 공격이었으니.
그렇기에 나는 그의 일격에,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우를 보였다.
오른발을 발목께까지 살짝 들어, 그래도 아래로 내려찍는다.
천마보법(天魔步法) 오의.
군림(君臨)
왕의 공격에는 왕의 발걸음으로.
그가 행한 공격에 비하면 너무나 느리게 보이는 발걸음이었지만, 거기서 발휘된 힘은 동등.
크허헝!
아니, 그 이상이었다.
집채만 한. 그저 한낱 미사여구가 아니라 정말로 집채만 한 적표가 그 한 발자국의 발걸음에서 일어난 충격으로 인해 그대로 튕겨 나갔으니 말이다.
하지만 군림이 일으킨 여파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쿠구구궁!!!
으헝!
땅 위에 자라있던 풀이 떨리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라있던 거목이 흔들리며, 굳건한 대지가 흔들린다.
다시 한번 휘청이는 대지에 왕의 싸움에 멀찍이 물러나 있던 적표 무리가 혼란스러운 울음 소리를 내뱉었다.
자신 외에는 그 무엇도 서 있는 것을 허용치 않는 것.
그것이 바로 군림.
천마의 발걸음이 가진 진짜 힘이었다.
으르르···.
“호오?”
하지만 그 힘 앞에서도 ‘왕’은 다시 일어섰다.
단단한 대지조차 몸을 떨게 만드는 충격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직격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일어섰다.
후들거리는 다리. 땀에 젖어 몸에 딱 붙은 털. 마구 흔들리는 눈동자.
그 모든 것이 이미 한계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음에도 적표는 다시 나에게 맞서려 하고 있었다.
그 몸을 일으키게 하는 건 순수한 육체의 힘인가?
아니면 한 종족의 왕이 가진 자부심인가?
그 답이 어느 쪽인지 나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건 놈은 다시 일어서서 아까와 같은. 아니, 더욱 불타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행동에 감탄하고 있던 것도 잠시. 다시 내게 맞서려 하는 놈을 바라보며 입가에 진한 미소를 그렸다.
“재밌네.”
사실 조금 전 이 일격에 놈이 꽁지 빠진 듯 도망치리라고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놈을 우습게 본 건 절대 아니었다.
방금 그 공격은 내 진심을 담은 일격.
인간으로 치자면 절정 고수조차 막지 못하고 큰 내상을 입거나, 억지로 부딪히려 했다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강맹한 공격이었다.
사실 놈이 땅에 널브러졌을 때, 아직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보고 의외라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놈은 내 예상을 넘어, 다시 일어서서 나를 노려보며 투기를 내뿜고 있었다.
인간도 하기 힘든 일을 한낱 짐승이 해냈다.
지금껏 한 번도 강자를 만나보지 못한 무지한 자의 오만도 아니다.
몸에 서린 흉터만 봐도 그가 무수한 강자와 싸워 이겨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걸 알 수 있으니까.
강한 자에게서 느낄 수 있는 공포를 충분히 암에도, 그것을 이겨내고 스스로 섰다.
크허허허헝!!!
펑!
그것은 마치 폭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땅에 감춰둔 폭약이 터지듯, 땅을 박차고 날아오른 적표.
주위의 거목들을 훌쩍 넘어선 높이까지 뛰어오른 적표는, 그대로 나를 향해 내리꽂듯 달려들었다.
공중으로 떠오른 건 땅을 흔들리게 하는 공격을 피하기 위함인가?
지금껏 이런 공격을 하는 적은 만나본 적 없을 텐데, 바로 파훼법을 찾아내다니.
“정말로 재밌어.”
나는 물론이거니와 내 주변까지 적표의 그림자로 가득한 상태에서도 나는 웃었다.
설마 그저 눈앞의 장애물 정도로 생각했던 짐승에게 이토록 즐거움을 느낄 줄이야.
하지만 그렇기에 아쉬움도 들었다.
이번 공격이 녀석의 최후의 일격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기에.
스윽.
나는 한 점의 후회도 없는 최후를 선보이기 위하여 발을 들었고.
쿵!
그대로 다시 발을 내렸다.
·········.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
다시 진동이 찾아오리라 생각했던 적표들은 내가 발을 내렸음에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자 멍청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런 그들이 발견한 건.
크와아아앙!!!
쿵!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늘을 날아올랐던 자신의 왕이 마치 날개를 잃은 새처럼 떨어지는 광경이었다.
천마보법의 오의. 군림은 그저 그 기운을 마냥 사방으로 퍼뜨리는 것이 아니었다.
사용자가 원한다면 전후좌우. 심지어 상하까지 모두 그 기운을 뿜어낼 수 있었다.
전번의 사용자는 이미 정신이 나가 있어서 그냥 주변으로 군림을 퍼뜨리는 수준으로밖에 사용하지 못했지만, 나는 다르다.
이미 오의의 사용에 익숙해져 있는 내게 군림의 힘을 다른 방향으로 뿜어내는 것 정도야 손쉬운 일이었으니까.
놈의 회심의 일격이 내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한 채 아래로 떨어진 건 필연이었다.
조금 전과 같은 공격. 아니, 더욱 강한 공격을 직격으로 맞아버렸으니 말이다.
쿠웅!
집채만 한 적표의 거체가 땅으로 떨어지자, 마치 군림을 제어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사용한 것처럼 땅이 울렸다.
허나 적표 무리의 반응은 아까와 달랐다.
자신의 왕이 패배했다는 사실에 땅이 울리건 말건, 모두 입을 쩍 벌리고, 고양이류 짐승 특유의 눈을 세로 동공을 쭉 키운 채 나와 왕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으르릉···.
크르릉···.
하지만 더욱 놀라운 건, 그들 중 도망치는 놈들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자신 중 가장 강한 자가 당하면 도망친다.
짐승 세계는 물론이거니와 인간 세계에서도 당연한 사실.
하지만 놈들은 그런 당연한 사실을 역행한 채 나에게 이빨을 들이밀었다.
마치 자신의 왕을 지키려는 것처럼 말이다.
흐음···이걸 어쩐다···.
원래 계획과는 조금 멀어진 반응을 바라보며, 나는 매끈한 턱을 만지작 거렸다.
원래대로라면 저것들이 그냥 가만히 물러나 줘야 하는데 말이지.
힐끔, 그리 생각하며 아래를 바라보자, 가쁜 숨을 헐떡이는 적표의 왕이 내 눈에 가득 들어왔다.
뼈가 몇 군데 부러졌지만, 그래도 그 뼈가 어디 찔리거나 한 건 아닌지 입이나 살 등. 외부로 피가 나는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내상 정도야 좀 있겠지만, 이만한 크기의 짐승이라면 며칠 요양만 하면 큰 후유증 없이 낫겠지.
하지만 지금은 발톱 하나 까딱하기 힘들 정도로 힘이 빠진 것 또한 사실.
만약 내가 원한다면 지금 당장 이놈의 목숨이야 거둘 수 있지만···.
“흘흘흘. 뭐가 그리 고민이냐?”
움찔.
내 옆에 갑자기 나타난 ‘또 다른 짐승’의 모습에 내게 다가오던 적표 무리가 발걸음을 멈췄다.
하나만으로도 힘들다고 생각한 짐승이 갑자기 또 하나 나타나니 놀란 것이리라.
“···딱히 사람 피비린내는 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놈들의 행동은 싹 무시한 채, 갑자기 내 옆에 나타난 신승에게 대답했다.
“현 공자의 말대로 진짜 이놈들이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흔적이나 증거가 있으면 뒤도 가리지 않고 다 때려잡으려고 했는데, 그런 건 보이질 않아서 말입니다.”
“호오, 네 녀석이 그것도 알아볼 줄 알더냐?”
“예, 뭐···전에 사람 잡아먹는 놈들을 몇 번 잡아봤거든요.”
북해는 모든 물자가 부족하며, 그것은 짐승에게도 통용되는 말이다.
북해의 짐승들은 무엇 하나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경우가 많았고, 그것은 동족의 시체나 사람이라고 해서 예외를 두진 않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열정적으로 인간을 사냥하는 무리는 있었고, 나는 그런 무리를 그 누구보다 열심히 잡아 죽이러 다녔다.
“사람을 잡아먹은 놈들은 이미 냄새부터 다르죠.”
그것이 천마의 권능 덕분인지, 아니면 내게 그것을 맡을 수 있는 특수한 재능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정확한 건 놈들에게는 그저 웃으며 넘어가 줄 수 없는 끔찍한 냄새가 풍겼고, 나는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내가 있던 동안에는 최소한 짐승이 사람을 사냥해 잡아먹는다, 라는 끔찍한 소문은 절대로 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놈들은 그런 냄새가 나지 않거든요. 그래서 이놈들의 처분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현옥의 정보는 무려 이십 년 전의 것.
인간은 몰라도 짐승의 무리에서는 몇 세대는 넘어갈 긴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인간을 잡아먹었던 무리도 인간의 발걸음이 뜸해지면서 다른 사냥감을 노리기 시작했고, 결국 오지도 않는 인간을 잡아먹는 놈들은 없어졌다.
뭐···확실하진 않지만, 아마 이렇게 흘러갔겠지.
“그래, 당장 널 노리는 것도 먹이라기보다는 갑자기 나타난 적과 싸우는 느낌이었으니, 네 생각이 틀리진 않았을 거다.”
반쯤 예상에 가까운 대답에 신승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나처럼 이 놈들이 사람을 잡아먹는 짐승은 아니다, 라고 느끼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왕과 싸웠고, 이놈들은 그 복수를 원합니다. 보아하니 몇 마리 쓰러뜨리는 거로는 그냥 지나가게 해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원래 계획도 가장 강한 놈 몇 마리 쓰러뜨리고, 적표들이 두려워서 도망쳤을 때 슬슬 지나가는 것이었다만, 완전히 반대의 상황을 맞닥뜨리고 말았다.
설마 이토록 동료애가 끈끈할 줄이야.
이 정도면 거의 내 부하 놈들이랑 비등비등한 정도 아닐까?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나. 내가 한 손 보태주마.”
“네? 불가의 제자가 살수를 펼치시려고요? 말 못 하는 짐승이라고 그리하시면 안 됩니다. 부처님이 다 보고 계신다고요.”
“예끼, 이놈아! 내가 언제 이 불쌍한 미물들을 어찌한다 했더냐?”
빼빼 마른 손을 들고 휘두르는 신승의 모습은 겉으로 봤을 땐 퍽 웃겼지만, 나는 전혀 웃지 못하고 얼른 그에게서 훌쩍 벗어났다.
수천 개에 다다르는 소림의 무공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백보신권을 극성까지 연마한 주먹에 맞서려는 바보가 어디에 있을까.
원래 이런 건 그냥 도망치는 게 상책이다.
내가 옆으로 비켜서자, 신승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쓰러뜨린 적표의 왕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무릎을 꿇고 그의 몸 위에 손을 올렸다.
우웅.
그러자 신승과 적표의 몸이 미세하게 흔들리더니, 조금 전만 해도 가쁘던 적표의 숨소리가 점점 안정을 되찾았다.
“이건···?”
“본디 역근세수경은 근육을 가꾸고 몸을 만드는 내공이다. 살아있는 생물의 치료야 그리 어렵지 않지.”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는 신승이었지만, 나는 이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을 내공으로 치유하는 것조차 어려운데, 인간과는 전혀 다른 짐승의 몸을 치유하기가 어찌 쉬울까.
하지만 신승은 오히려 그것이 쉬운 일인 양 말하고 있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고절한 내공과 뛰어난 실력. 이 두 가지 모두에 경악하고 있던 그때.
으헝···?
어느새 치료가 끝난 적표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내가 왜 일어났지? 하고 놀라는 적표 본인보다도 더욱 크게 놀라는 주변의 적표 무리.
그들의 눈으로는 마치 죽은 자신의 왕이 되살아난 것처럼 보였을 테니, 놀라는 것도 당연하겠지.
“에잉, 뭔 놈을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놨냐. ···그래도 이놈들은 좀 괜찮아서 그나마 다행이구먼.”
왕의 치료를 마친 신승은 쉬지 않고 좌우로 날아가 있던 두 마리의 적표도 모두 치료를 끝냈다.
원래부터 큰 상처를 입지 않은 상태라 그런 걸까. 대장 적표를 치료할 때보다 훨씬 빨리 치료를 끝냈다.
“그래도 이제 후유증 같은 건 없을 거다. 뭐, 당장 사냥을 하고 말고는 네놈이 원하는 대로 하면 되겠지만 말이다.”
툭툭. 적표 대장의 머리를 쓰다듬는 신승. 눈앞의 이 짐승이 자신을 어떻게 한 것인가? 계속 멍청한 눈으로 눈앞의 신승을 바라보던 적표 대장은.
할짝.
“허어?”
할짝, 할짝, 할짝.
“허허허, 이놈. 내가 널 살려준 걸 알아보는 것이냐?”
짐승의 앞발. 아니, 신승의 팔을 핥기 시작했다.
“뭐···생각했던 거랑 방법은 조금 다르지만, 그래도 어떻게 잘 된 것 같네요.”
원래는 찍어 누르고 길을 지나갈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되어도 나쁠 건 없다.
내 손에 피를 묻힐 필요도 없고, 적표들도 아무도 피를 흘리지 않았으니까.
무리의 대장이 우리를 순순히 받아들이니, 다른 적표들이라고 어찌할 수 있을까.
마치 인생(人生). 아니, 표생(豹生) 최악의 적을 만난 것처럼 살기를 뿜어내던 놈들도 모두 살기를 지운 채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자신의 왕보다 더 강한 자와, 자신의 왕을 치료해 준 자.
이 두 짐승으로 이루어진 무리는 이길 수 없다고 판별한 것일까.
차라리 우호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모양이었다.
“현 공자! 이제 나오셔도 됩니다!”
이쯤 되니 더 현옥을 대피해 놓을 필요도 없어 보였다.
“저, 정말입니까?”
“이놈들 보십시오. 어디 위험한 것처럼 보입니까?”
내 말에 자신이 타고 있던 말과 함께 앞으로 나오는 현옥.
갑자기 나타난 세 번째와 네 번째 짐승에 적표들도 꽤나 놀란 눈치였지만, 그래도 나와 서로 같은 울음소리를 내는 걸 보고 같은 무리라 생각한 것인지 가까이 다가갔다.
만사태평한 녀석이야 자신보다 훨씬 큰 적표가 다가왔음에도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흘러가듯 지나갔지만, 현옥은 그러지 못했다.
벌벌 떨면서 적표들에게 스치지도 않겠다는 듯 최대한 몸을 움츠리는 현옥.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으니.
크르렁!
현옥이 다시 우리 쪽으로 합류하자, 무리의 대장을 포함한 세 마리의 적표가 우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거 설마···.
“타라···라는 걸까요?”
“···알아보는 방법은 하나뿐이겠지요.”
떨리는 목소리로 적표를 가리키는 현옥에게 대답하며, 조금 전까지 싸우고 있던 무리의 대장 등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 순간.
어흥!
커다란 포효와 함께 앞으로 달려나가는 무리의 대장.
빠르다.
진짜 빠르다!
조금 전 나와 싸우던 그때의 몸놀림을 그대로 달려나가는 적표의 대장.
“흘흘, 이거 꽤 괜찮구먼.”
“으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악!!!”
그리고 내 옆에서 그보다는 조금 느리지만, 역시 빠른 속도로 앞으로 치고 나가는 신승의 적표와 계속해서 비명을 내지르는 현옥을 태운 적표까지.
이히힝~
맨 뒤에서 언제나 와 다를 바 없는 표정으로 엄청난 속도를 내며 따라붙는 녀석까지.
그렇게 우리는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이 남만 우림의 끝이 보일 때까지 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