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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능으로 무림최강-67화 (67/185)

쇠락한 묘강(1)

내가 신승에게 호위 의뢰를 받았다는 말에도 기정이는 딱히 놀라지 않았다.

아니,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감탄하기 여념 없었다.

“역시 도련님! 정파 제일 고수인 신승 어르신께서 호위 요청을 하실 정도라니! 저는 믿고 있었습니다!”

대체 뭘 믿고 있었고, 그런 괴물 같은 인간이 나한테 의뢰를 맡기는 게 이상하지도 않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밤하늘의 별보다도 더 반짝거리는 눈빛을 보고 결국 포기했다.

뭔 놈의 눈빛이 마교에서 보던 광신도 눈빛이랑 똑같냐.

[쟤한테는 네가 천마 같은 존재인가 보지 뭐. 아주 그냥 인생역전 제대로 시켜 줬잖아?]

뭐···그렇게 말한다면야 할 말 없지만.

그래도 덕분에 신승을 만나러 가는데 가타부타 변명할 필요가 없었으니 다행이었다.

오히려 나갈 때 ‘신승 어르신이라고 싸게 받지 말고 다 받아 오세요~’라는 배웅까지 받았다.

···이제 기정이도 간이 커질 대로 커졌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신승한테 저렇게 말하다니.

하긴, 이제 녀석도 이젠 그 옛날 시종이 아니라, 전 중원을 상대로 장사하는 대형 표국의 총관이니,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지.

간단히 짐만 챙기고,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이 익숙해진 녀석(다른 사람들이 마왕이라고 이름을 붙여주긴 했지만, 나는 아직 어색해서 녀석이라 불렀다)과 함께 표국 밖을 나섰다.

신승은 도시 경계에 있는 관제묘(關帝廟; 신을 모시는 사당)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서찰을 받았던 그 순간부터 그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드디어 왔군.”

신승은 저번에 만났을 때와 똑같이 허름한 가사에 차양이 넓은 삿갓을 쓴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쩍 마른 팔다리만큼이나 얇은 지팡이를 손에 들고 있는 늙은 승려.

누가 이런 모습을 보고 천하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고수라 생각할까.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아니, 나도 방금 왔네.”

“마차를 가져 왔으니 올라타시죠.”

차라리 말을 하나 데리고 올까도 생각했지만, 신승이 말을 탈 줄 모르는 경우 짐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냥 마차로 가져왔다.

어차피 이 녀석이 마차와 사람 하나로 속도가 느려지거나 힘이 달릴 녀석은 아니니 어느 편이든 상관없었다.

“그럼 사양하지 않겠네.”

신승은 내 말에 바로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호위 의뢰용으로 갖춰둔 마차라 주문 제작한 고급 마차에 비하면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그래도 일반적으로 이용되는 마차보다는 괜찮은 물건이었다.

덜컹.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바로 고삐를 흔들어 녀석을 출발시켰다.

곧 밤이 될 늦은 저녁이었지만, 하루 이틀 잠 못 자는 거로 피곤을 느낄 생명체는 이 셋 중에 없었다.

달칵.

마차 석 뒤편에 있던 창이 열리는 동시에 마차 안쪽에서 신승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행 준비는 어느 정도 해놨나?”

여행이라.

나는 신승의 독특한 단어 선택에 픽, 하고 짧은 웃음을 내뱉었다.

이토록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위험천만한 여행이 세상천지에 또 어디 있을까.

여행보다는 차라리 자살행위라는 말이 더 어울릴 법한 여정이거늘.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반대로 입은 그의 질문에 바로 대답을 꺼냈다.

“남만어를 오랫동안 연구한 학자를 구해 그에게서 남만어를 배웠습니다. 아직 완벽하게 구사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남만인과 만나면 어느 정도 대화는 가능할 겁니다.”

“허어, 거기까지 해뒀나? 정말 대단하군.”

“힘들 때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이 된다. 돈이 있으면 좋은 이유 중 하나지요.”

물론 돈 한 푼 안 쓰고 공짜로 익힌 남만어긴 하지만, 여기서 ‘사실 제 머릿속에 있는 유령인지 영혼인지 하는 친구한테 배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이쪽이 설득력이 있었다.

“자네가 그렇게까지 하니, 내 노력이 영 시시해 보이는구먼.”

“아닙니다. 저희를 안내해 줄 길잡이를 찾으시는 게 어찌 시시한 일일 수 있겠습니까.”

그를 억지로 띄워주려 이리 말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가 한 일은 이번 여행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이번 한 달간 남만어를 배우면서 틈틈이 남만에 대한 다른 정보도 구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구했다.

그리고 내가 정보를 얻으면 얻을수록 나오는 답은 딱 하나.

남만우림은 절대 허투루 볼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중원에서는 볼 수 없는 사나운 맹수와 독이 잔뜩 오른 식물들도 무척 큰 위협이었지만, 그보다 더 위험한 건 바로 중원과 남만을 잇는 길이었다.

오직 남만의 원주민밖에 알지 못하는 ‘옳은 길’.

만약 거기서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났다간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늪 속에 빠져버린다.

수천 년간 건기와 우기를 반복하며 만들어진 질척한 늪은 남만과 중원을 오가는 이들이 목숨을 잃는 가장 큰 이유였다.

그렇기에 그 ‘옳은 길’을 아는 길잡이의 유무는, 어찌 보면 남만의 인사말을 한두 개 할 줄 아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다 할 수 있었다.

“그 길잡이 말인데···사실 나도 확신할 순 없네.”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말보단 직접 보여주는 게 빠르겠지.”

내 질문에 신승은 어두운 목소리와 함께 한 장의 서찰을 내게 내밀었다.

과연 여기 글이나 쓸 수 있을까, 싶은 질 낮은 종이와 괴발개발 그린 그림. 그리고 종이에서 풍겨오는 싸구려 백주와 토사물의 냄새까지.

아니, 자세히 보니 이건 그림이 아니라, 글자였다.

도대체 얼마나 취한 상태에서 글을 쓴 거야?

그렇게 취한 상태에서 용케도 글을 써냈네.

이것을 적어 보낸 인간에게 경멸과 감탄이라는 상반된 감정을 느끼며 읽었···아니, 해석해 나갔다.

읽자마자 지끈거리는 머리와 뻐근해지는 눈동자에는 감사하게도, 거기에 적힌 글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도움은 줄 수 없지만, 오시려면 오십시오.]

대신 다른 의문이 떠오른 게 문제지.

“···이건 무슨 뜻입니까?”

“글쎄. 나도 뭐라 말을 못 하겠네. 그를 못 만난 지도 벌써 삼십 년이 넘었으니 말이야.”

삼십 년···이라니. 그 정도 못 보면 그냥 사실상 남남 아니야?

그래도 인연이라고 이렇게 서찰이라도 보낸 게 더 놀라울 지경이다.

“···정말 그런 사람을 믿고 남만으로 떠나야 하는 겁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네. 지금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이 사람밖에 없으니까.”

이런 무례하기 그지없는 서찰을 받았음에도 신승은 무조건 그를 고집하고 있었다.

내가 전생과 현생에서 경험해봤던 여러 고수를 생각했을 때,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본디 고수들이란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다 못해 옥황상제의 엉덩이까지 건드릴 인간들이었고, 보통 경지가 높을수록 더한 것이 보통이니까.

그렇기에 신승의 반응은 더더욱 나를 경악 속으로 빠뜨렸다.

천하에서도 둘째가라면 그리 말한 사람에게 주먹을 날릴 고수가 이렇게 꿇고 나갔으니까.

“왜 그렇게 그 사람을 고집하시는 겁니까?”

“어쩔 수 없지. 그 사람은 내가 아는 사람 중 유일하게.”

스윽.

신승이 창문 너머로 머리를 꺼낸 채 말을 이었다.

“중원과 남만 사이를 오가며 장사를 하는 장사꾼이니까.”

*****

묘강(苗疆).

중원 최남단에 있는 운남성에서도 아래쪽에 있는 이 도시는 분명 명나라에는 속해 있었지만, 아무리 봐도 한족보단 묘족의 도시라는 편이 어울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리 신기해할 일은 아니었다.

묘강에 있는 한족은 가능한 다른 성. 그것이 안 되면 운남성 내 다른 도시로 떠나려 하는 반면, 남만에 있는 묘족은 계속해서 묘강으로 들어오려 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딱 하나.

“후우, 덥구먼.”

중원 날씨라곤 믿기 힘든 이 후텁지근하고 습기 가득한 날씨 때문이었다.

“아직 남만에 도착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주변이 후끈후끈하구먼. 안 그렇나?”

“네, 확실히 그렇군요.”

땀 한 방울 흘리지도 않으면서 덥다고 말하는 게 참 웃기긴 했지만, 나는 성실하게 신승의 말에 대답했다.

이번 동행 동안 그의 성격부터 행동까지, 그를 동경하는 사람들은 모르는 그의 이면을 본 덕분이었다.

세상에, 강호에서 부처의 재림이라 불리면서 무림인은 물론 일반 민중들에게도 크나큰 존경을 받는 신승이 그리도 자기 할 말만, 그것도 짧게 짧게 말하는 성격일 줄이야.

사실상 이번 여행은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배우는 이 개월간의 합숙 훈련과 다를 바 없었다.

이렇게 해서 무공 한 줄이라도 배울 수 있다면 억울하지라도 않을 텐데···.

이미 내 몸에 굳건히 자리 잡은 천마의 권능이 다른 무공을 익히는 걸 철저히 방해하고 있었으니, 그건 내가 죽었다 다시 회귀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와 어디서 접선하기로 하셨습니까?”

“남풍 객잔이라고, 묘강에는 몇 없는 한족식 객잔이라 하더구나.”

“남풍 객잔···본인 객잔입니까?”

“글쎄다. 그래도 상단 일을 하던 사람인데, 설마 객잔까지 차렸을까?”

부정에 가까운 신승의 대답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족 중 유일하게 남만과 중원을 오가며 장사하는 사람이 뭣 하러 귀찮게 객잔을 차리겠는가.

돈 있는 사람은 떠나고, 돈 없는 사람만 몰려오는 묘강에 객잔을 차려봐야 돈도 벌 수 없고, 다른 성에서 오는 손님을 받으려 해도 묘강까지 오는 손님은 거의 없다.

남만과 중원을 오가며 상단을 이끌 만큼 상리(商理)가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이곳에 객잔을 차릴 리 없었다.

그래도 본인 상단이 아니라 객잔으로 오라고 하다니.

최근 장사가 잘 안되나?

뭐라 말하기 힘든 불길한 예감을 억지로 눌러 담은 채 고삐를 바삐 놀렸다.

하지만 그 예상은 객잔이 있다는 방향으로 마차를 이끌고 갈 때마다 눌러 놓은 돌덩이를 치우고 튀어나오려고 애를 쓰기 시작했다.

빈민가라는 말이 딱 어울릴 법한 허름한 골목.

그리고 갑작스레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외부인을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는 원주민들까지.

[이런 광경은 화전민 마을에서도 본 적 없는데 말이지.]

화순의 말대로였다.

낡고 허름할지라도 사람의 손길이 닿은 것을 알 수 있는 화전민 마을의 건물들과 달리 여기 있는 건 이미 사람의 손길이 떠난 지 오래인 건물뿐이었다.

거기에는 이미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채, 눈의 빛을 꺼버리고 그저 태어났기에 살아가는 사람들밖에 없었다.

“묘강의 사정이 좋지 않다고는 들었지만···.”

설마 골목이 아니라 거리 자체가 이렇게 쇠락했을 줄이야.

이런 뒷골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걸하는 거지들도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이미 그들도 알고 있다는 뜻이다.

겨우 한두 푼의 동전으로는 지금 이 거리에서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끼익.

목적지에 도착한 나는 고삐를 당겨 마차를 멈췄다.

남풍 객잔.

이미 먹도 다 지워지고, 현판도 비바람에 다 닳아 빠져있어 진짜 남풍 객잔이 맞는지 확신할 순 없었지만, 근처에 현판이 달린 건물이라곤 이곳밖에 없었기에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없었다.

녀석과 마차를 건물 옆에 밀어두고(당연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마구간도 없었다) 우리는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끼이이이익~

도대체 이 경첩을 손본 건 언제였을까.

마치 당장이라도 자신을 죽여달라는 듯 끔찍한 굉음을 내는 문에 깜짝 놀라 손을 뗐다가, 다시 마음을 먹고 밀었다.

끼이이이이익~

아무리 힘을 줘도 반밖에 열리지 않는 문 너머에서는 지독한 백주 냄새가 흘러나왔다.

냄새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지독한 주향에 인상을 쓰면서도, 나는 얼른 안을 살폈다.

열려 있는 건 맞나, 싶었던 외부의 모습과는 달리 안에는 많은 손님이 있었다.

아니···이걸 손님이라 해도 될까.

대체 언제부터 마셨는지 모를 술병을 탁자 위에 가득 채운 채 엎드려 자는 사람이 절반이요, 머리를 의자 뒤로 넘긴 채 자는 사람이 절반이었으니.

사실상 지금 깨어 있는 사람이라곤 딱 세 명.

벌컥, 벌컥, 벌컥.

그중에서도 한족으로 보이는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었다.

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마시고 있는데도 코를 찌르는 술 냄새.

코가 막히기라도 한 듯, 그 싸구려 술을 계속해서 목구멍 너머로 넘기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현철은 어디 있는가.”

신승은 챙겨왔던 서찰을 품에서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남자가 마시는 술과 비슷한 냄새를 풍기는 서찰을 반쯤. 아니, 구 할 이상 맛 간 눈으로 보던 남자는 고개를 들어서 나와 신승을 번갈아 보더니 입을 열었다.

“눼과···.”

히끅. 히끅.

속에서 끌어 오르는 게 대답인지, 아니면 토악질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그 안에 있는 걸 최대한 뱉어내려 애썼다.

“훤으···아들···히끅! ···현옥이···우웨에에엑!!!”

결국 두 가지를 모두 뱉어낸 그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러니까···.

“이런···.”

“우윽···.”

자신이 방금 토악질한 거기 그대로.

[축하한다.]

그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내 귀로 기쁨에 찬 화순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도 자야인가 뭔가 하던 그 여자처럼 대박을 건진 것 같네.]

···하, 젠장.

이번 일도 더럽게 파란만장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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