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교의 습격(6)
군림(君臨).
오의의 이름처럼 천마의 무공에 잠식된 마인(魔人)은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 아래에 있는 것 마냥 주위를 산산이 부수며 내게 다가왔다.
놈의 보보(步步)에 충격을 받는 건 대지뿐만이 아니었다.
나 역시 놈의 발걸음 하나하나에 마치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충격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천마의 발걸음(天魔步)마다 만마는 무릎 꿇을지니, 그것이 곧 군림이라!
위아래 없이 날뛰는 마귀들을 제압하기 위해선 역시 폭력이 제일이라는 건가.
하지만.
“그 뜻대로 될 성싶으냐!”
나는 굴복할 생각 따윈 없었다.
불파(不破).
무엇에도 부서지지 않을 팔로 창을 꽉 쥐고.
와류(渦流).
세상을 삼키는 거대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끼기기기긱-!!!
불파를 두른 팔에서 기괴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창에서 휘몰아치는 강력한 기의 폭풍이 내 팔까지 잠식해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불파로 감싸고 있지 않았다면, 권능으로도 회복하기 힘든 상흔이 팔에 고스란히 남았으리라.
그런 강력한 힘이 담긴 창을.
“죽어라!”
놈에게로 던진다!
콰과과과!
군림으로 헤집어졌던 대지를 다시 한번 뒤집으며 놈에게로 날아가는 와류.
오직 나만을 시야에 넣은 채 다가오던 마인도 그걸 맨몸으로 맞서서는 안 된다는 걸 직감한 것인지, 바로 내게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췄다.
고오오오!
군림을 멈췄음에도 더욱 강하게 휘몰아치는 기류.
하지만 그에 반비례하듯, 그의 얼굴색은 더욱 검게 물들었다.
선천진기를 마기로 바꾸는 것에 대한 부작용 때문이었다.
“크아아악!!!”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는 고통에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던 그도 선천진기를 마기로 변환할 때의 고통은 참지 못한 듯 통렬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렇게 주인의 생명과 혼을 먹어치우면서 만들어진 먹빛의 마기를 양손에 모으더니.
“흐아압!”
그대로 창을 향해 맞부딪혔다!
천마권법(天魔拳法) 오의. 격공(隔空).
공간조차 뛰어넘는 천마의 주먹이 지금 그 자리에서 발현된 것이었다.
콰과과과광!!!
쩍!
놈을 향해 날아가던 창이 보이지 않는 주먹에 막힌 순간, 군림과 와류로 이미 산산이 조각나있던 대지가 입을 열고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본디 세상에 둘 이상 존재할 수 없는 천마의 무공.
하지만 누군가의 역천(逆天)으로 인해 같은 시각, 같은 대지 위에서 만나게 된 두 개의 오의는 그 죄악을 저지른 이에 대한 분노를 내뿜듯,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 아래에 무엇이 있을지 예상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대지의 아가리.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휘몰아치는 거대한 기파의 용오름.
글자 하나 배우지 못한 무지몽매한 농민부터, 전 중원에서 가장 뛰어난 학식을 가진 대학사까지.
그 누가 봐도 세상이 멸망할 징조라 광기를 일으킬 만큼 무시무시한 광경이 우리의 두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쿵!
쿵!
하지만.
쿵!
쿵!
그런 광경을 만들어낸 우리 두 사람은 오히려 그 중심지로 가까이 가서.
쿵!
쿵!
각자의 무기를 다시 들어.
쾅!!!
서로를 향해 휘둘렀다!
대지가 갈라지는 것을 멈추고, 하늘로 치솟던 용오름도 사라진 그곳.
마치 모든 것이 멈춘 듯, 우리 두 사람은 서로의 무기만을 뻗은 채 멈추고 있었지만, 그 중심은 달랐다.
끼기기긱-!
쿠구구구-!
조금 전 주변의 모든 것을 부숴버릴 기세로 휘몰아치던 기류는 어디로 사라진 게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 두 사람의 양팔, 양다리 위에 굳건히 존재하고 있었으니!
쾅!
무기를 거둔 우리 두 사람이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원하는 건 오직 딱 하나.
서로의 목숨뿐.
쿵!
그가 발을 크게 굴렸다.
군림.
만마(萬魔)를 앙복(仰伏) 시키는 거대한 힘이 나를 짓눌렀다.
쾅!
내가 팔을 크게 휘둘렀다.
불파.
그 어떤 것으로도 부술 수 없는 거대한 방패로 그의 단전을 후려쳤다.
쩡!
그가 주먹을 앞으로 뻗었다.
격공.
공간의 제약조차 무시한 거대한 충격이 내 전신을 강타했다.
챙!
내가 창을 휘둘렀다.
와류.
인간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폭풍이 그의 전신을 할퀴고 지나갔다.
거기엔 누구의 우열도 없었다.
오직 상대가 먼저 부서지고, 상대가 먼저 망가지기만을 바라며 서로를 향해 살수를 날리기만을 반복할 뿐.
마기와 마기가 부딪혔으며, 무공과 무공이 부딪혔고, 오의와 오의가 부딪혔다.
그리고.
천마와 천마가 부딪혔다.
강제로 만들어지고, 억지로 이어져 왔으며, 끔찍이 고통받고 있지만.
그는 분명, 내가 수천, 수만 번 심상 속에서 싸워왔던 천마 그 자체였다.
쩡!
“크억!”
내가 휘두른 불파에 한 치가량 뒤로 물러나고야 마는 마인.
그것은 지금껏 이어져 왔던 대결의 끝을 알리는 신호이자, 미묘한 균형추가 점점 내 쪽으로 기울여지게 되는 시발점이었다.
이미 그의 얼굴은 생자의 것이라기보단 사자의 그것에 좀 더 가까웠다.
누군가를 죽이고, 그것을 삼킴으로써 보충해왔던 선천진기가 긴 시간 이어진 싸움으로 인해 급속도로 깎여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쾅!
“쿨럭.”
허나 나라고 해서 정상적인 상태라 할 순 없었다.
천마의 오의는 오직 천마의 오의로만 온전히 막아낼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는 그의 공격을 막는 대신, 그 공격을 몸으로 받아들이고 대신 공격을 한 번 더 날리는 데에 집중했다.
그로 인한 충격과 고통은 내 몸 깊숙한 곳에 심대한 상흔을 만들어냈다.
그것이 터지는 건 이제 일보 직전.
한 번만 더 강한 충격을 받았다간, 이젠 정말로 더 버틸 수도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지이잉!
나는 창을 들었다.
시시한 자존심이라 해도 좋고, 무모한 방식이라 욕해도 상관없다.
이미 다짐했다.
이 사내와 싸울 땐, 피하지도, 도망치지도 않고 당당히 맞서리라고.
그리고 그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치 자신의 끝을 예상이라도 한 듯, 그는 광기로 번들거리던 눈동자에 한 줄기의 이채를 띄우며 땅을 박차 나와 거리를 띄웠다.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그도 자신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쿵, 쿵, 쿵!
먼저 움직인 건 저쪽이었다.
저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나를 향해 다가오는 마인.
지금껏 한 번 발걸음을 뗄 때마다 대지를 울리게 만드는 폭발적인 기운은 이제 거기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절대 경시해선 안 된다.
[군림의 진짜 위력은 중첩에 있다.]
예전 심상 세계에서 천마보를 익힌 천마와 싸웠을 때 화순이 내게 말했다.
[일보, 일보.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딛을수록 그 위력은 몇 배로 늘어난다.]
그때 싸웠던 천마는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아 최고의 위력을 지닌 군림을 보지 못했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이자는 달랐다.
자신의 마지막 삶의 불꽃을 태워서 만들어내는 군림의 진짜 모습!
쿵.
그 발걸음에 거대한 충격은 없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일어나는 광경은 아까와는 괴리를 달리했다.
고오오오-
그의 주변에서 휘몰아치는 어마어마한 기류 때문에 공중으로 떠오른 흙먼지, 바위 파편, 나무 조각들.
그것은 그가 지금 얼마나 많은 힘을 끌어모으고 있는 것을 알리는 동시에.
“으아아아아!!!”
내가 막아야 할 공격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끝이 찾아왔다.
쿵!
그가 일보를 내뻗음과 동시에, 양 주먹을 앞으로 내밀었다.
·········.
거기에 소리는 없었다.
모든 것을 산산이 부수고 휘몰아치는 강력한 기파도 없었다.
마치 이른 봄의 선선한 바람처럼, 부드럽게 주변을 감싸는 한 줄기의 바람만 있을 뿐.
하지만 나는 보았다.
그 바람 안에 사람의 몸뚱어리 하나는 간단히 짓이겨버릴 천하의 거력이 담겨 있는 것을.
군림과 격공의 합체기.
지금껏 간접적으로만 피해를 주었던 군림의 힘이 격공에 실려 나를 향해왔다.
누군가 한 사람의 생명이 실려 만들어낸 가공할 위력의 일격.
피한다면 피할 수 있다. 도망치려면 도망칠 수 있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미 그의 육신은 모든 힘을 잃고 땅에 널브러져 있었다.
스스로 서 있을 힘도 없는 자가 어찌 이런 거력의 공격을 제어할 수 있겠는가.
그저 옆으로 슬쩍 피하기만 하면, 그의 공격은 저 하늘로 날아가 긴 시간 하늘을 유영하다 사라질 터.
하지만 그리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할 수 없었다.
억지로 만들어졌을지언정, 그도 나처럼 천마의 오의를 그 안에 품은 자.
그가 온 힘을 다해 만들어낸 최후의 일격을 그저 덧없이 피할 생각 따위, 애초에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온 힘을 다했다.
끼기기기기긱!!!
불파를 두른 팔이 상할까 싶을 정도로 온 힘을 끌어모은 창.
진 와류.
지금껏 딱 한 번, 북해의 거대한 땅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고수 앞에서 선보였던 나의 최강의 공격기.
이것이라면.
“당신의 최후에 어울리는 공격일 것이오.”
그리고.
창이 내 손에서 떠나갔다.
*****
“으, 으윽···.”
성욱은 침음성을 흘리며 눈을 떴다.
그가 있던 곳은 거대한 아름드리나무의 앞. 그는 거목에 등을 기댄 채, 잠들어 있었던 듯했다.
나는 왜 여기서 잠이 들어 있는 것이지?
“크윽?!”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는 가슴께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고통에 일어서는 걸 멈추고 가슴을 부여잡았다.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통증. 가슴을 얻어맞은 것과도 다르고, 넘어진 것과도 다르다.
가슴의 안쪽. 내장이나 신경에 직접 타격을 받은 듯한 그 기이한 통증에 그는 인상을 쓰면서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이건?”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눈앞의 광경에 말을 떨었다.
마치 거대한 폭풍이 지나간 듯한 자리.
아니, 어떤 거대한 폭풍이 휘몰아치더라도, 이런 광경이 나타날 수 있을까?
대지는 부서지고, 동굴은 무너졌으며,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갔던 수백 그루의 거목은 장작으로도 쓸 수 없을 만큼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자신이 기대있던 아름드리나무도 위쪽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멍하니 주변의 광경을 바라만 보다가, 한 줄기의 탄식을 내뱉었다.
“아!”
자신이 왜 여기 있었는지 깨달은 것이다.
“유, 유 소협은 대체 어디로?”
수많은 사람을 죽인 악귀의 흔적을 쫓아 이곳으로 왔을 때 만난 봉두난발의 괴인.
그와 유현이 처음 대립하면서 나온 기파에 자신은 튕겨 나가 이 나무에 부딪혔고, 그때의 충격에 기절했다.
그렇다면 대체 유 소협은, 그리고 그 봉두난발의 괴인은 어디 있는가?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한 줄기의 의문에 대한 해답은 그의 반대편에서 나왔다.
“아! 유 소협!”
“몸은 좀 괜찮소?”
모든 것이 부서진 대지 저편에서 유현이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저는 괜찮습···니다만···?”
백번 양보해도 유현의 상태는 좋다 할 수 없었다.
아까 보았던 봉두난발의 괴인이 더 나아 보일 지경의 옷차림부터, 머리부터 발끝까지 흙먼지를 가득 뒤집어쓴 모습은, 가장 가난한 이들만 모인다는 화전민 마을에서도 볼 수 없을 만큼 해괴한 신색이었다.
하지만 더욱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 그 남자는 설마?!”
유현의 어깨 한쪽에 실려있는 누군가.
만약 성욱이 착각한 게 아니라면, 그는 분명 아까 봤던 봉두난발의 괴인.
자신의 약혼녀를 죽였던 바로 그 마인이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그는 이미 목숨을 잃었으니까.”
“목숨을 잃었다니, 그게 무슨···헉!”
털썩, 유현이 땅에 그의 몸을 뉘자, 그 얼굴을 본 성욱은 대경실색하며 뒤로 물러섰다.
뼈에 거죽만 남았다, 못 먹고 사는 화전민 마을에서 쉬이 들을 수 있는 말이었지만, 지금 이 남자야말로 진짜 뼈에 거죽만 남았다 할 수 있지 않을까.
머리카락과 머리의 경계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검게 물든 피부를 향해 손을 뻗었다가, 닿는 순간 바로 손을 뺐다.
나무껍질보다 더욱 꺼칠한 그것은, 절대 사람의 피부라 할 수 없었다.
“이, 이 남자는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이오?”
“자신의 선천진기···그러니까 생명력을 모두 사용한 것이오. 그 생명력을 보충하고자 다른 생물이나 사람을 잡아먹었던 것이고.”
“그럼 이 남자는 이제 완전히 죽은 겁니까?”
“그렇소.”
유현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성욱은 조용히 이미 죽은 마인의 시체를 바라봤다.
유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봤다.
자신의 정인을, 가장 아끼던 사람을 죽인 인간을 가만히 바라보는 그는 어떤 마음일까.
“···감사합니다.”
그를 바라보는 것에 온 힘을 쏟아부은 양, 성욱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힘도 없었다.
“제 손으로 그녀의 복수를 하고자 왔지만, 그를 보는 순간 그것이 얼마나 덧없는 생각이었는지 알았습니다.”
마인과 성욱의 사이엔 인간과 개미만 한 차이가 있었다.
만약 유현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복수는커녕 한 끼 식사밖에 되지 못했을 터.
“아니, 그가 다른 사람에게서 생명력을 갈취한다는 걸 생각하면, 저희 마을 전부를 살려 주신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그리 말한 성욱은 고개를 깊이 숙이고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저를. 그리고 저희 마을을 지켜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감사받을만한 일은 아니오. 그저 내가 할 일을 했을 뿐이니까.”
유현의 대답에 성욱은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봤다.
유현의 말뜻은 ‘같은 천마의 무공을 배운 자로서 그의 목숨을 거두는 건 내 일이다’라는 소리였지만, 성욱은 그 말을 조금 달리 받아들였다.
“어릴 때 강호의 협객을 꿈꾸곤 했는데, 유 소협. 아니, 유 대협이야말로 진짜 강호의 협객이 시로군요. 자신의 무를 약자를 지키는 데 쓰고도, 감사받을 일이 아니라 하시다니.”
“아니, 그 말이 아니라···아니오. 그냥 그런 거로 칩시다.”
그의 오해를 바로잡으려다, 생각을 바꾸고 다시 입을 닫는 유현.
어차피 좋은 쪽으로 받아들였는데 일부러 바꿀 필요가 뭐 있나, 하는 이유에서였다.
“이 시체는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나무꾼을 납치한 범인이라며 관에 데리고 가야겠지요. 아직 행방불명 이야기로 뒤숭숭할 테니, 그걸 풀어야 하지 않겠소?”
이런저런 일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할 일을 잊지 않았다.
이걸 가져가서 관에 넘기면, 행방불명에 대한 소문도 곧 가라앉을 것이고, 그럼 다시 쟁자수를 구하는 것도 수월해질 것이었다.
‘그래도 지금 당장 쓸 사람은 못 구하겠지만···잠깐만.’
한참 밀려있는 표행에 대해 고민하던 유현은, 무언가 떠오른 듯 눈앞에 있는 성욱을 가만히 바라봤다.
딱 벌어진 어깨와 다부진 근육. 그리고 튼실한 하체까지.
‘조금 마르기야 했지만, 그건 먹을 것이 모자라 그런 것일 뿐. 제대로 먹이기야 하면 그 정도야 금방 괜찮아지겠지.’
그러고 보니 화전민 마을에 있던 다른 청년들도 성욱만큼은 아니더라도 전부 단련된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힘든 농사일을 끝내고, 다른 일까지 할 수 있을 정도의 체력도 있다.
‘이 정도라면···괜찮을 것 같은데?’
“그럼 저는 이제 마을로 돌아가겠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좋은 소식을 아직 떨고 있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니까요.”
기쁜 표정으로 자리를 뜨려던 성욱을 유현이 막은 것도 바로 그때였다.
“···잠깐만 기다려주시오.”
“네?”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유현의 목소리에 엉거주춤, 일으키던 몸을 멈추는 성욱.
“혹시···나랑 일 하나 해보겠소?”
“···네?”
누군가에게 한 번 내뱉었던 질문을 똑같이 내뱉는 유현.
그리고 그것을 들은 성욱의 표정 역시, 그때의 그.
기정이와 똑 닮아 있었다.
마인의 죽음
나무꾼 행방불명 사건을 해결한 지 며칠 후.
나는 표국주실에서 기정이에게 받은 서류를 확인하고 있었다.
“이번 주 표행은 전부 예정대로 처리됐나?”
“네. 아무래도 행방불명 사건 때문에 구인된 쟁자수 숫자는 조금 덜 적었지만, 이번에 도련님이 데리고 온 일꾼들이 예상보다 일을 잘 해줘서 똑바로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 그거 다행이네.”
기정이가 말하는 내가 데려왔다는 일꾼은 다름 아닌 화전민 마을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쟁자수 업무가 원체 근력이나 체력이나 모두 중요한 일이라 조금 걱정했는데, 오히려 몇 년간 쟁자수를 하던 일꾼들보다도 더 일을 잘하더군요.”
“몇 년간 산에서 농사를 한데다가, 다른 힘 쓰는 일도 꾸준히 했으니 체력이 적을 일은 없지.”
“거기에다가 마침 그들도 수확이 적어 이번 겨울을 어떻게 날지 걱정하고 있었다고 하니, 어려 모로 천운이 따랐지요.”
“들어보니 벌써 몇 년이나 한 장소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고 하더라고. 집도 오래돼서 낡고, 아이들도 다른 화전민 마을보다 많아서 금방 알았지.”
그들에게도 내 제안은 큰 이득이었다.
아무리 젊은 사람들이 사냥이나 약초 판매, 장작 판매를 하더라도 마을 사람 모두를 먹여 살리는 건 아무래도 힘들었으니까.
거기에 나는 그저 일거리만 주는 게 아니라, 그들을 모두 성도로 데려와 거주지까지 마련해줬다.
물론 개인 주택을 무상으로 줬다는 말은 아니고, 이번에 새로 만든 기숙사로 그들을 전입시켰다는 말이다.
“그래도 용케 관에서 그들을 들이는 걸 허락해줬네요.”
“원래 그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을 내가 대신해줬으니까. 아무래도 편의를 봐 준 거겠지.”
물론 그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마인의 시체를 관으로 가져갔던 그 날, 현령이 직접 나와 나를 접대하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대장군께서 직접 찾아오셨던 손님을 어찌 함부로 대하겠습니까.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언제든 찾아와주십시오.’
···대장군 본인은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갔다고 하더라도, 이미 아는 사람들은 다 알았던 모양이다.
덕분에 외부에서 살던 사람 수십을 들여보내는 건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정말 이걸로 됩니까? 하면서 뭘 더 못 해줘서 안달할 지경이었으니까.
괜히 사람들이 권력, 권력 하는 게 아니구나, 하고 그때 처음으로 직접 체감했다.
팔락, 팔락.
대충 남은 서류를 넘겨 읽은 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을 다시 기정이에게 내밀었다.
“좋아. 일은 전부 제대로 처리되고 있는 것 같군. 일꾼 중 재능이 있는 사람은 표사로 승진시켜 준다는 계획도 아주 좋아.”
“사냥꾼같이 험한 일을 하던 사람은 표국에서 일하고 있는 다른 표사와 비교해도 무력이 크게 꿇리지 않으니까요. 표사의 업무에 대해서만 가르치고 바로 승진시킬 생각입니다.”
“그쪽은 복삼 총표두와 함께 협업해서 처리하도록. 무에 관한 재능이 뛰어나다면 복삼이 그놈이 직접 가르쳐도 좋다고 해두고.”
“네, 알겠습니다.”
서류와 함께 내 명령을 받아든 기정이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국주실 밖으로 나갔다.
이제야 표국의 운행도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온 느낌이네.
[그럼 이제 다른 걸 봐야지?]
“그래, 그래야지.”
기정이와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화순은 기정이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바로 내게 다가와서 말했다.
이번 마인과의 싸움에서 얻은 건 새로운 일꾼뿐만이 아니었다.
첫 번째로 얻은 건 다름 아닌 무공.
천마의 권능을 지닌 자는 천마의 무공을 가진 자와 싸워 이김으로써 그가 가진 천마의 무공을 얻을 수 있었다.
[설마 이렇게 마교에 가지도 않고 새로운 천마의 무공을 얻을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화순의 말대로였다.
본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대 천마가 천마의 권능을 이어받은 제자에게 그가 미처 익히지 못하거나 얻지 못한 천마의 무공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있던 것이다.
그런데 기이한 우연으로 인해 마교에 있지도 않고, 우연히 천마의 권능을 얻었을 뿐인 내가 새로운 무공을 익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새로 얻은 보법은 어때?]
“더 말할 게 있겠어? 당연히 최고지.”
그가 가진 두 가지 무공 중 하나만 얻을 수 있다는 화순의 말에, 나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보법을 얻었다.
권법도 물론 탐나긴 했지만, 어차피 손으로 쓰는 무공이야 천마금나수도 있으니, 크게 필요한 무공은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새롭게 얻은 천마보는 지금껏 모아온 무공을 통해 이미 오의도 얻어둔 상태였다.
주변의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강맹한 위력 때문에 아직 써본 적은 없지만, 곧 인적이 드문 산이나 공터로 나가 한 번 시험 운용해볼 생각이었다.
내가 이번 대결로 얻은 것은 무공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나는 왼손을 들어 거기에 적힌 글자를 눈으로 읽었다.
“설마 그 마인도 초절정 고수로 인정될 줄이야.”
[임무 조건 : 총 여섯 명의 초절정의 고수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일 것.
임무 보상 : 한 명당 10년 내공. 임무 달성 시 총 60년 내공 획득.]
[현재 달성치 : 3/6]
본래 내 달성치는 2.
빙궁에서 하얀 별로 인정받을 당시, 북해에서도 내로라하는 초절정고수 두 사람과 대결로 얻었던 이십 년 내공이 전부였다.
마인과의 대결 이후, 평상시보다 늘어난 내공에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임무창을 열어보니 이렇게 바뀌어 있었다.
임무는 그 마인을 한 사람의 초절정고수로 인정한 것이었다.
[선천진기로 억지로 끌어올린 경지였을지언정, 그의 강함은 진짜였으니까. 권능도 그의 강함을, 그리고 너의 강함을 인정한 거겠지.]
처음 이것을 보자마자 경악했던 나와 달리, 화순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인 것 마냥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이제 절반···과연 내가 초절정고수 세 사람과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일 순간이 또 찾아올까?”
[모르지. 네가 언제 한 번 마교로 찾아가면 가능할지도.]
“마교···마교라···.”
화순의 말에 나온 한 단어에 나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마교.
사실, 이번 생에서 나는 마교와 크게 연관될 생각은 없었다.
전생에서 이런저런 안 좋은 꼴을 많이 당하기도 했고, 지금도 그들은 내 힘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천마의 권능을 노리고 있을 테니까.
독고삭의 마지막 유언도 마교와 최대한 관련되지 않고 해결할 생각이었다.
지금은 독고화가 마교에 체류하고 있지만, 본디 자유로운 걸 좋아하는 그녀는 성화녀로 임명받은 뒤에도 여러 번 강호행을 나섰으니 말이다.
물론 그때는 전부 비밀리에 나갔다 하지만, 본디 정보란 몇 년이 지나면 전부 하류로 떨어지는 법.
몇 년 전에 성화녀께서 여기로 강호행을 나가셨더라, 하는 소문은 정보부에서는 일상처럼 들을 수 있었다.
시간과 장소만 맞혀 거기로 간 다음, 독고삭의 마지막 말을 건네기만 하면 되지.
나는 이렇게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다.
허나, 내 생각이 틀렸다.
지금의 마교는 내가 알던 그곳과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
아니면, 내가 알던 마교는 아주 극히 일부분이었던 것뿐이거나.
“···언젠가 한 번 가긴 가야겠지.”
[응? 정말로?]
내 대답에 정말로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화순을 흘겨봤다.
“네가 제안해놓고 왜 그렇게 놀라는 거야? 참나. ···독고삭 그 사람의 유언도 들어줘야 하고, 그리고.”
나는 말을 하다 말고 내 오른손을 바라봤다.
이 손으로 창을 던져 목숨을 거뒀던 그 마인.
죽음 직전, 자신의 마지막 이성을 담아 나를 바라봤던 그 마인의 눈이 다시 떠올랐다.
“···내가 나타나지 않으면 옥천 그 미친놈은 계속해서 마인을 만들 테니까.”
[·········.]
내 말에 화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수천. 어쩌면, 수만 년 넘게 천마의 옆에 있었던 그도 옥천의 행동은 충격적이었다.
[자신의 경지를 높이고 싶다는 생각에 천마의 무공에 손을 댄 인간은 많았어도, 설마 다른 목적으로 천마의 무공을 남에게 가르치도록 하는 인간은 없었어.]
나와 마인의 싸움이 끝난 직후, 이미 죽은 마인의 시체를 바라보며 내게 말하던 화순의 목소리는 분노로 크게 떨리고 있었으니까.
공간의 제약과 물리적 제약만 없었다면, 화순이 직접 마교로 달려가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의 네가 가봐야···.]
“나도 알아. 어차피 개죽음이라는 거.”
하지만 나라고 해서 지금 당장 마교로 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빙궁에서의 싸움과 빙정과의 만남. 그리고 이번 사건으로 인해 내공도, 무공도 크게 증진했지만, 홀몸으로 마교에 들어간다는 건 자살행위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내가 끝없는 내공과 저절로 회복되는 육신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상대는 강호를 양분한 세력 중 하나다.
나와 같은 경지에 있는 자들은 물론, 나보다 높은 경지에 있는 인간도 분명히 있을 터.
설사 그들이 아니더라도, 불어난 황하의 강물처럼 밀려올 백만의 광신도를 생각하면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지금 내가 익힌 천마의 무공 중 하나를 십 성. 즉, 극의를 사용할 수 있는 경지까지 끌어올리거나, 북해에서의 시련을 다시 한번 겪는 정도의 대사건이 없는 한, 마교로 쳐들어가는 건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어느 쪽이건 먼 미래의 이야기겠지만 말이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화순은 나를 향해 씩 웃으며 말했다.
[권능의 주인은 너니까.]
“그래, 고맙다.”
기약할 수 없는 약속에도 기뻐하는 화순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보내며, 다시 책상 위의 서류에 시선을 집중했다.
지금은 내가 할 일을 해야 할 때였다.
*****
호롱불도, 촛불도, 심지어 창문 너머에서 비쳐오는 햇빛도 없는 어두컴컴한 방 안.
무엇하나 식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어느 자그마한 소리가 들렸다.
까득.
의자에 앉아있는 사내가 자신의 손 위의 호두를 굴리고 있는 소리였다.
한참을 재밌는 장난감처럼 호두를 굴리던 남자는 손을 멈추고 그 위에 있던 호두에 시선을 집중했다.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도 호두를 직시하는 사내.
그리고 잠시 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끼기긱.
사내의 손 위에 있던 호두가 저절로 쪼개지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검술의 고수가 단칼에 자른 듯, 상하로 갈라진 호두 껍데기 사이에서 자그마한 열매 한 조각을 꺼낸 사내는 그것을 입에 넣었다.
“중원의 과실은 참으로 맛이 좋아. 고향의 것과는 전혀 다르단 말이야.”
고소한 호두의 맛을 음미하던 사내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여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그 ‘도구’들은 잘 날뛰고 있나?”
“예, 그렇습니다.”
즐겁기 그지없다는 듯 경쾌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사내와 달리, 여인은 감정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딱딱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성과를 제일 크게 올린 쪽은 어디지?”
“절강에 보낸 마인이 제일 크게 날뛰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273명의 목숨을 거뒀습니다.”
“호오, 절강이라? 그럼 다음은?”
“호북으로 보낸 마인이 225명의 목숨을 거뒀고, 그다음으로 산동의 마인이 189명을. 그 뒤로 요령의 마인이···.”
“잠깐.”
웃으며 여인의 보고를 듣던 사내가 갑자기 말을 끊었다.
“섬서의 마인은 어떻게 됐지?”
갑자기 차가워진 사내의 목소리에도 여인은 한치의 주저 없이 대답을 꺼냈다.
“섬서의 마인은 열넷의 목숨을 거뒀습니다. 그리고 그 시체는···.”
“시체? 시체라고?!”
쿵! 여인의 보고에 사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격분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 그놈이 제일 뛰어난 도구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겨우 열네 개 밖에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고?”
“마교에서 올라온 보고에는 그렇게 적혀있었습니다. 현재 마인의 시체는 현청에 인도되어 화장한 뒤, 그 재는 강물에 뿌려졌다고 합니다.”
여인의 보고에 인상을 쓰고 있던 사내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화가 가라앉았다, 라는 건 절대 아니다. 그 증거로 사내는 아직도 이마에 깊은 주름을 새긴 상태였으니까.
“도구 중 유일하게 오의까지 익혔다고 해서 기대하고 있었는데···쯧!”
그 ‘도구’는 가장 오래 제정신을 유지했고, 그렇기에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오의를 익힌 ‘도구’는 바로 정신의 끈을 놓았고, 그 뒤 도구 중 가장 미쳐 날뛰기 시작해 마교의 고수는 물론, 사내의 부하까지 도륙했다.
사실상 이번 계획을 짤 수 있었던 것도 그 남자 덕분이었다.
그 남자가 날뛰기 전까지는 정말로 그들을 권능을 찾는 도구 정도로밖에 생각 안 했으니까.
그런데 설마 다른 누구도 아닌 그 남자가 제일 먼저 목숨을 잃을 줄이야.
아무리 그래도 천마의 오의까지 익힌 그를 죽일 수 있는 인간 따위, 전 강호를 뒤져봐도···.
“···아니야, 잠깐.”
뭔가를 고민하고 있던 사내는, 문뜩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분노를 가라앉혔다.
미쳐 날뛰는 도구를 직접 막은 사내였기에 그가 얼마나 강한지도 알고 있었다.
내공이나 무공의 우위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천마의 오의.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천마의 무공과는 그 궤를 완전히 달리하는, 극과 극의 무공이거나···.
“···완전히 똑같은 무공을 지녀야 가능하겠지.”
씨익. 설마 이렇게 찾을 줄이야. 입가에 아까와는 전혀 다른, 싸늘한 미소를 띤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인에게 외쳤다.
“섬서로 부하 몇을 보내 상황을 파악해라. 그 도구가 무슨 짓을 했는지, 또 누가 그 도구의 시체를 가져왔는지까지 전부.”
“네, 알겠습니다. ···옥천에게도 알립니까?”
“아니, 필요 없다.”
여인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문으로 향한 사내는 여인의 질문을 단칼에 잘랐다.
“어차피 우리가 내려준 무공에 미쳐 연공실에만 처박혀 있는 놈이다. 권능에 관해 이야기 해봐야 귀에 들어오지도 않겠지. 그리고.”
끼익. 한 치의 틈도 없이 꽉 닫혀 있던 문을 열자, 그 너머에서 눈부신 광채가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얼굴에 온갖 모양의 흉터가 가득한 사내는 원래의 형체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입을 뒤틀며 여인에게 말했다.
“천마의 권능은 놈이 아니라, 우리가 가질 테니까.”
신승의 방문
어느 늦은 오후.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복잡한 섬서성의 길가에 한 사람의 중이 나타났다.
얼굴 전면을 가리는 삿갓 탓에 직접 볼 순 없었지만, 다 헤지고 허름한 가사와 노출된 팔에서 보이는 주름으로 그 연배를 짐작 가능케 했다.
성도 근처에 절이 하나도 없던지라 오랜만에. 혹은 생전 처음 중을 본 사람들이 신기한 듯 그를 바라봤지만, 어디까지나 잠시일 뿐.
가만히 중이나 구경하고 있기엔 사람들은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중 스스로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무시한 채, 어딘가를 향해 쭉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입이 움찔거리는 걸 봐선 무언가 불경을 외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이 없던 탓도 있지만, 설사 바로 옆에서 걷고 있다고 해도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 자체가 힘든 건 마찬가지였으리라.
그의 목소리는 그렇게 말하는 자신조차 들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낮고 조용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불경을 외우며 길을 걷던 늙은 중은 어느 커다란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다른 곳과 비교해도 그 크기가 확연히 거대한 문의 위에는 그곳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현정표국.
그 이름을 확인한 늙은 중은 아무런 말 없이 소매 춤에서 목탁과 목탁 채를 꺼내 두드리기 시작했다.
딱딱딱.
맑고 청량한 목탁 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지자, 아까까지만 해도 길가에 있던 중은 신경도 쓰지 않던 사람들도 모두 발걸음을 멈췄다.
마음속에 숨어있던 탁기를 모두 지워내는 듯한 맑은 목탁 소리에 감화된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목탁을 두드렸을까. 길가를 걷고 있던 사람 모두가 그의 주변에 서서 목탁 소리에 빠져 있던 그때.
끼기긱.
현정표국의 대문이 열리며 그 너머에서 한 사내가 고개를 내밀었다.
“···누구십니까?”
현정표국의 문지기였다.
본래라면 이런 소란을 일으킨 사람을 쫓아내야 마땅하겠지만, 그도 문 너머에서 눈앞의 늙은 중의 목탁 소리를 들었기에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이런 고절한 경지에 오른 노스님을 강제로 쫓아냈다가 무슨 해코지를 당할까.
탁발하러 오신 거라면 내 주머니에서라도 좀 꺼내 드려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던 그의 뒤에서 예상하지 못한 목소리가 들렸다.
“짓궂으시군요.”
그 목소리에 문지기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자신의 기억이 옳다면, 이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히···.
“후배가 늦게 마중하러 나왔다 하여 이렇게 심한 장난을 치시다니요.”
문지기의 예상대로였다.
방금 그 목소리를 낸 사람은 다름 아닌 이 현정표국의 주인이자 섬서제일가 유가장의 장남. 그리고 현재 섬서성 내에서 그 이름이 제일 많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는 사내.
유현이었다.
그의 등장에 너무 놀란 나머지 그가 뭐라 말했는지도 잠시 잊고 있던 문지기는, 곧 그의 말을 이해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눈앞의 스님을 바라봤다.
분명, 유현이 자신을 후배라 칭했다.
유현이 무림인이라는 건 이미 표국 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번 행방불명 사건의 범인을 홀로 잡아 온 것도 그렇고, 지금은 전 지부에서 표사로 일하고 있는 폭풍단의 단원들이 자신의 단장이 얼마나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는지 말해줬기 때문이다.
그것 외에도 무림맹에서 개최한 용봉대전의 본선 진출자라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사실 여부를 파악하기 어려운 이야기라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어찌 됐건 유현이 무림인이라는 건 분명한 사실.
그렇다면 그가 선배라 부를 사람 중 늙은 스님은, 그것도 이런 고절한 경지에 오른 사람은 누가 있을까.
강호의 사정에 무지몽매했던 문지기가 떠올린 건 하나의 문파. 그것도 전 강호에서 가장 유명하고, 위대하며, 모두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문파였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그렇게 무지한 문지기의 예상은 사실이었다.
“흘흘흘, 본 중이 아무리 떠들어도 자네가 나오질 않길래 조금 장난을 쳐봤네.”
“신승 어르신의 부름에 나오지 못한 것 사죄드립니다. 이번에 새로 익힌 무공을 연습해본다는 것이 그만···.”
사실 유현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표국 내에 없었다.
이번에 새로 익힌 천마보의 오의. 군림(君臨)을 확실히 체득하기 위해 전(前) 미옥산 산채. 현(現) 유현의 비밀 연공장으로 가서 무공 수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새로운 무공이라···.”
유현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늙은 중. 신승은 삿갓 아래에 숨겨져 있던 눈을 번뜩였다.
“확실히 맹에서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르구먼. 어떤 대단한 깨달음이 있었던 모양이야.”
자신을 무인보다는 중에 가깝게 생각하는 신승이었지만, 그래도 무공을 익힌 몸.
유현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그는 날카롭게 파악했다.
그리고 그것이 겨우 그와 만나지 못했던 일 년 남짓밖에 안 되는 시간 만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파악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자신의 나이보다도 더 오랫동안 강호에서 살아온 대선배의 칭찬에 유현은 진심으로 기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다는 건 이미 진작 알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고절한 경지에 오른 고수가 그것을 인정하는 건 또 다른 이야기.
“귀한 손님을 너무 밖에만 내버려 뒀군요. 들어오시지요. 신승 어르신의 마음에 들만한 차를 내놓겠습니다.”
“흘흘흘, 그래, 그리하지.”
유현의 초대에 신승은 거절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을 모이게 했던 신승이 사라지자,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 자리를 떠나갔다.
딱 한 사람.
‘신승께서 우리 표국주님을 뵈러 오셨다!’
바로 옆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문지기만이 흥분한 채 그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시라도 빨리 이 소식을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
북해로 가서 빙정의 기운을 얻고, 세 명의 초절정고수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며, 새로운 천마의 오의. 군림을 얻은 나는 최근 조금 자만하고 있었다.
삼 갑자가 넘는 내공과 천하제일의 무공.
내 나이대의 다른 무인들은 하나도 얻을 수 없는 것을 나는 두 가지나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신승과의 만남 이후로 그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미옥산 산채와 지금 표국까지의 거리는 어림 잡아도 십 리가 넘는다.
그런데 설마 그만한 거리까지 자신의 목소리를 닿게 하는 기예를 부릴 줄이야.
물론 신승이 익히고 있는 육합전성(六合傳聲)을 조금 다르게 운용한 거란 건 알고 있지만, 거기까지 목소리를 보낸 건 그의 내공이 그만큼 심후하다는 증거였다.
이것이 바로 화경의 경지에 이른 절대 고수의 힘인가.
“흘흘흘, 미안하네. 자네의 수련을 방해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군.”
옆에서 웃으며 내게 말을 건네는 모습을 보면, 그런 절대 고수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데 말이야.
하긴, 겉모습만 보고 강약을 알 수만 있다면, 마교에서도 하극상으로 죽는 인간이 매일 나오진 않았겠지.
“아닙니다. 신승께서도 급한 일이 있어 저를 이리 부른 것일 텐데, 어찌 제 수련에만 열정을 다하겠습니까. 심려치 마십시오.”
“자네의 배려, 고맙게 받아들이겠네.”
부처의 미소가 이런 모습일까.
삿갓을 벗은 신승은 주름진 얼굴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응접실에 도착한 나는 미리 불러놨던 시녀에게 현재 낼 수 있는 제일 뛰어난 다과를 내오라고 한 뒤, 다른 사람은 절대 들이지 않도록 주의를 내렸다.
그리고 잠시 뒤, 다과를 내온 시녀가 고개를 숙이고 나가자 그제야 신승은 얼굴 위에 있던 미소를 지웠다.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그토록 자네를 애타게 불렀는가···이미 자네도 짐작하고 있을 걸세.”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내게 말하는 신승.
“그 말씀은···그들의 정체를 알아내셨다는 겁니까?”
내가 말하는 그들은 당연히 현재 무림맹에서 암약한 정체불명의 집단을 말하는 것이었다.
전생에 나와 사형제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었던 신창양가.
하지만 그들은 꼬리. 아니, 자그마한 털 한 가닥에 불과했다.
중원 곳곳에 퍼져있는 수십 개의 문파에서 그들과 똑같은 짓을 벌이고 있었으니.
정파라는 이름으로 젊은이들의 목숨으로 돈벌이를 하는 그들을 나는 막으려 애썼다.
하지만 하나의 손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첫 표행 때 그들의 손길이 닿아 있는 문파 여러 개를 지우면서 그들의 움직임을 잠시 제한되게 만들긴 했지만, 겨우 그뿐.
내가 그들 전부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혼자라는 한계를 느꼈던 나는 그때 용봉대전의 소식을 듣고 무림맹으로 찾아갔고, 거기서 신승을 만나 약조를 하게 된다.
정파의 거두, 수많은 명사의 존경을 받는 신승이라면 어떤 방법이 있으리라 믿고서.
내 질문에 신승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니, 아직 완벽히 파악한 건 아니네. 내가 예상하는 것보다 그들은 무림맹에 깊이 암약하고 있더군. 내 능력을 다했으나, 그들 전부를 찾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어.”
신승의 대답에 나는 이마에 깊은 주름을 새겼다.
설마 정파의 절대 고수이자, 무림맹주의 친우라는 신승조차 그들을 찾지 못할 줄이야.
하지만 그 대답에 절망적인 부분만 있는 건 아니었다.
“전부가 아니라는 건 일부분은 찾았다···이렇게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괜히 이만한 표국을 이끌고 나가는 게 아니군. 눈치가 빨라서 좋아.”
내 말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신승은 품 안에서 몇 장의 종이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언어인가? 그림인가? 알아볼 수 없는 문양들로 가득한 종이를 몇 번 훑어보던 나는 고개를 들고 신승과 눈을 마주쳤다.
“이건···암호로군요?”
“그래, 역시 알아보는군.”
이미 머릿속에 수십 개의 암호가 들어있는 나다.
내용을 파악할 순 없어도, 그것이 암호인지, 아니면 그냥 무의미한 문양의 나열인지는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크게 복잡하진 않지만···해독을 위해선 다른 복호 본이 필요한 종류의 암호로군요.”
“허어, 거기까지 파악할 수 있는가?”
“암호 해독을 위해선 그 정도는 파악하고 있어야지요. ···이걸 만든 건 신승 어르신 본인입니까?”
“그래, 어린 시절, 스승님 몰래 사형과 이야기를 나눌 때 쓰던 암호지. 이 세상에 아는 사람이라곤 한 손에 꼽을 정도로 희귀한 암호지.”
암호라는 것이 본디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더욱 높은 보안 강도를 가진다는 걸 생각하면, 이 암호는 세계 제일의 암호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설사 그가 암호를 쓰고 있는 것이 들키더라도, 현 무림에서 제일 배분이 높은 신승이 사용하는 암호를 물어볼 간 큰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의 말에 무조건 밝은 미소만을 지을 순 없었다.
“이렇게 암호로 적힌 정보를 가져오셨다는 건, 저한테 바라시는 것이 있으시다는 말씀이군요.”
지금 내게 정보를 건네주러 왔다면, 이렇게 암호화된 서류만 덜렁 가져올 리 없었다.
들킬 위험을 생각해서 암호화된 서류를 가져오는 건 그렇다 쳐도, 최소한 암호를 풀 수 있을 복호 본도 함께 가져와야 했지만, 지금 그가 건네준 종이에는 그런 건 없었다.
“자네한테는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어서 좋다니까. 그놈의 중놈들도 이리 빠릿빠릿하게 알아들으면 얼마나 좋아.”
내 말에 신승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누군가를 욕했다.
···아마 소림사에서도 반장급 배분을 가진 사람들을 욕하는 거겠지.
다름 아닌 신승이기에 할 수 있는 농담이었다.
“너와 무림맹에서 만났을 때, 두 가지를 약조했지. 기억하느냐?”
“네. 첫 번째는 이 서류에 적힌 것. 그러니까, 현 무림맹에서 암약하고 있는 놈들의 정체를 밝혀달라 부탁했지요.”
“그럼 두 번째는?”
신승의 보챔에 나는 창문 너머의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뒤틀린 천기를 바로 잡을 때, 한 손 보태 달라 하셨지요.”
허나 그 뒤편에는 나로서는 감히 볼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크나큰 뒤틀림이 있었다.
“그래, 기억하고 있으니 다행이구먼.”
후루룩.
아까 시녀가 내온 차를 한 모금 마신 신승은 찻잔을 내려놓고 나를 바라봤다.
“지금이 바로 그때일세. 나는 지금 자네의 도움이 누구보다 절실히 필요해.”
“천기를 뒤트는 자들을 찾았다는 말씀입니까?”
“아니, 그건 아닐세. 아직 적들의 정체는 나도 파악하지 못했어. 하지만 그들이 어디에 있는가 정도는 찾았네.”
“그곳이 대체 어딥니까?”
내 질문에 신승은 내 양 눈을 바라보며 조용히 답을 꺼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중원이 넘보지 못한 땅이자, 중원에서는 볼 수 없는 수많은 동식물의 고향.”
그것도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을.
“남만. 그곳이 바로 지금 천기가 가장 크게 뒤틀리고 있는 곳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