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하는 표국(3)
“신 공자에게 무공을 가르쳐달라고요?”
“제가 무공을 배운다고요?”
내 요청에 복삼은 물론 기정이까지 소스라치게 놀라며 나를 바라봤다.
“하, 하지만 어찌 저 같은 놈이 무공을···.”
“무공이 무슨 비인부전의 기술도 아니고, 누군가 가르치고 싶어 하면 가르치면 되는 거고, 배우고 싶으면 배우면 되는 거지. 너무 깊게 생각할 필요 없다.”
“어···단장님? 저희 문파는 비인부전 일인전승의 문파인데요?”
복삼 이놈이 여기서 끼어드네.
나는 인상을 쓰면서 복삼을 향해 말했다.
“너희 문파에 가르치는 모든 무공이 다 비인부전은 아니잖아. 저번에 보니까 후임들한테 몇 개 가르쳐 주더만.”
“그건 진짜 기초 중의 기초 같은 건데···괜찮습니까? 겨우 그거만 가르쳐드려도?”
“내가 뭐 기정이를 천하의 고수로 만들겠다는 게 아니잖아. 그냥 자기 호신할 정도의 무공이랑, 잔병치레 안 할 정도의 내공만 있으면 돼.”
“으음···그러시다면야······.”
턱을 쓰다듬으며 뭐를 가르쳐줘야 하나, 하고 고민하는 복삼의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장일이 입을 열었다.
“무공을 가르치는 거면 제가 가르치는 편이 더 낫지 않습니까? 저희 문파가 명문 흑도 문파긴 해도, 무공을 가르치는 건 괜찮지 않습니까.”
“만약에 기정이를 무인으로 만들려고 하는 거면 네가 더 좋은 선택이겠지. 하지만 아까도 말했다시피, 무공 수련보단 그냥 간단한 단련 같은 걸 원하는 거라고. 네가 가르쳤다간···.”
내가 말 안 해도 네가 알지?
그런 눈초리로 지그시 장일을 바라보자, 녀석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배운 무공은 모두 살기와 혈향이 짙으니, 건강을 생각한다면 좋은 선택은 아니죠. ···알겠습니다. 이 일은 전적으로 복삼이에게 맡기겠습니다.”
내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다는 것에 조금 아쉬운 기색을 내보이긴 했지만, 어느 쪽이 더 합리적인지는 아는 녀석답게 금방 내 말에 동의를 표했다.
“그래서 기정이 네 생각은 어떻냐?”
“저야 가르쳐만 주시면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필요하시다면 구배지례(九拜之禮)도 하겠습니다!”
무공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 퍽 기뻤는지, 눈까지 반짝이며 대답하는 기정이를 향해 양손을 마구 흔드는 복삼.
“아뇨, 뭐 거기까지···어차피 저도 이미 돌아가신 제 사부한테 한 번도 구배지례같은 건 한 적 없으니, 신 공자도 구태여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그런가요? 알겠습니다.”
기정이 이 녀석 뭔가 은근히 실망한 눈치인데? 구배지례를 해보고 싶었나?
[기정이가 생각하는 사부와 제자 간의 낭만 같은 거겠지. 보통 이야기책 보면 구배지례는 꼭 나오잖아?]
하긴. 그렇긴 하지.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나도 구배지례 같은 건 해본 적이 없네.
전생에서 신창양가나 마교에서 무공을 배울 땐 사부라기보단 교관에 가까웠고, 회귀 후에도 내 무공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독고삭에게 무공···그러니까, 권능을 물려받을 때도 구배지례 같은 건 하지 않고 바로 나왔으니까.
으음···그렇게 생각하니 구배지례를 한번 해보고 싶기는 하네.
[그럼 나한테 하면 되잖아? 너도 사실상 나한테 무공을 배우는 거잖아.]
···아냐, 역시 취소. 구배지례 같은 건 역시 필요 없는 것 같다.
[야, 이 자식아.]
그 뒤로도 화난 얼굴로 내 옆에서 무어라 떠드는 화순은 완벽하게 무시한 채 복삼에게 물었다.
“기정이한테 가르칠만한 무공은 있냐?”
“저희 문파에서 가르치는 기본적인 심법(心法) 하나랑 간단한 무공 몇 개면 될 것 같습니다. 예상보다 신 공자의 능력이 뛰어나면 조금 더 가르쳐도 될 것 같고요.”
복삼의 대답에 나와 장일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무공을 가르친다 해봐야 토납법(吐納法)에 무공 하나 정도 가르쳐 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본격적으로 가르치려는 낌새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이 가르쳐도 괜찮냐? 가르쳐 달라고 한 사람이 이리 말하는 것도 웃기지만, 그냥 기본적인 것만 가르쳐 줘도 돼.”
“에이, 뭐 어떻습니까. 어차피 제가 곧 우리 문파의 문주인데 문칙 한두 개 깬다고 무슨 문제 있겠습니까? 오늘부터 일인비전말고 이인비전하죠.”
내 말에도 오히려 껄껄껄 웃으며 술을 한입에 털어 넣는 복삼.
그런 그의 털털한 모습에 등을 두드리며 감사를 표했다.
“고맙다, 복삼아.”
“에이, 뭘요. 대신 봉급은 두둑이 주십쇼. 총표두에 신 공자 무공 단련까지 시켜드리니까요.”
“걱정하지 마라.”
쪼르륵. 나는 탁자 위에 있는 네 개의 술잔에 술을 따른 뒤, 내 잔을 들고 말했다.
“내 뒤를 따른 걸 절대 후회하지 않도록 만들어줄 테니까.”
“으하하! 알겠습니다!”
“믿고 따르겠습니다.”
“도련님이 저를 믿어주신 만큼, 저도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내 말에 다른 세 사람도 각자 잔을 들어 올렸다.
쨍!
시원하고 경쾌한 소리.
마치 우리의 앞날을 미리 알려주는 듯한 그 소리에 우리 네 사람의 입가에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
시간은 마치 쏜살같이 흘러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싸움 외에 다른 일을 하게 된 폭풍단 녀석들은 처음에는 조금 헤매는 듯 보였지만, 일에 조금 익숙해지자 누구보다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다.
어쩌다 노숙할 일이 생기면 누구 보다 앞장서서 식사와 잠자리를 마련했고, 싸울 일이 있으면 제일 앞에서 다른 표사와 쟁자수들을 독려했다.
같잖은 산적과 타 표국의 표사들이 거는 시비도 전장에서 싸워온 진짜들의 살기 한 번이면 모두 잠잠해졌다.
처음에는 갑자기 끼어든 외인들을 영 탐탁지 않게 여기던 표국 사람들도 그 능력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공이 다른 이들보다 뛰어나다고 젠체하지 않는 게 가장 큰 이유였지만 말이다.
[자기 단장이 제일 윗사람인데 어떤 간 큰놈이 무공 가지고 까불겠냐.]
뭐···속내를 따지자면 화순의 말이 맞았지만.
그래도 그건 처음뿐. 자신들이 표국에 받아들여지고, 소속됨을 느끼자 곧 진심으로 표국 자체에 충성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진심으로 자신들에게 고마워한다는 걸 그들도 알았기 때문이다.
군대라는 건 분명 외부의 침략자에게서 백성들을 지키는 고귀한 일이지만, 그것을 체감하긴 쉽지 않다.
애초에 국경부대라는 곳이 어디 민간인이 살만한 곳인가.
우리가 얼마나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군에 관련되지 않은 사람 중엔 거의 없었고, 그렇기에 우리를 고마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애초에 아무리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갔다곤 하지만, 명나라로 넘어오려는 적을 열심히 막고 있는 병사들에게 ‘버려진 자들’이라면서 깔보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했지만.
하지만 여기선 그럴 걱정도, 이유도 없었다.
눈앞에서 자신을 지켜주는 강한 무인에게 고마움을 표하지 않는 이는 없었고, 더군다나 선임 표사나 표두같이 표국 내 사람들에게 동경 받을 만한 자리에까지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봉급이 그때 당시보다 적냐면 그것도 아니다.
내 예상보다도 표국의 자금 상황은 더욱 탄탄했고, 덕분에 기본급만 해도 군에서 일하던 때보다 많이 줄 수 있었다.
거기에다가 표행 한 번 성공할 때마다 상여금도 두둑이 내줬고 말이야.
이런저런 이유 덕분에 폭풍단의 적응은 무척 빠르게 진행되었고, 군대에서 날뛰던 과거를 그리워하던 놈들도 이제는 없어졌다.
그리고 그들 덕분에 인력난 부분도 빠르게 해소되었다.
새로 들여온 표사들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나돌자, 돈은 벌고 싶지만 너무 큰 위험은 감수하고 싶지 않은 쟁자수 들이 우리 쪽으로 몰려온 것이다.
생각보다도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종래에는 가려서 뽑아야 할 정도였으니, 전국에서 시끄럽던 인력난도 우리에게는 서역 너머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렇게 인력이 풍부해지자, 이번에는 또 의뢰가 물밀 듯 밀려왔다.
다른 표국에서 줄어든 인력 때문에 표행의 중요도나 우선도를 따져서 받아야 했던 때에도 우리 표국은 넘쳐나는 인력 덕분에 어떤 의뢰라도 모두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원래 다른 표국을 주로 사용하던 상단이나 문파에서도 우리 쪽으로 표행을 맡겼고, 그렇게 맡긴 표물이 생각보다 빠르고 안전하게 도착한다는 걸 알고 다음에도 우리 쪽에 계속 맡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인력과 표행의 증가라는 선순환으로 우리 표국은 끊임없이 성장해, 개국 일 년 만에 섬서성 내에서 열 손가락 내에 드는 대형 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덕분에 본래 예정되어 있던 지부 추가 설립을 훨씬 빨리 앞당겨서 진행할 수 있었다.
물론 아직 전국에 지부를 둘 정도는 아니지만, 전에는 그것이 먼 미래의 일이었다면, 이제는 조금만 더 노력하면 현실로 마주할 수 있었다.
표국 외의 일도 잘 진행되고 있었다.
제일 큰 변화를 손꼽자면, 역시 기정이의 무공 수련이었다.
복삼은 내 예상보다도 기정이를 착실하고, 또 제대로 가르쳤다.
“처음에는 그냥 간단한 수련만 시킬 생각이었는데, 신 공자 본인의 열의가 생각보다 대단하더군요.”
표국주실로 놀러···가 아니라, 보고하러 온 복삼이 자신의 앞에 있던 술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물론 내 앞에는 찻잔이 놓여 있었다.
이야기하면서 술을 마시는 경험 따위, 빙궁만으로 족했기 때문이다.
“호오, 그 정도야?”
“네. 물론 약관을 넘어서 수련을 시작한 지라 엄청 높은 경지에는 오르기 힘들지만, 그래도 단장님이 가져오신 현청단도 복용했고, 꾸준히 수련하면 불혹(不惑; 40세)에 이르면 이류 소리는 들을 수 있겠죠.”
“이류라···대단하네.”
기정이의 경지를 나는 절대 우습게 보지 않았다.
당장 회귀 전의 나도 십 오 년을 넘게 수련하고도 삼류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고, 설사 거기서 십 오 년을 더 수련했다 해도 더 성장할 길은 요원했으니까.
오히려 그렇게까지 노력하는 기정이를 칭찬하고 싶은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른 표사들의 교육도 네가 맡았다며?”
“예. 아무래도 우리 애들이 너무 치고 올라가니까, 다른 표사들도 애가 좀 탔나 봅니다.”
우리 표국은 일단 기본급부터가 다른 표국에 비해서도 많지만, 일을 더욱 잘하면 더 많이 벌 수도 있었다.
가까운 곳은 용돈 벌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성 몇 개를 넘어갈 정도로 멀리 떠나면 기본급에 비견될 만큼 많은 성과급을 받았다.
하지만 먼 곳으로 떠나는 표행은 아무래도 실력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레 원래 무공 실력도, 실전 경험도 더 뛰어난 폭풍단 출신들이 많이 뽑힐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설마 폭풍단 출신인 저한테 무공을 가르쳐달라고 올 줄은 몰랐죠.”
뒤통수를 긁적이며 어색한 미소를 짓는 복삼의 등을 강하게 두드렸다.
“네가 총표두이기도 하지만, 기정이를 가르치는 걸 맨날 오가면서 보잖아. 아무래도 네 가르치는 솜씨를 보고 따를 수밖에 없겠지.”
이것도 내가 원했던 그림 중 하나였다.
폭풍단 출신들이야 원래 자기 상사였으니 복삼을 잘 따르겠지만, 문제는 다른 표사들이었다.
갑자기 나타나서 제일 위로 임명되니 눈초리가 어찌 고울 수 있을까.
더군다나 총표두라는 자리가 표행을 막 나갈 수 있는 그런 자리도 아니었으니, 복삼의 진짜 능력을 보여주기란 요원했다.
그래서 기정이에게 무공 수련을 시켜준다는 명목으로 다른 이들의 앞에서 복삼이 무공 시연을 하도록 했고, 그 실력을 본 폭풍단 외 표사들이 자연스레 복삼을 따르도록 만든 것이다.
덕분에 복삼은 표사 대부분이 지지하는 총표두로 자리를 확고히 잡을 수 있었다.
물론 거기에 원래 표사들의 솜씨가 늘어나는 건 기쁘기 그지없는 덤이었고.
“뭐, 저도 어느 표행에 어느 표사가 갈지 정하는 것보단 이쪽이 훨씬 즐겁지만요.”
“쭉 그렇게만 해줘. 너는 잘하고 있으니까.”
“하하하! 맡겨만 두십시오! 섬서 내 어떤 표국! 아니, 어떤 무림 문파에도 지지 않도록 단련시켜 놓을테니까요!”
[아니, 그건 좀 선을 넘은 것 같은데.]
“···하고 싶은 대로 해봐.”
물론 내 심정은 화순에게 좀 더 가까웠지만, 기껏 잔뜩 들뜬 복삼이를 실망하게 하고 싶진 않아서 그리 대답했다.
아무리 그래도 진짜 무림 문파 수준으로 만들겠어? 그건 말도 안 되지.
···그치?
쿵쿵쿵!
우리 표국의 표사들이 다른 문파의 무인들을 때려눕히는, 심히 기괴한 광경을 상상하고 있던 그때 저 멀리서 들려오는 급박한 발걸음 소리에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덜커덩!
“도, 도련님!”
그 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기정이였다.
···심상치 않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부르는 기정이의 모습에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무공을 배운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심(心)의 단련을 제일 중요히 여긴다는 도가 계열의 심법을 익히고 있는 기정이였다.
이제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강심장이 되어 있을 터임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식은땀을 뻘뻘 흘리다니.
자연스레 내 얼굴도 굳을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냐?”
“지금, 지금 당장 밖으로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길래?”
“아, 으, 저, 그···.”
내 질문에 말도, 손짓도 무엇 하나 완성하지 못하고 그저 기괴한 반응만 내보이는 기정이.
이 상태로는 뭔가 듣기는 힘들 것 같은지, 복삼이 마시던 술잔도 내려놓고 내게 말했다.
“···일단 나가보죠. 신 공자가 저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보통 일은 아닌 듯하니까요.”
“그래, 같이 나가보자.”
건물 밖을 나서자마자 가장 먼저 느낀 건 지독한 냄새였다.
마치 땀을 흠뻑 흘린 듯한 짐승의 암내와 비슷한 냄새.
전장에서 정신없이 적을 도륙하다 정신을 차려보면, 말한테서 이런 냄새가 나곤 했다.
그리고 그 냄새가 표국 입구에 점점 가까워지면서 진해지자, 복삼의 표정도 기정이만큼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지금 저 앞에 무엇이 있는지 그도 알아차린 것이다.
기정이의 뒤를 따라 도착한 표국의 입구. 저 너머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열기와 냄새. 그리고 소리.
“단장님, 이거 설마···?”
“·········.”
나는 복삼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굳건히 닫힌 표국의 문을 천천히 열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안녕하십니까, 북해의 하얀 별이시여.”
한때 함께 여행했던 빙궁의 고수와 함께.
“첫 공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말.
말.
말.
말 그대로 수천 마리의 말이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져 있었다.
“부디 받아주시겠습니까?”
싱긋, 하고 웃는 그에게 나는 아무런 대답도 꺼내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만 봤다.
북해의 공물
후루룩.
나와 빙궁의 대표 둘밖에 없는 표국주실 안에는 그가 차를 마시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다 마신 찻잔을 내려놓는 그는 어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명나라에 체류한 지 한 달이 넘었는데도 아직 이렇게 차를 마시는 건 적응이 안 되는군요.”
“원하시면 좋은 술을 내드릴 수 있습니다.”
내 제안에 그는 마치 본인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이제 이곳에 오래 있어야 할 테니 명나라의 예절에도 익숙해져야죠.”
“오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은?”
“다름 아니라 이번에 제가 북해의 대사로 임명받아, 명나라에서 오랫동안 체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의 대답에 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국가의 대사는 곧 해당 국가의 대표와 다를 바 없다.
하물며 국력까지 비슷한 북해의 대표라면 그의 위상은 가히 고위 관직과 다를 바 없을 터.
내 눈빛의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그는 어색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 뭐, 사실 뭔가 제가 뛰어난 부분이 있다기보단, 빙궁 내에서 한어(漢語)를 제일 잘 한다는 이유로 뽑힌 거지만요.”
“타국의 언어를 할 줄 아는 것이 뛰어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본인의 실력으로 당당히 쟁취한 자리니 부끄러워 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실 저보다 더 뛰어난 인재도 있는데 이 자리를 차지하게 된 거라, 조금 부끄럽습니다.”
“더 뛰어난 인재라니. 누구 말씀입니까?”
내 질문에 그는 당연하다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야 물론 자야 소주님이시죠.”
자야!
갑작스레 튀어나온 그녀의 이름에 나는 정색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빙궁주는 자야의 죽음을 빙궁에 알리지 않았던 걸까?
“사실 자야 소주 님이 빙궁에서는 한어를 제일 잘하시거든요. 하물며 명나라의 공주와 하얀 별을 직접 초청하신 공을 세우기까지 하였는데 지금 행방불명인 상태라 부득이하게 그다음으로 한어 실력이 뛰어난 제가 여기로 오게 된 거지요.”
그의 대답에 나는 확신했다. 빙궁주는 정말로 자야의 죽음을 비밀로 한 것이다.
이 사람이 자신을 낮춰서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빙궁에서 알아주는 절정 고수.
그런 사람이 모를 정도라면 빙궁의 다른 이들도 모른다고 하는 게 맞겠지.
어쩌면 빙궁주는 이미 죗값을 치른 그녀의 명예까지 더럽히고 싶진 않다,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빙궁의 주인이자 북해의 주인이 그러길 바란다는 데, 하얀 별이란 이름을 받긴 했지만 따지자면 외인인 내가 나설 이유는 없겠지.
자야의 죽음에 관한 비밀은 평생토록 숨기길 다짐한 채 다시 그와의 대화에 집중했다.
“그러셨군요. 빙궁 대사 직을 수행하면서 힘든 일이 있다면 언제든 제게 말씀하시지요. 부족하게나마 힘이 되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얀 별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마치 만 명의 전사가 제 뒤를 받쳐주고 있는 것 같군요.”
“그런데, 그건 그렇고···.”
힐끔, 눈을 흘겨 창문 밖을 바라보다, 다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건 뭡니까?”
지금 표국 안은 말. 말. 그리고 말로 가득했다.
그것도 어느 하나 질 떨어지는 놈 없는 최상품의 명마들로 말이다.
열 개까지 준비해놓은 마구간은 이미 예전에 초과적재 됐고, 근처 마방의 마구간은 물론 객잔 마구간에까지 맡겨놓은 상태였다.
그러고도 아직 표국 내에 정리하는 중이니, 그 숫자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제일 치열한 전장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수천의 말.
하지만 그것을 끌고 온 당사자는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공물이지요. 빙궁을 포함한 북해 전역에 있는 부족의 선물입니다.”
“아니, 그건 아까 들어서 아는데···이건 좀 숫자가···.”
이걸 뭐라 말해야 할지, 여러 가지 단어를 입속에서 돌고 돌리다, 결국 한 마디 꺼냈다.
“황실에 보낼 공물을 저한테 잘못 보낸 거 아닙니까?”
고민한 보람이 있는 대답이었다.
최소한 미쳤냐, 돌았냐, 생각 없냐. 이런 단어는 입에서 튀어나오지 않았으니까.
내 대답에 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명나라에 보낼 공물은 이미 주고받은 지 오랩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하얀 별에게 보내오는 공물입니다.”
“그, 그렇군요.”
솔직히 ‘아, 그렇네요. 제가 실수했군요. 바로 다시 가져가겠습니다.’ 이런 대답이 나오길 조금은 바랐지만, 역시 어림도 없었다.
“그런데 빙궁뿐만 아니라 북해 전역에 있는 부족 모두가 보냈다, 라는 건 무슨 뜻입니까?”
“아, 그것이 사실···.”
그의 설명은 이러했다.
최근 북해와 명나라의 교류가 허용되면서, 지금까지는 소규모였던 상행이 대규모로 커졌다.
그렇게 되면서 옛날 같았다면 크기나 수량 때문에 쉽게 팔 수 없는 물건. 특히 명나라에 많이 부족한 광물이나 북해의 명마들이 많이 팔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물건을 수출한 부족 역시 자기들에게 없던 명나라의 물건이나, 부족했던 식량들을 수입하면서 그 규모가 점차 커졌고, 지금은 각 일대에서도 이름을 날리는 대형 부족들이 되었다.
라는 건 좋은데···문제는 그 부족들이 전부.
“예전에 나를 호위했던 부족이라는 말씀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들만 혜택을 받은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그것이 조금 복잡합니다. 우연이라면 우연일 수도 있지요.”
우리 일행이 빙궁에서 명나라로 돌아올 땐 당연히 제일 빠른 길을 택했다.
좋은 소식을 최대한 빨리 알리고 싶기도 하거니와, 진짜, 만약의 경우지만 혹시나 남은 집단의 잔당이 우리를 덮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명나라의 상단들 역시 우리와 똑같은 길을 택했다.
북해에서 장사하려면 빙궁에 허락을 받아야 하고, 어차피 빙궁까지 갔다 오는 길이고 하니 명나라로 올 때 물건을 사고팔려고 짐도 잔뜩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시작됐다.
“그렇게 혜택을 받은 부족들이 모여 하얀 별에게 보답을 해드리자, 이렇게 이야기가 나온 겁니다.”
우연의 일치긴 했지만, 일단 내가 왔던 덕분에 그들이 혜택을 받은 건 분명하니까.
그런데 문제는 주변의 혜택을 받지 못한 다른 부족들은 그것을 다르게 해석했다는 것이다.
“저한테 잘 보인 덕분에 그런 이득을 봤다, 이렇게 생각했다고요?”
“물론 전부가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일부는 그저 하얀 별이자 빙정의 주인에게 예를 표하고자 보낸 부족도 있고, 동맹을 맺어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보내온 부족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주류는 그쪽이다, 이거군요.”
“예, 그렇죠.”
하아, 그의 대답에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혜택을 받은 부족이야 그런 게 아니라고 변명을 했겠지만, 손해를 본 부족이 그걸 곧이곧대로 듣겠는가.
결국 그렇게 보내오는 곳이 하나둘 늘어나다 보니 이렇게 많아졌다···그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그런데 그냥 금이나 다른 거로 보내오면 안 됩니까? 왜 하필 말입니까?”
“본디 북해에서 높은 분에게 무언가 선물을 드린다고 하면 말이 기본입니다. 북해에는 말은 기르는 가축을 넘어 가족이자, 부족의 보물이기도 하니까요. 그것을 드린다는 것은 곧 최고의 찬사를 함께 주는 것과 같습니다.”
“···라고 처음으로 공물을 보낸 부족이 말을 보내니까, 다른 부족도 따라서 말을 보냈다. 결국 이 뜻이죠?”
“네, 그렇습니다.”
이야기가 그렇게 되니, 돌려보낸다는 방법도 선택할 수 없었다.
만약 돌려보냈다간 돌려받은 부족이 ‘하얀 별이 우리를 택하지 않았다! 이건 우리를 무시하는 처사다!’라며 어느 이상한 짓을 할지 몰랐으니까.
[이미 손에 들어온 걸 놓기 싫은 건 아니고?]
···그런 욕심도 조금은 있지만, 일단 그건 두 번째 이유라고.
“그런데 설마 빙궁에서도 공물을 보내온 건 아니죠?”
“왜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보내왔죠.”
“저것도 다 감당하기 힘든 걸 알면서도요?”
“그건 알지만, 이것만은 반드시 돌려드려야 했습니다.”
“‘돌려준다’ 라는 건 또 무슨 말입니까?”
[너 빙궁에 뭐 놔두고 온 것 있냐?]
아니, 있을 리가 없잖아. 애초에 내가 뭘 가져갔다고.
화순의 질문에 나는 불평이 잔뜩 섞인 대답을 날렸다.
유일하게 가져간 마차도 한 번 습격당한 이후로 버렸는데.
두고 오고 싶어도 두고 올 게 없어서 못 두고 온다.
하지만 내 질문에 그는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역시 아직 모르셨군요.”
“제가 정말 뭐 두고 온 거라도 있습니까?”
“혹시 하얀 별께서는 마왕(馬王)이라고 아십니까?”
“마왕(魔王)이 아니라 마왕(馬王)이요? 아뇨, 들어본 적 없습니다.”
갑자기 전혀 연관 없는 이야기를 꺼내는 그에게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맞장구를 치자, 그는 계속해서 그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마왕은 북해의 전설 속에 나오는 동물로, 천리마, 적토마, 오추마 등 역사에도 이름을 날린 명마들의 아버지라 불리며, 신룡(神龍)이 말의 형상으로 내려왔다는 이야기까지 있는 명마 중의 명마입니다.”
“설마 그것을 공물로 가지고 왔다, 이런 말씀은 아니지요?”
“아뇨, 설마 그럴 리가요. 저희 북해에는 마왕도 없고, 설사 있다고 해도 감히 공물로 드릴 순 없죠. 다른 부족에서 분명 들고일어날 테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그는 이미 주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놈 이야기는 갑자기···.”
내 질문에 대답 대신 시선만을 보내는 북해의 대사.
···아니, 잠깐.
“그···설마······아니죠?”
“마왕은 그 크기가 다른 말의 절반밖에 되지 않으나 근육으로 가득하여 다른 말의 백 배의 힘을 내며, 그 다리는 짧고 얇으나 천 리도 거뜬히 나아가며, 생긴 것은 추하나 그 안에는 용이 담겨 있을지니.”
그의 설명에 점점 그려지는 한 마리의 말.
“···그리고 이 땅 위에 자식을 남기고 자신은 하늘로 다시 오르려 여색을 탐하니, 신룡을 낳으면 다시 하늘로 오르리라.”
그리고 그 예상이 확고해지는 한 문장.
“마왕의 씨를 품은 스무 마리의 암말을 모두 데리고 왔습니다.”
“·········.”
저 녀석이 진짜 마왕인가 뭔가 하는 영물이라고?
물론 내 와류를 혼자 버텨내기도 하고, 몇 날 며칠을 밤새 뛰어도 지친 기색 하나 보이지 않고, 사륜마차도 자기 혼자 끌고 다니긴 하지만···.
···왜 말하면 말할수록 설득력이 없어지냐.
“그리고 함께 갔던 다른 부족 중 일부에서도 암말을 데리고 왔습니다. 호위부대가 타던 암말 중 몇 마리가 더 임신해서 말입니다.”
이놈이 내가 안 보는 사이에 더했구나.
그래, 그래도 태어나는 놈마다 명마라 하니, 좋은 일···이라고 최대한 좋게 생각하자.
안 그러면 벌써 뛰쳐나가서 탕에 물 끓였다 진짜.
“하아···일단은 알겠습니다.”
공짜 말이 늘어난 건 좋지만, 지금은 상황이 너무 안 좋다.
안 그래도 수천 마리의 말이 벌써 마구간을 그득 채우고 있는데, 거기서 스무 마리 넘게 더 끼어들다니.
···그래도 어떻게 다 써먹을 방법은 있는 게 다행인가.
이 만남만 끝나면 바로 기정이한테 말해서 서찰을 보내야겠다.
그분이 오시면 그때 좀 천천히 이야기를 나눠 봐야지.
“그리고.”
“네?”
갑자기 내 수중으로 들어온 말의 처리방법을 생각하고 있던 그때, 갑자기 들려온 말에 다시 그에게로 정신을 집중했다.
“남은 공물이 또 있습니다.”
“···또요?”
예전 같았으면 주면 고맙다고 받았겠지만, 이젠 넘쳐서 문제일 지경이다.
내가 인상을 쓰자, 그는 바로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아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빙궁에서 드리려는 공물은 하얀 별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것이 아니니까요.”
“그럼 뭡니까? 혹시 말 대신 소를 보내주신 건 아니죠?”
“하하하! 그럴 리가요. 비오칸, 샤이타! 준비했던 공물을 가지고 들어와라!”
“옙!”
“알겠습니다!”
내 진심 어린 농담에 껄껄 웃던 그가 문밖을 향해 북해의 말로 소리치자, 두 사람의 사내가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하며 천으로 둘러싸인 무언가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쿵! 탁자 위에 놓이는 소리를 듣자 하니 무언가 크고 단단한 것 간긴 한데.
“무엇인지 짐작하신 눈치로군요.”
아니, 전혀 아닌데요. 뭔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본심은 그렇지만, 상대가 저렇게 말할 땐 원래 그냥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게 최선이다.
촤악!
그가 둘러싸여 있던 천을 거둬내자, 그 안에서 나타난 건 그저 평범한 먹색의 철.
···아니, 평범한 것이 아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천에 둘러싸여 있어서 금방 알아차리지 못했다.
가히 북해의 겨울이 떠오르게 만드는 서늘한 한기가 전면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음을!
어딘가 친숙한 그 한기에 나는 눈앞에 있는 이것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내 두 번째 창. 진양(眞陽)의 창대 일부를 이루고 있는 바로 그 철.
“만년한철(萬年寒鐵)!”
“이것이 바로 저희 빙궁에서 하얀 별에게 드리는 선물이옵니다.”
웃는 얼굴로 내게 그것을 내미는 그에게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
유현이 만년한철을 보고 감탄하던 바로 그 시각.
신강에서는 어느 미청년과 복면의 사내가 만남을 가지고 있었다.
북경에선 그 절반만 해도 금지를 당할 것이 분명한 거탑의 맨 꼭대기 층에서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유현과 북해의 대표처럼 밝은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대화는 절대 아니었다.
“네놈들은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느냔 말이다!”
청년의 매서운 호통에 앞에 서 있는 복면의 사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유들유들. 마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호통을 듣고 있는 것처럼 웃고 있을 뿐.
그런 사내의 모습에 열이 뻗친 청년은 그에게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벌써 오 년! 오 년이다! 그 시간 동안 네놈들은 뭘 했지?!”
“항상 말씀드리지만, 저희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준 정보를 토대로 최선을 다해서 그를···.”
“항상 말만 찾고 있다, 찾고 있다! 네놈들은 찾았다 그 한마디를 하는 것이 그토록 어렵나! 내가 원하는 건 성과다, 성과!”
고오오! 그렇게 소리치는 청년에게서 강렬한 기파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복면의 사내도 조금 기색을 달리했다. 물론 그것이 두렵다, 라기보단 의외라는 눈치에 좀 더 가까웠지만.
‘생각보다 재능은 있나 보군.’
“당신이 준 ‘도구’ 덕분에 속도가 확실히 빨라지긴 했지만···아무래도 저희의 예상이 틀렸던 모양이더군요.”
“무슨 말이지?”
“아무래도 그 잘난 능력을 전해주는 게 생각보다 길게 걸리지 않았던 모양이더군요. 만 오천 명 사이에는 반응하는 인간이 없더이다.”
“젠장! 그러니까 나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더냐!”
아까보다 더욱 분노하는 청년. 마치 건드려선 안 될 약점이라도 건드린 듯 진심으로 분노하는 청년의 모습에, 사내도 어쩔 수 없이 반 발자국 물러섰다.
“그래서 제안을 하러 오지 않았습니까.”
“무슨 제안!”
“그 ‘도구’···분명 놈의 근처에 가면 반응한다고 하셨죠?”
“그래, 그 인간이 거짓을 말할 게 아니라면 그렇겠지.”
“그렇다면 간단하죠. 그냥 풀어버리면 됩니다.”
“···뭐라고?”
사내의 말에 청년의 안면 근육이 꿈틀거렸다.
풀어버린다고? 설마 ‘그걸’?
본능적인 반응으로 거부를 표하는 청년과 달리, 사내는 마치 당연한 일인 양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도구의 효율을 최대로 끌어낼 방법이라는 데엔 방금 당신도 동의하지 않으셨습니까?”
“하지만···그건···.”
처음으로 약한 모습을 보이는 청년. 거기에 쐐기를 박듯, 사내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또 몇 년을 기다리실 겁니까? 아니면 눈 딱 감고 최고의 방법을 사용하실 겁니까?”
사내의 재촉에 청년은 눈을 감았다.
···이미 자신은 너무 먼 길을 걸어왔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정체불명의 적을 막아선 사부의 등 뒤에 칼을 꽂은 그때부터.
이 대화도.
“···알겠다.”
이 대답도 예정된 것이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라. 대신.”
번뜩! 그의 눈에서 푸른 빛의 귀기(鬼氣)가 쏟아졌다.
“이제는 더 기다려 주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성공시키도록.”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청년에게 대답하며 고개를 숙인 북면의 사내의 눈에도 청년과 같은 푸른색의 빛이 순간 보였다.
“반드시 해낼 테니까요.”
사내의 대답을 들은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 걸쳐뒀던 검은색 비단옷을 입었다.
그 등 뒤에 적힌 한 단어.
천마(天魔)!
마교의 주인이며, 만마의 종주. 그리고 모든 마교도의 신앙.
오직 한 사람에게 밖에 허락되지 않은 그 이름을 등에 걸친 청년은 조용히 밖으로 나섰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이제 조금도 더 기다릴 수 없다. 나야말로···.’
그가 항상 바라던 것밖에 없었다.
“···진정한 천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