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하는 표국(2)
“너, 너희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복받쳐 오르는 감정에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럴 땐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이 녀석들이 언젠가 찾아오겠지, 하고 항상 생각은 하고 있었다.
본디 군대라는 곳이 일반 병사로 오래 있을 만한 곳도 아니거니와, 본디 내가 없을 땐 힘만 세고 다루기 힘든, 이른바 관심병사 취급을 받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떠나기 직전에 찾아오라고 말을 해놨던 거고, 녀석들이 찾아올 때 같이 일하자고 표국까지 설립해 놨다.
하지만 설마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백 명 전부 내 말을 믿고 찾아올 줄이야.
내가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더듬거리고 있을 때, 장일과 복삼 두 사람이 입을 열었다.
“단장님. 일단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죠. 이야기가 길어질 듯하니 말입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정론만 딱딱 말하는 장일과.
“장일이 놈 말이 맞습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술도 한 잔 곁들이면 이야기를 나누면 더울 좋을 것 같군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주변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 줄 아는 복삼.
딱 내가 기억하고 있던 두 사람의 말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그 모습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꾸나. 일단 말부터···아, 그래. 기정이도 나와 있었구나.”
기정이는 옆에 선 문지기 차림의 사내와 함께 뻘쭘한 표정으로 나와 내 부하들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내가 이름을 부르자, 기정이는 놀란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조금 전 보고를 듣고 나왔는데···저···혹시 이분들이 도련님의 전우분들입니까?”
“그래, 전에 여러 번 말해 줬지? 아직 기억하고 있느냐?”
“물론이죠! 도련님의 전우분들을 어떻게 잊고 있겠습니까!”
흥분한 목소리로 내게 말하던 기정이는 바로 장일과 복삼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이며 큰소리로 외쳤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두 분의 이야기는 도련님에게 많이 들었습니다. 도련님의 전속 시종인 신기정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기정의 자기소개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정이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분이 단장님이 그토록 자랑하시던 신 공자였군요? 꼭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아, 아뇨, 공자라뇨. 제게는 과분한 호칭입니다.”
“으하하! 과중하다니요. 오히려 제일 먼저 단장님을 모셨으니, 빨리 들어온 순으로 치면 오히려 신 공자가 최고참 아니겠습니까? 저희가 예의를 차리는 것이 맞지요.”
두 사람의 말에 쑥스러운 듯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면서도 실없는 미소를 짓는 기정이.
그러고 보니 내가 기정이에게 군에 있던 이야기를 해줄 때 저 두 사람 나오면 귀를 쫑긋 세웠지.
어쩌면 기정이에게 저 두 사람은 동경의 대상이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것보다 이 녀석들이 타고 온 말들을 어디 좀 데려다 놔야 할 것 같은데···우리 표국에 마구간이 좀 큰 데가 있었나?”
“아···도련님이 말씀해 주신 대로 이분들이 딱 백 분이면···.”
한창 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던 기정이에게 말을 걸자, 손바닥 위로 무언가를 계산하는 시늉을 취하더니,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지금 육 번 마구간에 서른 마리 정도가 있긴 한데, 그 녀석들을 구 번 마구간에 보내면 백 마리 정도는 넣을 자리가 생길 듯합니다.”
“유, 육 번 마구간? 구 번 마구간???”
···우리 표국에 마구간이 아홉 개씩 있었나?
“···일단 그렇게 처리해.”
“알겠습니다. 관 서기님!”
“네, 총관님!”
“손님분들의 말을 전부 육 번 마구간으로 모시도록 하세요. 관리인한테는 도련님 전우분들의 말이니 각별히 주의하라고 전해주세요.”
“명령대로 시행하겠습니다.”
기정의 명령을 받은 관 서기는 안에서 몇 명의 건장한 사내를 부르더니, 백 마리의 말을 이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야, 단장님. 엄청나게 성공하셨네요. 이렇게 큰 표국이라니.”
“단장님의 배포라면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니지.”
그리고 마치 그것이 당연한 일인 마냥 바라보는 장일과 복삼.
아니, 나도 표국이 이렇게 성장한 줄은 몰랐는데.
물론 무림맹을 떠나기 전에 이것저것 잔뜩 계획을 세우고 가긴 했지만, 이건 예상보다 더했다.
아무래도 기정이는 원래 내가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그 규모를 넓힌 듯했다.
내 예상보다 기정이의 능력이 훨씬 뛰어날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연회는 지금 식당을 비우기가 어려워 근처 객잔을 수배해뒀습니다. 연락이 오면 바로 거기로 모시겠습니다.”
“그래, 오랜만에 모였으니 한 번 술을 적셔 봐야지.”
“오오! 단장님이 쏘시는 겁니까?”
“금방 전역한 놈들이 돈이 있어 봐야 얼마나 있겠냐? 당연히 내가 모조리 쏜다!”
오오! 하고 내 말에 감탄하는 옛 부하들.
옛날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그 반응에 나도, 복삼과 장일도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아주 오랜만에 옛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
“캬아! 오랜만의 술이라 그런지 꿀맛이 따로 없구나!”
“모두 목에 낀 때를 술로 씻어내자!”
“오늘 모두 죽었다고 복창해라! 모두 술독에 실려서 숙소에 가도록 만들어 버릴 테니까!”
왁자지껄한 주변의 술꾼들 사이에서도 나와 장일. 복삼과 기정이가 앉아 있는 정 가운데는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그것이 우리가 연회를 즐기지 못하고 있다, 는 걸 말하는 건 아니었다.
아니, 그것을 넘어 감히 단언컨대 지금 여기서 이 자리를 가장 즐기고 있는 사람은 우리라 말할 수 있었다.
당장 우리 네 사람의 얼굴에 그려진 미소만 봐도 그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모두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다. 부대에서 바로 여기로 온 거냐?”
“네. 고향에 들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들렀다 오라 했는데, 그러길 바라는 사람이 없더군요.”
“흠, 그랬구만.”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니다.
북방국경부대는 버려진 자들의 부대라 불릴 만큼 병사들이 불우한 과거를 가지고 있거나 먹고 살 방도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물며 우리 폭풍단은 전부 무공을 익힌 사람들뿐.
무공을 익힌 자들이 자신의 고향이나 사문에서 나와 북방국경부대에 들어갈 이유가 좋은 경우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폭풍단에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서로의 과거나 사문을 밝히는 일이 드물었다.
“그런데 여기 올 때까지 모두 말을 타고 온 거냐?”
명나라 군인의 행색을 하고 있다지만, 그래도 그 소속을 알 수 없는 백 명의 중갑기병은 자그마한 마을은 물론 성도에서도 신경 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용케도 시비 없이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이 놀라워 묻자, 복삼이 뜯고 있던 오리 다리를 내려놓고 대답했다.
“에이, 제가 누굽니까? 당연히 다 준비를 하고 왔지요.”
“···네가?”
내가 널 아는데, 네가 뭘 준비를 했다고?
그런 눈초리로 복삼을 지그시 바라보자, 목이 막힌 듯 술 한 병을 통째로 들이킨 녀석이 입을 열었다.
“아이, 뭐, 제가 직접한 건 아니고···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보여드리는 것이 빠르겠지요.”
그렇게 말한 장일은 품을 뒤져 한 장의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군에서도 일급 명령서에나 사용하는 고급 재질의 종이였다.
거기에 적힌 내용을 천천히 읽어보고 나서야, 왜 여기까지 아무런 사건, 사고 없이 찾아올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일장군님이 참 많이 신경 써 주셨네.”
“그러니까 일장군님이 아니라 총사령관님이라니까요. 그거 직접 들으시면 분명히 화내십니다?”
“아직 버릇이 안 고쳐져서 말이야.”
복삼의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전역한 지 이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도 내게 일장군은 일장군이었다.
종이에는 ‘대장군의 명령으로 부대 이동 중’이라는 한 줄의 말과 함께 대장군 대리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지금처럼 대장군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때 이것을 보여준다면, 황실 외에는 어디라도 간단히 통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부대의 규모를 줄일 때, 저희가 원하면 수도 부대나 황실 부대에 전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고도 하셨습니다. 저와 복삼은 천인장으로, 다른 단원들은 수준에 따라 백인장이나 십인장으로 승진도 시켜준다고 하셨고요.”
“···정말 그렇게까지 해준다고 하셨다고?”
일반 군사로 입대해 천인장까지 올라가는 건 거의 기적과 다를 바 없었다.
당장 나만 해도 그만한 공을 세우고도 병사 백 명을 이끄는 게 전부였으니까.
물론 부대의 성격이 타 부대와는 많이 다르긴 했지만, 그 정도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만한 직위를, 그것도 다름 아닌 버려진 자의 부대라는 북방국경부대에서 뽑는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만약 장일이 아니라 복삼이 이 이야기를 꺼냈다면 그냥 허풍이네, 하고 웃으며 넘어갈 정도로 말이다.
일장군···아니, 현 북방국경부대의 총사령관이 폭풍단을 총애하고 있다는 방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걸 거절하고 온 거야?”
“저보다야 그 자리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 있겠지요. 그리고 저는 단 한 번도 제가 군인에 어울리는 인간상이라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장일의 대답에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화순이 미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폭풍단. 아니, 북방국경지대를 통틀어서 이놈보다 군인 체질인 인간은 본 적이 없는데.]
화순의 말대로였다.
명령을 잘 따른다거나, 적을 잘 쓰러뜨린다거나 이런 걸 넘어서 그냥 사람 자체가 군인의 표본 같은 사람이 장일이었다.
그런데 설마 본인이 저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이야.
“몸은 떠났다지만, 아직 머리는 흑도에 속해 있다는 소리겠죠.”
···아, 맞다. 이놈 이거 원래는 흑도 명문 문파 사람이었지.
그런데 원래 우리 부대로 온 것도 흑도랑 너무 안 맞아서 가출해서 그런 거 아니었나?
아니, 너무 깊게 파고들지 말자. 본인 생각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저는 좀 끌리긴 했는데, 단장님이 저 없으면 섭섭하실까 봐 그냥 여기 붙었습니다.”
“그래, 너도 고맙다.”
참고로 말하자면 복삼이 이 녀석은 도가 계열의 일인전승 문파 출신이다.
[네가 군대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서로 태어날 곳을 잘못 잡은 것 같아.]
그건 나도 절실히 동감하고 있다.
하는 행동이나 말투를 보면 누가 봐도 복삼 이 녀석이 흑도의 고수고, 장일이 저 녀석이 도가 계열의 무인 같은데 말이지.
“···그런 제안을 받았는데도 나를 믿고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다.”
“일부러 자리까지 만들어뒀는데 저희가 안 오면 단장님이 잡으러 오실 거잖아요? 그거 무서워서라도 와야죠.”
“하하! 그래, 그건 그렇지. 괘씸해서라도 꼭 잡아 왔지.”
하하하! 내 대답에 우리 네 사람은 서로 큰 소리로 웃으며 술과 안주를 즐겼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주변의 웃고 떠들던 소리가 자신들만의 대화 소리 정도로 줄어들었을 때쯤, 얼굴이 벌겋게 변한 복삼이 내게 물었다.
“그런데 저희는 어디서 일하면 됩니까? 표국이라는 걸 보니 표사나 표두 시켜주실 것 같은데···뭐, 쟁자수 하라고 해도 단장 밑이면 기쁜 마음으로 하겠지만요.”
“너희만 한 고수를 왜 쟁자수로 쓰겠냐. 다 쓸데가 있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질문을 던진 복삼이 아니라 내 옆에 앉아 있던 기정이를 바라봤다.
북해에 오자마자 바로 연회를 하러 왔던지라, 아직 표국의 정확한 크기도 채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도 구 번 마구간이니 뭐니 하는 것까지 만들어둔 걸 봐선, 백명의 건장한 사내를 위한 일자리는 있겠지.
하지만 기정이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안 그래도 이번에 새로 설립할 사천 제이 지부에 사람이 필요한 참이었습니다. 두 분 중 한 분은 사천 제이 지부장으로, 다른 한 분은 본점에서 총표두를 맡아주시고, 다른 전우분들은 무공의 수준에 따라 표두나 표사로 힘써주시면 좋을 듯합니다.”
[···지부장?]
···총표두?
뭔가 내가 알던 일자리의 범위를 아득히 넘어선 대답에 아연해 있던 그때, 지부장과 총표두 직을 추천받은 두 사람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단장님이시군. 그 짧은 시간 만에 벌써 표국의 규모를 거기까지 키워놓으시다니.”
“원래 뭘 해도 성공하실만한 분이셨잖냐. 이 정도야 당연한 일이지.”
아니, 이걸 왜 당연하게 여기냐고. 나는 이렇게 성장시키는데 별일도 안 했는데.
하지만 더 기가 막힌 건 정작 표국을 여기까지 키워놓은 기정이의 반응이었다.
“도련님의 힘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 힘이 혹시 내 돈을 말하는 거니, 기정아?
물론 자금이라는 게 사업을 벌이는데 무척 중요한 것이고, 내가 직접 표국을 운영할 기반을 닦아놓은 것까지 생각하면 내가 한 일이 적은 것은 아니지만.
“총표두와 지부장이라···둘 다 엄청난 자리구만.”
“나는 어디라도 상관없다.”
“그래? 그렇다면 나는···.”
“잠깐.”
장일의 양보에 자신이 원하던 자리를 선점하려던 복삼의 말을 멈췄다.
“만약 너희만 괜찮다면 지부장은 장일이가, 총표두는 복삼이 했으면 한다.”
“저야 어디라도 상관없지만···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딱히 대단한 이유는 아니고.”
복삼의 질문에 나는 옆에 있던 기정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복삼이 네가 우리 기정이 무공 좀 가르쳐 줬으면 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