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권능으로 무림최강-56화 (56/185)

빙정(5)

“그것이 어찌 북해인 다운 방법이란 말이오!”

분노한 목소리로 외치는 사내는 바로 아무카란이었다.

“우리가 빙정에게 산제물을 바치다니! 그리고 그것이 우리 북해인에게 가장 어울리는 방법이라니! 대체 그것이 무슨 망발이란 말이오!”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 인품으로 모든 북해인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남자.

그는 지금 그녀가 내뱉은 ‘야만인’이라는 단어에 누구보다도 분노하고 있었다.

그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역사와 문화가 북해에 있다고 자부하는 그는 명나라에서 자신들의 문화를 우습게 여기거나 하찮게 보는 걸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빙궁의 소주가 산제물이라는 단어를 꺼내다니!

하지만 초절정고수인 아무라칸의 분노 앞에서도 자야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머나, 그런가요? 그렇다면···.”

그리고 그 웃음은 순식간에 지워지고.

“···왜 저의 어머니와 그 부족은 그리 만든 것이지요?”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진한 경멸.

그렇게 말한 아무라칸을 넘어, 자신의 핏줄. 그리고 북해 자체를 경멸하는 눈빛과 표정이었다.

그녀의 돌변에 순간 놀란 아무라칸이었지만, 그렇다 하여 여기서 뒤로 물러날 순 없었다.

지금 그가 뒤로 물러났다간,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 진짜 사실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대의 어머니와 그 부족은 북해에 대죄를 저질러···.”

“대죄···대죄라 하였습니까?”

저벅. 아무라칸의 말에 자야는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럼 그 대죄가 무엇인지, 제게 설명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움찔.

자야의 질문에 아무라칸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대부족 아슈람의 사건은 아직도 많은 북해인들이 회자하고 있는 일이었다.

빙궁주의 후궁인 메이파의 위세를 등에 업고 온갖 패악을 저지르다, 결국 빙궁에게 멸망한 부족.

하지만 그 멸망의 경위는 빙궁의 누구도 알지 못했다.

오직 한 사람.

그것을 진두지휘했던 빙궁주를 제외하곤 아무도.

“말하지 못하겠지요.”

하지만 그 진실을 아는 사람은 또 한 명 더 있었다.

아슈람 부족의 유일한 생존자.

빙궁주의 자비를 뜻하는 아이.

지금껏 단 한 번도 스스로 앞에 나선 적 없었던 여인.

“왜냐하면 아무런 잘못도 없었으니까요.”

자야.

그녀의 입에서 나온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저희 부족 아슈람은 그저 산제물로 바쳐졌을 뿐이었습니다. 북해의 평화, 북해의 구원을 위해서요.”

이십년 전. 북해는 혼란의 구렁텅이 안에 있었다.

동서남북, 어디를 가리지 않고 매일 부족 간의 전쟁이 일어나던 전란의 시기.

수백 년간 이어져 왔던 해묵은 원한과 새로운 증오가 맞물려 끊임없이 싸우고, 다투며, 죽여나갔던 그때.

혹자들은 북해 멸망의 때가 찾아왔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던 그 시기. 한 명의 사내가 나타났다.

당대 빙궁주보다 뛰어난 무공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은 그 사내는 그보다 더욱 놀라운 수완으로 부족 간의 전쟁을 막아냈다.

그가 주관하는 회의로 원한은 교류로 바뀌었고, 증오는 평화로 바뀌었다.

당시 빙궁의 일 소주이자, 당대의 푸른 별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그만한 업적을 이뤄낸 그가 빙궁주의 자리에 오르는 건 당연했다. 빙궁주의 자리에 오른 이후, 북해에는 긴 평화가 찾아오는 듯했다.

딱 한 번의 사건을 제외하곤.

아슈람 부족은 바로 그 새로운 전란의 시작처럼 보였다.

점점 강해지는 힘과 쌓여만 가는 부.

곧 빙궁조차 넘어설 것이라는 말이 거짓처럼 들리지 않던 위세를 자랑하던 아슈람 부족이 오랜 강자인 빙궁에 전쟁을 거는 순간,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전란이 다시 찾아오리라.

하지만 그렇게 예상하던 이들을 허무하게 만들기라도 하듯, 아슈람은 간단하게 멸망했다.

“바로 제 어머니의 손에 의해서죠.”

자야가 꺼낸 진실은 참혹했다.

푸른 별이 만들어 낸 평화는 사실 그가 아니라 그의 옆에 있던 후궁. 메이파가 만들어냈다는 사실과 자신의 부족을 멸망의 길로 이끈 것 역시 그녀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오직 북해의 평화와.

“바로 당신을 위해서였죠. 푸른 별이시여.”

자야가 입에 올린 충격적인 현실에 처음에는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녀의 옆에 있던 빙궁주가 입이라도 열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으니 모르지만, 그는 양 입술이 딱 붙기라도 한 듯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녀가 꺼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그럼 어찌하여 그것을 왜 미리···.”

“그랬다면 지금 북해는 어떻게 됐을까요? 푸른 별의 힘으로 만들어낸 평화가 사실 그가 만들어낸 평화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라도 했다간 북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야의 말에 다시 침묵이 내려왔다.

그랬다간 지금까지 수면 아래에 숨겨져 있던 원한과 증오가 다시 폭발하듯 튀어나왔겠지.

그리고 이번에는 그것을 막을 사람도 없었다.

“저도 처음에는 그냥 다 발설해버리고 끝내버릴까도 생각했습니다.”

자야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어머니와 부족을 사랑했다.

그리고 북해가 그들 모두를 죽인 그 날,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던 진실을 폭로하고 모두를 끝내버릴 마음까지 먹었다.

하지만 그리할 수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 가장 지혜로운 메이파가 그것을 막아섰다.

“사랑하는 북해와 사랑하는 남편을 위하여···참 우습지 않나요?”

그 둘 때문에 자신과 부족이 이렇게 되어버린 것임에도,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그 둘을 사수했다.

오직 그 한 마디에 자야는 진실을 밝히지 못했다.

자신들을 고결한 전사인 양 뽐내며 다니면서 그 아래에 숨은 희생은 모르는 북해인들을 매일 바라보면서도 그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차곡차곡 쌓여가는 증오와 원망, 그리고 분노.

그것은 자야를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천천히 바꿔갔다.

일류 이하의 고수로 이루어진 이들이 도착한 것도 그때였다.

먼 거리를 달려온 탓에 많은 이들이 힘들어하였지만, 주변에 흐르는 심상치 않은 기류에 심호흡도 하지 못한 채 그들은 자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은 아주 작은 진동이었지요.”

그녀가 거기에 있었던 건 순전한 우연이었다.

빙궁 제일의 지하. 예부터 전해 내려온 수많은 서적이 있는 북해의 서고에 찾아오는 이들은 많이 없었지만, 항상 지식에 목말라하던 자야는 그 얼마 없는 이들 중 하나였다.

언제나처럼 서고에서 시간을 보내던 그녀가 진동을 느꼈던 것도 바로 그때였다.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그녀가 그 진동의 이유를 찾으려 했던 것은 필연적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아냈죠. 이런 진동이 있었던 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것은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백 년. 혹은 이백 년의 주기로 일어나는 지진.

열흘가량 동안 빙궁조차 흔들어놓다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지진.

하지만 그녀의 영특한 머리는 그 이상의 것을 알아냈다.

바로 하얀 별이 뽑히는 때와 지진이 일어나는 때가 겹친다는 사실과.

“지진이 끝나고 하얀 별 역시 사라진다는 사실을요.”

처음에는 우연으로 생각했다. 외부인 중 뽑히는 하얀 별이니, 당연히 외부인이 본래 자신의 땅으로 돌아간다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파보면 파볼수록,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리고 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진실을 깨달았죠. 이 지진이 다름 아닌 빙정의 폭주라는 것과···하얀 별은 그 폭주를 잠재우기 위한 한낱 제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 그렇다면 설마!”

“네, 맞아요. 이 문 너머에 바로 그가 있습니다.”

쿵!

자야가 문을 두드리자, 절정 이상의 고수로 이루어진 일진(一陣)과, 그 이하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이진(二陣) 모두가 몸을 떨었다.

“당대의 하얀 별. 명나라의 폭풍단장이 말이죠.”

“안돼!”

자야의 말에 이진에서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들과 함께 왔던 명나라의 여인.

성하 공주였다.

“어서 오세요, 성하 공주마마. 오랜만이군요.”

“그게, 그게 무슨 말인가요! 이 안에 폭풍단장이 있다니!”

“말 그대로입니다. 그는 지금 빙정에게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우리 북해의 평화와···.”

싱긋.

무표정한 채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자야의 얼굴에 다시 한번 웃음이 피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 기뻐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 끔찍하고 참혹한 웃음에 어찌 누가 기뻐하고, 따라 웃겠는가.

“명의 평화를 위해서 말이죠.”

하물며 앞에 있는 또 다른 여인의 절망적인 표정에 그 누가 웃을 수 있겠느냔 말이다.

“명의···평화?”

“네, 저희 북해가 평화를 위해 산제물을 바쳤듯, 명도 한 사람을 산제물로 바쳤을 뿐입니다.”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가는 자야의 표정에는 조금의 거짓도 보이지 않았다.

“남는 장사 아닌가요? 저희 북해에서는 평화를 위해 수천, 수만으로 이루어진 저희 부족을 바쳤는데, 명은 겨우 한 사람의 목숨으로 이렇게 평화를 얻을 수 있다니. 부럽네요.”

“·········.”

성하 공주는 자야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짝!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세게 그녀의 뺨을 후려쳤을 뿐.

공주의 갑작스러운 일격에 자야의 얼굴이 옆으로 밀려났지만, 그뿐이었다.

일류를 넘어 절정 직전에 이른 고수인 자야와 태어나서부터 그녀를 괴롭혀왔던 병에서 회복한 지 겨우 일 년밖에 되지 않은 공주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벽이 있었다.

오히려 자야의 뺨을 때렸던 공주의 손이 더 아플 지경이었지만, 공주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자야를 노려봤다.

“당신의 고통과 희생, 나는 잘 몰라.”

자야가 자신과 부족에 관한 이야기를 다 끝내고 나서야 찾아왔던 공주였기에 정확한 사정은 알지 못했다.

그저 그녀가 말에서 어렴풋이 그 사실을 짐작했을 뿐.

하지만 그녀의 눈을 보고 나선 확실히 깨달았다.

“당신은 그저 자신과 똑같은 피해자를 만들고 싶었을 뿐이야. 평화라는 이름 아래에 희생되는 사랑하는 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악감. 그것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이 자신만 있다는 것을 참지 못했을 뿐이라고.”

지금껏 자야 자신도 깨닫지 못했던 사실을 말한 공주는 바로 그녀의 옆에 있던 빙정의 문에 다가갔다.

쿵쿵쿵!

“폭풍단장! 폭풍단장! 제 말 들리시나요!”

빙정의 힘조차 막아낼 수 있는 문이다. 무공은커녕 여기까지 뛰어오느라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그녀가 아무리 온 힘을 다해 외쳐봐야 맞은 편에 있는 이가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린 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녀였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문을 두드렸다.

꽁꽁 얼어 부르튼 손이 찢어져 피가 흐르더라도, 쭉.

가만히 옆에만 있던 빙궁주가 움직인 건 바로 그때였다.

“그만하게.”

“당신까지 저를 막아설 생각인가요?”

“아니, 그게 아닐세.”

고오오!

그리 말하는 순간, 그의 주위에서 강력한 기파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기운에 가장 가까이 있던 그녀는 물론, 주변의 다른 이들도 경악했다.

특히 사방장군의 놀라움은 다른 이들과도 비교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초절정의 끝자락이라고 생각했던 빙궁주의 무공이 화경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너머의 것을 막아내고 그를 되찾아 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으니 하는 말일세.”

메이파의 희생에 슬퍼했던 이는 자야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사랑하던 그녀를 희생해야만 했던 빙궁주의 슬픔과 분노도 그에 못지않았다.

자야와 다른 점이라면, 그 분노가 북해를 향했지만, 그것을 풀어낼 수 없었던 그녀와 달리, 빙궁주는 그 희생의 이유를 자신에게서 찾았다는 점과 그것을 혹사하는 걸 아무도 막을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런 혹사가 그가 그토록 갈구하던 경지로 이끌어 주었다.

빙정이 폭주하는 전조인 진동을 느꼈음에도 하얀 별을 적극적으로 찾아다니지 않았던 이유도, 지금까지 두문불출하고 연공실에만 박혀 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 모든 순환, 잘못된 희생을 자신의 선에서 끝내려 했기 때문이다.

마치 메이파가 자신을 희생해 북해를 평화로 이끌었던 것처럼 말이다.

“가능하면 다른 이에게는 비밀로 하고 조용히 끝내려 했지만···.”

빙정은 북해의 신. 그런 신에게 빙궁주인 자신이 바쳐진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하얀 별에서 푸른 별로 사람만 바뀔 수도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자신만 희생하고 끝낼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쿵!

문을 넘어 주변까지 흔드는 커다란 울림에 빙궁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서고에서 단편적인 정보로 알아차렸던 자야와 달리, 빙궁주는 오직 그만 알 수 있는 정보를 통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키게! 한시가 급해!”

지금 이 진동은 빙정의 폭주가 점점 심해진다는 뜻. 그의 말에 공주가 옆으로 비켜서자, 빙궁주는 바로 문에 손을 대고 힘을 줬다.

끼기긱!!!

빙정의 힘으로 인해 안에서부터 열려 있던 문이 점점 열리기 시작했다.

오오오!

주변의 다른 이들이 빙궁주의 그런 모습에 감탄을 내뱉었다. 사방장군의 반응에 그가 더 높은 경지에 올랐다는 건 예감했지만, 아는 것과 직접 보는 건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힘을 선보이고 있던 빙궁주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의문으로 가득했다.

저 건너편.

지금 그와 똑같이 힘을 주고 있는 이가 있었다.

아니, 설마, 그럴 리가.

그저 착각이라고, 화경의 경지에 오른 지 얼마 안 돼서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치부하고 넘어가기엔 점점 건너편에서 느껴지는 힘이 강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쿵!

빙정을 봉인하던 거대한 문이 열렸다.

하지만 참을 수 없는 한기가 곧 몰아칠 거라 예상했던 빙궁주의 생각과 달리, 그 건너편에서 나온 건 오직 하나.

“어라? 왜 다 여기 모여있습니까?”

온몸을 하얀색 얼음으로 뒤집어쓰고 있는 한 명의 사내.

그 안으로 들어가 빙정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을 줄 알았던 북해의 하얀 별이었다.

*****

“저를 보려고 여기 모여있는 겁니까?”

어딘가 다르다.

가장 문에 가까웠기에 필연적으로 제일 먼저 유현과 마주하게 된 빙궁주가 제일 먼저 떠올린 생각이었다.

빙궁주가 기억하고 있던 유현은 갓 약관에 든 청년에게 볼 수 있는 치기 어린 모습과 조금 나이를 먹은, 말하자면 세상 풍파에 익숙한 중년의 모습을 모두 갖춘 독특한 사내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유현은 어느 쪽과도 다르다.

허허로운 듯하면서도, 그 존재감은 주변의 그 누구, 그 어떠한 것보다도 또렷하다.

분명히 눈앞에서 똑똑히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관심을 잃으면 사라질 것처럼 흐릿하다.

분명 상반된 감각이지만, 지금 유현에게 느낀 점을 표현하자면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포, 폭풍단장?”

그리고 두 번째로 가까이 있었던 성하 공주 역시 그렇게 느꼈다.

그 누구보다도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으면서도, 한순간 사라져버릴 것 같다는 역설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앞의···‘존재’에게 말을 걸었다.

“네, 공주마마.”

유현이 공주의 말에 대답하는 순간, 그녀는 말로 할 수 없는 무한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것은 그녀로서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여기 북해에 와서는 물론, 자신이 나고 자란 황실에서도 항상 긴장감을 놓지 않았던 공주에게 안도감이랑 가장 거리가 먼 단어였으니까.

바로 그때, 공주는 자신의 눈꺼풀이 스르르 감기는 걸 느꼈다.

계속해서 유지했던 긴장감과 지금까지 쌓여온 피로. 그리고 유현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해방된 그녀의 육신이 조금이라도 빠른 회복을 위해 휴식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공주는 그런 육신의 선택에 반발했다.

이 자리에서 쓰러질 순 없다. 겨우 살아 돌아온 그의 앞에서 추태를 보일 순 없다.

가히 초인적이라 말할 수 있는 인내심의 발로였지만, 그런 노력도 눈앞의 사내가 꺼낸 한 마디에는 모두 헛수고가 되었다.

“괜찮습니다. 푹 쉬시지요.”

그것은 한낱 말을 넘어선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 한 마디에 공주는 더 버틸 힘도, 생각도 사라져 결국 눈을 감았고, 언제 깨어날지 모를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런 그녀를 받은 유현은 조심스레 눈 위로 그녀를 올렸다. 차가운 눈 위였지만, 눈을 감은 그녀는 그런 것도 하나 느끼지 못하는 듯 보였다.

차가움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눈앞의 사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일까.

“투할.”

움찔!

과연 둘 중 어느 것이 답인지 생각하고 있던 투할은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몸을 크게 떨었다.

“그 언월도. 잠시 빌려주시겠습니까?”

“네, 넵!”

한때 적으로 만났었던 유현의 말에 바로 자신의 독문 무기인 언월도를 내미는 투할.

항상 자신의 무기를 자신의 아내 대하듯 대하라고 자신의 부하들에게 강조하는 그였지만, 지금 유현의 말에 반발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투할이 양손으로 건넨 언월도를 한 손으로 받아든 유현은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딱 한 번만 휘두르고 드릴 테니까요.”

한 번만 휘두른다고?

유현의 말에 여기 있는 모두의 뇌리에 자야의 잘린 몸이 눈밭 위로 뒹구는 것이 떠올랐다.

지금 그가 저 언월도를 휘두를 대상이라면 당연히 자신을 빙정에게 산 제물로 바친 자야 뿐일 테니까.

그것이 목일지, 아니면 상체와 하체일지, 그것도 아니면 좌와 우로 나뉠지.

그것만이 다를 뿐, 그 사실은 모두에게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것은 자야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부디 고통 없는 죽음을, 하고 바랄 정도로 자야는 염치없지 않았다.

이미 강을 한 번 넘은 그녀였다.

죽음에 초탈하진 않지만, 그렇다 하여 벌벌 떨 생각도 없었다.

‘이제 곧 당신 곁으로 갑니다, 어머니.’ 곧 찾아올 고통을 기다리며 눈을 감은 그녀가 머릿속으로 되뇌는 순간.

후웅!

언월도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통이 없다는 사실에 그녀는 의외라 생각했다. 당연히 몸이 찢어지고, 영혼이 부서지는 고통이 느껴지리라 생각했다.

자신이 그에게 한 짓은 그만한 벌을 받을 만한 죄였으니까.

“오, 오오!”

하지만 그녀가 바라는 때는 오지 않고, 대신 누군가의 목소리만 들려왔다.

귀에 익은 목소리. 북해의 수많은 소주 중에서도 제일 수다스러운 십이 소주의 목소리였다.

왜 아직도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이유를 알 수 없던 자야의 귀로 그 해답이 들려왔다.

“하늘이 갈라졌다!”

번쩍!

그 말에 자야는 눈을 뜨고 하늘을 바라봤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모두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하나의 달과 셀 수 없는 수의 별이 박혀 있는 북해의 밤하늘이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아아! 아아아!

그 현실 같지 않은 광경에 모두 경악에 빠져 외치고 있던 그때, 유일하게 하늘에 시선을 주지 않았던 단 한 사람.

빙궁주는 눈앞의 사내, 유현을 바라봤다.

조금 전 느껴졌던 그 뭐라 표현할 수 없던 기이한 모습은 이미 사라졌었다.

거기 있는 건 그가 알고 있던 한 명의 사내.

아니, 전보다 훨씬 강해진 사내가 거기에 있었다.

조금 전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은 없었지만, 그 자리에 금방 느낄 수 있는, 그렇기에 더욱 잘 알 수 있는 강함이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풍기는, 너무나 익숙한 기운.

“하, 하얀 별이여.”

“예, 빙궁주님?”

땅에 눕혀놨던 공주를 등에 업은 유현이 빙궁주의 부름에 대답했다.

저 하늘에 남겨놓은 흔적 때문에 잠깐의 주저는 있었지만, 빙궁주는 꼭 그 대답을 들어야 했다.

조금 전 선보였던 그 힘. 그리고 지금 아직 그에게 남아 있는 그 힘.

이 두 가지의 힘의 근원이 과연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맞는지 듣기 위해서라도.

“자네···그 안에서 빙정을 만났나?”

“네,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무언가를 얻었지?”

“네, 그것도 맞습니다.”

꿀꺽. 점점 답에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 빙궁주는 이제 최후의 질문을 던졌다.

“혹시 자네가 얻은 그 힘을···보여줄 수 있겠나?”

빙궁주의 질문에 유현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하늘에 수놓은 것보다는 훨씬 부족하지만···.”

유현은 그리 말하며 손을 들었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손바닥. 거기에 유현이 힘을 준 순간.

고오오-

빙궁주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한기와 함께 하나의 자그마한 얼음이 떠올랐다.

마치 눈을 뭉쳐서 만들어 놓은 듯한 자그마한 얼음. 하지만 빙궁주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유현이 했던 것처럼 똑같이 손을 들어 올린 빙궁주의 손 위엔 유현의 그것과 비슷한, 하지만 그 색깔은 새파란 자그마한 얼음이 있었으니.

그것은 유현의 손에 있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마치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형제를 만난 듯, 공명하는 두 얼음 조각.

그것을 확인한 빙궁주는 자신의 손 위에 있던 얼음. 빙정의 파편을 지우더니,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빙궁의 주인이.”

스윽.

“빙정의 힘을 이어받은 자에게 예우를 표하는 바이오.”

최초의 하얀 별.

그 이름을 받은 이로부터 셀 수도 없이 긴 세월을 지나, 드디어 진실로 빙정에게 인정받은 자가 나타난 순간이었다.

북해의 전설

모든 사건이 끝나고 며칠 뒤.

나는 빙궁주의 부름을 받고 빙궁의 최상층, 빙궁주의 거처로 향했다.

빙궁주와 독대 같은 건 예전 같았다면 꿈도 못 꿀 일이지만,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오셨습니까, 위대한 하얀 별이시여.”

“빙궁주는 안에 계신가?”

“네, 그렇습니다.”

빙궁주의 거처 문 앞.

빙궁주의 전속 시녀가 내 질문에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오직 빙궁주에게만 고개를 조아린다는 말이 무색하게,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숙이며 내게 인사하는 그녀.

처음 이런 대우를 받을 땐 조금 당황했지만, 이제는 그것도 옛말.

북해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나를 그렇게 대우해주니 익숙해지기 싫어도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게 지금 내 상황이었다.

당장 여기 오는 길에만 해도 마주치는 사람들 모두가 이처럼 고개를 숙이거나, 오체투지를 하고 있었으니까.

빙궁주가 인정한 빙정의 주인이라는 호칭도 그런 대우에 한몫했지만, 진짜 이유는 빙궁주의 환갑잔칫날, 내가 보여준 일검 때문이었다.

그 실체는 사실 내가 빙정과 겨루고 난 뒤···라기보단 놀아준 뒤에 남아 있던 빙정의 힘의 조각이었다.

자연의 정수인 빙정답게 그 조각이라도 가히 인세에 다시 없을 힘을 담고 있었고, 아무리 힘을 얻고 싶은 나라고 해도 맞지도 않는 힘을 몸에 담아둘 순 없었기에 그것을 일검에 담아 모두 뿜어냈는데···.

···아무래도 그게 내 힘이라는 소문이 북해에 널리 퍼진 모양이다.

물론 보통 사람들이 그 소문을 퍼뜨렸다면 아무도 믿지 않았겠지만, 빙궁주의 환갑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은 모두 북해에서도 명성이 높은, 이른바 한 끗발 날리는 사람들이다 보니 아무래도 그런 헛소리에도 신빙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지금의 난 이른바 빙정의 화신으로 인정받아 일부에선 빙궁주보다 더한 존경을 받는 몸이 되어버렸다.

“어서 오시오, 하얀 별. 기다리고 있었소.”

내가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서자, 평상시보다 헐렁한 옷을 입은 빙궁주가 날 맞이했다.

어딘가 수척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뭐라 말을 꺼내려다 입을 다물었다.

지금부터 그에게 꺼내야 할 이야기의 무게를 생각했을 때, 이런 불필요한 마음 씀씀이가 오히려 좋지 않게 작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본디 빙궁주의 거처에는 그가 앉아있을 옥좌 외엔 다른 의자가 없었다.

그보다 높은 자리에 있을 사람이 없다는 상징적인 의미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맞은편에는 그와 비슷한 크기의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빙궁주가 오직 나 한 사람만을 위해 마련해 놓은 자리.

그가 나를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오늘은 어쩐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까?”

자리에 앉은 내가 맞은편의 그에게 묻자, 그는 어색한 손놀림으로 왼편에 있는 탁자에서 술병을 가져와 한 모금 마시곤 입을 열었다.

“오늘은 그 아이에 관한 처우를 논하려 불렀소이다.”

빙궁주의 한 마디에 그의 거처에서 차가운 기류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 아이.

여러 사람을 칭할 수 있는 단어였지만, 지금 우리 두 사람 사이에서 그 아이라고 하면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나를 빙정에게 산제물로 바치려 했다가 결국 실패해버린 빙궁의 소주.

나와 공주가 이곳으로 오게 만든 그녀.

그리고 내가 오늘 그에게 이야기하려 했던 주제.

“자야 소주 말이군요.”

“···그렇소.”

내가 그녀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속이 탄 듯 그는 다시 한번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이제 마음을 정했다···그런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지금껏 빙궁주의 거처에 오갔던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자야에 관한 처우 때문이었다.

그녀가 저지른 죄는 절대 빙궁의 소주라는 이유로 쉬이 넘어갈 수 있는 영역의 것이 아니었고, 그 때문에 그녀는 빙궁의 제일 지하, 빙옥(氷獄)에 갇혀 처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제는 딱 하나.

그녀를 누가,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였다.

아무리 죄를 지었다곤 하나, 그녀는 빙궁의 소주.

그를 처벌을 논할 수 있는 존재는 빙궁에서 오직 딱 한 명.

빙궁주뿐이었다.

“나는···그녀의 어머니이자 나의 아내, 메이파에게 큰 빚이 있소.”

자야의 어머니 메이파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이십여 년 전, 서로에 대한 증오와 불신으로 혼란스러웠던 북해를 지혜 하나만으로 질서정연하게 만든 것도 모자라, 십 년 뒤 다시 한번 커지려 한 북해의 혼란을 자신과 자신의 부족, 아슈람 부족을 바쳐 재워버렸으니까.

“···그럼 빙궁주님은 그녀를 용서하신다는 겁니까?”

“용서라···내가 주제넘게 그럴 수 있는지도 나는 잘 모르겠소. 너무나 무거운 빚과 죄에 자야를 지금껏 외면하고 있던 내가 어찌 그것을 왈가왈부하겠소? 나는···.”

그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목이 막히는지 이미 다 마셔버린 술병만을 더듬거리던 그는, 깊은 한숨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를 건드릴 수 없을 것 같소.”

“알겠습니다.”

그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만큼 그가 그녀의 어머니에게 받은 것은 컸으니까.

“그렇다면 그녀에 대한 처우는 제가 알아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허나 그런 이유로 나까지 그저 넘어가기엔, 그녀가 저지른 죄는 너무나 컸다.

일국의 공주를 속이고, 희롱하였으며, 그녀의 호위···정확히는 의뢰긴 하지만, 어찌 됐건 그녀와 함께 온 사람을 마음대로 산제물로 바치려 했으니까.

“···그리하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잠깐.”

“···왜 그러십니까?”

“염치없는 것은 알지만,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소?”

“어떤 부탁 말입니까?”

내 질문에 그는 천으로 감싸져 있는 무언가를 내게 내밀었다.

“이것은 그 부탁을 위한 대가요.”

“대가라니, 대체 무엇을···.”

그가 내민 물건을 받아든 나는 그것의 정체를 깨닫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 무게와 촉감. 그리고 크기까지.

너무나 익숙한 동시에···이렇게 떨어져 있어서 어색할 수밖에 없는 그것.

내 착각이 아니라면, 그것은 분명 누군가의 손이었다.

[어우···빙궁에 미친 사람은 그 여자 한 명뿐인 줄 알았는데, 아니네.]

내 옆에서 자야를 어떻게 벌할지 떠벌리던 화순도 그 선물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설마 자신의 팔을 잘라서 내게 대가라며 건넬 줄이야.

전혀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나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설마 이걸로 그녀를 벌하지 말라는 건···?”

“당연히 그건 아니오. 겨우 내 팔 하나로 그냥 웃으며 넘어갈 일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소. 내가 바라는 건 딱 하나뿐이오.”

흐읍, 후우. 그는 입에 맴돌던 말의 무게에 짓눌린 듯, 몇 번이고 주저하고, 또 주저하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녀를 다른 곳이 아니라 북해의 품 안에서 잠들 수 있도록 해주시오.”

그녀의 처벌은 어디까지나 북해 내에서 해달라는 것인가.

어려운 부탁은 아니다. 애초에 나도 명까지 가서 그녀를 벌할 생각 따윈 없었으니까.

하지만 설마 그런 시시한 부탁에 이런 걸 받아버릴 줄이야.

“이것은 나에 대한 처벌이자.”

내 눈빛에 담긴 의미를 이해했는지, 빙궁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아이를 그런 괴물로 만들어버린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속죄요.”

평상시보다 헐렁한. 아니, 그런 착각을 이게 했던 이유를 손에 받아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빙궁주의 요청대로 하겠소이다.”

“···고맙소.”

그 말을 끝으로 빙궁주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치 이 한마디를 하는 것만으로 온 힘을 다 쓴 듯, 평상시보다 훨씬 늙어버린 그에게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빠져나왔다.

내가 나갈 때까지도 그 감긴 눈이 떠지는 일은 없었다.

*****

빙궁주와 이야기를 나눈 직후 나는 바로 아래로 내려갔다.

빙궁 제일 지하, 빙옥.

거기에 갇힌 한 명의 죄수를 만나기 위해서.

“·········.”

며칠 만에 처음으로 마주한 자야는 나를 힐끔 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것이 죄악감의 발로인가, 아니면 정말로 아무런 할 말이 없어서 침묵을 지키는 것인가.

이유는 짐작할 수 없었지만, 그쪽이 내게도 편했다.

여기서 시끄럽게 날뛰면 나도 피곤할 뿐이었으니까.

“이제 갈 시간이오.”

처벌의 때가 왔다는 말에도, 팔다리에 연결된 쇠사슬을 모두 풀 때도, 팔을 잡고 몸을 일으킬 때까지도 자야는 침묵을 고수했다.

[히야···독하다, 독해.]

···그러게 말이야.

마교에서 독한 사람 여럿 봤을 화순까지 감탄할 정도로 고요한 그녀.

최소한 마지막 한마디 정도는 들어줄 생각이었지만, 이런 모습이라면 그럴 필요도 없을 듯했다.

아혈과 마혈을 점혈할 때까지 몸부림 한 번 치지 않은 그녀를 업고 나는 빙궁 밖을 빠져나왔다.

나가는 길목에 마주치는 이들은 몇몇 있었지만, 내가 자야를 업고 나가는 걸 보고 바로 고개를 숙였다.

자야가 정확히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모르는 이들은 있을지언정, 그녀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대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은 빙궁에 없었다.

그리고 내가 그녀를 데리고 나가는 이유를 모르는 이도 없었고.

경신술을 사용할 수 없었기에 목적지까지 걸어갈 수밖에 없었지만, 새롭게 얻은 40년의 내공 덕인지, 아니면 빙정의 파편이 몸 안에 있는 덕분인지 몰라도 북해의 겨울 길도 내게는 마치 뒷마당의 산책로처럼 편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를 처벌할 목적지. 빙궁의 북쪽에 있는 설산 정상에 오른 나는 자야를 땅에 던진 뒤 혈을 다시 풀었다.

초점 없는 흐릿한 눈에 힘 한점 없는 사지. 거기에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를 맥과 호흡까지.

절정의 무공을 가지고 있는 무인이라기보단 병색이 완연한 병자에 가까운 모습.

이미 삶의 동아줄을 완전히 놓아버린 듯한 그녀의 신색에 과연 이 처벌이 이유가 있나, 하고 잠깐 생각했지만.

“나는 이제부터 당신을 벌할 것이오.”

할 일은 해야만 했다.

여기서 그냥 넘어가기엔 이미 너무나 많은 길을 걸어왔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같은 건 없소?”

“···푸른 별은.”

지금껏 쭉 침묵을 고수하던 그녀의 입이 드디어 열렸다.

“저에게 뭐라고 하셨죠?”

“·········.”

최후의 질문이 설마 빙궁주에 관한 것일 줄이야.

그녀에게 빙궁주가 어떠한 의미인지는 난 알 수 없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건, 그녀가 단 한 번도 그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오직 푸른 별이라 불렀다는 사실 뿐.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소.”

“···그렇군요.”

순간 빛을 되찾았던 그녀의 눈이 다시금 흐릿해졌다.

바로 그때. 나는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대신 이것을 주며 내게 부탁했을 뿐이지.”

“·········?”

내가 그녀와 함께 챙겨왔던 기다란 무언가.

그것을 힘없는 손으로 받아든 그녀의 눈에 드디어 처음으로 감정이 깃들었다.

경악.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을 마주한듯한 경악이 진하게 깃들었다.

“당신이 북해 내에서 최후를 맞이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이오.”

“아냐···그럴 리 없어···.”

“·········.”

빙궁주의 팔을 꽉 쥔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자야.

나는 그런 그녀의 단전에 손을 올리고, 내 삼갑자 내공을 거기 밀어 넣었다.

쩡!

일갑자의 내공이 내 내공의 침투를 잠깐 막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깐일 뿐. 곧 그녀의 단전과 혈도를 파고 들어간 내 내공은 그 모두를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방금 그 일격으로 그녀는 이제 평범한 일반인. 아니, 그보다 훨씬 쇠약한 병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 살이 찢어발겨 지는 고통을 느꼈을 것이 분명함에도, 빙궁주의 잘린 팔에만 온 신경을 다할 뿐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나는 북해의 겨울에서 칠주야를 버텼지.”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자야가 고개를 들어서 나와 눈을 마주쳤다.

조금 전 그 무감정이 무색하게, 온갖 의미가 담긴 눈빛을 마주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당신도 여기서 칠주야를 버틴다면, 당신을 용서하겠소.”

불가능한 일이라는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끝없이 회복되는 일갑자의 내공을 가지고도 겨우 버틴 북해의 겨울.

그것을 아무런 내공도 없는 몸으로, 더욱 가혹한 설산에서 버틴다는 것이 가능할 리 없다.

그것이 내가 내리는 사형 선고였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그토록 애증하던 북해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도록 한다.

물론 그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건 내가 되겠지만.

“그럼, 이만.”

“···하.”

내가 등을 돌려 그녀에게서 멀어지는 그때.

뒤편에서 그녀가 입을 열었다.

“하하하.”

하지만 그것은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것도, 애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하하하하.”

그저 웃을 뿐.

“아하하하하하하!!!”

폭설이 몰아치는 북해 최북단.

“아하하하하하하하하!!!!!”

애증과 광기가 섞인 웃음소리만이 고요히 울려퍼졌다.

오래, 아주 또 오래.

*****

그로부터 며칠 후.

하얀 별이 북해를 떠난 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빙궁주는 이제는 익숙해진 외팔로 업무를 보고 있었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빙궁주는 자신이 보던 종이를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누군가?”

“신이옵니다, 궁주님.”

“그래, 들어오게.”

항상 듣던 전속 시종의 목소리에 출입을 허락하는 빙궁주.

안으로 들어온 시종은 그에게 고개를 숙이더니, 바로 자신이 챙겨 온 종이를 그에게 내밀었다.

“이게 무엇인가?”

“최근 북방에 특이한 일이 있었다는 보고서입니다.”

“북방에?”

시종의 말에 빙궁주는 그가 내민 종이를 받아들며 되물었다.

북해의 겨울에 북방은 극히 위험하기에 몇몇 부족을 제외하곤 모두 따뜻한 남방이나 안전한 빙궁에 체류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기에 정말 특별한 일이 없다면 겨울의 북방에는 아무런 보고도 올라오지 않기 망정인데 갑자기 보고서라니.

시종이 건넨 종이를 읽어내려가던 빙궁주의 눈이 아래로 내려가는 순간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최근 북해의 설산에 웃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관측됐다는 보고입니다. 한낱 헛소문으로 치부하고 넘기려 했으나, 그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어도 웃음을 들었다는 이들이 많았기에 이런 보고가 올라온 듯합니다.”

“그 뒤는···뒤에는 아무 일도 없었는가?”

“며칠 후, 웃음소리가 끊긴 것을 이상하게 여긴 사냥꾼 중 하나가 설산을 올라가 보니, 사람 팔만한 무언가를 안은 여인의 얼음 조각 같은 것을 봤다고 합니다.”

“·········.”

“조사단을 파견할까요?”

“···아니.”

다 읽은 서류를 시종에게 건네며 빙궁주가 대답했다.

“한낱 괴담에 불과한 일에 사람을 쓸 필요는 없다. 지금은 한 사람의 손도 부족한 겨울이다. 그런 위험한 곳에 사람을 파견할 필요는 없지.”

“그럼···그냥 넘어가면 되겠습니까?”

“일단 그렇게 하게. 단, 설산의 얼음 조각은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도록 하게. 설산의 마녀가 괴이한 짓을 벌인 걸지도 모르니 말이야.”

“예, 그럼 그리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빙궁주의 명을 받은 시종이 조용히 거처 밖으로 빠져나가고, 주변의 인기척이 모두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빙궁주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고맙소.”

누군가에게 말하는 건지 알 수 없는 감사의 인사를.

그날 이후 북해에는 두 개의 전설이 생겼다.

북방의 설산에는 절대 건드려선 안 될 설산의 마녀가 산다는 전설과 가장 추운 혹한의 겨울날. 한 송이의 하얀 꽃이 여인의 얼음 조각 앞에 공양 된다는 전설이.

호위의 대가

소음이나 진동 하나 느껴지지 않는 마차 안.

웬만한 객잔의 숙소보다 넓은 마차 안에는 나와 공주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북해에서는 구하기도 힘든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신 공주가 입을 열었다.

“정말 대우가 천지 차이네요. 이 모두가 폭풍단장 덕분이에요.”

북해에서 할 일을 모두 끝마치고 명으로 돌아가는 길은 북해로 올 때와는 전혀 다른 대우를 받았다.

같은 무게의 금보다 더 비싼 마차와 그것을 이끄는, 북해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네 마리의 명마. 그리고 절정 이상의 고수가 포함된 호위 부대까지.

매일 사람 틈바구니에 끼여 적의 습격이 닥쳐오지 않을까 걱정하던 그때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라는 말로 부족할 정도였다.

물론 여기에는 내가 북해를 구원하는 하얀 별이자, 빙정의 주인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받은 것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공주마마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평화협상을 넘어 확고한 동맹이라는 대업을 이루셨으니, 이제 조정에서도 일황자 전하와 공주마마의 능력을 의심하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내가 북해에 오고 나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방에만 있던 것과 달리, 열심히 사람을 만나고 다닌 공주는 대형 부족의 주력 인사와 빙궁의 소주 여럿을 온건파로 설득했고, 내가 빙궁주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힘입어 모든 일이 끝난 후 열린 빙궁의 대회의에서 평화협상뿐만이 아니라 북해와의 동맹이라는 커다란 성과를 이뤄낸 것이다.

물론 내가 그녀와 일행이라는 사실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일을 주도한 건 어디까지나 그녀였으니까.

똑똑.

그렇게 얼마쯤 서로의 얼굴에 금칠을 하고 있자니,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차가 너무 편안해서 마차가 계속 움직이고 있는지, 아니면 멈춰 섰는지도 몰라 멈추면 누군가 꼭 이렇게 알려 줘야 했다.

“왜 그러시오?”

“곧 우루칸 부족의 영역을 벗어나 전사들이 떠나기 전 하얀 별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싶다 하여 잠시 멈춰 섰습니다. 그들을 보시겠습니까?”

정중하다 못해 언뜻 존경심까지 비치는 목소리.

무공과 자존심은 북해의 어느 전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빙궁의 고수들이 나를 이리 극진히 대하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네, 지금 바로 나가죠.”

덜컹, 두께에 비하면 놀랍도록 가벼운 문을 열고 나가자,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들뜬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열 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열을 맞춰 정렬해 있었다.

우루칸 부족에서 그들의 영역 내에서 나를 호위하기 위해 파견해준 부족 제일의 고수들이었다.

“열 명 다 공주마마와 나를 지켜주느라 고생 많았소. 열 명의 도움 덕분에 조금의 걱정이나 두려움 없이 이곳까지 올 수 있었소. 북해의 하얀 별이자 빙정의 주인으로서 그대들의 도움에 감사드리는 바요.”

“영광이옵니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마치 한 몸처럼 동시에 대답을 올리는 열 명의 사내들.

이제는 옛날 영웅담의 한 장면 같은 이 짓도 꽤 익숙해진 상태였다.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저런 말을 줄줄 내뱉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들은 지금부터 진입할 쿠루파 부족의 전사들입니다. 모두 이름난 전사로, 명나라의 공주님과 북해의 하얀 별님을 안전하게 모셔드리기 위해 스스로 나선 이들입니다.”

“그대들도 앞으로 일주일간 잘 부탁드리오. 나와 공주마마의 안전을 그대들의 검에 맡기도록 하겠소.”

“크나큰 영광이옵니다, 위대한 북해의 하얀 별이시여!”

···이 짓을 벌써 몇 번째 하고 있는데, 안 익숙해지면 그게 비정상이지.

지나가는 길에 있는 대형 부족마다 모두 내게 잘 보이려는 심산인지 몰라도 최소 다섯 이상의 전사를 꼬박꼬박 보내주고 있었다.

덕분에 한 부족의 영역을 벗어나며 그 부족의 전사들이 떠나면, 곧바로 다른 부족의 전사들이 호위라는 명목으로 달라붙었다.

덕분에 이 연극도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었고, 그 수준도 웬만한 연극단 못지않게 발전했다.

처음에 어색해서 죽을 뻔했던 걸 고려하면, 엄청난 발전이었다.

작별인사와 환영 인사가 끝나고 전사들이 각자의 위치로 향하자, 빙궁의 대표가 다시 내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마차에 연결된 말도 이들이 가져온 이들로 교체시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내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두 수컷으로 가져오라고 알려뒀습니다.”

“좋아요, 잘됐군요.”

빙궁 고수 대표의 말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빙궁에서 데리고 나온 말 중 두 마리는 이틀 만에 다시 빙궁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당연히.

이히힝~

지금 마차 뒤를 설렁설렁 따라오고 있는 저놈 때문이었다.

단 이틀 만에 두 마리를 모두 임신시켜버린 저 녀석 때문에(심지어 그걸 알아챈 이유는 저 녀석이 그 짓을 하다가 마구간으로 쓰는 천막을 부숴버려서였다) 그 뒤로 부족의 영역에 들어와 마차를 이끄는 말을 바꿀 때마다 반드시 그 말들이 수컷인지 암컷인지 반드시 확인해야만 했다.

···그래, 나도 그런 부탁 하는 게 부끄러운 건 안다.

그래도 저놈이 그 짓을 하다가 또 마구간이 부서지는 것보단 말 바꿀 때마다 잠깐씩 쪽팔리는 게 낫지 않겠는가.

나는 덕분에 아직도 말을 바꿀 때마다 저 대표 얼굴도 못 마주친다고.

이 문답을 할 때마다 나랑 저 녀석을 미묘한 눈빛으로 번갈아 보는 게 얼마나 쪽팔린 줄 아냐.

젠장···다시는 빠르다는 이유만으로 저 녀석을 데리고 다니나 봐라.

너는 이제 평생 일마(一馬) 전용 마구간 행이야, 이 자식아.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가롭게 하품이나 하는 녀석을 한 번 째려보며 대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교체가 끝나면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그때 또 신호를 드릴 테니, 편하게 쉬고 계시지요.”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빙궁 대표의 공손한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 안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잠시 뒤, 누군가 마차의 벽면을 툭툭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출발한다는 신호였다.

마부의 이럇! 소리로밖에 마차가 출발했다는 걸 알 수 없는 우리를 위한 대표의 배려였다.

마차가 출발하고 잠시 뒤, 한 권의 서책을 모두 읽은 공주가 그것을 옆으로 밀어낸 후 고개를 들고 내게 말을 건넸다.

“이제 이 여행도 슬슬 끝이 보이는군요.”

“네, 그렇습니다.”

쿠루파 부족은 명나라와 가까운 곳에 있는 부족 중 하나.

그들의 영역에 들어선 이상, 이제 명나라가 바로 코앞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처음에 떠날 때만 해도 과연 웃으며 돌아올 수 있을지 걱정하며 갔는데···설마 이런 대우를 받으며 돌아가리라곤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어요.”

찻잔의 온기를 느끼던 공주가 내게 웃으며 말했다.

“모두 당신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폭풍단장. 감사합니다.”

“아뇨, 중요한 의뢰이기도 했거니와···.”

북해에 도착하고 나선 거의 잊히긴 했지만, 일단 여기 온 이유는 어디까지나 표행 의뢰였다.

결코 아무런 대가 없이 북해행을 택한 건 아니었단 말이다.

“저에게도 좋은 경험이었으니까요.”

사실 좋은 경험이었다, 한 마디로 넘어갈 만한 사항은 아니었다.

근 일 년 넘게 정체되어 있던 내공도 일갑자나 얻을 수 있었을뿐더러, 거기에 초절정 고수와 싸우며 얻은 무공까지 합치면 대박이라 할 수 있었으니까.

이번 북해행에서 가장 큰 이득을 얻은 사람은 다음 대 황제의 자리가 굳건해진 일황자도, 조정에 자신의 능력을 보여준 공주도 아닌, 무공과 내공을 한층 성장시킨 나일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폭풍단장에겐 북해로 안전하게 호위해달라고 의뢰를 넣었죠. 북해에서 저보다 폭풍단장이 더 열심히 일해서 잠깐 잊고 있었어요.”

“지금껏 수하에게 맡겨둔 것이 미안해서 조금 열심히 했을 뿐입니다. 무림맹에 다녀오느라 제대로 일도 못 했으니까요.”

농담기 섞인 내 말에 공주는 풋, 하고 웃더니 나를 안심시키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상은 걱정하지 마세요. 일을 맡겨둔 수하에게 고개를 떳떳이 들고 돌아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챙겨드릴 테니까요.”

“기대하겠습니다.”

···나도 간이 좀 커지긴 했구나.

설마 공주 앞에서 돈 달라는 말을 이렇게 뻔뻔하게 말할 수 있을 줄이야.

이미 한 번 경험한 일이니 더 그랬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이번 대가는 얼마나 대단할까.

저번에 공주의 병을 고친 대가로 받은 건 말로 다 못할 정도로 대단했다.

지금 애용하는 태양적석으로 만든 창. 진양(眞陽)도 그렇지만, 지금 내가 세우고 기정이가 열심히 운영하는 표국도 그때 받은 대가로 세운 거나 마찬가지니까.

심지어 이번 의뢰는 공주 개인을 넘어 황실과 연관된 의뢰다.

그때보다 더욱 큰 대가를 받을 수 있는 건 당연지사.

심지어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결과를 이뤄냈으니, 내가 받을 대가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아, 그리고 그 대가 말인데요.”

이번에 받을 대가로 지금껏 나 없는 동안 고생한 기정이한테 뭔가 사줄까, 하고 생각하던 내 귀로 공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의뢰주에게 받아내야 하는 것 맞지요?”

“아···네. 원칙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그러고 보니 이번 일의 의뢰주가 누구였지?

일단 총사령관···은 아니고, 공주···일려나?

하지만 그런 것치곤 조금 전 말투가 마치 자기는 의뢰주가 아니라는 것 같았는데···?

하지만 내 대답에 그저 싱글벙글 웃기만 할 뿐 무어라 더 말을 꺼내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나 역시 더 묻진 못했다.

과연 이 마차의 도착지에는 또 무슨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점점 커지는 기대감과 거기에 비례하듯 함께 커지는 불안감을 가슴속 깊은 곳에 품은 채 그저 마차가 얼른 목적지로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

[이야! 우리 유현이!]

잔뜩 들뜬 화순의 목소리.

내가 빙정의 기운을 얻었을 때보다도 더욱 기뻐하는 녀석의 목소리에 뭐라 대답을 날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여기서 뭔가 이상한 생각을 하다가 까딱 잘못해서 입 밖으로 꺼내버렸다간, 그땐 정말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 거니까.

하지만 내가 대답을 하건 하지 않건, 녀석은 아무 상관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이거 진짜 대단한 거라니까? 역대 천마 중에서도 몇 명 이루지 못한 업적이라고. 좀 더 당당해도 괜찮아.]

당당은 개뿔. 지금 무릎 꿇고 이마를 땅에 붙이고 있는 게 안 보이냐?

아, 젠장. 결국 대답 해버렸잖아.

지금 이런 상황에선 입 좀 다물고 있으면 안 되냐? 내 목이 날아가면 너도 손해라고.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입 밖으로만 안 꺼내면 되니까. 아무리···.]

푸흡, 말을 이어나가던 화순이 웃음을 참는 소리를 내더니, 그걸 집어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다른 사람 생각까지 읽을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거참 위로가 많이 되네, 이 자식아.

화순의 말에 짜증을 내며 나는 그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가지 않도록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번 일은 성사되지 못했을 거다, 이 말인가?”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황제를 대신해서 국정을 돌보고 있는 분이자.

“네, 그렇습니다, 오라버니. 이분이 없었더라면 이만한 결과는 절대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공주의 오라버니이며.

“하하하! 내 너와 대장군의 말을 믿고 그에게 일을 맡기길 참으로 잘했구나!”

이번 북해 행의 의뢰인.

“그리고 자네도 무척 잘해줬어. 고생 많았네, 폭풍단장. 아니, 지금은 전역했으니 이름으로 불러야 하나?”

“편하신 대로 부르시옵소서. 그리고 저는 그저 명의 백성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곧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를 바로 그 사람.

“일황자 전하.”

지금껏 누군가의 입을 통해서만 들었던 그 사람이 바로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일황자

마차의 도착지가 저번에 의뢰를 받았던 객잔인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공주가 북해라는 적성 국가로 향하는 길을 제대로 된 호위가 아니라 한낱 표국에게 맡겼다는 건 절대 좋은 소리를 들을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당대 황실을 대대로 황실의 호위를 맡은 금군을 믿지 못한다는 말부터 금군의 실효성에 관한 이야기나 믿을 수 없는 외인에게 어찌 공주의 호위를 맡겼냐는 이야기까지.

···당장 정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이 정도인데, 세 치 혀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조정의 대신들이라면 무슨 말을 꺼낼지 알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북해에서 떠나기 전부터 나에 관한 건 가능한 숨기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야 대가만 제대로 받을 수 있다면 어느 쪽이건 상관없었으니 거절할 이유도 없었고.

그래서 황실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여기로 오는 것도 당연하게 여겼다.

다만 거기 안에 있던 사람이 대장군이 아니라 불혹(不惑; 40세를 뜻함)에 이른 것처럼 보이는 한 사내라는 사실에 놀랐고.

뒤따라 들어온 그녀가 그를 보고 ‘오라버니!’라고 외치며 달려가 안긴 것에 놀라고.

뒤늦게 나타난 대장군이 진땀을 뻘뻘 흘리며 그 사내를 섭정이라 불렀다는 사실에 놀랐을 뿐이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심장이 멈출 뻔했다.

“고개를 들게. 아까 너무 단숨에 고개를 숙이느라 자네 얼굴도 못 봤군. 동생을 안전히 데려다준 사람인데 얼굴이라도 봐야 하지 않겠나?”

“네, 알겠습니다.”

일황자의 말에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아까는 거의 얼굴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였던 지라 자세히 살펴볼 수 없었지만, 허락을 받은 이상 거리낄 게 없었다.

사실 언제 또 현 섭정이자, 미래의 황제 얼굴을 볼 수 있겠는가.

자랑···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봐둘 만큼 봐둬야지.

“흐음···이런 얼굴이었구만.”

내가 일황자를 관찰하는 만큼, 일황자 역시 나를 관찰하기 위해 내 얼굴을 샅샅이 훑어봤다.

“대장군의 이야기만 들었을 땐 나이가 좀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젊군. 아직 이립(而立; 30살)은 됐나?”

“아닙니다. 약관에 이른지 오 년 정도 되었습니다.”

“허어, 그것밖에 되지 않았다고? 그 정도라면···대장군.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금군의 고수 중 제일 젊은이의 나이가 몇이지?”

“불혹을 갓 넘기고 나서야 이른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전하.”

“전 중원에서 제일 재능이 뛰어난 자를 찾아, 영약을 밥 먹듯 키워 만든 금군의 고수들도 불혹을 넘겨서야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거늘, 겨우 약관의 사내가 아무런 도움 없이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다?”

턱을 매만지며 내 얼굴을 관찰하듯 보던 일황자는 그의 뒤에 서 있던 대장군을 향해 물었다.

“강호라는 곳은 그런 일이 비일비재한가?”

“저 역시 강호 무림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렇단 말이지···괜히 대장군이 총사령관 시절부터 아끼던 부하가 아니군.”

얼굴에 금칠 해주는 건 고마운데···아무래도 상대가 상대인지라 좀 찝찝하긴 하다.

왠지 코가 꿰일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설마 대가랍시고 관직이라도 주려는 건 아니겠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역시 그건 거절을···.

“그래서.”

한창 생각을 이어나가던 도중 들려오는 일황자의 목소리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가 미소를 띤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는 뭘 원하나.”

“제가 바라는 것 말입니까?”

“말하면 뭐든 줄 수 있다···이 중원에서 유일하게 그걸 실제로 가능케 하는 사람이 앞에 있지 않나?”

그 미소에 깃든 건 자신감.

“원하는 건 뭐든 말해보게. 내가 다 내줄 테니 말이야.”

진짜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자만이 보일 수 있는 웃음이었다.

“아! 그래도 나라는 안되네. 아직 내 것이 아니거든. 내가 정당하게 물려받고 나면 다시 고민해보지.”

“하하···마음만 받겠습니다.”

뭐야 저거. 황자만 할 수 있는 농담 같은 거야?

···여기서 고개 끄덕이면 바로 죽겠지?

[황제의 대리인 눈앞에서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당당히 공언한 또라이라고 역사서에 평생 기록될지도 모르지.]

열심히 일한 대가로 그런 걸 받기는 싫다.

“어찌 백성 된 자로 전하에게 뭔가를 요청하겠습니까. 전하가 주시는 것이 무엇이든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말을 뺑뺑 돌리긴 했지만, 그냥 간단히 말하자면 내가 뻔뻔하게 먼저 제시하긴 힘드니 알아서 달라는 소리다.

너무 많이 달라고 하다가 거절당하면 큰 손해고, 너무 적게 말해서 생각보다 저렴한 놈 취급받으면 그건 또 그것대로 큰 손해였으니까.

그리고 혹시나 ‘아, 그럼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거네?’ 이렇게 받아들이지 않도록 뭔가를 꼭 달라는 말도 잊진 않았다.

이 정도면 외통수···같은 건 아니지만, 내 말이 무슨 뜻인진 알겠지.

“흐음, 그렇단 말이지.”

내 말에 일황자는 잠깐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그렇다면, 그래.”

태연한 얼굴로.

“부마의 자리는 어떠한가?”

수만 개의 진천뢰를 동시에 터뜨렸다.

“···네?”

“오라버니.”

머릿속을 뒤흔드는 한 마디에 내가 반응이 늦은 사이, 뒤에서 공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장난은 그만두시지요.”

그것은 내가 마주했던 빙정보다 차갑고, 내 가슴을 찔렀던 마멸검의 검보다 날카롭게 일황자의 말을 잘랐다.

“폭풍단장이 곤란해하지 않습니까.”

···솔직히, 쫄았다.

“허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구나.”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일황자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과연 황제의 대리청정을 맡은 사람이구나···이 정도 말은 끄떡도 없다는 건가!

이상한 곳에서 일황자에게 감탄하고 있던 나를 향해 그가 말했다.

“북해에 다녀오면서 별 좋은 인상은 못 줬던 모양이야? 저 아이가 저렇게 싫어하는 걸 보면 말이지.”

“아, 그게···하하하······.”

죄송하지만 전 방금 그 목소리를 또 듣고 싶지 않아서 말입니다.

웃음으로 일황자의 말을 넘기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입을 열었다.

“어마마마는 돌아가시고, 아바마마도 저런 상태라 내가 성하의 혼처를 잡아주려 하는데, 어딜 말해도 다 거절만 하니 참으로 걱정이야. 자네는 여동생이 있는가?”

“아니요, 그저 골칫거리 남동생 두 놈만···.”

[얌마! 지금 중원에서 제일 남동생 두 놈 때문에 골치 아픈 사람한테 남동생을 대화 주제로 꺼내냐?!]

···아차!

화순의 말을 듣고서야 내가 무슨 말을 꺼냈는지 실감했다.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려 한 두 동생 놈의 목을 친 지 일 년도 밖에 안 된 사람한테 내가 남동생이 골칫거리니 뭐니 말한 거야?

일황자의 충격 발언과 뒤이어 날아온 얼음장 같은 공주의 목소리에 머리가 순간 굳었던 탓에 거기까지 생각을 못했다.

하지만 일황자는 내 말에도 전혀 놀라는 기색이나 다른 표정 변화 없이 여전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는 말이야. 원래 여동생보단 남동생들이 더 말썽인 법이지. 하하하!”

···이건 대범하다 해야 하냐, 아니면 정신이 나갔다고 해야 하냐?

[···둘 다 같은데.]

셀 수도 없이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온갖 인간 군상을 다 봤을 화순조차 지금 일황자의 반응에는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들은 강호무림이 복마전이라 하지만, 진짜 복마전은 바로 저런 사람이 있는 곳을 말하는 거겠지.

“어쨌든 이건 마음에 안 드는 것 같고, 그렇다면···흠···대장군?”

“네, 일황자 전하.”

“이번에 북방국경부대의 규모를 줄이고, 다른 부대의 규모를 늘리는 건 어떻게 되고 있지?”

“새 부대로 전입할 병사들은 따로 모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보급은?”

“곧 입찰 건에 관하여 천하백대상단에 차례로 공문을 내릴 예정입니다.”

“흐음, 그렇군.”

차분한 대장군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던 일황자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래, 대장군의 말은 그렇다는데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국가의 대사에 갑자기 제 생각은 어째서 물으시옵니까?”

“자네의 도움에 대한 보상으로 그 일부를 좀 떼주려고 말이야.”

잠깐. 그 말은 설마···?

나는 내가 들은 것이 진짜 사실인지 다시 확인하기 위해 그에게 물었다.

“제게 군납(軍納)을 맡기신다는 말씀입니까?”

“왜, 마음에 안 드나? 납품할 물건도 자네가 원하는 대로 정할 수 있는데?”

질문에 질문으로 돌려주는 그였지만, 그렇기에 그만큼 확실한 대답도 없었다.

그는 정말로 내게 군납을 맡기려 하는 것이다!

군납은 그저 민간에 물건을 팔아넘기는 것과는 규모도, 가격도 완전히 다르다.

설사 백대상단 제일 끝자락에 있는 상단이라도 군납을 한 번 허락받으면, 십대상단은 당연, 오대상단까지도 가시권 내에 들어갈 수 있다.

그만큼 군납은 모든 상단에서 침을 줄줄 흘리는 커다란 기회였다.

거기에다가 물품을 내가 원하는 대로 정할 수 있다는 건 더욱 말도 안 되는 일.

매일 몇천 섬을 소비하는 곡물도, 사람에게 없어서 안 될 소금도, 천하에서 가장 많은 돈을 만질 수 있다는 무구조차 내 마음대로 납품할 수 있다는 소리였으니.

다만 문제가 있다면.

“···저는 아직 제 상단을 운영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나는 아직 조촐한 표국 하나만 운영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물론 언젠가 상단까지 열어볼까, 하는 생각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고 싶기도 했거니와, 전생에는 평생 가난하기만 했으니 이제는 좀 떵떵거리며 살고 싶은 욕심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나중의 이야기.

지금은 그 시작점인 표국을 운영하는 것도 남에게 맡기고만 있었으니 아직 한참 멀었다.

“으음···그랬던가?”

내 대답에 만난 뒤 처음으로 눈에 이채를 띤 일황자.

내가 상단을 운영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그렇게나 놀라웠나.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 일황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똑같은 눈높이에서 말했다.

“그거야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자네가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잠깐은 기다려줄 수 있네. 아직 병사도 모집 중이고, 군납 상단 모집 공문은 내리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꽈악.

그가 내 어깨에 힘을 주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손에 담긴 힘은 쳐낼 필요도 없이 어깨를 한 번 튕기는 것만으로도 치울 수 있을 정도로 약했지만, 눈에 담긴 힘은 그러하지 않았다.

오직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는 자만이 담을 수 있는 위엄.

그런 위엄이 담긴 눈빛과 목소리로 그가 내게 말했다.

“이 기회를 허무하게 놓치진 말게. 자네가 아끼는 사람과 자네를 아껴주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말일세.”

“···알겠습니다.”

“좋아. 알아들었다면 됐네. 북해에 다녀오느라 고생 많았네.”

다시 아까와 같은 사람 좋은 얼굴로 돌아온 일황자는 내 어깨를 두드려 준 뒤, 대장군과 함께 조용히 객잔 뒤편으로 사라졌다.

뭐라고 해야 하나···참으로 폭풍 같은 사람이었어.

“미안해요, 폭풍단장.”

옆에 있던 공주는 아까의 그 말 때문인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오라버니가 이상한 말을 해서 폭풍단장을 곤란하게 만든 게 아닌가 걱정되네요.”

“아, 아뇨. 아닙니다. 저도 오히려 동감했으니까요.”

“···그렇습니까?”

“네. 기껏 주신 기회를 놓칠 수는 없으니까요. 아직 상단을 운영할 정도는 아니지만, 다른 방도가 없는지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내 대답에 공주는 웃는지, 아니면 얼굴을 찌푸린 건지 알 수 없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래도 폭풍단장이라면 꼭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정말 잠시일 뿐, 곧 평상시처럼 미소를 띤 얼굴로 내게 말했다.

“당신은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니까요.”

“감사합니다, 공주마마.”

사실 조금 얼굴 부끄럽게 만드는 호칭이긴 했지만, 공주가 봤을 땐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절대 치료할 수 없는 병이라던 구음절맥을 치료한 건 물론, 하얀 별이자 빙정의 주인으로서 북해와 동맹까지 성사시켰으니.

···내가 봐도 진짜 말도 안 되는 일을 해결했구나, 싶었으니 옆에서 본 공주 눈엔 어떨까.

“이제부터 서로 바빠질 테니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싱긋.

더없는 웃음을 지은 그녀는 일황자의 뒤를 따라 사라지기 직전, 내게 말을 건넸다.

“다음에 만날 때도 지금처럼 웃는 얼굴로 볼 수 있길 바랄게요.”

“···네, 몸조심하십시오.”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길고 길었던 북해의 의뢰도 마무리 되었다.

*****

황실의 심처.

들어오는 것은 물론 아는 것조차 선택받은 소수 외엔 허락되지 않은 그곳에 두 사내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전하가 보시기엔 어떠하십니까?”

큰 체구의 사내, 대장군의 질문에 그의 앞에 있던 작은 체구의 사내, 일황자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사내더군.”

객잔에서 보였던 흔들림 없던 미소는 거기에 없었다.

“타인을 아득히 초월하는 능력도 능력이지만, 그 심계도 가히 일절이라 부를 만하더군.”

날카로운 눈빛과 진지한 얼굴로 유현을 분석하는 그 모습은 가히 맹수와도 같았다.

그것도 오직 자신과 명의 앞날만을 생각하는 무시무시하고 강력한 맹수.

복마전이라는 조정에서조차 그 눈빛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라곤 철이 들기 전부터 창을 쥐고 적과 싸운 대장군과 한평생을 조정에서 살아왔던 병필태감 정도밖에 없었다.

“들어오자마자 내 정체를 파악했음에도 확실히 확인하기 위해 성하와 자네가 말을 꺼내기 전까지 기다리던 것부터, 제국의 이인자 앞에서도 자신의 이득은 놓치지 않는 그 모습까지. 거기에다가 자신의 분에 넘치는 기회는 거절할 줄 아는 태도는 욕심만 넘치는 조정의 대신들에게선 도저히 보기 힘들지.”

씨익. 맹수의 입가에 드디어 미소가 그려졌다.

“왜 자네나 성하가 그토록 칭찬 일색이었는지 알 수 있는 만남이었어.”

“감사합니다, 전하.”

“허나 내 아래로 들어오진 않겠지?”

“아쉬운 일이지만···제가 아는 유현이라는 남자는 그런 남자입니다. 누군가의 아래에 있는 것을 싫어한다···그걸 넘어 거의 경멸함에 가깝더군요. 그가 제 명령에 따라준 것도 지금 생각하면 놀라울 따름입니다.”

“하아···내 옆에 인재가 부족하다는 생각은 지금껏 한 적 없었건만···.”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일황자는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군납 정도의 미끼라면 어떻게 내 옆에 엮어둘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안 되다니. 참으로 아쉬워.”

“그래도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그 친구 역시 그것을 무척 아쉬워하는 눈치였으니 말입니다.”

“···그랬던가?”

“네. 분명 확실히 준비를 끝내고, 기회가 여전히 있다고 생각되면 분명히 다시 도전할 겁니다.”

“그래, 그럼 그때를 기다리지.”

대장군의 말에 만족한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일황자는 뭔가 생각난 듯 대장군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 사이는 어떻던가? 북해에 보내놨던 첩보원으로부터 연락은 없었나?”

“허허, 그 이야기라면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동안 보고받았던 걸 모조리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이야기가 흘러나오던 황실의 심처는 남녀 사이의 이야기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아주 오랫동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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