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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능으로 무림최강-55화 (55/185)

빙정(4)

··빙정에 손을 대는 순간 엄청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독고삭이 사나운 맹수와 같고, 신승이 둔중한 바위와 같다면, 이 기파는 끝없이 휘몰아치는 바람!

나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중구난방으로 마구 뿜어내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만, 힘은 그 둘과도 비견될만했다.

만약 이것이 오직 나에게만 휘몰아친다면, 감당은커녕 지금은 산산이 조각난 얼음 조각 꼴이 됐을 터.

쿠구구궁!

빙정이 뿜어낸 기파가 벽에 부딪히자, 주변이 크게 흔들렸다.

지진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나.

끝도 알 수 없는 이 공간까지 출렁이게 만드는 강력한 기파다.

빙궁과 얼마 떨어지지도 않은 이곳에서 지금과 같은 기파가 몇 번이고 휘몰아치면, 지진으로 착각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대체 왜 우리가 처음 도착했을 땐 멀쩡하다가, 최근 며칠 사이에 이렇게 계속해서 지진이 찾아왔던 걸까?

아니, 애초에 지진이 대체 얼마 만에 일어났던 거지?

지진이 일어났을 때의 북해인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절대 평상시에도 지진이 흔하던 건 아니다.

그럼 빙정은 최근에 들어서서야 이렇게 날뛰기 시작했다는 건가?

두웅!

“큭!”

폭주의 이유를 추리하던 도중 또다시 나를 덮쳐오는 기파에 바로 정신을 그쪽으로 돌렸다.

빙정이 이렇게 날뛰는 이유는 나중에라도 알아낼 수 있다.

지금은 이걸 막는 것에만 집중한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이 혹한의 기운을 막아낼 수 없다.

그것은 지금껏 내가 지나쳐 왔던 얼음 조각들의 상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두꺼운 옷이라도, 아무리 강력한 무구라도 막을 수 없는 기운!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는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천마의 오의, 불파와 와류!

끼기기긱-!

철판에 손톱을 대고 긁은 것 같은 기이한 소리가 내 팔에서 들려왔다.

불파를 두른 팔에 와류를 뒤집어씌워 만든, 이른바 빙정 대책용 방어술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지금 빙정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온전히 막아내기는 역부족.

그렇기에 나는 거기에 내가 지금까지 익혀온 무공까지 더했다.

절대 정면으로 대적하지 않는다.

흘리고, 빗기고, 스친다.

그걸로 정면으로는 막아낼 수 없는 공격도 큰 피해 없이 막아낸다.

강호에서 흔히 말하는 사량발천근(四兩拔千斤)의 묘리였다.

그 사량의 힘조차도, 지금 나에겐 모든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한순간이라도 정신을 놓았다간, 불파를 두르고 있는 팔을 제외하곤 모두 아까 그 얼음 조각과 똑같은 꼴이 되어버린다.

그런 정신적 압박 속에서 전심전력을 다 해 공격을 막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처도, 내공도 순식간에 회복하는 육체긴 하지만, 이 상황이 지속되면 내 정신이 버티지 못한다.

어떻게든 지금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수단이, 빙정을 다시 잠재울 방법이 필요하다!

[심상으로 이끌어.]

심상?

[이 상태론 이겨내기는커녕 막기도 힘들어. 그리고 무엇보다···나도 정확히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심상 안으로 들어가면 답이 있을 것 같아.]

화순의 말에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화순의 말이 십 할 옳다는 법은 없지만, 지금 답도 없는 이 상황을 쭉 이어가는 것보단 어떤 방법이라도 써보는 게 낫다.

끼기긱!

정면으로 날아오던 기파를 흘려보낸 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던 바람도,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할 것만 같던 혹한의 기파도 점점 잦아들었다.

오직 나와 화순만이 인식할 수 있는 심상 속 세계.

여기서 빙정을 이겨낼 수만 있다면, 현실에서도 어떻게 방법이 생기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뜬 순간.

“···읏!”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혹한의 기운은 거기에 없었다.

허나 그 이상으로 나를 압박하는 무언가가 거기에 있었다.

어린아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분칠이라도 한 듯 새하얗게 물들어 있는 어린아이가···.

“·········.”

“·········.”

“·········.”

···지평선 너머까지 존재했다.

인간···? 아니, 인간은 아니다. 이렇게 똑같은 모습, 똑같은 크기로 셀 수 없이 존재하는 것이 인간일 리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금방 그것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혹시 이게···빙정의 실체인가?”

심상으로 상대를 끌고 와 싸우는 건 신승 말곤 해본 적 없지만, 그 한 번으로 심상 속의 싸움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대충 알 수 있었다.

신승의 힘이 부처의 형상을 취한 것처럼, 빙정의 힘이 어린아이의 형상을 취한 것이리라.

그 실체를 알아챈 나는 아연한 표정으로 내 옆에 앉아있는 아이를 바라봤다.

전신이 눈으로 이루어진 듯 하얗고, 차가운 기운을 내뿜어내는 아이.

겉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그 안에 담긴 강대한 힘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이 아이들 모두가 곧 빙정이었고,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곧 빙정이었다.

정말로 이들을 이겨낼 수 있을까?

심상 내에서 나는 내공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 상처를 입어도 금방 수복하며, 원한다면 어떤 무기든 꺼낼 수 있다.

하지만 이만한 수는?

하나를 쓰러뜨리는 데도 신승의 부처와 싸울 때와 비슷한 힘을 내야 할진대, 어찌 이들 모두를 쓰러뜨릴 수 있겠는가.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풀 듯, 고민하고 있던 내 귓가로 화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는 아직 어린아이구나.”

내가 알던 그의 말투와는 전혀 다른 말투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던 화순이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옛날에 들었던 이야기를 어떻게든 다시 기억에 되살려 보려는 아이처럼도 보였고, 아주 오래전 기억을 회상하려 애쓰는 노인처럼도 보였다.

어느 쪽이건 내가 알던 얼굴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한 채, 화순은 자신을 향해 손을 뻗은 아이 중 한 명의 손을 잡았다.

“그 모습 그대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거냐? 변하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까 두려워, 평생 어린아이의 형태로, 그 수만을 늘리고 있었던 거냐?”

손을 뻗고는 있었지만 자신의 손이 잡히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일까. 아이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웃으며 그 아이를 받아들였다.

“이제 그 사람은 없다. 아주 오래전 이 세상을 떠났지.”

“어이, 화순. 설마 그 사람이라는 게···?”

“네가 대충 예상하는 대로야.”

모호하게 들리는 대답이었지만, 내게는 무엇보다 확실한 대답이었다.

초대 천마는 빙정과 접촉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빙정이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했거나, 혹은 그 수가 적었을 때 말이다.

“그 말은 곧···.”

그리고 그 사실은 내게 무엇보다 기쁜 소식이었다.

“초대 천마가 빙정을 이겼다는 거지?”

누군가가 빙정과 싸워 살아나갔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였으니까.

거기에다가 그 대상이 다름 아닌 천마라니.

그가 썼던 방법이라면, 천마의 권능을 이어받은 나도 어떻게든 쓸 수 있는 방도가 있으리라.

하지만 화순의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초대 천마께서는 빙정과 싸웠던 게 아니야. 같이 놀아줬을 뿐이지.”

“그건 또···무슨 소리야?”

씨익.

어딘가 불길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손을 잡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던 화순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거기서 나온 대답은.

“숫자를 보아하니 그때보다 조금 더 많이 놀아줘야 할 것 같은데?”

앞으로 찾아올 내 고생길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

“진실을···알린다고···?”

빙궁주는 자신의 딸, 자야가 자신에게 했던 대답을 되뇌었다.

아니, 설마, 그럴 리 없다. 그녀가 빙정의 진실을 아는 일 따위, 있을 리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자신의 예상, 아니, 바램과 달리, 자야는 미소를 지으며.

“네. 우리 북해가 왜 외부인에게 북해의 일곱별 중 하나인 하얀 별의 칭호를 내리는지.”

담담하게 끔찍한 진실을 고했다.

“모두에게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으득.

빙궁주는 담담한 그녀의 목소리에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녀가 어떻게 오직 빙궁주에게만 허락된 진실을 알아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영특한 그녀가 자신에게 허락된 정보만으로도 어떻게든 알아차렸으리라는 것만 어렴풋이 짐작할 뿐.

‘알아낸 것’뿐이라면 괜찮다. 넘치는 지식은 화를 부를 때가 많지만, 빙궁주는 그저 아는 것만으로 그녀를 처벌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는 것을 넘어서, 스스로 행동했다.

그것이 빙궁주가 그녀를 향해 이토록 분노하고.

“왜···왜!”

슬퍼하는 이유였다.

“왜냐니요?”

자야는 그런 빙궁주의 태도에도 그저 담담히 말했다.

“빙궁이란, 북해란 원래 그렇게 움직이는 것 아니었나요? 평생토록 누군가를 희생시키고, 아프고, 힘들게 만들며 다른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 순간, 그녀의 표정이 돌변했다.

완벽한 무표정.

단 한 톨의 감정도 깃들지 않은 얼굴.

그 이면에 숨은 것은 분노인가, 고통인가.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빙궁주는 물론, 그녀 스스로도 그 답을 알 수 없었다.

그저 지금 그 마음이 시키는 대로 따를 뿐.

“푸른 별께서 저희 어머니와 그 부족에게 그리하였던 것처럼요.”

“너의 어머니···메이파는···!”

“알아요.”

다시 본래의 신색으로 돌아온 자야는 울분에 찬 빙궁주의 말을 끊고선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이 만드신 평화를 위하여, 북해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을.”

쿵!

빙궁주의 뒤를 따르던 절정 이상의 고수들이 당도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아니, 자야 소주!”

“이곳에 왜 당신이···!”

그중 절반은 빙궁주와 마주하고 있던 자야의 모습을 보고.

“저, 저 옆에 저 문은 설마!”

“오오! 저게 바로 빙정의 터로 향하는 그 문인가!”

다른 절반은 그녀의 옆에 있던 커다란 문을 보고 경악성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빙궁주와 자야 사이에 흐르는 심상치 않은 기류를 감지한 이들은 조용히 침묵한 채 두 사람을 지켜봤다.

“이분들까지 오리라는 건 예상하지 못했지만···잘됐네요.”

거짓이다.

웃으며 말하는 자야를 보고 빙궁주는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그녀는 처음부터 자신과 그 휘하 고수들이 이곳으로 오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자신도, 문도 숨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러분.”

그것이 바로 그녀의 진짜 목적이었으니까.

“여러분은 빙정이 왜 이런 곳에 봉인되어 있는지 아시나요?”

“자야 소주.”

자야의 말에 검은 별, 투할이 앞으로 나섰다. 같은 온건파라는 이유로 평상시 친밀히 지내는 두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만약 사이한 말로 빙궁주님이나 우리를 혹하게 하려는 속셈이라면···.”

마치 필생의 적을 눈앞에 둔 듯한 강렬한 살기.

조금이라도 이상한 몸짓이나 발언을 꺼낸다면 그 순간 그의 언월도가 춤을 추리라.

하지만 그런 압도적인 살기 앞에서도 자야는 조금도 떨지 않았다.

이미 목숨 따윈 포기했다는 걸까, 아니면 그녀의 눈에서 반짝이는 광기가 내려준 축복인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말하려는 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니까요. 그렇지 않나요? 푸른 별이시여?”

“·········.”

자야의 물음에 빙궁주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야의 말을 부정하는 건 어렵지 않다. 만약 자신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기만 해도 여기 있는 모두가 그녀를 향해 사특한 마녀라 외치며 검을 뽑으리라.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이 거짓이라 말했던 진실이 밝혀질 것이 두려웠고, 눈앞의 이들에게 거짓을 말한다는 게 고통스러웠으며, 지금껏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쌓아 올린 힘이 아쉬웠다.

무엇보다 그는 메이파와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

그녀가 떠난 뒤 홀로 남을 자야가 슬퍼할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던 그 약속을.

그리고 그 잠깐의 주저가 큰 변화를 만들어냈다.

“이제 북해는 다시 안전합니다!”

쿵!

자야가 큰 목소리로 외치며 자신의 옆에 있던 문을 두드렸다.

“더는 빙정이 폭주할 일도 없을 것이고, 그로 인해 지진이 일어날 일도 없을 겁니다!”

자야의 발언에 빙궁의 고수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최근 지진이 자주 일어나긴 했지만, 설마 그것이 빙정의 폭주 때문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말이오? 자야 소주, 당신의 말 대로라면 빙정이 우리를 죽이려 들기라도 했다는 말이오?”

자야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던 투할이 살기까지 내뿜어가며 그녀에게 물었다.

하지만 자야는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걸 넘어, 오히려 웃음을 지으며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그것을 제가 막아냈고요.”

“···어떻게?”

“당연히 무척 북해인다운 방법으로죠.”

투할은 그리 말하는 그녀의 미소에 소름이 돋았다. 몇십 년간 전장을 전전했던 그조차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괴물의 모습.

그리고 그 괴물은 북해가 지금껏 숨겨온 가면을 산산이 조각냈다.

“북해를 구원하는 하얀 별을 산제물로 빙정의 노여움을 풀었습니다. 아! 이렇게 보니 참 닮지 않았나요?”

모두가 눈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야를 바라보고 있는 도중에도 그녀는 웃고 있었다.

“당신들이 평화라는 허상을 위하며 저의 어머니와 그 부족을 모두 몰살시켰을 때와 말이지요.”

하지만 그 이면에 존재하는 절망.

북해가 지금껏 숨겨왔던 그 절망이 지금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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